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촛불시위에서 '정치'를 빼앗아가나

2008년 05월 06일 (화) 10:06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손우정 기자]
▲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3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 권우성
들끓고 있다. 민심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약속한 이명박 정부의 굴종적인 협상, 그러나 스스로 그것이 굴욕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아둔함 속에 국민들의 속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다.
끓다 끓어 청계광장으로 모였다. 대통령이 시장 시절 가장 내세우려 했던 업적인 청계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닦아준 그 곳에서 취임 100일도 되지 않아 자신의 탄핵 요구가 울려퍼질 것이란 점을 꿈에서나 예측했을까?
그런데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속을 다시 한번 들끓게 만든 소식이 전해졌다. 한진희 서울지방경찰청장은 5일 기자간담회에서 촛불문화제가 정치 시위화 할 경우 사법처리 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제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있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찰청의 인식은 정치를 '국민모두가 참여하고 누려야할 어떤 것'이 아니라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특정인들만의 성역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새삼스레 한탄할 필요는 없다. 정치를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게 만들려는 사람들은 국민의 정치 냉소주의를 자극하고 투표율을 낮추어, 결국 사조직을 보유한 기성 거대 정당을 보게 만드는데 기여해 왔다. 겉으로는 낮은 투표율을 걱정하면서도 뒤돌아서 웃음 짓는 기성 정치꾼들의 전형적 수법이다. 정치 자체에 대한 국민의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독점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만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 조항이다.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는 이 당연한 문구는 대한민국에서 한번도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과연 국가운영에서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까? 따져보자. 많은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의 탄핵을 요구하고 있다. 다음 아고라의 탄핵 서명은 한달만에 120여만명의 서명을 받아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역대 최단기간 최대 하락이라는 신기록을 수립중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몇 사람의 동의를 얻어야(서명을 받아야) 이명박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이다. 아무리 많은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해도 한나라당 의원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2/3 이상이 탄핵을 요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국민이 요구한다고 해서 탄핵이 되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탄핵이 안 되는 게 아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은 국민의 의사와 전혀 다른 국회의원의 의사만으로 탄핵이 이루어졌고, 이 상황이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황당함과 짜증을 불러왔는지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3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을 가득 메우고 저마다 촛불을 들고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 철회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쇠고기 수입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의견도 있다. 그럼 몇 명의 국민이 동의하면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 있을까? 100만명? 200만명?
이 역시 정답은 '꿈깨라'다. 우리 헌법 72조에는 국민투표 조항이 있으나 대통령만이 제안할 수 있다. 국민투표를 명시한 다른 하나는 130조 2항의 개헌시 국민투표 조항뿐이다.
결국 대통령을 탄핵하거나, 국민투표를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이렇다.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의원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의원 3분의 2를 설득하는 것이 서명운동으로 국민의 공감과 합의를 모아내는 것보다 현실적다.
국민투표 실시를 위해서는 국민 다수에게 국민투표의 필요성을 호소하기보다 국민투표의 패배로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 당사자, 즉 대통령이 스스로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투표를 제안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아, 그리고 만일을 위해 헌법재판소의 동의를 얻어두는 것도 중요하다.
촛불집회는 정치적이면 안 된다? 정치참여는 4년에 한번만 해야 하나
결국 현재의 헌법체제에서 국민의 의사와 다른 정치적 결정을 남발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탄핵이나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서(뉘우쳤다면 정책을 철회할 것이므로), 자신의 잘못을 분명하게 드러낼 방법을 시혜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는 영어몰입식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에서 도대체 국민의 지위는 뭔가? 주권자인 국민은 국가운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한국과 같은 철저한 위임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지위는 선거가 끝남과 동시에 날개 없이 추락한다. 루소가 뭐랬던가?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루소의 지적은 오늘 우리 국민의 현실도 그대로 대변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권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선거에서 승리한 소수에게 있다"가 더 부합하는 현실이다. 백만 국민이 대통령의 정치적 결정에 반대를 표명하고, 광장에 모여 국민의 뜻을 아무리 전달해 봐도, 실질적인 권한은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면서 당선되면 뒤통수를 치는 선출직 공무원들뿐이다.
국민이 바로 통치자라는 민주주의 원칙은 국민의 의사표현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로 보일 경우 당장 사법처리를 하겠다는 경찰청장의 말 앞에 무력화된다. 몇 명이 투표했건 선출된 자가 국민에게서 분리되는 순간, 국민은 그들의 결정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합법적으로는 국민투표를 국민이 요구할 수 없으며, 합법적으로는 대통령을 포함해 마음에 들지 않는 국회의원을 소환할 수 없다. 합법적으로는 국민이 생각한 법안을 발의할 수 없으며, 합법적으로는 국민의 정당한 의사표현을 불법이라고 규정한 경찰청장을 호통 칠 방법이 없다. 쇠고기 수입 논의 과정에서 국민에게 부여된 역할이란 굴욕적 쇠고기 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대통령 일행의 여행경비를 위해 세금을 내는 것뿐이었다.
촛불시위, 진정한 국민주권 획득운동으로 이어져야
복잡하고 범위가 커진 현대사회에서 국민이 모든 정치를 직접 담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정치적 대리자인 국회의원들을 잘 뽑아야 한다. 그러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은 국민의 대리자가 국민의 의사와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할 때,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국민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겐 무엇이 있는가? 이번 촛불시위처럼 국가의 결정에 반대하는 입장표명을 위해서는 아무런 정치색 없는 문화제 정도로 분노와 짜증을 배설하거나, 경찰청 기준으로 범법자가 되어야 한다. 서글픈 대의민주주의의 현실이다.
국민주권을 의미 그대로 구현해야 한다. 국민이 국가 중대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국민투표를 국민이 제안할 수 있도록 하는 법, 선출된 공무원이 국민의 의사와 반하는 정치활동을 펼칠 경우 국민이 다시 소환할 수 있도록 하는 법, 좋은 대안을 국민 스스로 법제화할 수 있게 보장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불가피한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최소한의 국민의 정치개입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선거 때만 잘하겠다는 출마자들에게 냉소주의를 퍼부으며 투표를 외면한 수많은 유권자들이 똑똑하게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런 현상이 되풀이 되는 것은 출마자들의 개인적 인격 때문이라기보다 시스템이 그런 정치행태를 철저히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두 달 전에 촛불시위가 이렇게 전개되었어도 경찰청장이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자신에 대한 소환권이 국민에게 있어도 '정치적 배후', '불순한 정치적 의도' 운운하는 국회의원이 있을 수 있을까? 국민투표를 국민이 제기할 수 있어도 수많은 서명운동 동참자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해야 했을까? 아니, 국민의 먹을거리를 담보로 한 노골적인 대미 퍼주기를 저렇듯 뻔뻔하게 자행할 수 있을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정치체제다. 이제 철저한 위임권력을 창출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한시켜온 87년 체제의 낡은 틀을 벗어 던져야 할 때다. 선택된 소수에게만 있는 주권을 국민에게 되찾아줘야 할 때다.
문화제면 괜찮지만 정치적 의사표현은 안 된다는 개념 상실한 공무원들에게 주인의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을 쟁취하는 정치혁명이 필요하다. 국민이 발의할 수 있는 국민투표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이 소환할 수 있는 국민소환제, 좋은 정책을 국민이 발의하는 국민 발안제 도입은 정치혁명의 첫 번째 과제다.
촛불시위의 함성이 '권력을 우리에게' 돌려달라는 정치운동, 국민주권회복 운동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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