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천안함 좌초설' 아직도···대통령 직속위 또 조사

[중앙일보] 입력 2021.03.31 21:56 수정 2021.04.01 06:24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

김상진 기자

박용한 기자

SNS 공유 및 댓글SNS 클릭 수38카카오톡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SNS 공유 더보기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규명위)가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에 나선 것으로 31일 확인됐다. 천안함 사건 발생 직후부터 '좌초설' 등을 꾸준히 제기했던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이 "천안함 장병의 사망 원인을 밝혀달라"며 낸 진정을 받아들이면서다. 
  

정부 '北 소행' 규정했는데, 의문사 규명 진정
"관련 기록, 판결, 국방부 판단 등 확인할 것"
신상철, 진정 신청 자격 두고 내부서도 논란
군 관계자 "명백히 결론 났는데, 저의 뭔가"

이미 정부가 '북한의 소행'으로 규정한 사건을 군 의문사를 다루는 위원회가 다시 조사하고 나선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논란이 예상된다. 정부는 천안함 폭침으로 숨진 46명의 장병을 '제2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도발'로 희생된 장병과 함께 '서해수호 55 용사'로 기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지난 26일 오후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열린 제6회 서해수호의날 기념식을 마친 후 '천안함 46용사' 추모비를 참배하고 있다. [뉴스1]

규명위에 따르면 신 전 위원이 진정을 낸 것은 지난해 9월 7일이다. 규명위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진정 접수 마감일이었던 지난해 9월 14일 직전에 진정이 몰렸는데, 그때 신 전 위원의 진정도 함께 접수됐다"며 "사전조사 결과 결격 사유가 없어서 지난해 12월 14일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다만 "여러 사건이 적체돼 있어 해당 진정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관련 기록이나 판결 내용, 국방부의 판단 등을 모두 확인한 다음 위원회가 결론을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과정에서 "진정인(신 전 위원)에 대한 조사나 숨진 천안함 장병 유가족의 의견 청취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넷매체 서프라이즈 대표를 지낸 신 전 위원은 지난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민주당 추천으로 민군합동조사단에 합류했다. 당시 정부는 국내외 전문가 71명과 국회 추천 위원 3명으로 합조단을 꾸렸다.
 
합조단 참여 이전부터 신 전 위원은 좌초설 등을 강력히 제기했다. 두 달여 뒤 정부가 "북한군 어뢰에 피격돼 침몰했다"는 조사결과를 공식 발표한 이후에도 그는 '천안함은 좌초했는데, 정부가 침몰 원인을 조작하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계속해서 서프라이즈에 게재했다.
  

'천안함 좌초설'을 주장하며 군 관계자 등을 명예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민주당 추천)이 지난해 10월 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때문에 군과 합조단 관계자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 2016년 2월 일부 게시물에 대해 유죄(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신씨가 허위성을 미필적으로 인식하고도 자극적이고 경멸적 표현을 사용했다"며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어서 공직자 개인을 악의적으로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항소심에선 무죄 판결이 났다. 당시 재판부는 게시글이 허위라는 점은 인정했으나 비방 목적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이같이 판결했다.
 
신 전 위원은 이 판결을 앞두고 규명위에 진정을 낸 셈이다.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규명위 내에서도 신 전 위원의 진정 신청 자격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한 소식통은 "관련 법률이나 시행령상 진정을 낼 자격이 없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조사한다는 결정이 났다"며 "이미 명백하게 결론이 난 사안을 다시 들춰보겠다는 저의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규명위 관계자는 "유가족이 아니라 해도 목격한 사람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도 진정 신청 자격이 있다"며 "이번 건은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군 내에서도 놀라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군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저런 결정을 내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얼마 전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을 놓고 정치적 논란이 불거졌는데, 물밑에서 이런 조사를 시작했다니 참담한 기분마저 든다"고 말했다.
 
이번 사안과 관련, 국방부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규명위가 진행하는 사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도 "다만 천안함 희생 장병에 대한 국방부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김상진·박용한 기자 kine3@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단독] '천안함 좌초설' 아직도···대통령 직속위 또 조사

news.v.daum.net/v/20210405102103767

 

천안함 좌초설 신상철 진정서 공개.."폭발 인체 손상 無"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이 군 의문사를 조사하는 기관에 천안함 좌초설을 다시 제기했다가 거절당한 가운데 신 전 위원이 진정서에 적은 주장이

news.v.daum.net

 

news.v.daum.net/v/20210405061004775

 

[단독] 천안함 폭침이 해난사고? 87쪽 '음모론 진정서' 살펴보니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규명위)가 ‘천안함 좌초설’ ‘군 증거인멸설’ ‘북한 어뢰 조작설’ 등 11년 전 음모론을 반복하는 87쪽 분량 진정서를 접수했던 것으로 4일 나타났다

news.v.daum.net

 

아직 답답한 유족들 "5.18처럼 4.3 명예훼손 처벌해야"

제주4.3 희생자 제73주년 서울 추념식 열려... 추미애 "정당한 저항의 역사"

21.04.03 14:58l최종 업데이트 21.04.03 15:03l

신나리(dorga17)

 

 

 

 

 

    • 2

 

    •  

 

  •  

본문듣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감11 댓글4

 

큰사진보기
  제주4.3희생자 제73주년 서울 추념식"에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참석해 추념사했다
ⓒ 유튜브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4.3 당시 짐승처럼 끌려갔던 할망(할머니), 하르방(할아버지), 삼촌들의 넋이 이곳에 있으니 오늘은 흐르는 눈물 삼키지 말고 모두 다 쏟아냅서(쏟아내소서)."

박진우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군욱, 이정수, 한석재', 그의 등 뒤에 세워진 전광판에 제주4·3희생자들의 이름이 지나갔다. 3일 오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제주4.3희생자 제73주년 서울 추념식'이 열렸다. 제주4.3 70주년 이후 추념식은 매년 서울에서도 열렸다.

실제 4.3 수형인들이 옥살이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유족들은 '4.3특별법'을 언급하며, 부족한 점이 있다고 꼬집었다. 앞서 지난 2월, 4.3 희생자들에 대한 배·보상과 수형인들의 명예회복을 담은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아래 4.3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여기에는 ▲수형인 명예 회복 ▲배·보상과 관련한 '위자료 등의 특별지원' ▲추가 진상조사 방안 등이 담겼다.

"여전히 4.3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사람 많아"

박진우 청년회장은 "4.3특별법이 전부 개정됐고, 2년 전 광화문광장에서 참배했던 경찰청장과 국방부 장관이 73년 만에 처음으로 오늘 제주 추념식에 참석했다"라면서 "(4.3 특별법) 과제가 남아 어깨가 무겁다"라고 입을 뗐다.

박 회장은 "여전히 4.3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5.18이 '역사왜곡특별법'으로 처벌하는 것처럼 4.3 역시 처벌해야 한다, 여야 국회의원이 (4.3 특별법)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3일 오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제주4.3희생자 제73주년 서울 추념식"이 봉행됐다.
ⓒ 유튜브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4.3은 대한민국 역사, 역사의 명령이다. 제주도의 간절한 염원이다. 70년을 기다렸다. 4.3특별법 개정으로 명예회복 추진하라. 불법적인 군사재판 무효화하라."

4.3 유족 현민종씨가 4.3특별법 개정을 위해 지난해 겨울 내내 집회에 참석했다며, 당시 구호를 외쳤다. 이어 "3~4대 이르는 수십만명의 4.3 유족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라며 "특별법개정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불법 군사재판을 받았던 백부의 수형 기록을 찾아 재심청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참석해 추념사를 낭독했다. 앞서 추 전 장관은 제주4.3 사건 당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수형인 335명이 무죄 판결을 받은(3월 16일) 다음 날인 3월 17일, 수형인 명예회복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제주에서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

추 전 장관은 "73년 전, 그 날도 오늘처럼 제주도에는 붉은 동백꽃이 피었을 것이다. 긴 세월 마음의 감옥에서 갇혀 지냈고, 집안마다 '순이 삼촌'의 사연을 하나씩은 품고 있을 그 고통과 슬픔을 어찌 일일이 헤아릴 수 있겠나"라며 운을 뗐다. 이어 "'곧지 마라'면서 한을 안으로만 새겨야 했던 그 비극적인 일을 일깨우는 이유는 다시 같은 일이 이 땅에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 더 이상 4·3은 남쪽 끝 섬에서 벌어진 반란의 역사가 아니다. 폭도의 역사는 더더욱 아니다. 4·3은 잘못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의 역사이자, 정당한 저항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추 전 장관은 "이번에 통과된 4.3 특별법으로 약 2000여명의 특별재심 길이 열렸다. 국가 차원의 재보상과 재심절차가 이뤄지도록 정부, 국회, 사법부가 최대한 노력해주기를 당부한다"라고 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태그:#제주 4.3, #4.3 73주년, #추념식

추천11 댓글4 스크랩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文 "특별법 개정, 제주4·3 자기 모습 되찾았다…유가족 염원 이행 약속"

김보선 기자 입력 2021.04.03 11:03    


73주년 4·3 추념식 참석…완전한 해결 의지 재확인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진행된 제72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추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아이뉴스24 김보선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3일 김정숙 여사와 함께 제73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특별법 개정으로 4·3이 자기 모습을 되찾게 됐다"며 "정부는 4·3 영령들과 생존 희생자, 유가족과 국민의 염원을 담아 만든 설계도를 섬세하게 다듬고, 성실하게 이행해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 평화공원 내 평화교육센터 다목적홀에서 봉행된 제73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문 대통령의 4·3희생자 추념식 참석은 2018년, 2020년에 이어 재임 중 세 번째다. 특히 지난 2월 제주 4·3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국가의 배상 의무와 추가 진상조사 필요성을 명문화한 4·3 특별법 전면개정안이 통과된 데 따라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특별법 개정으로 이제 4·3은 자기 모습을 되찾게 됐다"며 "제주도민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죽음과 이중 삼중으로 옭아맨 구속들이 빠짐없이 밝혀질 때, 좋은 나라를 꿈꿨던 제주도의 4·3은 비로소 제대로 된 역사의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법 개정으로 1948년과 1949년 당시 군법회의로 수형인이 되었던 2천530명이 일괄 재심으로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렸다. 문 대통령은 "가족을 잃고, 명예와 존엄, 고향과 꿈을 빼앗긴 2천162분의 특별재심이 아직 남아있다"며 "한분 한분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배상과 보상을 통해 국가폭력에 빼앗긴 것들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으로 국가의 책임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5월부터 시범 운영 중인 '4·3트라우마센터'는 관련 법률이 제정되는 대로 국립 트라우마센터로 승격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문 대통령은 "개소 9개월 만에 1만2천여 분이 트라우마센터를 다녀가셨다. 국립 트라우마센터로 승격하고, 많은 분들의 아픔이 온전히 치유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추념식에는 사상 최초로 국방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참석했다. 국방부 차관과 경찰청장이 2019년 광화문 시민분향소를 찾아 헌화하고 유감을 표명한 일은 있었지만, 군경 최고 책임자가 정부에서 주관하는 공식 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김보선 기자(sonntag@inews24.com)



김보선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군의문사위 “천안함 희생자 사인 불명확” 결정 후 긴급회의 왜? - 미디어오늘 (mediatoday.co.kr)

 

군의문사위 “천안함 희생자 사인 불명확” 결정 후 긴급회의 왜? - 미디어오늘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가 11년 전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건 희생자의 사인이 명확하지 않고 의심할 상당한 사유가 있다고 결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위원회

www.mediatoday.co.kr

 

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 제주CBS 고상현 기자메일보내기
  • 2021-03-29 05:00

 

 

 

뉴스듣기

 

[제주4‧3, 짓밟힌 꽃망울 ①]
희생자 10명 중 2명 '아동‧청소년'
군‧경 '초토화 작전' 때 학살 집중
"4‧3의 비인간적 야만성 드러내"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이 중에는 꽃망울조차 피어보지 못한 채 군홧발에 짓밟혀 죽어간 아동‧청소년이 있다. 군‧경은 젖먹이뿐만 아니라 임산부에게도 총구를 들이댔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29일은 첫 순서로 전반적인 학살 실태를 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계속)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설치된 <비설>. 4·3 당시 희생된 모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상현 기자


'양기열 1세 여 1949. 12. 21 사망'
'김병현의 자1 11세 여 1948. 12. 18 사망'
'김병현의 자2 9세 남 1948. 12. 18 사망'
'김병현의 자3 7세 남 1948. 12. 18 사망'(…)

지난 3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확인한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에 적힌 4‧3희생자의 이름, 성별, 당시 나이, 사망 일시다. 희생자 중에는 생후 1년부터 만 6세에 불과한 영‧유아뿐만 아니라 19세 미만의 청소년도 있었다. 부모와 함께 몰살당하거나 '○○○의 자(子)'로 이름조차 없이 희생된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4‧3 당시 아동‧청소년 희생자 규모는 어떻게 될까. 지난해 6월까지 제주도에 신고된 4‧3 희생자는 1만4533명이다. 이 중 9세 이하는 818명, 10~19세는 2535명이다. 전체 희생자의 23%(3353명)가 아동‧청소년이다. 3세까지의 영아는 3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 고상현 기자

유가족이 직접 신고한 수치가 이 정도이고,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유아는 미처 호적에 올리지 못한 채 희생되거나 온 가족이 몰살당하며 희생자 신고조차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존재조차 '말살' 당했다.

◇방어 능력 없는 아이들, '속수무책' 학살당해

4‧3 당시 아동‧청소년의 희생은 군‧경이 초토화 작전을 벌이던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됐다. 이 기간 군‧경은 한라산 중산간 마을 사람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방어 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했다.

실제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경우 4‧3 당시 205명이 희생됐는데, 이 중 20%(41명)가 15세 이하의 아동이다. 집들이 불타며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이 된 동광리 '무등이왓' 학살에서 살아남은 홍춘호 할머니(84)는 73년 전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홍 할머니는 당시 11세였다.

 



"1948년 12월일 거라. 마을 사람덜이 아시날(전날) 죽은 가족들을 묻으려고 하는데, 잠복해 있던 군‧경 토벌대가 덮친 거라. 나중에 우리 아버지가 가보니깐 젖먹이가 어멍신디(어머니한테) 도라졍(매달려) 젖 먹으멍(먹으면서) 죽엉이신 거라(죽어있는 거야)."

지난 5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학살 터에서 홍춘호 할머니(84)가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1948년 11월 13일 벌어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 학살 사건에서도 희생자 34명 중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당시 홀로 살아남은 故 이모(1925년생)씨는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의붓엄마가 다섯 살 난 남동생을 등에 업고 있었는데, 총을 쏘아 부니깐 탁 엎어져서 당한 거죠. 실탄이 우리 동생 등으로 해서 엄마 머리 위로 날아가 버렸어요. 남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어불고(죽고). 그 당시 어린이들은 부모허고(부모하고) 같이 있다가 총살되면 같이 총살되는 거니까."

◇임신부 나무에 매달아 대검으로 마구 찔러

임산부들의 죽음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비학동산 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1948년 12월 10일 토벌대는 주민 36명을 총살하기 전에 고정규 씨의 아내(당시 30대)를 끌어내 옷을 전부 벗긴 뒤 팽나무에 매달았다. 이후 총에 대검을 꽂고 만삭의 몸이었던 여성을 마구 찔렀다.

피난 과정에서 아동들이 전염병과 기아 등으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군‧경에 쫓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안타깝게 희생되기도 했다.

지난 17일 취재 과정에서 만난 A 할머니(80)는 한 어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이 마을 사람들과 오름에 곱았다가(숨었다가) 아이가 울어버리니깐 토벌대에 발각된 거라. 정신없이 도망치당 보난(보니깐) 아이가 어서(없어). 토벌대가 죽여분(죽여버린) 모양이라."

지난 7일 서귀포시 강정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정순희 할머니(87)가 4‧3 당시 경찰로부터 전기고문을 당해 지금까지도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고상현 기자.

학살에서 살아남더라도 4‧3은 아동‧청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모진 고문과 총상으로 평생 후유장애로 고생하거나, 학살의 충격으로 정신적 외상 증후군에 시달린다. 10대의 나이에 수형 생활로 꿈을 저버렸다. 특히 4‧3으로 부모를 잃어 '학살 고아'로 한 맺힌 삶을 살기도 했다. 최근 한 달간 취재진이 만난 생존 피해자들의 얘기다.

◇"갓난아기가 무슨 사상을…무차별 학살 증거"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은 4‧3 당시 아동‧청소년의 죽음에 대해서 "좌우 이념을 떠나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라고 강조했다. 4‧3희생자 10명 중 2명이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는 아동‧청소년에 해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4‧3의 '광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도피자 가족으로 낙인찍히면 젖먹이도 빨갱이가 됐어요. 당시 갓난아기, 열 살, 열다섯 살 아동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겠어요. 그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죄목으로 그렇게 죽어야 했나요. 이것만 보더라도 4‧3이 비인간적인 야만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제주4·3평화공원 안에 설치된 <비설>. 고상현 기자

제주4‧3평화공원 안에는 <비설>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초토화 작전 시기인 1949년 1월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 눈밭에서 故 변병생(당시 25세)씨가 어린 딸(2세)과 함께 희생됐는데, 이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주위로는 억울하게 숨진 아이를 위무하듯 제주어 자장가가 적혀 있다.

'웡이자랑 웡이자랑 /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아기 자는소리 / 놈으아기 우는소리/ 우리어진이 곤밥먹엉 / 혼저재와줍서 / 웡이자랑 웡이자랑 / 웡이자랑 웡이자랑….'

kossang@cbs.co.kr

 

 

신상철 진실의길 대표, 7년간의 연구 그리고 결론 (1)

 

 

신상철TV 구독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N-R...

(2)부는 4월9일 금요일 저녁9시에 진행합니다.

새날 광고 및 문의 : saenalkr@gmail.com / questionkorea@gmail.com

새날 멤버십 가입하기 : https://www.youtube.com/channel/UCu1F...

새날 페이스북 팔로하기 : https://www.facebook.com/saenalTV

새날 유튜브 구독하기 : https://t.co/I1ummCl2YG

새날 팟빵 구독하기 : http://www.podbbang.com/ch/7290

*새가날아든다 방송을 무단 복제 및 게재 시 저작권법에 의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

blog.naver.com

 

[단독] 5·18 조사위 “북한 특수군 광주 침투 주장 사실 아니다”

 

 

 

 

 

 

 

6

입력 :2021-02-14 14:43ㅣ 수정 : 2021-02-14 15:29 

 

 

 

▲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도심에 투입된 5·18 계엄군의 모습. 5·18 기념재단 제공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한 조사 활동 과정에서 국내 일부 탈북 인사들이 주장하는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는 조사 결과를 낸 것으로 확인됐다.

14일 서울신문이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위원회의 2020년 하반기 조사활동보고서에 따르면, 위원회는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 책임자 및 경위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 △행방불명자의 규모 및 소재 △계엄군 등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 등 사건 12건을 직권 조사하고 있다. 이 중 하나가 탈북자의 ‘북한 특수군 광주 침투 주장’이다.

위원회는 “북한 특수군의 광주 침투 주장은 2015~2016년을 기점으로 유튜브를 통해 확산됐고 2017년에는 이때까지 제기된 탈북자들의 주장을 기반으로 한 저서가 출간되는 등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며 “위 탈북자들의 주장을 조사해 그 진위를 밝히고 의혹을 해소해 향후 이와 관련한 국민적 논란 및 갈등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조사 개시를 결정한 이유를 밝혔다.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는 인물 중 한 명이 탈북작가 이주성씨다. 앞서 이씨는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하여 계엄군과 교전을 벌이고 북한으로 귀환했다는 인물의 체험담을 2017년 저서 ‘보랏빛 호수’에 기술했다.

북한 특수군이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쯤 평양 대양리에서 트럭을 타고 같은 날 오후 9시쯤 황해남도 장연군에 도착해 배 2척을 탄 다음 1980년 5월 22일 오전 2시쯤 전남 영광해안에 도착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 책은 또 북한 특수군이 영광해안에 도착해 5시간 넘게 행군하여 광주에 도착했고, 광주 동구 무등산에 있는 사찰인 증심사에 가서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 오후 3시쯤 출발했다고 적었다.

이씨는 이 책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에 특수부대 파견을 요청했다고도 주장하여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6월 1심 재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1월 항소심 재판부도 유죄가 인정된다며 이씨의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위원회는 국립해양조사원과 육·해군의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여 당시 영광해안의 간만의 차, 우리 군 작전 상황과 군 경비태세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이씨 저서의 주장이 ‘현실성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냈다.

위원회는 먼저 북한 특수군이 영광해안에 상륙한 후 육로로 이동했다는 주장에 대해 “증심사는 영광해안에서 동쪽으로 약 60㎞(이하 직선거리 기준), 옛 전남도청에서 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처럼 영광해안에서 증심사까지 약 60㎞의 거리를 탈북자의 주장처럼 ‘광주 시가지를 우회하여’ 도보로 5시간 이내에 이동하기에는 거리 및 위치상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어 “증심사에 대한 실지 조사 결과 현장은 비교적 밀집된 건물 배치로 모든 전각이 한눈에 들어오며 경내 어디서든지 소리가 잘 들릴 수 있는 구조임을 확인했다”면서 “증심사의 지리적 위치 및 구조적 특성으로 보아 북한 특수군이 노출되지 않고 증심사에서 체류 및 식사를 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또 ‘5·18 당시 남파 후 전사하여 복귀하지 못한 북한군의 묘지가 북한 청진시에 있다’는 일부 탈북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 군 및 북한 자료 등을 확인한 결과 이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인원들의 묘지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5·18 당시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와 같이 일부 탈북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북한군 개입설은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거나 역사적·전술적인 타당성이 없는 무리한 주장인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과제인 국내 일부 인사들에 의한 북한군 개입설 주장 및 확산에 대한 조사를 이어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9년 12월 27일 출범하여 지난해 5월 11일부터 조사 활동을 개시한 위원회는 지난해 12월까지 12건의 직권 조사 결정 사건 외에 58건의 신청사건을 접수해 이 중 20건에 대해 조사를 결정했다(나머지는 각하 또는 조사 개시 여부를 검토 중). 또 지난해 12월까지 총 251건의 제보를 접수했는데 ‘기타’(115건)로 분류한 제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유형의 제보는 ‘암매장’과 관련한 제보(50건)였다.

위원회가 국회, 국방부, 국가정보원, 대검찰청 등 유관기관들로부터 제출받아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8591건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