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밀린 마음의 양식을 채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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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책읽읍시다]1.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설 연휴 추천도서]

머니투데이

◆강형철 시집, '환생'(실천문학사)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모성과 자기 인생 사이의 긴장 관계에 시달린다. 모성이 인간이라면 타고나는 성질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 후천적으로 형성된다는 논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가운데 모성을 다룬 책들은 모성의 숭고함과 어머니의 삭막한 일생을 놓고 갈등한다. 그러면서 일을 위해 출산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여유도 없이 한바탕 전쟁을 치른 우리 어머니들은 어떤가? 55년생인 강형철 시인의 '환생' 은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오락가락하는 노모(老母)를 향한 사모곡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어머니는 갑자기 밥을 하신다. 표제적인 '환생'의 전문을 읽어보자.

옛 기억이 되살아나시는지 밥 안치는 일을 자청하신다

손목 아래로 빚어지는 정겨운 리듬

썩썩 써스럭, 써-억 써억 썩

바가지가 요란해진다

쏟아지는 수돗물이 시원타며 손등이 웃고

어둑한 집 안의 오후가 환해진다

어머니 일흔아홉이니

쌀 씻어 밥 안치는 일은 칠십 년은 됐으리라

짚풀은 부지깽이로 아궁이에 넣어 지피고

한참 후엔 전기밥통에 쌀 씻어 안쳤으리라

식구들의 사발에 깨끼밥도 푸고

때로 고봉밥 꾹꾹 눌러 펐으리라

떨어지는 밥알은 손으로 주워드시면서

"엄니, 다시 시집가도 되겠네, 쌀 씻는 소리 들응께"

"야 좀 봐라, 못 허는 소리가 없네, 떼-엑!"

"평생 장남 일에 안 된다는 말 한 번 안 하신 어머니/ 내가 교회고 절이라고 하셨던 어머니 / 공부해야 한다는 말엔 그 어떤 것도 방해가 돼선 안 된다고 믿는 어머니"를 "저녁밥을 천천히 대화하며 나누어 먹고/ 일회용 팬티 바꾸어드린" 다음 침대에다 안아 눕혀드리고서는 아들이 '공부해야 돼요'라는 말을 하니 그대로 잠이 드신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게 '수면제'가 따로 필요 없다.

'앞으로 5년 결정적 미래'(머니투데이 특별취재팀 엮음, 비즈니스북스)는 우리 사회의 급변할 미래 5년의 한 가운데에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들의 결혼과 출산 연령이 늦어져 육아와 간병이 동시에 진행되는 바람에 '간병대란'이 예상되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아들의 일상이 감동적인 이 시집을 읽으며 설에 가족의 의미를 새삼 깨달아보시길.

◆신현락, '고맙습니다, 아버지' (지식의숲)

초등학교 교사인 저자는 아버지가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자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었다고 말한다. 시대에 대한 절망과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눈이 멀었을 때는 윤리적 감각을 일깨워주고 생에 대한 의지를 북돋워 주었다. 힘들 때마다 내밀어주던 아버지의 등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젖줄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등은 사라지고 없다.

"내가 기댈 아버지의 육체적인 등은 이제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낙원인 에덴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나는 아버지의 영혼의 등을 믿는다. 아버지의 등이야말로 사랑이 가득한 나의 최초이자 최후의 고향이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살이에 힘들고 지칠 때 아버지의 영혼의 등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아버지는 가고 이제는 내가 등이 되어 줄 자식이 내 등 뒤에 있다. 한때는 '자식들이 혹시 아버지의 등짐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자식을 업으면서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해가 갈수록 무거워지는 자식을 업을 때마다 내 마음은 점점 든든해져 갔다. 자식은 짐이 아니라 힘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가 되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힘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자신보다 더 큰 자식을 업고 병원을 향해 뛸 마음을 낼 수 없다."

아버지를 둔 사람은 모두가 복 받은 자식이다. 지금 은퇴를 앞둔 아버지들은 20대 자식의 힘겨움에 안타까워한다. 20대는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가 태반이며 나머지의 대부분도 비정규직이거나 임시직이다. 잘못 하다가는 부자가 함께 망할 위기에 봉착했다. 그럴수록 아들이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리며 또는 아버지가 아들의 등을 밀어주며 묵묵한 정을 나누다보면 험난한 세상을 이겨낼 힘이 샘솟을 것이다. 저자는 "인생에서 한 번쯤은 간절하게 아버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찾아온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라고 말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설흔, '우정 지속의 법칙'(창비)

인간은 누구든지 일생에 가족, 로맨스, 버디 영화 등 세 편의 영화를 찍는다고 말한다. 그 중에 가 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가치판단은 다르겠지만 나는 '버디 영화'라고 본다. 나는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친구'를 얻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이라는 말을 해왔다. '우정 지속의 법칙'은 언뜻 보아서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관계'인 우정을 지속하기 위한 11가지 법칙을 제시하는 매뉴얼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4중 구조로 잘 짜인 소설처럼 읽힌다. 자살한 친구, 친구처럼 지내는 조카, 옛 사람들의 일화와 고전 속에 등장하는 인물, '어바웃 어 보이'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등의 영화 속 주인공 등 네 유형이 보여주는 우정이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완벽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작가여서인지 4중 구조가 잘 조화를 이루는 바람에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가 '우정'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저자는 중학교 3학년 시절에 "인생은 시합 아니겠어? 나랑 농구나 한번 할까?"하고 말하는 단짝 친구의 요구를 학원에 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친구와는 다시는 농구를 할 수 없었다. 그 친구가 곧바로 자살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자살한 친구는 자퇴의사를 밝혔다가 선생님에게 매질을 여러 차례 당했다. 끔찍한 공포와 가슴 아픈 연민을 느꼈지만 친구를 위로한 적도 없고, 도대체 왜 학교를 그만두려 하는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이 책은 그 친구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회한을 가진 저자가 친구와의 일화를 매개로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를 밝혀나간다. 사소한 일로 조카와 다투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대목에서는 가족끼리도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책 속에는 우정을 다룬 선인들의 좋은 글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다음은 책벌레(간서치) 이덕무의 글이다.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친구를 얻으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십 년 동안 뽕나무를 심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누에를 길러 내 손으로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열흘에 한 가지 빛깔씩 물들이면 오십 일에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으리라.

그 오색실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린다.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으로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한다.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는 옛 느낌이 나는 옥을 달아 축을 만든다. 뾰족하고 험준한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 사이에 펼쳐 놓고 말없이 바라본다. 해가 지면 다시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채한수, ‘천천히 걸으며 제자백가를 만나다’(김영사)

◆시마자키 스스무, ‘단숨에 읽는 사기’(창해)

제나라 환공을 필두로 이어지는 춘추오패, 그 후 전개된 전국칠웅의 끝없는 전쟁과 혼란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장장 550년간 이지어는 춘추전국시대는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로 수많은 '꽃'(아이디어)이 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 자는 제왕에게 가서 유세 한 번으로 재상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거나 개의 흉내를 잘 내는 재주’(계명구도, 鷄鳴狗盜)라도 갖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당시의 식객이 요즘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박사급 학자라 보면 어떨까? 지금도 자신만의 '꽃'이 있는 사람은 포트폴리오나 오디션 하나로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유교와 도교가 탄생했다.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에서는 유일신교, 그리스에서는 철학적 합리주의가 등장했다. 그래서 카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축의 시대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폭력마저 정당화되던 시대다.

'천천히 걸으며 제자백가를 만나다'는 장자, 열자, 한비자, 전국책, 여씨춘추, 논어, 묵자, 맹자, 회남자, 안자춘추 등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황금기를 이뤘던 제자백가를 잘 요약해 들려주고 있다. 644쪽의 책 한 권으로 동양사상의 정수를 모두 맛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과 문화는 사마천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가 궁형의 치욕을 이겨내며 피로 쓴 '사기'는 '인류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보물창고'로 '인간의 희로애락, 생존을 위한 권모술수, 끝까지 명예를 지키려는 사람의 자세' 등 인간의 모든 면이 묘사되어 있다. '단숨에 읽는 사기'는 '사기'를 완전히 해체해 은과 주의 시대,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의 시황제 시대, 항우와 유방의 시대, 문제와 경제의 시대, 무제의 시대 등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사기'의 원문을 정말 교묘하게 편집해 7개의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있어 원문 자체가 주는 감동을 누리면서 춘추전국 시대의 인물들이 뿜어내는 촌철살인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강창래, ‘책의 정신’(알마)

10세기 페르시아의 총리였던 압둘 카셈 이스마엘은 여행을 할 때마다 11만 7000권에 달하는 책들과 멀리 떨어지기 싫어서 400마리나 되는 낙타들에게 알파벳 순서로 걷도록 특별 훈련을 시켜서 책을 몽땅 싣고 다녔다. 낙타들은 제목 순서대로 정해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고, 덕분에 그는 여행 중 쉽게 책을 찾아 읽었다. 매우 효율적인 '이동도서관'이었던 것이다. 번역가 심혜경은 강창래의 '책의 정신'을 11만 7000권의 책과 400마리의 낙타에 비견한다. 이 책 한 권으로 '드넓은 책 세상을 한눈에 조망해볼 수' 있다.

이 책은 메타북이다. 메타북은 '책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책에 담긴 내용인 생각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다룬다. 프랑스 서적 사가인 로제 샤르티에 등이 편저한 '읽는다는 것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등이 대표적인 메타북이다. 그러니까 '책의 정신'은 저자의 단순한 독서편력기가 아니라 책을 제대로 읽어보려고 나서는 이들이 좋은 책을 고를 수 있게 안내하는 길잡이 책이다.

저자는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논문이자 프랑스대혁명의 성서라고 할 수 있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거의 읽히지 않았지만 그가 쓴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는 40년 동안 무려 115쇄를 찍었다는 사실을 들며 '포르노소설이 프랑스대혁명을 일으켰다'는 가설을 이끌어낸다.

이 책을 미리 읽어본 나는 다음의 추천사를 썼다. "한 권의 책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혁명을 꿈꾸게 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자살을 시도하게 만드는 책도 있다.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안겨주는 책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깊고 오묘한 뜻을 알게 되는 책도 있다. 책에 대한 전복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책의 정신'은 읽는 내내 정말 유쾌했다. 우리도 이만한 서적사가를 두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소장 ash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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