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도 놀랐을, '녹두꽃' 동학혁명군의 신무기
▲<녹두꽃>.ⓒ SBS
동학혁명군은 조선군을 압도했다. 비록 일본군의 참전 때문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외세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농민군이 정부군을 압도했다. 고종의 파병 요청에 따라 청나라군이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불청객 일본군까지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면, 동학군이 주도하는 개벽 세상이 이 땅에 도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군은 만만한 군대가 아니었다. 청나라군이나 일본군에 비해서는 약했지만, 조선팔도를 지킬 만한 힘은 갖고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 23년 전인 1871년, 조선군은 미군의 침공도 막아냈다. 개별 전투에서는 조선군의 피해가 더 컸지만, 조선군은 미군을 퇴각시키고 영토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또 조선이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전쟁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전쟁에 패해 나라를 넘겨준 게 아니기 때문에,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황실이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왕실 지위를 유지하면서 일본 왕실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전쟁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면, 한국 황실의 지위를 굳이 인정해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상당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던 조선군을 상대로 동학군은 우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호남 곡창지대의 중심지인 전주성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지금으로 치면 최고의 산업단지를 혁명군이 차지한 셈이 된다. 그러자 고종 임금은 의욕을 잃고 외국 군대에 의존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게 된다.
정부군을 압도했던 농민군
농민군이 정부군을 압도했다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농민군은 군사훈련이 안 돼 있었을 뿐 아니라 무기 면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했다. 국민대 국사학과가 집필한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 영산강 문화권>은 동학혁명 당시의 한양 정부군 즉 경군(京軍)이 보유한 군사무기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경군은 외국에서 수입해온 쿠르프식 야포, 회전식 기관총, 모제르식 소총 등의 최신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각 고을을 점령하면서 지방군의 무기들을 접수하여 무장을 강화시켰다 하나, 경군의 무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조선군은 회전식 기관총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 군대를 상대로 농민군이 우위를 확보했다. 농민군한테 뭔가 비결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목이다.
▲<녹두꽃> 속의 황룡촌 전투. 동학군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SBS
▲SBS 드라마 <녹두꽃> 15회 방송분ⓒ SBS
우선, 농민군은 숫자가 많았다. 민심이 농민군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지난주 <녹두꽃> 15회에서 묘사된 황룡촌 전투(장성 전투)에서도 나타난다. 하천가에서 맞부딪힌 양쪽 군대의 진용에서 숫자 상의 우열이 한 번에 드러났다. TV 화면상으로 농민군의 압도적 우세가 한 번에 표현됐던 것이다.
그런 숫적 우세에 더해, 기묘한 무기의 출현도 있었다. <녹두꽃>에 등장한 장태라는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농민군이 통나무보다 훨씬 두꺼운 장태를 굴리며 조선군 쪽으로 진격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조선군이 쏜 총알은 장태에 흡수되고, 농민군은 장태 뒤에 숨어서 진격했다. 조선군의 대포가 장태 밑에 깔리는 장면도 있었다. 이 무기에 관해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 영산강 문화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장태란 원래 닭을 키우는 데 쓰이는 닭구장태 만드는 법을 응용하여 만든 것으로, 농민군은 이 장태 안에도 짚을 넣어 불을 붙인 뒤 수백 개를 경군 쪽으로 굴리면서 경군 진용을 혼란시킨 뒤 공격해 나갔다."
▲SBS 드라마 <녹두꽃> 15회 방송분ⓒ SBS
한마디로, 장태는 규모가 큰 죽부인이었다. 그 안에 볏집을 넣은 일종의 방탄용 차였다. 빨리 굴러가라고 바퀴도 달려 있었다. 그 안에 사람이 숨어서 총을 쏘기도 했다고 한다. 마치 미니 거북선처럼 활용됐던 것이다.
그 급박한 와중에 이런 신무기가 개발됐다는 것은, 농민군 내에서 각종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기술자들도 혁명군에 합세했음을 의미한다. 동학군 내부가 새로운 기운으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전주성 진입 직전에 있었던 이 전투에서는 그 유명한 학익진 전법도 구사됐다. 이 지역 지형에 밝은 농민군이 학 모양의 진을 치고 관군에 대응했던 것이다. 육상의 미니 거북선이라 할 수 있는 장태에 더해 학익진 전법까지 동원됐으니, 이순신과 수군을 연상시킬 만한 상황이 전봉준과 동학군한테서도 연출됐던 셈이다.
이런 일들은 동학군 내부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벌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관군 앞에서 두려움에 떨기 쉬운 농민들이 신무기도 개발하고 전법까지 구사했다는 것은 혁명의 열기가 농민들에게 심리적 여유를 불어넣어 주었음을 뜻한다. 군사훈련도 안 돼 있고 무기도 열악했던 그들이 정부군을 압도한 핵심 비결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포탄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런데 <녹두꽃> 제15회에서 묘사된 황룡촌 전투에는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이 드라마에서는 전투 초반에 동학군이 일부러 포탄을 맞아주는 장면이 나왔다. 관군의 포탄에 농민군들이 쓰러지는데도 동학군 지도부는 "가만히 서 있으라"는 명령만 내렸다. 농민군이 가만히 서 있는 채로 포탄을 맞고 쓰러지다가, 관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반격에 나섰던 것이다.
▲관군의 포탄 공격을 피하지 않는 동학군. 포탄을 맞고 쓰러지는 농민군들이 전봉준(최무성 분) 뒤에 보인다.ⓒ SBS
날아오는 포탄 앞에서도 의연히 서 있다가 쓰러지는 장면은, 동학군의 종교적 신성성이나 순교 정신을 보여주는 효과는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전투의 실제 양상을 보여주기에는 부적절하다.
전투 초반에 농민군이 포탄 공격을 당하며 수세에 몰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포탄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포탄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전 서울대 교수 한우근(1915~1999년)이 1989년에 펴낸 <동학과 농민봉기>는 전투 초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1894년 5월 27일(음력 4월 23일)의 일이다.
"경군대장 이학승이 이끈 경군의 별동대는 26일에 영광을 떠나서 그 다음날 오전에 장성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 별동대가 황룡천을 건너 바로 월평리로 나아가려는 때에, 마침 황룡촌에서 식사 중인 동학군을 발견하고 불의의 포격을 가했다. 동학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즉시 경군에 대해 역습하였다. 경군은 도리어 동학군의 역습에 놀라 대포를 버리고 달아나 영광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전투 초반에 농민군이 대포 공격을 받고 쓰러진 것은 일부러 포탄을 피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식사 중에 기습을 받는 바람에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녹두꽃>에서처럼 동학군이 일부러 대포 포탄을 맞을 만큼 '지나치게' 용맹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의 동학군은 관군을 압도할 만큼의 숫적 우세에 더해 혁명 열기와 창의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감으로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1894년의 민중은 그런 열기에 휩싸여 정부군을 압도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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