미얀마의 시민저항이 전 세계에 미칠 영향
- 천관율 기자
- 호수 704
- 승인 2021.03.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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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시민의 저항은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군부와 그 뒷배인 중국이 물러설지, 그 전에 저항이 사그라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다.
ⓒAFP PHOTO3월2일 양곤. 군사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총상으로 숨진 니 니 아웅 뗏 나잉의 장례식에서 추모객들이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2월1일 쿠데타 이후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이 한 달을 넘겼다. 군부의 실탄 사격으로 최악의 유혈사태가 난 2월28일은 ‘피의 일요일’로 불린다. 유엔인권사무소는 이날 시위에서 적어도 1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미얀마 시민단체인 정치범지원협회(AAPP)는 2월 한 달 동안 군부의 시위 진압으로 30명이 사망하고 1132명이 체포됐다고 집계했다. 3월 들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3월3일 유엔 미얀마 특사인 크리스틴 슈래너 버기너는 이날 하루에만 군부의 시위 진압으로 3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최악의 기록은 계속 바뀌고 있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반도 서북쪽에 있다(지도 참조). 북으로 중국, 서쪽으로 인도와 국경을 접했고, 벵골만을 통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다. 인구는 5500만명으로 한국과 비슷하고, 1인당 GDP는 1325달러(2018년 세계은행)다. 인구 셋 중 두 명은 버마족이고, 그 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이 산다. 버마족이 사는 지역과 소수민족 지역은 행정구역 이름도 달리 쓰는 다민족 연방제 국가다. 연방은 불안정하다. 민족 간 내전이 그치지 않는다. 2010년대 들어서는 로힝야족 집단학살과 난민 문제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이렇다 할 외부의 위협이 없는 미얀마에서, 군부는 ‘연방의 유지’를 내세워 군부정권을 정당화했다. 소수민족으로부터 버마족을 지키고 연방에서 버마족 우위를 보장한다는 게 군부의 명분이다.
2010년대는 미얀마의 부흥기였다. 저개발국가 미얀마는 2010년대에 연평균 7% 가까운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또 2010년부터 미얀마 군부는 민간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2015년 총선에서는 NLD(민주주의를 위한 민족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가 집권했다. NLD는 미얀마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정당이다. 리더이자 상징은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다. 미얀마의 2010년대는, 로힝야족 문제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지만, 국내 상황만 보면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동시에 전진하는 희망찬 10년이었다.
2021년 미얀마에서는 10년의 전진을 지켜내려는 시민들이 집계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대규모로, 한 달이 넘도록 식지 않고 꾸준히 쏟아져 나온다. 정치학에는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높아진다는 테제가 있다. 고학력 중산층이 민주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경이로운 예외다. 소득수준도 대학진학률도 낮은 편이지만 민주화의 열망은 세계가 놀랄 정도로 높고 꾸준하다. 하지만 군부는 강경 일변도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들도 그걸 알고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시간축에 미얀마의 현대사를 놓고 공간축에 2020년대 국제질서를 놓아서, 지금 미얀마라는 좌표가 찍힌 시공간을 확인해야 한다.
시간축부터 보자. 미얀마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민간 정권을 세웠으나, 1962년에 군부 쿠데타로 정권이 전복된다. 이후 1988년까지가 1차 군부 통치기다. 여기까지만 보면 독립과 민간 정권을 거쳐 박정희 군부독재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와도 닮았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는 한국처럼 경제개발과 수출주도 성장을 내걸지 않고 고립과 은둔을 택한다. 문을 걸어 잠근 미얀마는 1988년까지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잊힌 나라였다. 이 시기는 냉전기다. 미얀마는 냉전의 전략적 요충지는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은 대체로 무관심했다. 미얀마는 강대국 국제정치를 피해간 덕에 은둔의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AFP PHOTO3월3일 만달레이에서 무장한 군인이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한 시민을 제압하고 있다.
1988년에 ‘8888 항쟁’(1988년 8월8일의 대규모 시위)으로 일단 군부정권이 무너졌지만 9월18일 쿠데타로 곧바로 재건됐다. 군부가 관리한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의 NLD가 압승했지만, 군부는 총선을 무효로 돌리고 집권을 이어간다. 시민 항쟁에 놀란 군부는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총선을 무효화한 군사정권은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강력한 무역 제재를 받았다. 고립과 은둔을 벗어던지려던 미얀마 군부는 거꾸로 서구에게 고립을 당했다. 군부의 대안은 북쪽으로 국경을 접한 중국이었다. 중국은 이 무렵 고도성장의 로켓에 올라타 있었다. 중국과의 국경무역은 미얀마 경제의 유일한 숨구멍인 동시에 군부의 자산을 불리는 원천이기도 했다. 이 숨구멍을 틀어쥔 중국은 미얀마에서 영향력을 갈수록 키워갔다. 미얀마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 20년은 중국의 시대였다. 하지만 곧 반전이 일어난다.
2008년에 집권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를 내걸고 미국 외교의 중심축을 아시아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 세계 경제에 결합할 방법을 찾던 미얀마 군부에도 기회가 열렸다. 그러나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민주화가 필요했다. 군부는 새로운 헌법을 준비하고 2010년에 총선을 치러서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2010년 총선은 NLD가 불참한 가운데 군부가 ‘잘 관리된 결과’를 냈다. 문민정부가 출범했지만 군복을 벗은 퇴역 군인이 주축을 이뤄, 사실상 군부의 위성정권이었다.
2012년 12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한다. 미국 대통령 중 최초였다. 이후 미얀마 민주화에는 가속이 붙었고, 2015년에 NLD도 참여하는 실질적인 첫 총선이 치러졌다. 여기서 압승한 NLD가 집권하고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실권을 잡았다. 전문가들은 일련의 과정이 미국·군부·민주화 세력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덕에 굴러갈 수 있었다고 본다. 군부는 국내외의 압력을 완화하여 지배력을 유지하고 싶었고, 민주화 세력은 일단 군부독재를 종식하는 게 급했다. 미국의 관심사는 뒤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AP Photo2014년 11월14일 미얀마를 방문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아웅산 수치가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미얀마 민주화는 군부의 ‘대리 통치’
미얀마의 새 헌법은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의 권한을 보호했다. 미얀마 연구자인 장준영 교수(사이버한국외대)가 쓴 책 〈하프와 공작새〉는 미얀마 헌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국가 지도자는 의회가 간접선거로 뽑는 대통령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군통수권이 없고 군 총사령관이 군통수권자다. 군 총사령관은 국방장관, 내무장관, 국경장관 임명권도 있다.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군 총사령관은 자동으로 대통령 권력을 이양받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헌법은 국가비상사태의 기준을 정하지 않았다. 군부가 마음만 먹으면 권력을 돌려받을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대통령이 군 총사령관을 해고하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안 된다. 군 총사령관은 국방안보평의회(NDSC)가 뽑으며 대통령은 임명만 한다. 그런데 국방안보평의회 멤버에는 군 총사령관, 부사령관, 국방장관, 내무장관, 국경장관이 포함된다. 전부 군부 몫이다. 국방안보평의회는 사실상 군부의 정부 출장소인데, 대통령도 국방안보평의회의 결정은 따라야 한다.
이쯤 되면 미얀마는 헌법을 바꾸지 않는 한 군부의 복귀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미얀마에서 헌법을 바꾸려면 의원 정족수의 75% 찬성이 필요하다. 마지막 안전장치가 여기에 있다. 미얀마 헌법은 의석의 25%를 군부 몫으로 자동 배분한다. 그러므로 군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미얀마 헌법은 바뀌지 않는다.
민주화는 원래 기존 권력과의 협상과 타협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얀마는 유난할 정도로 기존 권력인 군부의 권한이 잘 보장된 사례다. 군부는 국영기업들을 지배하여 미얀마 주요 기업을 수중에 넣고 있는데, 이런 이권도 민주화 이후에 고스란히 보장받았다. 그러다 보니 미얀마에서는 군부에 맞설 민간 영역이 잘 성장하지 못했다. 막강한 미얀마 군부는 민주화에 휩쓸렸다기보다는 ‘대리 통치’로 전략을 전환한 데 가까워 보인다. 대리인이 마음에 안 들면 권력은 언제고 회수할 셈이었고 2021년 2월에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NLD도 이런 한계를 알면서 민주화라는 긴 승부에 베팅을 했다. 미국이 지켜보는 동안 여러 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민주화를 돌이킬 수 없이 공고화시킬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오랜 군부독재에 지친 민주화 세력에게는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이 게임에서 군부는 퇴장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힘을 유지하면서 막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15년 이후 미얀마 정치는 전면의 아웅산 수치와 막후의 군부 사이 미묘한 경쟁으로 전개됐다.
로힝야 난민 문제가 상징적인 사례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유력한 행위자인 군부는 전통적인 ‘연방의 보호자’ 명분을 내세워 로힝야족 탄압을 주도했다. 2017년 로힝야족 학살 사건의 책임자가 민 아웅 흘라잉 군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이번 쿠데타의 주역이다. 이때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흘라잉 군 총사령관을 감싸다가 국제사회에서 돌이킬 수 없는 평판 추락을 겪었다. 군부가 로힝야족을 다룬 방법은 버마족에게 인기가 높아서 정당성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은 군부에 밀려 국내 입지가 좁아진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민주화를 공고히 다지려면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녀가 로힝야족을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든 결론은 같다. 로힝야족 탄압을 비판하는 국제사회를 무시하는 것이다.
ⓒEPA3월1일 양곤에서 교사들이 쿠데타 반대 시위 중 숨진 동료를 추모하고 있다.
‘군부로부터 주어진 민주화’라는 근본적 취약성은 얼버무릴 수 없었다. 2015년 총선과 202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의 NLD가 연이어 대승을 거두자 군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이것은 사실상 미국과의 암묵적 합의를 깨는 것인데, 지금은 그래도 된다는 계산이 선 것 같다. 대안은 중국이다. 흘라잉 군 총사령관은 1월11일 미얀마를 방문한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만났다. 분석가들은 쿠데타를 마음먹은 흘라잉 군 총사령관이 이 자리에서 중국에 후견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제 미얀마는 미·소 냉전 시절의 은둔 국가가 아니다. 21세기 미·중 관계에서 미얀마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급부상했다. 시간축에다 공간축을 겹쳐 읽어야 미얀마 쿠데타의 맥락이 온전히 드러난다. 미뤄뒀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미국은 왜 미얀마 군부와 민주화 세력을 중재하여 ‘애매한 민주화’라도 일단 발진시키려 했을까.
동남아시아 전문가인 이재현 박사(아산정책연구원)는 이렇게 말했다. “동남아에서 미국이 영향력을 확보 못한 나라가 미얀마 하나밖에 없었다. 중국은 미얀마를 1990년대부터 영향권에 뒀다. 중국 입장에서 바다를 놓고 생각해보자.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긴장관계다. 파키스탄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진출하려 한다. 미얀마까지 확보하면 벵골만을 거쳐 인도양으로 나가는 길도 열린다. 미국의 바닷길 고리를 끊어놓을 여지가 그만큼 늘어난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에서 출발해 태평양 해안으로(혹은 그 반대로)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는 배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을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항행의 자유’로 불리는, 사실상 미국의 제해권(바다를 통제할 권리)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미국 패권의 본질적 요소 중 하나다. 미국은 타국의 12해리 영해 안에서도 군함과 군용기가 무해통항(훈련이나 정찰 없이 단시간 단거리로 단순히 통과만 하는 것)할 권리까지 보장되어야 항행의 자유가 있다고 본다.
중국이 미얀마를 장악한다고 미국의 제해권 고리가 끊어지는 건 아니지만, 중국이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넓어지는 것만으로 전략적 가치가 있다. 이것은 자체로 미국의 패권에 위협이 된다. 남중국해가 21세기의 화약고로 떠오르는 이유 역시, 항행의 자유를 둘러싸고 미·중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 지역을 ‘중국의 호수’로 만들어 제해권을 주장하려 한다. 미국이 카리브해를 ‘미국의 호수’로 만든 선례도 만지작거린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가 미국의 핵심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중국의 호수’를 인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커트 캠벨은 오바마 정권 1기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의 팀에서 일했다.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그는 ‘피벗 투 아시아’ 전략의 입안자로 유명하다. 그는 2009년부터 미얀마에 꾸준히 공을 들였고, 군부와 민주화 세력이 타협하는 데 막후에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은 그 결과물이다.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아시아 정책을 총괄하는 인도·태평양 조정관을 신설하여 캠벨을 앉혔다.
캠벨은 차관보 직을 마친 후 책 〈피벗〉을 써서 그의 구상을 자세히 밝혀뒀다. 21세기는 인구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아시아의 세기인데, 미국의 대외정책은 유럽과 중동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아시아의 우선순위가 밀렸다는 게 기본 문제의식이다. 게다가 중국은 21세기 미국의 최대 라이벌이다.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미국에게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다. 냉전시대에 소련을 봉쇄하듯 21세기 중국을 봉쇄할 수 있을까. 캠벨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아시아에는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국가가 너무 많다. 이들에게 중국 봉쇄에 동참하라고 요구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둘째, 기후위기와 같은 새로운 안보 문제는 중국과의 협력이 필수다. 봉쇄와 세력균형으로 중국의 발을 묶는다고 지구가 식지는 않는다.
ⓒXinhua1월12일 미얀마를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왼쪽)이 흘라잉 군 총사령관을 만나고 있다.
봉쇄가 아니라면? 캠벨의 답은 중국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않되, 그 떠오르는 경로를 미국이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행의 자유, 자유무역, 민주주의와 같은 국제규범을 중국은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중국이 그 경로로만 떠오를 수 있고 다른 길은 막히도록 게임의 틀을 설계해야 한다. 캠벨은 이렇게 쓴다. “현재 체제의 규범들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에도 이익인 반면 이를 반대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명확히 할 것.” 물론 중국은 이 접근법이, 말만 바꾼 봉쇄정책에 가깝다고 인식한다.
미국은 아시아의 동맹국들과 함께 항행의 자유, 민주주의 등 국제규범을 아시아의 국제질서로 다져나간다. 그렇게 여러 국가가 진용을 짜야만 중국이 떠오르는 경로를 좁힐 수 있다고 캠벨은 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팽개쳤던 다자주의의 부활이다. 오바마 정부 시절 추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대표적이다. 바이든 정부 들어 G7에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를 초청해 D10(민주주의 10개국)으로 개편하려는 구상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이런 다자주의 구상을 캠벨은 ‘아시아 운영체제’라고 부른다. 선례는 유럽이다.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6개국이 모인 석탄철강공동체로 출발하여, 유럽 대부분을 포괄하는 유럽연합으로 반세기에 걸쳐서 운영체제를 진화시켜 나갔다.
‘과도기 국가’는 어디로 기울까
이제 캠벨이 미얀마에 왜 특히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첫째, 미얀마는 중국이 대양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다. 고전적인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봐도 미얀마는 미·중 관계의 요충지다. 둘째, 미얀마는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에 걸려 있는 국가다. 이런 과도기 국가들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가 ‘아시아 운영체제’의 성패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시아에는 이런 과도기 국가가 유난히 많다. 방글라데시, 미얀마,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네팔, 싱가포르, 스리랑카, 타이 등이 해당한다. 캠벨은 이렇게 쓴다. “아시아가 민주주의 공동체가 될지 아니면 고통스러운 후퇴의 지역이 될지, 이 과도기 국가들의 방향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미얀마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성공하고 이행기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아시아는 유럽처럼 국제질서의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성장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주위에 더 많은 민주주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가 더 튼튼한 규범이 될수록,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국제사회가 더 잘 개입할 수 있다. 과도기 국가 중의 하나인 미얀마가 어디로 기우는지는 다른 과도기 국가들의 군부와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선례가 된다. 아시아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대륙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런 싸움들이 누적된 결과로만 답할 수 있다. 한국은 아시아에 더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있을 때 특히 더 이롭다.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 중국의 턱밑에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민주주의의 운명은 이런 식으로 한국의 민주주의와 이어져 있다.
마찬가지 원리로,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은 민주주의 규범이 ‘아시아 운영체제’로 정착하는 미래를 반기지 않는다. 중국은 각국의 주권 보장과 내정 불간섭을 외교의 기본 원리로 내세우기 때문에, 중국이 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세계 각지의 독재국가들은 큰 친구를 얻게 됐다.
ⓒU.S. Navy2월9일 남중국해에서 미 해군 핵추진 항공모함이 합동훈련을 벌이고 있다.
미얀마의 운명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정치학계의 석학인 아담 셰보르스키는, 민주화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는 집권 엘리트의 분열이라고 주장했다. 집권 엘리트는 더 버틸 방법이 없을 때 분열한다. 아무리 시위가 이어져도 미국이 주저하고 중국이 후견하는 한 미얀마 군부는 버틸 방법이 있으므로 쪼개지지 않는다. 총칼을 이기는 주먹은 없다. 이 점만 보면 피플파워는 무력하다. 홍콩은 오랜 자유주의 역사를 가졌고 시민의 저항도 거셌지만 중국공산당의 무력을 뛰어넘을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미얀마 쿠데타 발발 초기 많은 전문가들이 결국 군부의 승리를 예상한 이유도 비슷하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진정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강도와 지속성을, 군부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줬다. 이들은 정치학의 오래된 테제를 여럿 깨부수고 있다. 미얀마는 중산층이 두껍지도 않고, 대학 교육을 받은 비율도 낮으며, 군부가 통제하지 않는 민간 영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도 않았다. 이것들은 모두 민주화에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자산인데, 미얀마 시민들은 이런 자산 없이도 총칼에 맞서 목숨을 거는 기약 없는 싸움을 한 달 넘게 이어가고 있다. 이 이례적인 힘이 세계의 이목을 잡아끄는 데 성공했다. 이재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미얀마는 홍콩과 달리 중국이 자국 국내문제라고 주장할 수 없는 외국이다. 중국이 쿠데타의 후견자처럼 비치는 게 국제사회에서 갈수록 부담스러워지는 국면으로 가고 있다. 중국이 물러설까? 그 전에 저항이 사그라질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어쨌든 현 상황 자체가 쿠데타 직후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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