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치유의 역사적 배경
1. 기치유의 역사
기치유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기치유(에너지치료)라고 하면 흔히 고대 동양에서만 행해져 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물론 서양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활용되어 오던 치료법이다. 즉 기치유란 근세에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치료법이 아니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아픈 부위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가슴이 아픈 사람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나, 발이 아픈 사람이 손으로 발을 잡고 있는 모습은 누구나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통증을 느끼거나 불편한 곳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그 부위로 손을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주무르는 등 물리적인 자극을 주지 않아도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손을 통해 나오는 에너지(기)로 자신의 통증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인간의 잠재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치지 않아도 누구나 보호 본능에 의해서 손이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를 기치유의 원형으로 본다면 기치유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고 보더라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호에서는 기치유의 역사를 동서양이 서로 비슷한 발전과정을 거친 고대사회와 상이한 발전과정을 거친 중세사회 이후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2. 고대 사회의 기치유
학문적 성숙도를 떠나 기치료가 나름의 체계를 잡기 시작한 것은 초기 종교가 시작된 때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대 동서양의 기치유는 그 근원을 초기종교와 샤머니즘, 주술, 마법 등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주술치료, 안수치료, 정령치료 또는 심령치료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속되어 왔다. 이 시기의 모든 치료는 주로 주술사나 제사장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기도의 형식과 손을 이용한 치료가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기치유와 심령치료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치유는 인간의 잠재능력을 스스로 개발하여 사용하는 것이며, 심령치료는 신의 가호를 통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기치유 능력은 인간본연의 능력이기 때문에 수영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번 배워 두면 평생을 사용할 수 있으며 타인에게 교육을 통하여 전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심령치료는 선천적으로 또는 우연한 계기를 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얻은 능력이기 때문에 서서히 능력이 사라지기도 하며 타인에게 교육 또는 전수도 불가능한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치유능력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발휘되는 능력이라 믿었으며 그에 따라 주술사나 제사장은 부와 권력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은 제정일치(祭政一致)라는 특이한 사회구조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정치적 통치자와 제사장 또는 주술사의 구별이 없었으며, 제사장이 곧 정치적 실권까지 행사했던 시기였다.
때문에 실제로 심령치료를 행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선천적으로 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나 종교적 수도생활을 통하여 치유능력이 각성된 사람들조차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 칭하여 주술사, 제사장 등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중세시대에 접어들면서 서양과 동양의 기치유는 서로 다른 발전성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는 서양의 기치유와 동양의 기치유를 구별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3. 서양의 기치유
고대 서양에서는 한 종족의 치료를 그 종족의 주술사나 마녀, 마법사라는 사람이 맡고 있었으며, 이들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주술과 기도라는 형식으로 치유행위를 행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의 치료법 중 하나로 기록된 “손 얹기”(Laying Hands)는 기치유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주술사, 정령술사, 마법사들의 행위가 심령치료인지 에너지치료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그들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권력의 최상부에 있었으며, 치유능력은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으로 오로지 신에게 선택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모습은 근대의 미국 인디언 사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주술사가 족장과 같은 또는 더 우월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 사회의 질병치료를 맡고 있었다.
카돌릭이 지배하던 유일신 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가톨릭인이 아닌 사람이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때문에 이 시기의 기치유는 신비주의 또는 사교(邪敎)라는 낙인이 찍혀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과 같은 종교적 탄압으로 인하여 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서양에서는 기치유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 했으나 좀더 본격적 으로 연구된 것은 1차 대전 이후이다. 그들은 기치유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현상학적으로 분명히 효과를 나타낸다는 점에 착안하여, 각종 임상실험을 통하여 기치유가 효과적인 치료법 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61년 캐나다 몬토리올에서 실시된 실험이었다. 멕길 대학교의 버나드 그라드 박사는 에너지 치료능력을 가진 에스테바니 대령(Oskar Estebany)이 상처 입은 쥐들을 하루에 두번씩 약 5분 동안 손으로 감싸는 것 만으로 쥐들의 상처회복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발견했으며, 에스테바니 대령의 누나이자 생화학 자인 주스타 스미스는 에스테바니의 기치유(에너지 치료)가 병 안에 들어 있는 효소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하여 치유에너지의 효과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에스테바니는 당시 뇌종양에 걸린 6세 소녀를 치료하여 유명해진 인물로서 에너지치료에 대해 연구를 거듭하여 기치료가 선천적인 능력이나 선택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며 교육에 의해 개발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기치료에 대해 많은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결과, 오늘날에는 약 100여 군데의 미주 내 대학 병원과 종합병원에서 임상에 접목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서양에서의 기치유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으며, 그들 특유의 논리적 사고방식과 결합시켜 킬리언 사진(기를 촬영할 수 있는 사진)을 개발하거나 기의 실체를 파동으로 해석하여 파동검출기를 사용하여 연구하는 등 기치유의 임상적 증명과 함께 기를 물리학적으로 검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4. 동양의 기치유
동양의 문화는 기의 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철학에 있어서도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기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특히 의학에 있어서는 동양의학은 기를 조절하는 의학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기는 동양의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고대 동양의학에 있어서 기공수련은 의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동양의학의 역사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염제 신농씨”는 백초를 맛보고 그 효능을 알아냈다고 전해 지는데, 현재의 상식으로는 풀을 먹어본다고 해서 그 효능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공수련을 충분히 거친 사람이라면 음식을 먹어보는 것만으로 어느 장기에 또는 어느 경락에 작용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동양의학의 기원이 기공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처럼 고대 동양에서의 기치유는 그 발정양상에 있어서 서양과 마찬가지로 초기종교와 함께 시작되었으나, 그 발전 양상에 있어서는 기공수련을 통하여 얻은 능력을 의학분야에 많이 응용하여 현재의 기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학을 정립하는 등 서양의 경우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중세기로 접어들면서 동양인들의 자연과 기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져 갔고, 그에 따라 각종 기공 수련법들도 많은 발전을 보았다. 때문에 서양과는 달리 기치유와 심령치료의 구분이 뚜렷했으며, 심령술사들을 무속인으로 분류하여 수도자와는 구별하는 세심함도 엿볼 수 있다.
중세 이후 동양의 기치유도 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종교계에서 많이 행해졌다. 나름의 종교수행으로 얻어진 치유능력을 활용하여 포교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질병이라는 것은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특히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장수에 대한 염원이 강했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신선사상이나 우리나라에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불을 모시는 사찰이 많다는 것만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고 교리를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진 종교 수행자들은 그에 부흥하여 대부분 의술에 조예가 있었고, 자신의 건강관리와 포교의 방편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수행자들 중 일부는 수행과정에서 치유능력을 개발할 수 있었고 그들의 의술과 접목시켜 기치유라는 새로운 치료법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풍토와는 달리 현재는 과거의 기공수련이나 기치유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존재하는 대부분의 자료가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것들이라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틀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비밀스러운 것을 존중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리려 하지 않으며, 비방이라는 이름 하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고대에 행해진 기공수련이나 기치유의 원형에 대해서는 그 이론이나 수련법, 치유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묘연한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국내에 있는 수련법의 대부분이 전래의 수련법이 아닌 중국의 내단서(內丹書 : 호흡법)나 조선시대에 북창 정염제가 썼다는 용호비결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공체조(동공) 또한 중국의 무술기공이나 요가동작 또는 요가동작의 변형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독자적인 수련법은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이러한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수련자들은 서로 자기가 전래의 수련법을 계승한 정통파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수련방법이나 치유법 등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인 면에서 전혀 통일되어 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기공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에 큰 저해요인이 되고 있으며, 최근 보다 과학적이고 실험적인 연구를 통하여 기공수련과 기치유에 대한 이론과 실기의 정립에 힘쓰고 있는 서구의 발전속도에 크게 뒤쳐지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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