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Cover Story] 뭘 좀 아는 '선도적 사용자' 그들이 혁신의 주인공 된다

  • 보스턴=오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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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4.08.16 03:04

    조깅 유모차도 '선도적 사용자' 생각이 만들었다
    폰 히펠 MIT 교수 인터뷰
    소비자·공급자 경계 허물어져 : 제조사, 선도 사용자 아이디어 찾아내… 그들과 협업할 때 '혁신의 민주화' 이뤄
    선도 사용자를 경쟁자로 생각 말라 : 레고, 사용자 아이디어 받아들일 때… 디자이너들 “일자리 뺏길라” 걱정했지만 새로운 디자인 상품화… 오히려 得이 돼

    1978년 하와이에서 열린 윈드서핑 월드컵에 출전한 서독의 위르겐 혼셰이트 선수가 사상 최초로 공중 도약을 시도했다. 파도를 탈 때 공중으로 높이 뛰어오르고 몸을 비트는 동작이었다. 그 뒤 모든 서퍼가 이 공중 도약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점프를 하면 공중에서 보드와 몸이 분리돼 다리를 다치거나 보드를 망가뜨리는 일이 잦았다.

    윈드서핑 선수 출신인 래리 스탠리씨는 이런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보드에 발을 고정하는 끈(스트랩)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스스로 만들어 보았다. 그가 만든 끈 달린 서핑 보드는 소문을 타면서 많은 서퍼가 썼고, 마침내 스포츠용품 회사들이 본격 개발해 팔기 시작했다.

    MIT 연구실에서 만난 폰 히펠 교수는 마치 학생에게 설명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연구실 벽에는 오래된 전기기기 부품과 배전판 등을 모아 장식용처럼 만든 선반이 걸려 있었다. / 오윤희 기자
    MIT 연구실에서 만난 폰 히펠 교수는 마치 학생에게 설명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연구실 벽에는 오래된 전기기기 부품과 배전판 등을 모아 장식용처럼 만든 선반이 걸려 있었다. / 오윤희 기자
    아직도 많은 기업이 '회사가 물건을 만들어 일방적으로 소비자에게 공급하고, 소비자는 그것을 쓰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엔 많은 소비자가 스탠리씨처럼 직접 제품을 개발·개선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 MIT의 슬론 경영대학원 에릭 폰 히펠 교수는 이들을 가리켜 '선도적 사용자(lead user)'라고 일컫는다. 선도적 사용자는 소비자인 동시에 혁신가다. 이들은 기업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개량해서 인터넷에 무상 공개하고, 제조사가 만든 아웃도어 제품을 개량해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쓰기도 한다.

    "사용자들은 제품을 쓰면서 어떤 한 특정 기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 결과 그 부분에 대해 제조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됩니다. 스케이트 보드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청소년이 그런 물건을 원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걸 만들어낸 것은 바로 아이들 자신이었습니다. 선도 사용자였던 겁니다. 초창기 스케이트 보드 모델은 아이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 나갔고, 마침내 기업이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아이들이 사용하던 조잡한 형태의 스케이트 보드를 개량해서 더 많은 사람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만든 겁니다. 이런 현상은 산업계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기업이 선도 사용자를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업은 소비자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선도 사용자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한 뒤 상업성을 평가해 대량 생산한다. 폰 히펠 교수는 이런 과정을 '혁신의 민주화'라고 표현했다.

    "과거에도 선도적 사용자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도적 사용자가 만든 혁신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번질 수 있게 되면서 훨씬 큰 파급력을 가지게 됐습니다."


    폰 히펠 교수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이어갔다.

    "과거에도 지금도 숲 속엔 항상 버섯이 있었습니다. 다만 예전엔 적극적으로 버섯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선도 사용자들이 있었고,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랐지만, 제조사는 그런 현상을 어쩌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제조사가 더 체계적이고 빠르게 숲 속의 버섯들을 찾게 됐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선도 사용자를 헌팅하라

    ―많은 기업이 고객 설문조사를 실시하기도 하고, 피드백도 받습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객 요구를 수렴하는 것과 사용자 혁신을 이용하는 것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가장 큰 차이점은 실제로 제조사가 관여할 수 있는 어떤 원형 단계의 제품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입니다. (존재할 경우 사용자 혁신에 해당) 소비자들이 그냥 막연하게 '이런 게 있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을 할 때와 실제 존재하는 어떤 모델이 있고 제조사가 거기에 관여해서 개량할 수 있을 때와는 분명히 다르니까요."

    제조사는 선도 사용자가 만든 원형에서 새로운 시장 수요를 발견하고, 그것을 더 잘 만들어내거나 그 기능을 개선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조사는 선도 사용자들이 만들어낸 것에 왁스 칠을 한다고 볼 수 있다고 폰 히펠 교수는 부연설명했다.

    ―제조사는 선도 사용자와 어떻게 공존하고 윈윈(win-win)할 수 있습니까?

    "사실 선도 사용자는 기업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 어떻게 하면 제품의 특정 기능을 더할 수 있거나 개선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예를 들어 한 농부가 밭에 물을 주는 스프링클러를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걸 제조사에 알리지 않지요. 자신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으면 그걸로 그만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제조사가 선도 사용자와 공존하는 방법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 즉 제조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동시에 그런 비전통적인 소비자들을 '헌팅(hunting)'하는 겁니다."

    폰 히펠 교수는 선도적 사용자를 잘 활용한 성공 사례로 레고를 들었다. 레고는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사용자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디자인이 있다면 여기에 포스팅하세요'라고 사용자 혁신의 장(場)을 제공했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올린 여러 디자인 가운데서 어떤 것이 얼마나 다운로드되는지 살펴봤다. 그렇게 해서 인기가 좋은 레고 모델을 상품화하고, 해당 상품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의 사진과 이야기를 명시했다.

    선도 사용자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말라

    "레고의 경우는 예외지만, 대개 업체는 선도 사용자들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발견할 경우엔 그냥 그것을 가져가 버립니다. 그러면 사용자들은 불쾌해하거나 화를 내고 그냥 그걸로 끝이지요.

    하지만 앞으로 사용자 혁신은 더욱더 활성될 것이고, 이것을 알게 된다면 업체는 선도 사용자들을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업체는 대개 선도 사용자에게 아이디어의 대가로 얼마간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또 '이건 우리가 만들어낸 거야'라고 대외적으로 뻐기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자신의 제품 중 사용자들이 무엇인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알리기를 꺼리고요. 선도 사용자들을 잠재적인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서 위협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레고조차도 사용자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기 전에 회사 내부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기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사용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그들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알리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기업에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건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매우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지요."

    조깅 스트롤러(jogging stroller)
    조깅 스트롤러(jogging stroller)는 일반 유모차처럼 아이들을 태울 수 있지만, 바퀴가 달려서 어른이 유모차를 밀면서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품이다.

    이 제품을 만든 사람은 평범한 젊은 아버지였다. 조깅을 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 아이 유모차를 밀어야 했던 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 위해 자신의 차고에서 자전거 바퀴를 떼서 유모차에 붙였다. 이 물건을 인터넷을 통해 홍보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이 '이 물건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어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서 조깅 스트롤러를 팔게 됐다.

    "이처럼 이제 선도 사용자들은 기업이 제품을 만들어 주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회사를 차릴 수가 있어요. 왜 기업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요? 미국의 벤처기업 가운데 창업 후 5년간 생존한 기업의 절반이 이러한 혁신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습니다.(2011년 카우프만 재단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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