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 조광래 “대표팀 선수 선발, 외압 있었다”


"작금의 상황은 한국축구의 위기가 아니다. 대한축구협회의 위기일 뿐이다. 이제 축구협회도 합리적인 조직으로 변해야 한다."

최근 사령탑에서 물러난 조광래(57)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에 쓴 충고를 던졌다. 후임자로 지휘봉을 잡은 최강희 감독에게 조언을 던지기 위해서다. 26일 서울 강남의 모 호텔에서 취재진과 만난 조 감독은 "축구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축구협회가 지도자에 대해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줘야 한다"면서

"내가 지휘봉을 잡고 있던 기간 중 축구협회 고위층으로부터 특정 선수를 뽑아달라는 외압을 받았다. 전임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고 들었다. 국내파 지도자들이 선임될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누가 소신 있게 대표팀을 이끌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조 감독은 "협회 고위층의 요구를 거부한 이후 대표팀 운영과 관련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조별리그 상대인 레바논과 쿠웨이트에 대한 전력 분석 요청을 거절당했고, 중동 원정 2연전을 앞두고 선수 엔트리를 1~2명 늘리는 방안도 결국 무산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해당 선수의 컨디션을 분석했지만, 대표팀에 선발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축구협회와의 관계를 위해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지도자로서의 양심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해임된 코칭스태프의 잔여 연봉 지급을 거부한 점을 보더라도 축구협회의 일처리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언급한 그는 "감독을 경질하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한국축구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면, 축구협회를 이끌고 있는 선배들이 젊고 유능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결단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광래 감독은 "새로 부임한 최강희 감독이 중심을 제대로 잡고 대표팀을 이끌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음 속에 묻어두려던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고 밝히면서 "여전히 혼란스럽고 마음이 아프지만, 축구를 너무 사랑하기에 용기를 냈다"고 이번 발언의 취지를 설명했다.

다음은 조광래 감독이 언급한 내용 전문.

요즘 정신이 혼란스러워 후임 감독인 최강희 감독에게 축하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뒤늦게나마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뿌린 씨앗을 거두지 못해 아쉽다. 그 점을 최 감독이 떠안게 돼 미안하게 생각한다. 최 감독은 평소 아끼는 후배다. 장점이 많은 지도자다. 대표팀 감독도 충분히 잘 해낼 자질을 갖추고 있다. 나는 중도에 하차했지만 최 감독은 성공한 대표팀 감독이 될 수 있도록 기원하겠다.

뚝심 있는 후배라 잘 해낼 것으로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회 수뇌부가 전폭적인 힘을 실어줘야 한다.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대표팀 감독이 외부의 바람에 흔들린다면 더 이상 미래는 없다. 최 감독도 외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부끄러운 한국 축구의 자화상이지만, 외압은 존재했다.

세 명의 협회 수뇌부가 한 선수의 대표팀 발탁을 요청했다. 선수 이름은 밝힐 수 없다. 선수 선발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지만 거리가 멀었다. 상부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 또한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선수에게 눈길을 주고 코치들과 논의도 했다.

소속팀 감독과도 상의해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나 모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아직은 아니다'였다. 대표팀에 발탁하기엔 컨디션이 떨어져 있다는 평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외압과 타협할 순 없었다. 그냥 눈 딱 감고 한 명 정도 뽑아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누구나 추천은 할 수 있지만, 면밀한 평가에 이은 최종 결정은 감독의 몫이어야 한다. 원칙과 소신이 한 번 무너지면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명이 두 명, 세 명이 될 수 있다. 대표선수 선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컨디션과 경기력, 전술 이해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후 코치들과 토의해 최대공약수를 도출해낸다.

기술교육국장을 겸직하고 있는 황보관 기술위원장도 잘 알고 있는 문제다. 그 선수를 추천할 때 옆에 있었다. 그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선수를 뽑지 않은 후 축구협회의 시선이 더 차가웠다. 이후에는 협조도 잘 되지 않았다.

지난달 아랍에미리트와 레바논 원정에 앞서 기술위원회에 3차예선 최종전 상대인 레바논과 쿠웨이트의 경기 분석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들며 난색을 표명했다.

당시는 당장 아랍에미리트전 준비가 급한 상황이었고, 시간도 촉박해서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예선전 일정을 보면 레바논과 쿠에이트의 전력 분석은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또 중동 원정 2연전에 경고 누적과 부상에 대비해 25명의 선수로 원정단을 꾸릴 계획을 짰다. 변수가 많아 23명에서 두 명을 늘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협회에서 거부해 그 계획은 무산됐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기성용이 장염으로 합류하지 못했다. 박주영은 아랍에미리트전에서 옐로카드를 한 장 더 받아 경고누적으로 레바논전을 뛰지 못했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코치진의 잔여 연봉 문제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계약기간이 존재했고, 파기한 것은 축구협회다.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한 쪽에 책임이 많다. 코칭스태프나 선수가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할 경우 재취업 여부와 상관 없이 전 소속팀이 잔여 계약기간에 대해 연봉을 지급하는 것이 계약의 필요성이다.

가마 코치는 외국인이라 차별을 받고 있다. 박태하, 서정원 코치는 새로운 팀이 생겨 잔여연봉을 지급받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계약기간을 파기한 축구협회가 책임을 지고 새 직장을 알선해 준 것도 아니다.

박태하, 서정원 코치는 능력이 출중해 곧바로 새로운 길을 찾았다. 잔여 연봉을 문제 삼는 것은 신의의 문제다. 감독을 버린 후 아무 죄 없는 코치들까지 짓밟는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진다.

특히 박태하 코치가 잔여 연봉을 해결하기 위해 김진국 전무와 면담했을 때 나의 퇴임 기자회견에 코치진이 참석한 부분에 대해 상당히 불쾌하다며 왜 참석했느냐고 따져 물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본다면 지금의 연봉 문제는 결국 코치들에게 괘씸죄를 적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안타깝다.

축구협회 선배님들께는 미안하지만, 감독을 경질하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제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 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내 마음은 무척 혼란스럽다. 지금의 심정으로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바친 나의 열정이 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축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할 지 결정을 하지 못하겠다.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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