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본

이교도에게서 유래한 ‘부활절’과 색칠한 달걀

--biblepower--
1993년 1월호 p16 / 통권 10호

1. 이스터 - 하늘의 여왕 아스타르테
이제 이스터(Easter-부활절)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이스터”라는 단어 자체가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인지를 보면, 그것은 기독교에서 온 말이 아니라 갈대아에서 기원한 말이다. 하늘의 여왕 벨티스(Beltis)의 명칭 중 하나인 아스타르테(Astarte)를 니느웨 사람들이 발음한 것은 이슈타르(Ishtar)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스터가 된 것이다. 벨(Bel)과 아스타르테의 숭배는 매우 일찌기 드루이드교도들과 함께 브리톤으로 왔다. 어떤 이들은 이들에 대한 숭배가 기독교가 시작되기 수 세기 전에 주석을 얻으러 콘월로 왔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이 땅에 유입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페니키아인들이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섬지역에서도 그와 같은 숭배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5월의 첫날을 연감에서 벨테인(Beltane)이라고 부르는 것은 벨(Bel)에서 따온 말이다. 오늘날까지 영국에 남아 있는 풍속을 통해서 벨, 또는 몰록(모두 같은 신을 일컫는 말이다)의 숭배가 영국의 북부지역에서 고스란히 전래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영국의 고대 풍속을 연구한 존스코트(John Scott)는 그의 저서 <기록과 의문, Notes ans Queri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퍼드샤이어의 고(故) 레이디 베어드(Baird)가 내게 말해 주기를 해마다 벨테인(5월 1일)에는 크리프 근방의 그녀의 사유지에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고대 드루이드교도들이 원형으로 배치한 바위에 모여든다고 한다. 원의 중앙에 불을 지피고 각 사람은 양치기의 모자에 오트케익 조각을 담는다. 그리고 모두 앉아서 눈을 감고 그 모자에서 한 조각씩 꺼낸다. 그 중 한 조각에는 미리 검은 칠이 칠해져 있는데 그 조각을 집는 사람은 원의 중앙에 있는 불을 통과해서 뛰어 넘은 뒤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사실 고대 바알 숭배의 한 모습이며, 불을 뛰어 넘는 사람은 원래 제물로 희생되었었다. 벌금을 물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는 셈인 것이다.” 이처럼 브리튼에서 바알 숭배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바알의 배우자인 아스타르테가 영국인의 선조들에 의해 숭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니느웨어서는 이슈타르로 불렸던 이 “아스타르테”의 이름에서 오늘날의 부활절이 “이스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교회사에서 3,4세기에 이스터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던 축제는 현재 로마 카톨릭에서 지키는 부활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고, 당시에 그 축제의 이름은 이스터가 아니라 파스카 즉 “유월절”(Pasch, or the passover)이었다. 그 축제가 그러한 이름으로 불린 것은 예수께서 처형되신 날이 유대인의 유월절이었기 때문인데, 2세기 말 터툴리안의 때 그 날짜는 3월 23일이었다. 당시에 그 축제는 우상숭배적이지 않았으며, 더우기 그 전에 사순절(Lent)이라는 절기는 있지도 않았다 .5세기 마르세이유의 수도승 카시아누스(Cassianus)는 초대 교회와 자기 시대의 교회를 대조하면서 “초대 교회에서는 40일 동안 금욕하는 절기가 전혀 없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순절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2. 여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사순절
사순절 40일 동안의 금욕은 기독교가 바빌론 여신 숭배자들로부터 직접 가져온 것이다. 봄에 40일 동안 지켜지는 이 절기는 쿠디스탄의 마귀 숭배자들인 예지디스(Yezidis)도 그들 조상이 섬겼던 바빌론인들에게서 배워 와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사순절은 이교도 멕시코인들도 지키던 것인데, 험볼트(Humboldt)는 멕시코의 절기들에 대한 그의 <멕시코 연구, Mexican Researches>에서 “춘분으로부터 사흘 뒤에...태양을 기념하기 위한 40일 간의 엄격한 금욕절이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윌킨슨(Wjlkinson)의 <이집트인, Egyptians>을 보면 이집트에서도 그러한 사순절이 지켜졌음을 알 수 있다.
랜드시어(Landseer)의 <사바 연구, Sabean Researches>에 의하면 그 절기는 중재의 신 아도니스 또는 오시리스를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는데, 그와 같은 시기에 그와 유사한 모습으로 프로설파인(Proserpine)이 강간당한 날이 기념되었으며, 줄리우스 퍼르미쿠스에 따르면 “40일 동안” “프로설파인을 위한 애도”가 계속되었다. 아르노비우스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이 지켰던 “신성한” 금욕절 “카스투스”(Castuss)가 원래는 세레스(Ceres-농업의 여신) 여신의 기나긴 금식을 모방한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녀는 지옥의 신 플루토가 납치한 그녀의 딸 프로설파인을 잃어버린데 대한 극도의 슬픔 때문에 수많은 날동안 먹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개의 것이었던 바쿠스 또는 아도니스와 프로설파인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지면서 바쿠스는 리베(Liber)로, 그의 아내는 프로설파인의 또 다른 이름인 아리아드네, 리베라(Ariadne, Libera)로 불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후대에 지켜진 사순절 40일 동안의 금욕이 두 이야기 모두와 관련되었다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3. 사순절의 날짜와 기간
이교도들 사이에서 이 사순절은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커다란 연중 행사에 앞서는 절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절기는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의 부활절에서 몇 주 지난 때에 지켜졌는데, 에곡에서 시작하여 환희로 끝나게 되는 이 절기는 팔레스타인과 앗시리아에서 6월에, 이집트에서는 5월 중순에, 브리튼에서는 4월에 지켜졌다. 카톨릭은 이교도들을 이름뿐인 ‘기독교’로 회유하기 위해서 ‘기독교’와 이교도의 축제일을 합쳐 놓은 것이다. 그리도 매우 기술적으로 달력을 고쳐 놓음으로써 그들이 다른 숱한 부분에서도 그러했듯이 이교도와 ‘기독교’를 혼합시켜 놓았다. 이러한 이교와의 타협에 공헌한 인물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Little)로서,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실제 연도보다 4년 옮겨 놓은 장본인이다. 이것이 실수인지 고의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수님의 생일이 사실보다 만 4년 뒤로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부활절과 관련하여 이러한 달력의 변화는 중대한 결과를 수반하였다. 즉 사순절의 금욕과 관련하여 가장 타락하고 가장 지독한 미신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40일 사순절 동안 금욕하는 이교도들의 절기를 교회 안에 들여올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진리에서 떠나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가 부활절에 앞서 금욕절을 지키게 되었을 때 이교주의와의 완전한 일치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니케아 종교회의가 있기 전에 로마 교회에서 사순절에 해당하는 절기가 없었으며 그 회의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에도 그 절기는 3주 이상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D.450년 경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의 도시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스터 전에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3주 동안 금욕했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이 아스타르테를 숭배하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갈대아의 6주 또는 40일에 이르는 금욕절 전체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었으며, 그것이 로마 제국의 서부 영토 내의 거민에게 명령으로 내려졌다.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이 A.D.519년 경 아우렐리아의 종교 회의에서 부활절 전에 사순절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며칠 후에 이 결정을 수행하기 위해서 디오니시우스가 달력을 수정한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6세기 말경 새 달력의 준수를 강요하는 첫번째 시도가 브리튼에서 이루어졌지만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브리틴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념했던 ‘기독교’의 ‘부활절’과 로마에 의해 강요되었던 이교도 이스터와는 한 달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결국에는 폭력과 유혈을 통해서 갈대아 여신의 절기가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대체되었다.

4. 이스터의 풍속
(1) 둥근 빵
이스터에 행해지는 풍습들은 역사가 말해 주는 이 절기의 바빌론적 성격을 충분히 입증해 주는데, 특히 금요일의 둥근 빵(hot cross buns of Good Friday), 염색한 달걀 등은 갈대아의 종교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둥근 빵”(buns)과 같은 이름의 빵이 아테네의 창시자 케크롭스(Cecrops)의 때부터 하늘의 여왕 이스터 여신의 숭배 의식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시작보다 1500년이나 앞선 때의 일이다. 바이런트(Byrant)는 “신들에게 바쳐지는 거룩한 빵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서 보운(Boun)이라 불려 왔다.”고 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빵의 주성분에 대해 “보운이라 불리는 성별된 빵은 고운 밀가루와 꿀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헌납에 대해 『자식들은 나무를 모으고 아비들은 불을 피우며, 여인들은 가루 반죽을 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과자를 만들며..』(렘7:18)라고 했다.

(2) 부활절 달걀
부활절 달걀의 기원 또한 명백하다. 고대 드루이드교도들은 그들의 의식에서 달걀을 성스런 상징으로 사용했다. 아테네에서 볼 수 있듯이 바쿠스신을 기념하는 주신제에서 밤에 거행되는 의식 중에는 달걀로 거행하는 의식이 있다. 힌두교 설화에서는 현세를 의미하는 황금색 달걀이 등장한다. 일본인의 전설에도 구리빛의 신성한 달걀이 등장한다. 중국에서도 부활절과같은 시기에 물들이거나 색칠한 달걀이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인과 그리스도인들은 달걀을 종교 의식에 사용하였고 그들의 신전에 미신적인 목적으로 그것들을 달아 놓았다(삽화Ⅰ).


이 ‘성스런’ 달걀의 기원은 이집트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시(詩)들은 바빌론의 신비스런 알에 대한 전설로 가득차 있다. 아우구스투스 때의 인물인 이집트 사람 하이기누스는 로마에 있는 팔라타인 도서관의 박식한 관장이었는데, 그는 그 전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거대한 크기의 알이 하늘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으로 떨어졌는데, 물고기들이 그것을 강가로 굴려오자 비둘기들이 그 알을 품었다. 알이 까지자 거기서 비너스가 나왔는데 그녀는 후에 시리아의 여신으로 불려졌다.” 비너스, 다른 말로 하면 아스타르테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달걀은 아스타르테, 즉 이스터의 상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로마 카톨릭은 아스타르테의 알 신화를 수용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상징으로 삼아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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