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칭따오市

중국에서 기공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며 심지어 일부 사가(史家)는 중국 문화사는 기공의 역사라고까지 말한다. 중국에서 氣가 다시 주목을 끈 시기는 1980년대에 개혁개방이 이루어진 이후이다. 기공(氣功) 붐이 일어 대중에게 퍼져나갔고, 전통문화에 대한 대 토론장에서 주역과 기공이 주로 떠올랐다.

이 토론에서 중국 의학의 기(氣)이론과 현대 과학의 물질론은 서로 다른 세계관이고 이 둘을 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주장의 배경에는 중국의 공산주의 유물론적인 사상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氣보다 실제로 존재하는 氣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도 있다.

氣에 대한 연구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氣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인체과학(人體科學), 그리고 氣와 물질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분야는 기공과학(氣功科學) 이라고 부른다. 기공과학은 氣과학에 해당하며 인체과학은 氣의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 건강을 위한 기공 (1954~1965년)
근대에 들어 기공을 치료목적으로 임상에 응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며 기공의 현대화 기초를 다지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리우퀘이첸(劉貴珍, 1912~1983)을 꼽는다. 일찍이 공산혁명에 참가하였던 그는 악성 위궤양을 비롯하여 여러 병으로 시달리다가 기공수련으로 완쾌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기공수련을 하였다. 1954년에는 중국 최초의 기공전문 의료시설인 “당산(唐山) 기공요양원”을 개설하였다. 리우(劉貴珍)는 샹(商權后)과 함께 많은 고문헌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1953년에 “기공요법실천(氣功療法實踐)”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 당시, 기공요법이 20여 종의 질병에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북쪽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남쪽에서는 1956년에 “상하이 기공요양소”를 설립하였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약 2년 동안에 걸쳐 중국 각지에서 약 70여 기공요양원, 기공병실 등 기공의료시설을 개설하였다. 1959년에 중국 정부의 보건담당 부서인 위생부(衛生部)의 지원 하에 개최한 “제1차 전국 기공경험 교류회”에서는 기공이 유효한 것으로 확인한 질병의 숫자가 증가하여 위궤양, 위하수, 폐기종, 만성 간염, 고혈압, 성기능 장애 등 50여 종 이상이었다.

1954년부터 문화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965년에 이르는 약 10여 년 동안에 주로 기공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인체의 호흡생리, 심장박동, 혈압, 소화기능, 중추신경 기능 등의 생리 작용에 미치는 기공의 영향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 약 300여 편 나왔으며 이 시기에 학문으로서 기공학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는 위생부(衛生部)의 지도 하에 각 성(省)과 시(市)에서 자체적으로 기공의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기공의 대중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던 공법은 ‘궈린 기공’이다. 화가였던 궈린(郭林, 1908~1984)은 50세에 자궁암에 걸렸고 수술을 하여 자궁과 방광의 일부를 떼어 냈으나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전이되어 가망이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 그림을 그리러 산으로 다닐 때 만난 도사들에게서 배운 기공을 생각해 내고 이를 스스로 실천하여 암을 고쳤다. 여사는 이 기공의 핵심만 추려서 현대인들이 하기 쉽게 간략하게 만들어 ‘궈린 신 기공 요법’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보급하였으며 그 이후로 궈린 기공은 암에 유효한 것으로 속속 드러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수련하고 있다.

▶ 문화대혁명과 기공말살 정책
(1966~1976년)
그러나 1966년부터 시작하여 10여 년에 걸친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는 氣 또한 낡은 관습으로 간주하였고 무수한 기공사(氣功士)들이 탄압을 받았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氣는 허망한 것이며 척결해야 할 봉건미신의 잔재라는 주장과 함께 氣라는 말이 역사 문헌상의 용어로만 남을 운명에 처했다.
1976년에 문화혁명이 끝나고 마오저뚱(毛擇東)이 1977년에 죽으면서 氣가 다시 살아났다. 되살아난 가장 큰 이유는 기공이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에서 회복하는 데 효험이 있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데 있다. (다음호에 연재)

투고: 방건웅 박사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849

중국의 氣 열풍[2]   과학부 science_all@epochtimes.co.kr    (지난호에서 계속) ▶ 문화대혁명 이후 기공(1977~1990년) 1977년에 상해중의학원, 상해중의연구소, 중국과학원 상해원자핵 연구소는 공동으로 기공사들이 발공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구명하기 위하여 최초로 현대적인 장비들을 동원하여 측정하였다.

 이 결과 기공사들이 발공할 때 적외선, 정전기, 자기, 특정 이온 등을 방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8년 7월에는 베이징에서 현장 감정 측정이 있었다. 이 당시에 중국과학원, 국가과학위원회, 중국과학협회, 위생부, 국가체육위원회에서 당과 정부 주요 인사 600여 명이 참석하여 기공사들의 공개시연을 보면서 감정하였는데, 기(氣)는 물질적인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로 기(氣)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고 의료기공에 관한 전국적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에는 정부 승인 하에 “중화전국중의학회기공과학(氣功科學)연구회”(약칭; 중국기공과학연구회)를 설립하였으며 물리, 화학, 생물, 생리, 심리의 5개 조직으로 구성하였다. 뒤를 이어 “중국의학기공과학연구회”, “중국체육기공과학 연구회”, “중국교육기공과학 연구회”, “중국특이공능과학(特異功能科學)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이중 “특이공능과학연구회”는 후일 “인체과학(人體科學)학회”의 모체가 되었다.

 이 당시 설립했던 관련 연구소로는 1983년에 세운 북경 중의약대학 산하 “기공과학연구소”, 1985년에 세운 “상해기공연구소”가 있으며 또한 1985년에는 상해중의약대학과 중국 중의연구원 침구연구소에서 공식적으로 의학기공의 석사학위과정을 개설하였다. 

 ▶ 중국정부의 기공에 대한 삼불(三不)정책 이후 중의학(中醫學), 체육, 교육, 특이공능(特異功能)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연구결과들은 주로 “자연잡지”, “기공과 과학”, “중국인체과학” 등과 같은 전문 학술 잡지에 실렸다. 90년대를 전후하여 기공관련 전문잡지는 30여 개를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기공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허용한 배경에는 유물론적 사상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기( 氣)의 물리적 실체를 인정하였다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 연구에 대해 논쟁이 심해지자 중국정부는 기공에 대하여 선전하지 않으며[不宣傳], 반대하지 않고[不批判], 논쟁하지 않는다[不爭論]는 소위 삼불(三不)정책을 표명하였다. 90년대에 중국에서 氣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은 약 500여 명에 달했다. 필자는 21세기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적 강자로 부상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 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기공(氣功)과학은 다시 건강기공과 의료기공으로 나누며 건강기공을 체육기공이라고도 한다. 건강기공은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의료기공은 질병치료에 사용하는 것으로 아무 질병이나 치료할 수 있지는 않다. 장기의 기능이 약해지면 건강기공으로 쉽게 회복할 수 있으나 일단 기능을 상실하면 아무래도 치료가 어렵다고 한다. 현재 의학의 흐름이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옮겨가는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예방의학적 관점에서 기공을 적극 활용함이 적절한 방법 중 하나일 수 있으리라. (다음호에 연재) 투고: 방건웅 박사 2004년 07월 17일 과학부의 다른기사 보기 http://www.epochtimes.co.kr/ 



중국의 氣 열풍[3] (1990 ~ 현재)

한덕희  |  200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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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평화롭게 연공하는 아이들                             (아래) 파룬궁 수련자료를 불태우는 장면   중국의 氣 열풍[3] (1990 ~ 현재)   과학부 science_all@epochtimes.co.kr      (지난호에서 계속) 
▶ 기공과학의 산실 - 상하이 중의학원 건강기공은 중국 정부의 체육처에서 관장하고 의료기공은 위생부에서 관장한다. 건강기공은 구기(球技), 육상 등 일반 체육과 동등하게 인정받으며 국민 건강과 체력 증진이 주 목적이다.
 이와 관련한 지침을 1996년에 중앙정부 7개 부서(중앙선전부, 국가체육위, 위생부, 공안부, 민정부, 국가 중의약 관리국, 국가 공상행정 관리국)가 연합하여 작성한 바 있으며 각 부서별 담당 업무를 구분하고 있다. 이 지침에서도 기공은 중화민족의 귀중한 역사유산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기공과학의 출발지는 상하이(上海)였으며 “상하이 중의학원”은 중국 내에서도 최대 규모에 들어가는 중의대(中醫大)이고 임상, 교육, 연구 모든 면에서 우수한 연구실적을 내고 있다.
이 중의학원의 부속 연구소로 1985년에 “상하이 기공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의료기공분야의 연구가 활발해졌다. 120여 명 의사, 연구자들이 종사하였으며 그 동안 40여 명이 정년퇴직하고 2000년 말 현재 약 60여 명이 재직중이다. 이 중의학원은 의료기공분야에서는 중국 최대이자 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연구소 내에 의료기공병원이 있으며 기공마취로 유명한 린호우솅(Lin, 林厚省)은 이 연구소의 부원장이었다. 상하이 중의학원은 일본과 교류가 많았으며 일본은 중일합작연구소를 세워 연간 80만 엔을 지원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하바드 대학에서 공동연구에 대한 제의가 있었으며 9명의 하바드 의대 교수가 방문하여 기공마취 시술현장을 견학하기도 하였다. 한편 베이징에서는 가장 큰 중의 종합병원인 서원(西苑)병원에서 1970년대 후반에 최초로 기공과를 개설하였으며 1984년에는 베이징 중의학원 교과과정에서 기공학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다. 
 ▶ 국제 기공학술대회 기공연구회 등 학술단체 결성과 동시에 국제적인 기공학술대회도 열리기 시작하였다. 1989년 11월에 상하이에서 “세계의학기공학회 성립대회”를 열었는데 이것은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최초의 공식 대회였다. 당 간부들과 위생부(衛生部)의 각 책임자들이 참여하였다. 1993년 9월에는 제2회 대회를 베이징에서 열었으며 26개국 545명이 참가하였고 논문 76편을 발표하였다. 특기할 만한 점은 참석한 외국인들 절반 이상이 일본인으로서(262명) 일본이 기(氣)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에서 열리는 학술대회로는 3년마다 있는 “세계의학기공학회”, 2~3년에 한번씩 열리는 “국제기공학술회”가 있으며 이 학술대회에는 주로 체육관계자들이 참가한다. 또한 2년에 한번씩 “중외(中外) 기공 검토회”가 열린다. 이미 기공 분야 연구논문이 1,600여 편 이상에 이르고 있을 정도로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 기공의 열풍 잠재우다 (1999년 7월 이후 ~ )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활발한 기연구와 일반대중의 건강호전 효과로 인해서 기공을 수련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격히 많아져 약 1억이 넘어서자, 1999년 7월에 대중에게 환영받았던 파룬궁(法輪功)을 금지하고 탄압했으며, 더불어 다른 기공 수련도 금지했다. 이때부터 상하이 기공연구소를 포함하여 중국 내의 모든 의료기공 인증을 취소했으며 2000년에 상하이 기공연구소의 의료문진부(醫療問診部)만 재 인증하였다. 
 이곳에서 약 20여 명 의사가 제한적으로 기공치료를 하고 있으며 침술, 지압, 부항 등의 전통요법은 예전처럼 사용한다. 일반 체조나 무술은 일부 허용하여 공원에서 연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투고/ 방건웅 박사 ▒▒▒▒▒▒▒▒▒ 방건웅 박사 약 력 ▒▒▒▒▒▒▒▒▒ 52년 원주생, 경동고, 서울공대,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재료공학 전공이다. 현재 표준과학연구원에서 경도 표준을 담당하고 있다. 오랫동안 수련을 해 왔고 우리의 전통 사상과 기의 과학적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氣)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2004년 07월 31일 과학부의 다른기사 보기   http://www.epoch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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