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동물원’에 갇힌 한국, 갈수록 더 심해져

한겨레신문 | 기사전송 2012/02/15 21:46

[한겨레] [0.1% 재벌의 나라] ④ 한국판 스티브 잡스 왜 못 나올까
‘재벌 포식자’, 기업 생태계 유린…벤처정신 설 곳이 없다 대학가 벤처동아리도 이제는 “대기업 취업 스펙용”
창업으로 매출 1조이상 성장한 회사는 30년간 2곳
기술 약탈·계열사 몰아주기 등으로 중소기업 ‘고사’ 1980~90년대 한창 벤처동아리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온 사회에 벤처 바람이 불던 때다. 지금도 대학가엔 벤처동아리들이 활발히 활동중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90년대의 열쇳말을 ‘신바람’이라고 한다면, 요즘은 ‘생존본능’이다. “벤처동아리들은 주로 애플리케이션 개발하는 데가 많아요. 정말 창업하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대기업 취업용 ‘스펙’ 쌓는 데 벤처동아리가 좋거든요.”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다니는 김아무개(25)씨는 “벤처동아리로 대기업이나 정부 쪽 지원사업 대상에 뽑히면 취업 때 도움이 된다”며 “망하기 쉬운 창업보다는 안정적인 대기업 취업이 요즘 대학생들의 더 큰 관심사”라고 말했다.

청년 벤처정신이 사라진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재벌의 약탈적 행태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재벌 빵집 논란이 일 때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빵이 결정적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한국의 재벌이 일본이나 독일 스타일의 소규모 전문 기술업체가 양성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점”이라며 “한국 기업가가 혁신 역량을 갖기 시작하면 재벌은 해당업체를 사들여 자산과 인력을 빼앗는다”고 꼬집었다. 핵심을 정확히 짚은 지적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룡 재벌그룹 때문에 벤처창업 열기는 급속히 식어가고 있다. 한국거래소·벤처기업협회 등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연간 벤처기업 수는 2만6148개로 사상 최대였지만 지난해 5월 283개가 줄어든 것을 시작으로 6월 400개, 9월 126개, 12월 228개 등 5월 이후에만 848개가 줄었다.

현재 국내의 기업 생태계는 0.1%의 대기업과 나머지 영세한 소기업으로 이뤄진 ‘첨탑형’이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창업을 통해 성장한 회사 가운데 매출 1조원이 넘은 곳은 웅진과 엔에이치엔(NHN)밖에 없다. 매출 1000억원 이상 벤처기업은 315개에 불과하다. 새로 창업하는 기업은 많지만 대부분 중소기업까지 성장해 정체하거나 다시 도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기업의 창업, 성장, 발전의 경로가 막히게 된 주요한 이유는 납품업체 쥐어짜기, 벤처기업 기술·인력 약탈, 문어발식 사업 확장,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 재벌의 횡포 때문이다. 국내에서 정작 기업가 정신을 파괴하는 당사자가 재벌이란 것이다. 한 중소기업 임원은 “말로는 상생과 공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기업) 생태계를 파괴하는 장본인은 재벌들”이라며 “재벌 총수들이 제대로 기업가 정신을 갖추지 못한데다 재벌 중심의 생태계가 되다 보니 젊은 사업가들도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갖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재벌 중심의 기업 생태계는 최근 들어 더욱 굳어지고 있다. 재벌그룹의 신생 계열사들이 일감 몰아주기 등 그룹의 뒷받침에 힘입어 몇년 만에 대기업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뛰어난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공간이 없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의 물류기업 현대글로비스는 2001년 설립된 지 10년 만인 지난해 매출 8조원을 넘어섰다. 시장 전문가들은 2013년엔 매출 1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이밖에도 삼성그룹의 서울통신기술, 엘지그룹의 써브원 등의 계열사들도 그룹의 지원을 받아 급성장했다.

미국의 산업계를 살펴보면 국내의 기업 생태계가 얼마나 척박한지 알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나 애플이 대표적 사례다. 1975년 빌 게이츠가 거의 맨손으로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는 2000년을 전후한 벤처 열풍 속에서 세계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관련해 전세계 회사들이 2010년 창출한 수익은 무려 5800억달러에 이른다. 아울러 마이크로소프트가 1달러를 벌 때 마이크로소프트 생태계에 속한 기업들은 8.7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냈다.

재벌 중심의 한국적 기업 생태계가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아왔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지적된 문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갈수록 더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선 기업가 정신도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중소기업인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재벌 기업들은) 자기들한테만 납품하도록 묶어버린다. (…) 삼성동물원에 갇혀 있으니까 (시장이) 작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한국판 스티브 잡스가 나올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해진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전하고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이 많이 나와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발상의 전환이 대기업에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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