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의 달인` 안철수, 밤에는 돌변…
낮에는 의사, 밤에는 프로그래머…7년간 이중 생활
17년새 네번의 변신…대선고민 1년반
의사→벤처→교수→정치, TV출연 이후 2030에 인기
기사입력 2012.09.19 19:11:15 | 최종수정 2012.09.19 19:16:49 싸이월드 공감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604923 기사의  이미지

안철수의 과거 사진들. 맨 위부터 1970년대 초 부친의 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초등학생 시절 모습과 2000년대 들어서 찍은 가족사진, 그리고 2008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미래기획위원으로 위촉되는 장면.

제18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1962년 2월 26일 의사인 안영모 옹(81)과 박귀남 여사(76)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밀양이지만 1963년 4월 가족들이 부산으로 이사한 후 부산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

유년시절 안 원장은 왜소한 체격,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항상 땅만 보고 걸었다. 스스로도 "나는 공부나 운동 어느 것도 잘 하지 못하고 너무나 내성적인 내 자신에 실망하면서 지냈다"고 했다.

초등학교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 성적표에는 수보다 우, 미가 많았다. 중학교 때까지도 반에서 1등 한 번 못했다. 고3 때 처음으로 반에서 1등, 이과 전체에서 1등을 했다.

그는 `책벌레`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쯤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을 정도다. 체육시간에도 운동은 하지 않고 혼자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최근 펴낸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에서 "평생 읽은 책의 절반 정도는 중학교 때까지 다 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존 그리샴과 스티그 라르손의 추리소설에 푹 빠져 지내기도 했다.

원래 꿈은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의대 진학을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진급 즈음이다. 큰아들이 의사가 돼 가업을 이었으면 하던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그는 "피를 끔찍하게 싫어하던 내가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과대학에 갈 것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후에는 의대 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82년 가을 친구 집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다. 1년 후에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컴퓨터를 갖게 됐다.

1988년 6월 11일은 안 후보 인생의 일대 변곡점이 되는 날이다. 기계어 공부를 막 끝냈던 그해 초 잡지를 통해 `브레인 바이러스`라는 컴퓨터 바이러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안 후보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 6월 11일 새벽녘 최초의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 V1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를 찾았지만 박사과정 공부에 수업조교까지 해야 했다. 결국 수면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꼬박 7년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백신을 만들고 이후에는 의사로 일했다.

91년 2월 6일 해군에 입대해 39개월간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입대하는 날 새벽까지 미켈란젤로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했다. 94년 4월 전역한 후에는 입대 전 몸담았던 단국대 의대 교수로 복직하려고 했지만 학교 측과 마찰을 빚어 실업자가 됐다. 이를 계기로 비영리법인 설립을 추진했고 한글과컴퓨터 창업자이자 대표였던 이찬진 현 드림위즈 대표와 인연이 닿아 95년 2월 16일 서초동 골목에 직원 3명의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연구소를 세운 후 95년 9월에는 엔지니어 출신 사업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EMTM(기술경영전문대학원) 과정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중요한 업무는 직접 필라델피아에서 챙겨야 했다. 매달 한 번 이상 연구소 일 때문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이틀에 하루는 밤을 새우는 생활이 계속됐다.

2년간 악전고투 끝에 기술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1997년 10월 30일 귀국했지만 급성간염으로 쓰러져 곧장 병원에 실려갔다.

병실에서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연구소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직원 월급을 주려고 물품대금으로 받아놓은 어음을 은행에 들고가 할인(깡)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1999년 4월 26일은 연구소에 기적 같은 기회였다. 이날 오전 9시 전국에서 30만~50만대 컴퓨터가 동시에 다 먹통이 되는 CIH바이러스(일명 체르노빌바이러스)가 창궐했다. 그해 연구소는 처음으로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2001년 9월에는 코스닥에 상장했다.

연구소 창립 10년째인 2005년 3월. 안 후보는 돌연 사표를 냈다. "영혼이 있는 기업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두 번째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2008년 4월 30일,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아내 김미경 교수가 한 달 앞서 자리 잡은 카이스트에 석좌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복귀했다. 카이스트에서 기업가정신을 강의하면서 청년실업 등으로 `불안의 늪`에 빠져 있는 2030세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각종 강연에 강사로 나섰다. 카이스트 교수 재직시절 한 해 평균 100회 강연을 했다.

[문지웅 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