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서 성공한 한상(韓商) 권영호 인터불고 회장 … 연매출 1조원에 프라이드 손수 운전

[중앙일보] 입력 2010.10.23 00:12 / 수정 2010.10.23 00:12

“여보 생활비 좀 더 줘요” “그럼 남을 우째 돕노”

그를 만나고 나올 때 요즘 동화책에 나오는 ‘자린고비’가 떠올랐다. 옛 이야기에서 자린고비는 가족에게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술 먹을 때마다 쳐다보게 할 정도로 인색한 사람이다. 하지만 요즘 동화책에서는 자린고비를 재해석한다.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는 것까지는 옛 이야기와 같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아끼고 아껴 많은 돈을 모은 자린고비는 일정한 돈을 모으자 그때부터 이웃을 위해 자기 재산을 쓴다. 스페인 기업 인터불고의 권영호(69) 회장이 꼭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다. 연매출이 1조원에 육박한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차 프라이드를 손수 운전하고 다닌다. 젊을 때부터 ‘돈이 아까워’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정도로 돈을 아끼는 그다. 19~21일 대구에서 열린 세계한상대회에 참석한 그를 만나 도전과 성공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구=김창규 기자<teentee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jokepark@joongang.co.kr>

그는 돈 한 푼 없이 ‘맨몸’으로 나가 유럽에서 성공한 대표적 한상(韓商)이다. 그가 스페인까지 가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 26세부터 배를 탔는데요.

 “경상북도 울진의 어촌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 배운 것이 고기잡는 것이었지요. 어른이 되면서 연안의 영세한 어업인보다는 대양에 나가서 좀 더 넓은 가슴으로 세계를 정복해야겠다는 야망을 가졌습니다. 마침 그때(1960년대) 정부가 외화벌이 목적으로 원양어업을 장려해 ‘개척자’로 나갔습니다. ”

● 처음 간 곳이 스페인이었나요.

 “네. 당시 스페인은 한국과 어업협정을 해서 한국 어선에 기지를 제공했지요. 그 기지가 그랑 카나리아라는 섬이었는데요. 거기서 3년간 배를 타다가 회사의 인정을 받아 71년부터 스페인 주재원으로 근무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페인에서 살고 있습니다. ”

● 우연히 인연을 맺었네요.

  “그렇죠. 스페인어를 배운 것도 아니고…. 그곳 사람과 동화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어요.”

● 거기서 개인사업을 하게 된 동기는 뭔가요.

 “직장은 틀을 벗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10여 년 근무하고 79년 차장으로 퇴직했어요. 그때가 일본에서는 원양어업이 사양산업이라 철수하는 시기였어요. 마침 부두에 가니까 일본 업체가 내일 폐선할 예정인 배를 대놓고 있었지요. 1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번 돈 2만 달러를 주고 그 배를 샀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내일 버리겠다는 배를 과연 권 차장이 수리해서 잘할 수 있을 것인가’ 등…. 진심으로 하는 얘기였죠.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얘기하니까 오히려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 2만 달러짜리 배로 어떻게 성공하게 됐나요.

 “행운이 많이 따랐어요. 물론 운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따르지,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따르지 않겠지만요. 82년에 갑자기 세계 수산업계에 위기가 왔어요. 한국 기업도 철수 단계에 있었지요. 하지만 나는 사업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철수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 카나리아가 영업기지였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아프리카의 앙골라를 개척했습니다. 거기에서 정말로 기회를 찾을 수 있었어요.”

● 앙골라 어장을 개척한 이유는 뭔가요.

 “카나리아에는 고기가 없었으니까요. 보통 어장 발견 후 수익성이 보장되는 기간은 5년입니다. 카나리아도 황금어장이었는데 여러 해 동안 일본·소련과 연안국이 다 뛰어들어 어장이 고갈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어장을 개척해야 했지요. 앙골라는 카나리아에서 배로 10일 정도 걸리는 곳입니다. 한국과 수교가 없는 적성국가였지만 입어권(조업할 수 있는 권리)을 획득했습니다. 한창 때엔 50여 척의 원양어선을 보유했어요.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에서 남쪽의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우리 회사 배가 줄지어 조업할 정도였지요.”

● 해외에서 사업하면서 무엇이 제일 어려웠나요.

 “유럽에서 외국인이 돈 벌어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사업 무대가 아프리카 바다여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언어나 문화적 차이, 동양인에 대한 배타적 생각 등이 어려웠지요. 내가 솔선하지 않으면 그들은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 한국, 특히 경북 지역에 투자를 많이 하는데요.

 “사업을 시작한 후 5년 뒤인 85년부터 한국에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주로 경북 지역에 하는데 내 고향이 가까우니까요. 애향심 때문에 투자한 것이지 사실은 지방에 이런 호텔 사업을 한다는 것은 수익을 내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 회사는 글로벌 기업 아니냐, 왜 여기에 투자하느냐’고 묻기도 한답니다.”

 인터불고는 국내에 호텔인터불고 대구·엑스코·원주와 인터불고경산컨트리클럽, 인터불고건설, 인터불고유통 등을 보유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스페인(조선소·골프장) 외에 프랑스·네덜란드(유통업), 앙골라(수산업), 가봉(수산업) 등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룹 전체 매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 정도다.

젊은 세대를 이야기할 때 그에겐 아쉬움이 깊게 배어 있었다. 젊은이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국가관입니다. 요즘 (한상) 세대에는 국가관이 없어졌어요. 물론 자기가 태어난 곳이 국가라고 하지만 자신의 뿌리, 조국에 대한 생각은 가져야 합니다. 젊을 때 조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어요. 아프리카 등을 다니다 보면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출입국 때 아무 이유 없이 아프리카 오지의 대기실에 밀어넣고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해요. 가끔 ‘난 한국이 싫어. 빨리 외국 국적을 받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요즘 외국에 나가면 한국 여권이 자랑스러워요. 등을 기댈 조국이 있다는 생각을 꼭 잊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 절약을 강조하는데요.

 “만사가 절약이에요. 인생도, 시간도, 물질도 절약해야 합니다. 인생도 절약해야지 과음 등을 하면 오래 살 수 없잖아요. 내가 타는 차엔 기사가 없습니다. 차는 교통수단인데 좁은 시내를 다니면서 큰 차 타고 다닐 필요가 있나 생각해요.”

● 아내 입장에서는 너무 절약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제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와 50년 동안 산 앵무새가 있는데 이 앵무새가 유창하게 쓰는 말이 있지요. ‘여보 생활비를 왜 이렇게 적게 줘요.’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남을 도우겠노.’ 내 잘 먹고 남 도울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비행기를 타도 비즈니스석이나 퍼스트 클래스를 타본 적이 없어요. 간혹 운이 좋아서 마일리지 등으로 공짜로 타본 적은 있지만요. 절약한 돈을 가지고 사회사업을 하는 겁니다. 예전에 청와대에 갈 때도 엑셀을 타고 갔지요. 그때는 제가 운전하기 좀 그래서 총무부장을 데려갔습니다(하하하).”

 그는 자녀가 ‘우리 아버지는 깍쟁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자녀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 자녀에게도 절약을 강조합니까.

 “아이들은 나보다 더 큰 차를 타고 다닙니다. 물론 철철 넘치진 않지만요. 나는 습관적으로 (절약을) 하는 것이지 꼭 남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 기부를 많이 하는데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정신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돈을 벌고 나서 돈을 보람있게 쓸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어차피 인생은 내가 번 돈을 두고 가는 것인데 어려운 사람에게 나눔·베풂을 실천하는 게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는 86년 동영장학재단을 설립해 25년간 한국·중국·아프리카 학생 1만3000여 명에게 모두 130억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2008년에는 계명대학에 200억원 상당의 경북 칠곡군 소재 임야 243만4547㎡(74만 평)를 기증했다. 그는 최근 4~5년 동안 1년의 3분의 2가량을 한국에 머물렀다. 골프장·호텔 건설 등 주요 사업을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제 스페인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조국을 강조하는 그가 스페인에서 오래 살고 싶다니…. 이유를 물었다.

 “스페인은 내 고향입니다. 한국은 내 조국이고요(하하하).”


j 칵테일 >> 권 회장의 잃어버린 손가락 마디들

이 이야기는 권영호 인터불고 회장이 밝히지 않으려 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한다. 권 회장은 왼손 세 손가락의 마디가 없다. 1997년 6월 26일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날’이다. 인터불고는 앙골라 해군에서 인수한 낡은 호텔을 수리 중이었다. 당시 56세인 ‘회장님’이 직접 공기를 맞추기 위해 현장에 갔다. 그가 시멘트 섞는 장비를 점검하던 중 현지인이 현장을 확인하지 않고 동력 스위치를 작동했다. 순간 그의 손이 벨트에 말려들어갔다. ‘악!’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손은 피범벅이 돼 있었다. 그는 다친 손을 움켜쥐고 침실로 가다가 의식을 잃었다. 그가 다친 소식은 앙골라 대통령 비서실에까지 알려졌고, 접합수술을 받기 위해 그는 의료기술이 좋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수술을 했지만 세 개의 손가락 마디를 접합하지 못했다.

  크게 상심했지만 그는 마음을 추슬렀다. “한쪽 발을 잃으면 두 발을 다 잃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두 발을 다 잃으면 목이 성한 것에 감사하라”는 탈무드의 한 대목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실수를 한 현지인에 대해 어떠한 ‘보복 조치’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손가락 절단으로 인해 받은 보험금 전액도 앙골라 현지인을 위해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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