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쒀서 개 줬다”는 탄식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등록 :2016-12-21 10:56수정 :2016-12-2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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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번 이렇게 끝났나

1987년 6월항쟁 쓰라린 귀결
대학생·넥타이부대·노동자 등
야당 지도부에 주도권 넘겨버려

광장 목소리 ‘헌법 개정’서 배제
양김은 ‘전두환 각본’대로 분열
결과적으로 군부독재 합법적 연장

2016년 박근혜 탄핵뒤 ‘반면교사’
“광장의 시민이 계속 주도권 갖고
민주사회 구현해야 진정한 승리”
“직선제를 해도 마, 이기지 않겠소?”

1987년 6월24일 청와대. 대통령 전두환이 민정당 대표 노태우를 불러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선제로서 이긴다고요?” 김대중을 사면·복권하면 김대중·김영삼이 다 대통령 후보로 나와 이길 방법이 생길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다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태우가 대통령과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선언하고 나중에 대통령이 추인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서중석의 <6월항쟁>(2011) 중에서)

이틀 뒤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6·26 대행진)이 열렸다. 전국 33개 도시에서 당시로는 역대 최대 규모인 동시다발 시위가 열렸다. 50만명이 참가한 6·10 국민대회보다 더 많은 130만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특히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과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6·10대회에 이어 대거 참여했다. 전두환·노태우는 굴복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6월29일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시국수습 방안을 발표했다. 노태우는 ‘각본대로’ 청와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두환은 7월1일 노태우의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역시 ‘각본대로’였다.

12월16일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은 졌다. 6월항쟁으로 어렵게 얻은 선거에서, 그것도 오랜 독재를 물리치고 16년 만에 처음 치른 국민의 직접선거에서 말이다. “죽 쒀서 개 줬다”는 국민의 탄식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역사가 전환기를 맞을 때마다 우리 국민은 광장으로 뛰쳐나와 권력에 맞섰다. 그러나 그 끝은 ‘패배의 기억’으로 남기 일쑤였다. 1960년 4·19 민주혁명부터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까지 만족스러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거대한 파도는 이내 가라앉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평범한 일상이 반복됐다.

4·19와 5·18은 총칼을 앞세운 군부의 쿠데타로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87년 6월항쟁은 방심한 민주세력이 기성 정치권에 기만당한 사례다. 특히 헌법 개정 과정에서 국민은 철저히 배제됐고, 야권이 분열하면서 군부독재의 합법적 연장으로 귀결됐다. 당시 유력 대선 후보군이었던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은 자신들의 대리인들로 8명(8인 정치회담)의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쫓기듯이 개헌을 추진했다. 헌법 개정 과정에서 국민 참여나 토의는 없었다. 8인 정치회담은 7월31일에 시작해 한 달 만인 8월31일 끝났다. 대통령 임기와 자격, 국회의 권한 강화 등 정치 권력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중심 의제였다. 대통령 국민소환제 등 국민이 권력을 직접 견제하는 제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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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담에 통일민주당 대표로 참여했던 이용희 전 국회부의장은 “대통령 임기가 최대 관심사였다. 여당은 6년 단임을, 야당은 5년 단임을 요구했다. 디제이와 와이에스가 (단일화 문제로) 싸우고 있으니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형식으로 5년씩 하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으로 확정된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10월29일 공포됐다. 전광석 연세대 교수(헌법학)는 ‘헌법과 한국 민주주의: 1987년 헌정체제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87년 헌법 개정작업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헌법 개정작업은 전적으로 정치권에 맡겼다. 즉 헌법이 일종의 엘리트 협상의 산물로서 탄생했다. 실제 국회는 예정됐던 지역 공청회를 여야 간에 공청회 장소 및 연사 선정 등의 문제에 이견을 보이며 한 번도 시행하지 못했다. 둘째, 헌법 개정에 전적으로 차기 집권을 위한 전략적 사고가 지배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정치학)는 “프랑스 혁명의 경우 인권선언을 만들어냈고 2년 뒤 헌법에 이를 반영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헌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은 운동으로만 끝나버리고 선언이나 헌법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6월항쟁 때 민주 세력은 왜 개헌 논의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오충일 목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 국본 지도부는 주도권을 정치권에 넘겨버렸다. 야권의 대통령 후보인 양김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87년 6월항쟁> 저자인 김원 박사(정치학)는 “당시 중산층은 호헌 철폐와 직선제 쟁취라는 민주주의 제도의 절차성에 관심을 가졌고, 양김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대리인’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고 했다”고 지적했다.

국본 조직국장이었던 이병철(농민운동가)씨는 “민주 세력은 직선제 이후에 무엇을 할지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 독재에 대한 염증이나 분노, 저항은 컸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를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로드맵이 없었다”고 진단했다. 직선제 이후 구체적 대안이 부족했던 이들은 대선 과정에서 급속도로 분열했다. 국본 정책 연구차장으로 일했던 황인성(6월민주포럼 운영위원장)씨는 “합법적 경쟁을 하면 야권이 이길 수 있다는 낙관이 지배적이었고, 다양한 세력이 모인 탓에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후보 단일화’ ‘비판적 지지’ ‘독자 후보’로 분열하면서 민주세력은 독립적인 중심으로 서지 못하고 구정치 엘리트의 종속변수가 돼 버렸다. “결국 국민의 힘으로 이룩해놓은 변화의 계기를 군부 독재 정권의 합법적 정권 연장으로 갖다 바쳐버렸다.”(황인성)

그뿐이 아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후 잇따라 군부 세력과 손잡았다. 1990년 1월 김영삼은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손잡고 ‘3당 합당’을 선언했고 1992년 여당 후보로 대선에서 이겼다. 김대중은 1997년 대선 때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해 당선됐다. 이용희 전 국회부의장은 “87년에 디제이와 와이에스가 단일화해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면 군사정권을 다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대통령이 나올 수 있겠나. (박근혜 정부의 탄생에)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오충일 목사는 “내가 6월항쟁의 죄인”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이 되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시민이 계속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민주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계속 논의하고 이를 구현해야 진정한 승리를 완성할 수 있다.” 2016년 12월9일,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 결의 이후에도 광화문 촛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87년 광장에서 당한 배신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연재1987~2017 광장의 노래
  • 1부 나의 광장, 너의 광장
  •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
  • 3부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다
  • 4부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 설계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5486.html?_fr=mt2#csidxb03a202709eacc0a881fb2f78358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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