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스크랩] 강택민시대 중국외교의 난제 | 나의 관심정보 메모 삭제 2006/07/22 13:28
찬란한신(styun21) http://memolog.blog.naver.com/styun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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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택민시대 중국외교의 난제


류 동 원*

Ⅰ. 서 언

1949년 신중국 건립이후 중국외교정책은 국제 및 국내환경 변화의 영향을 받아 서너 차례의 중대변화와 조정을 겪어왔으며, 이러한 조정은 크게 두 단계로 대별할 수 있다. 제1단계는 1949년부터 1982년까지로 사회주의 혁명과 그 건설을 주요 임무로 하고, 국제주의와 애국주의의 결합과 국제통일전선이라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외교정책을 제정하였다. 이를 보다 세분하면 다시 3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楊公素 1997: 15-18). 제1시기(1949-1963)는 대소일변도정책의 수행시기로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연합하여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세력들의 전쟁과 침략정책을 반대하는 국제통일전선 구축을 주임무로 하였다. 제2시기(1964-1972)는 反제국주의, 反수정주의정책의 수행시기로 제2세계와 제3세계의 연합을 통해 美제국주의와 소련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국제통일전선의 형성을 주임무로 하였다. 제3시기(1972-1982)는 反패권주의정책의 수행시기로 미국과 연합하여 소련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국제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제2단계는 1982년부터 현재까지로 국제환경의 변화(동서간의 긴장완화, 중미국교 수립)와 국내환경의 변화(경제건설의 필요)에 따라 중국은 1982년 중국 공산당 12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그 외교정책을 대폭 조정하여 자주독립의 평화외교정책을 주창하였다. 자주독립의 평화외교정책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주임무로 하고 反패권주의, 제3세계 국가와의 유대강화, 평화공존5원칙 그리고 대외개방정책을 그 근본 특징으로 하고 있다.
1982년을 기점으로 한 중국외교정책의 제1, 2단계 구분은 국내환경 및 국제환경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중국지도부의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에 기인한다. 즉 1982년을 전후하여 중국 국가의 중심 난제가 계급투쟁에서 국내경제건설로 전환하였고 그에 따라 국내경제건설을 위한 평화적 국제환경 조성을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중국의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도 근본적 변화를 가져 왔다. 중국은 1982년 이전의 국제정세를 전쟁과 혁명의 시대로 파악하였으며, 1982년 이후 미소 양 강대국의 힘의 균형, 그로 인한 세계대전 가능성의 감소 그리고 기타 대부분 국가들의 평화에 대한 여망 등을 근거로 국제정세를 평화와 발전의 시대로 판단하였다. 요컨데 1982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중국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국내경제건설에 유리한 평화적 국제환경 조성이라는 큰 틀 속에서 운용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해체와 동구의 붕괴에 의한 사회주의 세력의 약화와 1989년 천안문사건의 발발과 이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대중국 제재조치로 인해, 갓 태동한 강택민(江澤民) 지도체제는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하게되고 그에 따라 평화적 국제환경 조성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 외교정책을 수정, 보완하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먼저 강택민시대 중국외교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중국외교의 난제인 '중국위협론의 대두', '남중국해영토분쟁', '대만문제', '중·미관계의 안정적 발전'과 그에 대한 중국의 대응전략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강택민시대 중국외교정책의 변화

전술한 바와 같이 1980년대 등소평(鄧小平)의 실용주의노선의 등장이후 경제건설은 중국의 제일 당면과제로 등장하면서 외교정책의 추진도 경제건설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외교정책도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국가안보가 최소한도 보장되는 상황이라면 적극적으로 경제건설을 위한 대외 협력적 자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공산권의 붕괴는 중국외교정책의 수행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경제건설을 제1의 국가목표로 하는 내부적 환경은 그대로인 반면, 대외적 환경은 그 이전의 국제질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신 국제질서, 즉 탈냉전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천안문사건 발발이후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제재조치를 받게 되면서 경제발전을 위한 개혁·개방정책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구 소련이 붕괴된 후, 공산주의의 유일한 거대국으로 남은 중국은 점차 서방세력의 자국내 영향력에 대한 불안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즉 중국지도자들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의 자본주의 전파는 중국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환경과 내부적인 체제위기로 인해 천안문사태 직후에 등장한 강택민 지도체제는 사회주의 체제유지와 경제건설을 모두 달성해야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천안문사태 이후 책임을 지고 물러난 조자양(趙紫陽)에 이어 상해시 당서기에서 일약 중국공산당 당서기에 발탁된 강택민은 중앙무대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였고, 군부로부터도 확고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등소평 사후 중국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등 강택민 체제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등소평의 용의주도한 지원과 강택민의 지도하에 이룩한 중국경제의 놀라운 경제적 성취로 그의 지도력은 당내외에서 충분히 인정받았다. 즉 1992년 이후 등소평이 '남순강화'를 통해 경제건설을 국가의 제1목표로 재차 강조하였고, 서방의 대중국 제재조치 역시 점차 완화되면서 대내외적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중국 지도부는 '국내경제건설에 유리한 평화적 국제환경의 조성'을 중국외교정책목표의 최우선 과제로 재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강택민 지도부는 대미, 대일 경제적 협력관계의 강화라는 기존의 노선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관계의 다변화를 추구하는 '전방위 외교'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주변국들과의 선린우호 관계발전', '제3세계와의 협력강화', '서방선진국과의 우호 및 경제관계의 발전', 'UN외교의 강화' 그리고 '국제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이며, 특히 '주변국과의 선린우호 관계발전'이 중점 강조되었다(Chen 1993: 241-242)
'주변국들과의 관계발전'은 중국의 정치, 경제, 안보이익에 직접 영향을 미치므로 강택민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첫째, 정치와 안보 면에서 '주변국들과의 선린우호 관계발전'은 2만km에 이르는 국경선을 15개국과 접경하고 있는 중국에 경제건설에 필요한 안정적 주변환경을 제공한다. 중국은 199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 월남 그리고 한국과 정식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등과 협상을 통해 국경선 문제를 매듭지음으로써 국경지대의 안정을 가져왔다. 특히 1992년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국내경제건설에 필수적인 한반도에서의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였고, 한국과의 경제협력 확대를 통한교역다변화로 미국의 경제제재조치에 대처하면서 일본의 대중국 투자와 기술이전을 촉진하고자 하였다. 둘째, 경제방면에서 1990년대 초반 중국대외무역총액이 이미 국민총생산액의 약 1/3을 차지하고 그중 2/3는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진행된 것이다. 중국의 3대 무역 교역국과 투자국인 미국, 일본, 홍콩이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경제건설은 아·태지역 국가들과의 경제협력 강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990년대 중반이후 중국외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1997년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이후 '15전대회')와 홍콩귀속을 계기로 보다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15전대회'에서의 지도체제개편 결과 지도체제의 주체가 과거 '혁명·전쟁형'의 제1,2세대에서 '기술·관료형'의 제3세대로 완전 이전함으로써 강택민의 정치적 위상이 공고화되었고, 이에 따라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해갈 수 있는 국내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15전대회'에 제시된 '정치보고'에서 강택민은 먼저 국가목표의 최우선순위가 '경제발전'임을 재확인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위한 '유리한 국제환경조성' 즉, '경제외교'의 강화를 대외정책목표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정치보고'에서는 현 국제정세가 다극화로 발전되고 있으며, '패권주의'와 '강권정치'가 국제질서의 불안정 요소로 상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방안으로서 반패권주의(反覇權主義)의 '다극화외교(多極化外交)'를 제기하고 있다. 중국의 다극화 외교는 1996년 4월 '미일신안보공동선언' 이후 중국이 집중적으로 제기한 것으로, 세계질서가 특정 강대국에 의해 독단적으로 주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패권주의와 강권정치는 냉전시대의 유물로서 탈냉전시기 세계평화와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세계질서가 다극화로 변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NATO의 동유럽확대나 미일안보체제의 강화 등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탈냉전기 국제질서의 형성과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신국제질서가 미국에 의해 주도될 경우 대만문제를 포함한 중국내정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 더욱 강화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결국 다극화외교는 중국이 세계질서가 미국 등 특정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제기된 것으로, 그 구체적 방안으로 '강대국외교'의 강화와 '주변국과의 선린우호외교' 등을 들 수 있다.
'강대국외교'의 일환으로 중국 지도부는 정상외교를 강화하여, 1997년 엘친 대통령의 중국방문과 증·러정상회담(11.10), 이붕 당시 중국총리의 일본방문과 중·일정상회담(11.11)을 가졌다. 그리고 1998년에는 블레어 영국총리와 조스팽 프랑스 총리의 중국방문(10월), 강택민주석의 러시아 및 일본방문(11월) 등에 따른 중국과 이들 강대국들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각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중국은 미일신안보조약이 체결된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1997년 4월과 1999년 8월 두 차례의 중·러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 단극체제 탈피를 위한 다국적 국제질서의 확립과 중국과 '전략적 협력의 동반자' 관계를 구축, 확대하여 미·일 군사동맹의 강화에 공동대응하기로 합의하였다(동아일보 1999/8/26).
이와 동시에 주변국가와의 관계개선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특정국가(미국 혹은 일본)의 패권을 방지하려 한다. 중국은 역내 국가들과의 관계 중진에 심혈을 기울여 왔을 뿐만 아니라 역내 주요 분쟁지역인 한반도, 캄보디아, 인도와 파키스탄 문제해결을 위해 과거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양자관계의 발전과 동시에 '아세안 지역 포럼'(ARF)과 '동북아 협력대화' 등 지역안보대화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요컨데 강택민의 집권 초기인 19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중국외교는 1989년 천안문사태로 인한 외교적 고립을 뚫는데 주안점을 둔 수세적·피동적 성격을 띠었다면, 1997년 이후 '다극화외교'의 강화는 세계 지도국으로서 적극적으로 세계문제에 관여하겠다는 적극적·공세적인 자세를 담고 있다. 1997년 9월 '15전대회' 이후 중국의 일관된 외교노선은 한마디로 '다극화 속의 경제실리외교'로 정리할 수 있다. 중국이 최근 자신있게 독자적인 적극외교를 하는 배경에는 아시아 통화위기로 촉발된 세계경제위기 속에서 주변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데다, 위안화 가치 고수정책으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점이 자리한다. 외교분석가들은 중국지도부의 이런 전략을“다음 세기에 정치 경제적으로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원대한 뜻”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실리외교전략'의 성공여부는 현재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외교적 난제인 '중국위협론의 대두', '대만문제', '남중국해영토분쟁', 그리고 '중·미 관계의 안정적 발전' 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있다.


Ⅲ. 중국위협론의 대두

'중국위협론'이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이를 토대로 한 군사력 강화가 주변국가와 지역질서에 위협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위협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이 냉전 종식 후에도 국방비를 증가시키고 또 러시아로부터 첨단무기를 구입하는 등 군현대화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구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영향력 감소로 초래된 힘의 공백을 메움으로써 이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중국의 팽창정책은 주변국가들과 지역질서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중국위협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1992년 9월 {타임}지 아시아 지국장을 역임한 먼로(Ross H. Munro)는 "잠에서 깨어난 용- 아시아의 진정한 위협은 중국에서"라는 글에서 중국이 깨어나면 전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라는 서방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중국은 개혁, 개방 이후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팽창하기 시작하여 아시아 및 세계질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 및 군사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Munro 1992: 10-17). 그리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 역시 1992년 말 중국에 관한 특집기사에서 '중국위협론'을 주창하였다. 그 후 서방에서는 중국의 성장을 경계하는 글들이 수 없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뉴욕타임즈}지 북경 특파원을 지낸 크리스토퍼(Nicholas Kristof)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군사예산 증가속도가 세계최고로서 중국이 이러한 추세로 계속 발전한다면 그 국력이 2020년경에는 미국을 따라잡게 되어 미국이 중국의 확장을 봉쇄할 수 없다고 밝혔다(Kristof 1993: 59).
이들은 '중국위협론'의 근거로 중국의 경제력과 국방력의 급속한 증대를 들고 있다. 먼저 중국의 경제력 증대를 살펴보면,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l979년 이후 현재까지 약20년 동안 연평균 9%를 넘는 경제성장을 지속하여, 매8년마다 자신의 GDP를 2배로 증대시켜오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의 GNP 규모는 1995년에 이미 1978년의 4배에 달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서방의 많은 전문기관들은 21세기 초 중국이 일본을 추월하여 미국과 비견되는 경제규모를 가진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도 역시 연평균 8∼10%의 평균성장률을 보일 경우 중국경제는 2010년에 일본을, 2030년에는 미국을 추월해 세계최대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서를 최근 발표했다. 또 2050년에는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3백83조 달러에 달해 미국의 2배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1997년 52차 연차총회에서 발표된 <세계경제전망>보고서에서 중국이 인플레를 잡으면서 고도경제성장을 지속한다면 앞으로 15년 내에 세계경제의 20%를 점유,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에 미국과 EU는 2005년에 각각 세계 경제의 16%를 차지, 경제규모 면에서 서서히 중국에 뒤질 것이라고 IMF는 예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또한 2020년까지의 세계경제 전망보고서에서 2020년 중국이 세계 제1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했다고 전했다(동아일보 1997/8/21, 1997/9/18).
상기의 분석은 중국의 경제대국화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토대로 미래형의 중국위협론을 전개하고 있는 반면, 새로운 경제력 평가방법의 채택에 따르면 현재 이미 혹은 가까운 장래에 중국은 경제대국으로 지역경제 질서와 주변국가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즉 통상적인 평가방법에 따르면 중국은 거듭된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l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낙후된 국가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법인 공식 환율에 의한 중국경제력의 평가는 중국경제의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서방세계에서는 구매력 지수(purchasing power parity)에 근거하여 중국경제를 평가하는 방법이 유행하게 되었다. 실제의 구매력을 근거로 경제규모를 환산하는 이 새로운 평가법은 일순간에 중국을 규모 면에서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만들었다.
미국 중앙정보부의 의회 보고자료에서는 중국이 2020년 구매력 평가기준 국민총생산이 20조40억 달러로 전세계의 20%를 차지해, 미국(11%)과 일본(5%)을 앞지를 것으로 예측했다. 세계은행도 2002년 중화경제권 국민총생산 규모가 구매력 평가기준 9조8천억 달러로 미국과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와튼계량경제연구소(WEFA)는 중국(홍콩 포함)의 교역규모가 2001년 1조 달러에 이르러 미·일에 이은 세계 3대 교역대국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측했으며, 일본 경제 기획청도 2010년 세계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10%(96년 2.9%)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한겨레신문 1999/5/6).
두 번째 요인은 군사력의 증대를 들 수 있다. 중국은 최근 들어 급속한 경제성장을 계속하면서 이를 토대로 국방비를 급격히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무기의 자체개발 및 러시아로부터의 구입을 통해 국방현대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중국위협론을 초래했다. 중국의 국방비는 냉전적 양극대결 분위기가 이완되기 시작한 l980년대 말부터 급격히 증대되어 왔다. 구체적으로 1989년 l2.6%를 시작으로 1990년대 초반 평균 13%, 그리고 1995년에는 21.5%의 최고치를 기록한 후 1998년 12.8%를 기록하여(한겨레신문 1999/3/1) 지난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두 자리 수의 증가율을 기록해왔다.
그런데 중국이 실제로 군사목적에 지출하고 있는 액수는 공식 발표한 국방비를 훨씬 상회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 연구개발비는 과학·기술비에 포함되며, 무기수출에서 얻는 외화는 군수산업의 재투자에 직접 충당됨으로써 군의 현대화 경비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여기에다 공식적인 국방비를 훨씬 상회하는 규모의 숨겨진 국방비를 더하면 중국의 국방비는 이미 엄청난 규모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처럼 중국이 국방비를 계속해서 증대시키는 것은 새로운 군사강국이 되려는 야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중국이 향상된 경제력을 군사력 확장에 이용함으로써 강대국의 지위를 추구하려 한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국방비 증가와 함께 중국은 최근 신무기의 자체개발을 통해 독자적인 방위체계 구축에 힘쓰는 한편 러시아와의 적극적인 군사교류를 통해 군사현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중국위협론의 근거로 지적된다. 1999년 10월 1일 중국 건국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인 군사퍼레이드에서 선보인 첨단 무기와 장비로는 130여대에 이르는 중국산 전투기와 전폭기, 공중급유기와 사정거리 8천km인 미사일 동풍-31, 440대의 전차와 장갑차등이며 이중 95%이상은 종전에 공개되지 않던 무기들로 전해졌다. 또 러시아제 수호이 27전투기와 C3000 지대공 미사일을 제외하면 모두 중국 자체에서 제작된 병기들로 알려졌다(중앙일보 1999/10/2). 이로써 중국은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자체 개발한 무기로서 독자적인 방위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같은 야심은 1999년 11월 쏘아 올린 무인우주선에서도 드러났다.
한편,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개선된 이후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적지 않은 양의 무기를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l992년 이래 러시아로부터 약 70여대의 수호이 전투기를 구입하였고 1996년에는 200여대의 수호이 전투기 제작을 위한 라이센스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1999년 12월 중·러 비공식정상회담에서는 러시아의 무기판매를 핵심안건으로 논의했으며, 러시아는 10억 달러 상당의 수호이 전투기를 중국에 판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외에도 중국은 S-300 방공미사일, 킬로(Kilo)급 잠수함, n-76 수송기, T80 탱크 둥을 이미 구입했거나 구입을 위한 협상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중국의 군사력 증강노력은 동아시아 지역의 군비경쟁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즉, 중국의 군사력 증강은 주변국가들로 하여금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국방력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의식을 증대시킴으로써 역내의 군비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서방의 전문가들은 중국의 군사 현대화 노력이 공군력과 해군력을 증강하는데 집중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과연 중국 국력의 급속한 증대가 주변질서에 위협이 되는가, 혹은 될 것인가? 이에 대한 학자들 간의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울러 현실적으로도 중국의 등장이 갖는 의미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다는 주장들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중국정부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적 위협이 지나치게 과대하게 평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령, 이들은 중국경제에 대한 IMF나 세계은행 등 서방 전문기관들의 평가에 커다란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아울러 이들은 중국의 군사력이 비록 지난 수 년 동안 계속해서 증대해왔다고 하지만 아직 주변국가나 지역질서에 위협이 될 수준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군사정책에 있어서도 중국이, 비록 대만문제나 남사군도(南沙群島)문제 등과 관련하여 무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팽창적이고 공격적인 군사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 또한 아직은 찾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반론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중국위협론이 객관적 평가에 근거하고 있기보다는 일부국가의 우려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웨인(Swaine)은 1997년 5월 18일 {와싱톤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 악마 만들기가 근거 없는 신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신랄히 비난하였다. 최근 중국이 대만에 취한 위협 행위를 근거로 아시아 전체를 위협한다는 가설, 중국군사비를 8백 억에서 1천5백억 달러로 추정하는 가설 그리고 중국이 보유한 현대첨단무기 수준은 이미 아시아 각국의 균형수준을 넘었고 이들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다는 가설은 홍콩이나 대만의 언론들이 과장보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데서 오는 근거 없는 신화이다. 실제 중국의 최신병기 구입은 대만의 최신무기 구입에 버금가는 것에 불과하고 일본의 순양함, 한국의 최신 독일 설계 6척의 잠수함, 말레이지아 및 인도네시아 등의 병기 구입을 고려할 때 결코 위협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Swaine 1997).
물론 이러한 중국위협론에 대하여 중국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에 반박하기 위해 다양한 대응논리를 준비하고 있다. 먼저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대한 서방측의 평가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서방국가들의 중국위협론 제기는 주로 중국의 성장이 지역질서, 주로 동남아지역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이후 서방국가들이 중국위협론을 주창할 때에는 자신들이 중국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다. 중국위협론은 냉전종식이후 중국의 전략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함으로써 미국이 아시아지역에서 자신의 잠재적 위협대상인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파악한다(席來旺 1996: 271-279).
그리고 이를 불식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7년 9월 '15전대회'에서 확정된 군현대화 계획에서 강택민 주석은 2000년까지 50만 명의 병력감축계획을 발표한 것도 '중국위협론'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또한 해군력 개발이 방공능력개발보다 우선 순위를 뒤지게 함으로써 중국의 해군력 개발이 지역세력균형 유지에 미치게 될 부정적인 영향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2000년 10월 '국방백서'를 발표, 중국은 '방어적 국방정책'을 추구하며 패권주의를 결코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면서, 2000년 중국의 국방예산은 같은 기간 미국의 5%, 일본의 30%, 영국의 40%에 불과하고, 국방예산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보다 낮게 책정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연합뉴스 2000/10/16).
그와 동시에 중국은 1994년부터 주변국인 태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인도 등 동남아 및 서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군고위층 인사의 상호방문을 통한 군사협력를 강화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ASEAN 지역포럼 등 다자안보대화에 계속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중국위협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주변국에 평화적 이미지 부각에 힘쓰고 있다(閻學通 1999: 38-39).


Ⅳ. 남중국해분쟁

남중국해는 석유생산지인 중동지역과 동북아시아를 잇는 중요한 해상보급로인 동시에 대외무역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전략요충지라고 볼 수 있다. 남중국해(230만㎢)에는 남사(Spratlys), 서사(Paracels), 중사(Macclesfield Bank), 동사(Pratas)의 4개 군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중 남사군도의 점유해역이 가장 넓고, 영유권 분쟁이 가장 복잡하다. 또한 남사군도(南沙群島)의 영유권 분쟁의 결과가 한·일간의 독도문제와 중·일간의 파랑도문제, 러·일간에 4개 도서 반환문제 등에 공히 중요한 선례가 될 수도 있어 국제적 안목이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
남사군도는 국제해도상 '스프래틀리 군도'(Sprat1y Islands)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역의 분쟁을 일반적으로 '스프래틀리 분쟁'이라고 부르며 230여 개의 섬과 산호초, 그리고 사주(모래톱)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섬 가운데 25개 정도만이 수면위로 나타나 있고, 128개의 암초와 77개의 사주가 남북으로 800km, 동서로 640km의 영역(54만 m12)에 펼쳐 있고, 해면 위에 돌출해 있는 모든 도서의 총 면적은 2.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태평도(太平島), 남위도(南威島), 중업도(中業島)와 마환도(馬歡島)가 비교적 중요한 섬들이다. 남사군도는 북위 4-12도 사이의 망망대해 청정해역에 펼쳐져 있는 4개 군도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중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 주변 여섯 나라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남사군도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섬 영유권 분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다. 즉 남사군도 해역은 베트남해안으로부터 동쪽 300마일, 중국 해남도의 동남방 600마일, 필리핀 서쪽 50-90마일 지점, 말레이시아 자바섬과 브루나이로부터는 북방 160마일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남사군도를 분할·점령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대만 등 5개국이다(陸忠圍 1995: 413-415).
현재까지 중국은 베트남과의 수 차례 무력충돌을 통해 일부 섬을 강제 점령했고, 필리핀 영토의 섬에 건축물을 축조했으며 대만 북부 해상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힘의 과시를 통해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또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이러한 중국의 강력한 조치와 군사력 팽창은 남사군도의 지역분쟁이 보다 큰 국제분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이 제시되기 어려운 상황하에서 군사력이 여전히 중요한 변수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지역분쟁은 관련당사국들의 해군 및 공군력 강화의 필요성을 자극하게 되며 이는 결국 지역 내 군비경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베트남은 현재 남자도(南子島), 남위도(南威島) 등 27개를 점령하고 있으며, 필리핀이 마환도(馬歡島), 중업도(中業島) 등 8개, 중국이 6개, 말레이시아가 3개를 점령하고 있다. 남사군도에서 가장 큰 태평도(太平島)는 대만이 점령하고 있다. 이밖에도 인도네시아와 브루나이는 각각 5만 평방m와 3천 평방m의 해역을 점령하고있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각 국가들은 군사시설을 짓고 군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어 이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중국, 대만, 베트남은 해수면상의 모든 도서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대만, 필리핀은 해수면하의 모든 지형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기타 분쟁 당사국은 일부 수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분쟁의 씨앗은 이 해역에 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천연자원이다. 구리, 알루미늄, 주석 같은 광물은 물론 주변국들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자원인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1966년 유엔 극동아시아경제위원회 후원으로 아시아연안 합동광물탐사조정위원회가 2년간 탐사한 끝에 남중국해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1989년에는 중국 지질광산부가 남사군도의 석유추정 매장량을 177억 톤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쿠웨이트의 석유 매장량보다 47억 톤이 많은 규모이며, 세계 제4위의 매장량이다. 따라서 석유자원 탐사경쟁이 벌어지면서 주변국들이 서로 광물자원법과 석유법을 일방적으로 발효시키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약 80개에 이르는 석유회사들이 석유개발에 열을 올려 주변국들이 상당한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베트남은 1985년부터 7년 동안 남중국 해역에서 연간 5백40만 톤에 이르는 막대한 석유를 생산해 주된 수입원이던 쌀보다도 석유로 얻는 수입이 더 많게 되었다.
중국은 남사군도에 행정력과 영유권을 행사한 최초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점 우선을 인정하는 국제법의 영토권 조항에 따라 다른 나라들의 영유권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중국은 이 지역이 이미 후한시대(A.D.25-220)의 지리서에 창해(남중국해의 당시 이름) 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당, 명 시대의 항해기록이나 19세기 외국에서 출판된 기록에도 이 지역을 중국영해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증거들을 통해 중국은 남중국해 전역이 자신의 영해임을 주장하고 있다(陸忠圍 1995: 406-408).
또한 다른 분쟁 당사국들에 비해 월등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힘의 과시를 통해서라도 자국의 영유권을 지켜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경제적 이익을 겨냥한 이유도 있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남사군도가 있는 남중국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려는 것으로 분석되며, 이를 위해 해군력을 증강하고 있다. 또한 1992년 2월에 정비(整備)한 영해법에는 남중국해의 4개의 군도가 중국의 영토라고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해를 침범한 외국의 함정을 중국군의 함정 또는 항공기가 추적할 수 있는 권한이 명확히 명기되어 있다. 특히 침범자에 대하여 군사당국이 실력행사를 하도록 인정하고 있는 것이 이 영해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남사군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예고 없는 전쟁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이곳은 석유, 천연가스 등 자원의 보고(寶庫)일 뿐만 아니라 교통 등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국이 전격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지배권을 확보할 경우, 아시아 군사력 판도의 변화는 물론 남사군도의 국제 통항로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일본, 한국 등의 권익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중국의 기본입장은 분쟁유보와 공동개발이다. 즉 영유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으나 분쟁을 덮어두고 석유탐사 등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것은 허락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동남아의 관련국들에게 일종의 회유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여전히 남사군도 전체를 장악할 만한 해군력을 갖지 못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원양해군력 강화와 항속거리가 긴 장거리 전폭기의 구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분쟁유보라는 일시적인 대안이 나올 수 있는 배경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미국도 중국의 위협이 아직까지는 크게 우려할 만한 사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으로 연계되는 해상수송로가 중국의 해군력 강화와 해역장악에 따라 위협받게 될 때 미국도 좌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2001년 4월 남중해역에서 발생한 중국전투기와 미국정찰기의 충돌사건도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미국의 견제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동 분쟁은 6개국 간의 복잡한 국제형 분쟁이나, 무력충돌은 중국과 베트남간에만 발생하였고, 향후 분쟁이 재현될 경우 주로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 간의 쌍무적 분쟁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에 비해 국가 잠재력이나 군사력이 크게 낮기 때문에 중국과의 쌍무적 협상보다 아세안 기구, 혹은 다자간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모색하고 있으나, 중국은 동 분쟁의 "국제화"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이 다자간 협상에 대한 태도를 점차 적극적으로 바꾸고 있어, 이에 대한 기대가 증대되고 있다(변창구 1999: 203-204). 결론적으로 중국의 원거리 투사력 부족 및 당사국들간의 현상유지를 감안할 때, 단·중기적으로 동 문제가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평화적 해결 역시 어려운 실정이다.


Ⅴ. 중·미 관계의 안정적 발전

강택민 지도부가 직면한 상기의 외교적 난제인 중국위협론의 대두, 대만문제, 주변영토분쟁 등은 직·간접으로 미국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중국이 이러한 난제들을 극복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재 정치·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세계 유일의 패권국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강택민 체제의 최대 외교적 난제는 대미 관계의 안정적 발전이라 할 수 있다.
1949년 중국공산정권 수립이후 현재까지의 중미관계를 살펴보면, 1950-60년대에는 쌍방이 각각 동서냉전구조에 편입되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 반면, 1972년 상해공동성명과 1979년 국교정상화를 통해 1970-80년대는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중미 양국이 상호간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적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해 對蘇전략적 유대관계가 소멸한 탈냉전기에서 중미관계는 이전과는 상이한 양상을 나타내어, 군사, 안보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 인권, 대만문제 등에서 협력과 갈등관계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미관계의 이러한 변화는 주로 미국의 대중국정책에 의해 결정되어져 왔다.
탈냉전시기 중미관계 악화의 계기가 된 것은 1989년 6월 발생한 천안문사태로서, 이는 이전까지 고위인사 상호 교류, 경제협력 및 과학기술 교류 증대 등 전반적으로 안정 속에 꾸준히 진전되고 있는 양국관계에 일시 먹구름이 드리우는 사건이었다. 미국은 대중국 무기금수, 군 고위 인사교류 동결, 정부 고위 인사간 교류 동결 등 대중국 제재조치를 시행했다. 이에 중국은 대미 강경 비난을 계속하면서 미 주재원을 퇴거시키고, 풀브라이트 사업을 중단하는 등 대미 보복조치를 강행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부시행정부는 중국의 지나친 고립화 방지를 위해 점진적인 관계회복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에 대한 화답으로 중국 측은 북경일원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천안문사태 관계자를 석방하는 등 미국에 대해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1993년 1월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양국관계는 통상마찰, 중국인권문제, 미국의 대대만 F-16판매 문제 등으로 또 다시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 간의 교역을 보더라도 1986년이래 미국의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90년 104억 달러, 1991년에는 150억 달러, 1992년에는 180억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심각한 무역수지불균형을 초래했다. 미국 측 통계에 의하면 양국 간 무역고가 330억불(1992년)로 급성장했는데 이 중에서 미국 측 적자가 약 180억 달러를 차지하기 때문에 통상문제에 있어서 주요현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인권문제에 있어서는 양국이 서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클린턴 대통령은 민주주의 확산을 미국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중국의 인권박해에 대해 MFN연장 조치 철회, 수퍼 301조 발동 등과 같은 경제제재조치를 발동했다. 이에 중국 측은 인권문제는 근본적으로 내정문제로서, 중미 양국은 사회체제, 역사, 가치관, 경제발전 수준 등이 현격히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이 미국식 기준에 의한 인권문제를 중국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이후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던 양국관계는 1995년 이등휘(李登輝) 대만 총통의 미국방문과 1996년 3월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해협에서의 미사일 연습훈련 등으로 더욱 악화되어 왔다. 이러한 양국관계에 있어서 일대의 전기가 마련되었는데, 그것은 중공 'l5전대회' 결과 강택민 지도체제의 공고화로 중국은 대미관계개선에 유리한 국내 정치적 여건을 확립한 것이다. 특히 등소평 사후에 중국사회에 등장한 민족주의와 극단적 반미정서가 'I5전대회' 이후 해소됨으로써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구축으로 중·소분쟁 이후 중국 외교정책의 핵심난제로 되어 왔던 북방안보위협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대미관계 발전은 향후 중국 대외관계의 최우선 순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미국 내부에서도 몇 차례의 논쟁을 거치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명확한 대중국정책, 즉 '포괄적 포용정책'을 산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상간의 상호 방문을 포함한 대화와 접촉을 강화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강경한 수단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렇게 적극적인 대중국정책을 채택하게 된 배경은 미국이 그 동안 중국이 중요한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지역질서의 안정은 물론 주요 국제문제의 해결에 있어 중국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양국간 경제관계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의 2대 교역상대국이고 중국은 미국의 4대 교역상대국이다. 중국은 미국 항공기와 밀의 최대 수출시장이며, 이미 세계 10대 무역대국(홍콩을 포함하면 세계 4대 무역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2000년에 총 무역액이 4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세계은행이 추정한 중국의 사회간접 자본 투자는 2000년까지 1천7백억 달러이고 중국의 중서부지역 개발은 그 규모가 미국의 서부개척 당시의 그것 보다 적지 않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같은 중국시장과 상업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미국시장 없는 중국경제도 상상하기 어렵다. 투자 면에서 미국은 세계 2위의 대중 투자국이다. 1979년에서 1999년 12월까지 미국의 대중투자는 누계 2만8천여 건, 계약금액 5백26억 달러에 달했다(臺灣行政院大陸委員會, 2000). {Fortune}지가 선정한 미국의 5백대 기업 중 2백 개 이상의 다국적기업이 중국에 진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압력용 카드라면 몰라도 대중 MFN(최혜국대우)연장을 거부하지는 못 한다. 결국 이 같은 현실적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미·중 양국은 강대국으로서의 서로의 실체를 상호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97년 10월 강택민 국가주석이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경색된 양국관계를 청산하고 관계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됨으로써 중미간의 협력 가능성이 보다 가시화되었다. 중·미 양국은 1995년 10월 UN 50주년 기념식 기간 중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의 관계개선을 모색하였으나 1996년 3월에 발생한 대만해협의 군사위기로 인해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1996년 하반기부터 중미 관계는 연이은 정상회담과 고위급회담을 통해 지난 수 년 간의 대립국면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력의 국면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강택민과 클린턴은 1997년과 1998년 두 차례의 정상회담에서 인권문제를 제외하고는 많은 분야에서 합의를 보아 양국은 '건설적 전략동반자관계'를 구축하였다.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대만문제에 대한 하나의 중국정책을 재확인하였다. 경제분야에서 중국은 추가시장 개방을, 미국은 중국의 WTO 가입지지를 약속하였다. 중국은 또 컴퓨터, 반도체, 통신장비 등에 대한 관세철폐를 위한 정보기술협정(ITA)가입, 제3국에 대한 핵 기술지원 중단을 약속했고 미국은 중국에 원자로 및 관련부품의 수출통제 조치를 해제하기로 하였다.
특히 양국은 전략핵무기의 상호 불겨냥에 합의함으로써 중·미 양국은 더 이상 적대적 관계가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처럼 양국 정상회담은 많은 합의를 이루어 놓았지만 그것이 그대로 지켜질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양국이 합의한 '건설적 전략동반자관계'는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서로 제도와 가치상에서의 차이를 극복한 바탕 위에서 추구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차이들을 최소화하면서 사안별로 상호 공동이익을 모색해 나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갈등요인을 내재하고 있다. 실지로 1999년 초부터 미국이 재미 화교과학자의 핵 기술 절취의혹사건, 미 공군기의 유고주재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 중국 내 인권상황 및 미·일간 미사일방어체제(NMD) 구축합의 등을 통해 긴장이 지속되었고, 부시(조지 W.) 행정부 출범이후 중미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부시(조지 W.) 행정부는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strategic partner)가 아닌 전략적 경쟁자(strategic competitor)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대중국정책은 '포용론'보다는 '봉쇄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중국이 러시아로부터 최신예 전투기와 미사일, 잠수함, 구축함들을 구입하는 등 군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은 대만을 겨냥한 것인 동시에 남중국해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위기 시에 미국이 이 지역들에 개입하는 것을 억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중국에 대해 힘에 의한 외교를 통해 중국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중국이 지속적으로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경제·통상관계는 안보관계와 별도로 계속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부시(조지 W.)행정부는 중국의 경제력 성장에 따른 군사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방위(MD)체제와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 구축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만문제에 있어서도 클린턴정부가 '하나의 중국원칙'을 존중한데 반해 부시정부는 중국이 무력사용을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특히 최근 부시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대만이 공격받을 시에는 미국의 군사력을 동원하겠다고 발언함으로써 이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또한 대만안보강화법을 지지하고 있으며,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만을 포함하는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 구축을 추진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행정부의 대만에 대한 이지스 구축함이나 아파치 헬기와 같은 최신 무기 판매문제로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예를 들면 1대에 12억$이나 하는 이지스 구축함의 판매는 미국 쪽에서 보면 커다란 경제적 이익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정거리가 수백Km인 미사일로 100개의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파괴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는 이지스 구축함이 폭이 160Km에 불과한 대만해협에 배치되는 것은 미국과 대만의 군사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현실적으로는 TMD체제에 대만이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적극 반대하고 있다.
이같이 부시(조지 W.) 행정부 출범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2001년 4월에 터진 미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의 충돌사건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된 것이다. 11일만에 어렵게 협상이 타결돼 승무원이 귀국할 수 있었지만 양측은 서로 이번 충돌사고의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공방을 계속하고 있다. 정찰기 반환 및 보상 등 사후처리를 둘러싸고 미·중간에 또 한차례 격돌이 불가피함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긴장고조에도 한계는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 긴장 가능성이 상존하지만 경제적으로 협력을 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올림픽 개최 여망과 더불어 연간 80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무역흑자, 그리고 WTO가입을 위한 미국과의 협조 필요성 때문에 끝없는 대립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1년 6월 미국과 중국 양측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을 사실상 타결한 것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2001/6/11). 냉전 시절과는 달리, 중국을 봉쇄할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 않을 뿐더러, 매년 1000억달러를 상회하고 있는 미·중간의 상품교역량 규모를 따져볼 때 부시 행정부 역시 중국과의 경제적 교류와 협력이 절실하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중국과 미국은 대외정책에서 정경분리를 엄격하게 실천하고 있다. 현재 양국은 공동이익이 되는 경제분야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있지만 대만문제, 인권 및 미사일방어 등 정치 및 안보분야에서는 갈등을 나타내고 있다.
앞으로의 양국관계에 있어서는 냉전체제 종식 이후 국제질서 변화에 따른 미국의 중국 시각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이 될 것 같다. 러시아 사회의 본질적 변화로 미·러 간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됨에 따라 대소 경계용 중국카드의 전략적 가치가 축소됐으며, 이념적·전략적 측면보다 경제적 실익 추구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중국으로서도 미국은 경계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경제건설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중미관계는 사안별로 대립,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최근의 중미 관계는 NMD구축문제와 대만문제 등에서 여전히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양국은 공히 냉전이후 세계 신질서 구축 및 자국의 국내경제 회생 또는 발전이라는 과업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양국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Ⅵ. 대만문제

중국의 대대만 정책은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성한 영토의 일부이며, 조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것은 대만 인민을 포함한 전 중국인의 신성한 책임"이라고 헌법에 규정하고 있듯이 통일문제와 관련 홍콩에 적용했던 '1국 2체제' 원칙을 고수해 왔으며, 대만이 독립을 추진할 경우 무력침공도 불사하겠다고 천명해 왔다. 대만문제는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게 되었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패주하게 됨으로써 생긴 중국의 국내문제였으나, 1950년 한국전이후 미국이 이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국제문제로 비화되어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중국정부는 대만 문제 해결을 위해 평화적·무력적 방법을 고루 사용하였다. 1949년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의 모택동 집권시기에는 '무력을 통한 대만해방'을 추구하였으나, 1979년 중국이 개방·개혁정책을 확대하고, 세계적으로 동서화해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중국과 대만간의 양안관계는 질적·양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은 1979년 1월 대만에 대해 3통(통상, 통항, 통우) 및 4류(경제, 문화, 체육 및 과학·기술 교류)정책을 제의하면서 기존의 '대만해방'으로부터 '평화통일전략'으로 대대만 외교노선을 전환했다. 이는 모택동의 사후 실용주의적 개혁정책의 추진에 따른 국내의 정치·경제적 변화가 대만정책에 투영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적극적인 평화통일전략에 비해 대만은 상대적으로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 해왔다. 특히, 1949년 중국과 미국간의 수교로 인한 미국과의 단교와 대륙으로부터의 평화공세라는 양면적 충격 속에서 대만은 처음부터 중국과의 교류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이후 양측의 국내적 요인과 국제정세의 변화로 확대되기 시작된 양안간의 교류와 협력은 1987년 말 대만정부가 대만인의 대륙방문금지조치를 공식 해제함에 따라 급속도로 인적·물적 교류가 진행됐다. 이후 대만은 정치·경제교류를 중심으로 대 중국 투자를 활발히 하기 시작했으며 대륙경제의 자본주의화를 통해 대만에 유리한 통일환경이 조성할 수 있도록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만은 분리독립과 유엔 재가입을 골자로 하는 분리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중국정부는 3대 국가목표로서 조국통일 완수를 채택하여 대만문제해결을 위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지만, 강택민 집권 이후 중국지도부는 대만문제의 성격이 과거보다 복잡하고 민감하게 전개되어 이를 해결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이유로 아래의 몇 가지 요인들을 들 수 있다.
첫째, 냉전종식 이후 미국요인을 들 수 있다. 미국은 중국통일문제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대만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모택동의 2차에 걸친 대만 침공을 저지하였다. 1979년 미·중수교 이후에는 '대만관계법'을 제정하여 대만과 민간차원에서 관계를 지속한 한편 계속 대만에 무기를 지원하여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이중정책은 냉전종식 이후 중국의 국력이 급속 신장함으로써 보다 강화되어 대만문제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유리한 하나의 카드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각종 첨단무기를 대만에 제공하는 한편 미·대만관계를 격상시켜 쌍방 고위 관리의 방문을 허용함으로써 1995년 대만총통 이등휘의 미국방문이 성사되었다. 이등휘 총통의 訪美를 대만 분리주의의 일환으로 파악한 중국정부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여 1995년말∼1996년 초 대만해협에서 미사일 훈련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정부는 대만 정책을 조정하여 '하나의 중국'정책을 재천명하면서 중국대륙에게는 무력사용불가를 요구하고 대만에게는 독립불가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1998년 클린턴은 중국을 방문하여 三不政策(대만독립·두개의 중국 및 대만의 UN가입에 반대)을 발표하게 되었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대만 자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988년 장경국 총통이 사망한 후, 국민당의 일당독재도 함께 종말을 고함으로써 대만내부에는 새로운 민주화를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하고, 이는 '대만본토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장경국 뒤를 이은 이등휘 총통은 통일정책에서도 점차 '대만의식'을 강조하면서 反統一·分離主義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제1야당인 민진당이 '대만독립'을 당헌에 명시함으로써 대만독립운동이 더욱 가시화 되었다. 결국 대만내 각 정치세력들의 분리주의 강화는 강택민 지도체제로 하여금 대만문제 해결의 긴박성을 느끼게 하였다.
그 외에도 1997년 홍콩과 1999년 마카오 중국회귀로 인해 대만문제의 해결은 국가정책의 우선 순위로 등장하면서 중국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이 문제에 임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중국지도부는 '평화통일, 일국양제'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대만에 대한 통일정책을 적절히 조정하면서 그 강도를 더해갔다. 중국의 대대만 통일정책은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성한 영토의 일부이며, 조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것은 대만 인민을 포함한 전 중국인의 신성한 책임"이라고 헌법에 규정하고 있듯이 통일문제와 관련 홍콩에 적용했던 '1국 2체제' 원칙을 고수해 왔으며, 대만이 독립을 추진할 경우 무력침공도 불사하겠다고 천명해 왔다.
즉 중국은 '강·온 양면전략'을 적절히 구사하여, 한편에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 하에 兩岸정치협상의 진행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사용 가능성'을 강조하여 대만 내에서 대만독립운동세력의 확장을 견제하였다. '民' '官' 분리와 '政' '經'분리를 통해 대만당국이 추진하고있는 '실용외교'와 '분리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한 대응을 하고, 양안 경제교류와 민간교류는 적극 권장·지지한다. 특히 1993년 8월 중국 국무원이 발표한 '대만문제와 중국통일' 백서는 7개국어로 대외에 공포되었다(中華人民共和國國務院 1993: 946-959.). 백서의 주요 목적은 대만문제는 중국 국내문제인 점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대만이 독립국가의 신분으로 UN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저지함과 동시에 미국의 대만문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함에 있었다.
그리고 1997년 '15전대회'를 전후하여 중국의 국제적 지위상승과 중국 국내정치의 안정 및 홍콩주권회복은 대만문제 해결에 있어 중국의 주도권을 보다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홍콩주권회복은 대만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 심화와 국제적 입지위축을 초래함으로써 중국의 對대만 '一國兩制'정책을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99년 12월 20일 이루어진 마카오의 중국회귀는 양안(중국-대만)간의 통일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즈음하여 중국 지도부는 다음 목표가 대만통일임을 강조하였다. 마카오회귀 직전인 12월 17일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은 마카오의 중국반환은 통일을 향한 중요한 진전으로서 '兩國論' (국가대 국가론)을 주장하는 대만에 대한 압력이 될 것이며, 一國兩制는 중국통일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강주석은 홍콩과 마카오에서 시행되는 일국양제의 성공적인 수행은 대만문제 해결의 모델이 돼 중국의 완전한 통일을 앞당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중국은 2000년 3월 총통선거에서 승리한 민진당 정부 지도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마카오를 모델로 한 새 통일방안을 구상중이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마카오 반환행사가 끝난 직후에 강택민이 책임자로 있는 대만 工作사무실이 주관하는 <새 천년 대만통일정책>회의를 개최하여 이등휘 이후를 겨냥한 새 통일정책을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강택민 측근들은 새 통일방안이 홍콩에 실험하고 있는 일국양제 모델보다 한층 매력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재 중국은 대만문제 해결을 위해 강·온 양면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먼저 대만에 대해서는 홍콩과 마카오에 적용한 '一國兩制' 를 내세워 평화통일 원칙을 강조한다. 대만상인의 중국투자를 보호하겠다고 거듭 다짐하였다. 그러나 대만이 바라는 무력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결코 할 수 없다. 오히려 대만해방의 최적기가 가까워졌으며, 대만점령을 위한 가상시나리오까지 준비했다는 등 전쟁불가피론을 계속 흘린다.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는 홍콩과 마카오와는 달리 대만문제는 중국내전의 결과이며 전적으로 중국 내부 사안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하나의 중국'원칙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또한 미국의 대만에로의 무기 판매를 중지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중국과 대만이 통일을 하더라도 별문제가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
한편 대만에서는 중국과 통일하기보다는 대만이 독립해야한다는 쪽에 찬성하는 사람수가 점차 늘고 있는 추세이며, 이에 따라 중국의 전쟁 위협 속에 2000년 3월 18일 실시된 대만 총통 선거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해왔던 민진당의 진수편(陳水扁)(49) 후보가 승리, 반세기에 걸친 국민당 집권 시대를 마감하고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민진당 정부는 집권 후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대만독립을 추진하지 않고 중국과 정치적 대화를 주장하는 등 집권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지만 중국이 주장하는 '일국양제'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명확히 반대를 표명하고 있어 양안간 긴장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다.
요컨대 대만문제의 해결은 중국, 대만 및 미국 3자간의 이해관계와 힘 겨루기에 의해 결정되며, 그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중국대륙이다. 중국이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주화가 진행된다면 양안간의 통일은 생각보다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있다.
Ⅶ. 결 어

세계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 핵무장을 하고 있는 중국, 매년 7%가 넘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중국은 21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결국 미국과 세계질서의 주역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리라 내다보고 있다.
중국식 세계질서를 구축해야겠다는 중국인들의 원대한 꿈은 중국의 국가발전계획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중국인들은 그러나 아주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강대국 건설'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주변정세가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미국과의 대결을 되도록 회피하려하고 있고, 일본과의 우호관계 유지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다. 중국의 원대한 장기적 국가전략구상과 현실수용이라는 두 축을 놓고 보면, 모든 현안에 대한 중국의 정세 인식과 정책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중 먼저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역시 중국의 대미국 전략이다. 중국은 미국이 앞으로 예상되는 중국과의 대결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일본 및 유럽국가들과 손잡고 중국을 포위하여 일정수준 이상의 강대국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다고 믿는다.
코소보 사태 중 발생한 중국 대사관에 대한 미국의 폭격은 중국으로 하여금 여전히 미국과 군사-기술력에서의 격차를 느끼게 했고, 미국정찰기 충돌사건은 중국을 당혹스럽고 만들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이 유럽에서 동진(東進)하고, 반대로 동쪽에서는 미국의 구호 아래 일본, 대만, 한국과 호주를 연결하는 세력이 '부채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이 대만에 첨단무기를 판매하고 신미·일방위지침과 전역미사일방위(TMD)체계를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의 독주와 서방세계의 중국 견제를 막기 위한 전략으로 양자적 동반자 관계의 강화와 다자적인 안보 구도를 추구하고 있다. 양자 관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미국 양국은 상호 경계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경제건설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중미관계는 사안별로 대립,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중국은 주변국들과 적지 않은 외교적 어려움도 안고 있다. 인도와 베트남과는 전쟁도 치렀다.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도 걸림돌이다. 그러나 중국은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정지작업 중이다. 러시아, 베트남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 구 소련 국가들과도 국경선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했다. 필리핀과는 남사(南沙)군도 영토분쟁을 당분간 묻어두기로 합의했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의 관계도 강화하고 있다. 주용기(朱鎔基)총리 등 중국 지도부는 최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군사협력를 강화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아세안+3' 회담과 ASEAN 지역포럼 등 다자안보대화에 계속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중국위협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주변국에 평화적 이미지 부각에 힘쓰고 있다.
그렇지만 대만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강한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대만이 공식으로 독립을 선언할 경우 무력사용을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만독립은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내부혼란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미국의 중국포위를 강화하는 결과가 되리라 보기 때문이다. 현재 대만당국뿐만 아니라 대만인들 중 70%이상이 중국과의 통일을 반대하고 있고 미국이 양안관계의 평화적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상태에서 중국이 무력을 통해 통일을 실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향후 대만문제의 해결은 중국, 대만 및 미국 3자간의 이해관계와 힘 겨루기에 의해 결정되며, 그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중국대륙이다. 앞으로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이 이룩되고 민주화가 진행되어 대만인들이 중국과의 통합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게 된다면 양안간의 통일은 생각보다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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