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대표한다”…11월 혁명의 ‘스마트 시민’

글자크기
[한겨레]
한겨레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박 대통령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7차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10일 오후 시민들이 집회도중 휴대폰으로 1인방송을 하거나 동영상을 찍는 등 자신의 집회참석을 기록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1월 혁명’에는 지도부가 없다. 국회를 압박해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끌어냈지만, 트로피를 들어올릴 ‘누군가’가 없다. 전통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은 행사를 조직하는 도우미만 자임했다. ‘차이’와 ‘다양성’이 넘실대는 이들을 더듬어보려는 건 광장의 미래를 짚기 위해서다. ‘11월 혁명’을 이끈 이들은 누구인가.


한겨레
■ 깃발을 들지 마라…나는 내가 대표한다 촛불 시민은 어떤 대표자도 원치 않았다. ‘나’는 ‘나’로 대표될 뿐이다. ‘깃발을 치워라’는 요구는 촛불 초기부터 광장을 메웠다. 기존 조직은 거부당했다. 이들은 ‘세상에 없는 조직’의 깃발을 들고 광장에 나서는 것으로 임의로 ‘나’를 대표하려는 조직에 반감을 표했다. ‘장수풍뎅이연구회’, ‘정다운 개돼지 연합’, ‘민주묘총’ 등의 깃발은 이번 사태에 대한 기묘한 풍자이면서, 동시에 멋대로 나를 대표하려는 조직을 부정하는 몸짓이었다. ‘장수풍뎅이연구회’ 깃발을 들고 나선 이는 ‘장수풍뎅이연구회’ 트위터 계정에 ‘소속 집단을 나타내는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는 방식이 낡았다고 느꼈다.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부유하는 기표로 모임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름엔 아무 뜻이 없다’고 밝혔다. 최근 정치스타트업 ‘와글’이 시민대표를 추천받아 ‘온라인 시민의회’를 만들려고 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힌 사건은 이런 흐름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당신이 왜 함부로 나를 대표하려는가’라는 질문으로 ‘시민의회’를 주저앉혔다.

조직 깃발로 모이지 않고
개인들 느슨한 자유 연대
SNS통해 즉석 모임뒤 해산

박 대통령 꼼수 담화 보곤
패러디물 만들어 SNS 공유
촛불 현장은 실시간 중계

정치 관찰자 아닌 주체로
정당들 눈치보며 흔들릴때
압박 문자 보내며 중심잡아


조직에 대한 반감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로 이어졌다. 이름도 모르는 타인들은 모르는 이와도 손쉽게 ‘친구’를 맺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속성대로 거부감 없이 모였다. 직장인 이예슬(27)씨는 지난달 4일 집회에 혼자 나가기에 앞서 페이스북에 ‘혼자 온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페이지를 개설했다. 페이지는 빠르게 공유됐다. 11월12일 이씨가 처음 ‘혼자 온 사람들’ 깃발을 들고 집회에 나갔을 때 300여명이 함께 행진했다. 익명의 개인들은 이 깃발 아래서 자유롭게 만나고 흩어졌다. 이원상(30)씨는 “주최자가 있거나 조직처럼 움직이지 않아 자유롭게 합류했다 빠질 수 있다”고 장점을 설명했다.

■ 가르치지 마라…내가 판단한다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고, 공유하고, 분노했다. 정치인, 지식인들보다 행동이 재빠를 수 있었던 이유다. 지난 10월29일 처음 광장에 모인 이래 이들은 흔들리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거국중립내각, 질서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 등으로 오락가락했던 정치권은 속수무책으로 광장을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들이 꼼수를 부릴 때마다 이를 비트는 콘텐츠가 쏟아졌다. 공분을 불러일으킨 콘텐츠는 분노의 크기만큼 에스엔에스에서 빠르게 유통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달 29일 3차 대국민 담화가 대표적이었다. ‘박 대통령이 국회에 공을 넘겨 분란을 만들고, 임기를 연장하겠다는 것’이라는 해석은 분노를 먹이 삼아 빠르게 전파됐다. 재치있게 3차 담화를 분석한 영상도 쏟아졌다. 가족들과 집회에 참여한 김명중(50)씨는 “3차 담화 보고 나서 화가 났다. 대통령이 자기 연설을 국민들이 해석하게 만들잖나. 담화문 뒤에 꼼수를 숨겨놓고 국민들이 못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학습하고, 공유하고, 분노한 뒤 행동으로 나서는 이들의 특성은 지난 8월 이화여대에서 이미 감지됐다. 지도부도 없이 자발적으로 모인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학내 커뮤니티를 통해 학습하고, 토론하고, 결정한 뒤 행동했다. 익명의 개인들 간 연대로 이어진 86일간의 점거농성은 결국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 철회’와 ‘최경희 총장 사퇴’로 이어졌다.

‘스마트 시민’은 젊은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손에 익은 중장년층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집회 현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집회 현장을 실시간 중계했고, 친구·가족들이 모인 ‘단톡방’에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지난달 26일 열린 5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50대 남성은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에 남기려는 이유도 있지만, 카톡이나 밴드로 지인들에게 사진을 보여줘서 다음 집회에 나오도록 하려고 현장 사진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 대의기구는 내 말을 들어라 광장에 선 ‘스마트 시민’들은 거듭 물었다. ‘왜 내 뜻대로 하지 않는가.’ 이들은 대의제 아래 유보됐던 주인의식을 마음껏 표출했다. 5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박가연(18·고교 3학년, 청주 거주)양은 “국민소환법이 생겼으면 좋겠다. 국민들이 계속 외쳐도 버티는데, 정말 분통 터진다. 우리가 뽑았으니까 우리가 불러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의기구인 국회를 규탄하는 데 머물던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 직후 새누리당 비박계가 탄핵안 표결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자 직접 압박에 나섰다. 한 대학생이 새누리당 국회의원 휴대전화 번호를 통째 공개한 지난달 29일, 문자메시지 폭탄이 의원들에게 쏟아졌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입장을 바꿨다. 이혜훈 새누리당 의원은 “인터넷에 새누리당 의원들의 전화번호가 공개돼 국민들의 문자메시지가 쏟아진 것이 입장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며 “누구 엄마, 어디 아파트 주민이라고 오는 문자들을 보니, 동원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시민의 뜻이라는 것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처리를 앞두고 국회의원들 앞으로 손쉽게 항의 이메일을 보낼 수 있도록 고안된 ‘박근핵닷컴’이라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이 사이트를 통해 개별 국회의원들은 최소 수천통의 항의 이메일을 받았다. 한 국회의원은 “개별 지역구 의원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에 직접 대통령 탄핵을 청원할 수 있도록 의원 사무실 전화번호 등을 제공하는 사이트 어셈블리포미(http://assembly4.me) 개발자 이아무개(35)씨는 “‘국민은 우매하지 않고, 똑똑하다’는 점을 국회의원들이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다양한 창구를 통해서 지식을 얻고 있다”며 “국민은 이제 의원을 직접 압박할 수 있다. 대의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라인 시민의회’를 만들자던 정치스타트업 ‘와글’의 제안에 대해 한 누리꾼은 이렇게 말했다. “모처럼 국회를 길들였는데 또다른 민회가 왜 필요한가. 맘에 안 들면 문자·이메일 보내면 된다.”

박수진 고한솔 기자 jjinpd@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페이스북][카카오톡][트위터]
▶ 지금 여기 [사설·칼럼][만평][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