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현실을 고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해 괴롭다”

이길우 2015.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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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의 ‘독백’

z1.jpg »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이 제철을 맞은 단풍이 한껏 물이 든 백양사 입구 쌍계루앞 연못 주변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16살 때 무작정 버스 타고 가출
내리고 보니 절, 바로 출가
 
풋내기시절 관광 온 여학생에 번뇌
환속을 꿈꾸기도 

세상은 노력 따라 지옥도 극락도
그래서 세상 바꾸는 일에 투신
 
6·10항쟁 주도하다 대공분실로 
소름 끼치고 공포 엄습
 
생사는 ‘다반사’라고 떠들었는데
아! 나는 사기꾼이었다
 
깨달음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바른 삶이 깨달음의 목적  

역사에 귀먹고 현실에 눈먼 
노회한 자칭 도인은 속인보다 못해

권력과 자본과 결탁해
종교를 고급 취미처럼 생활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
 
설법하지만 후회·번뇌 못 벗어나고
그냥 웃어본다



새벽이다. 항상 거닐던 오솔길이다. 마침 단풍이 제철이다. 전국에서 백양사 단풍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몰린다. 해 뜨기 전인데도 백양사 입구의 연못엔 카메라를 설치하고 빛을 기다리는 이들이 장사진이다. 운문암으로 오르는 오솔길은 언제나 정겹다. 문득 출가했을 때가 떠오른다. 16살이었다. 아버지는 울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고리채에 전답을 날리신 탓이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때가 중학 2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학교에 안 가고 밀밭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애들아! 공부해야 뭐 하니. 일찍부터 돈을 버는 것이 낫다. 우리 돈 벌러 나가자.”

아버지 숨지고 가난 지긋지긋

  그렇게 가출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주린 배를 한번이라도 채웠으면 했다. 도시로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전남 장성군 장성읍에 내리니 백양사 가는 버스가 있었다. 무작정 타고 봤다. 내리니 절이 있었다. 그길로 출가했다. 가출이 곧바로 출가로 이어졌다. 풋내기 사미승 시절 때는 해탈과 번뇌에 대해 밤낮으로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무 하고, 가마솥에 밥 짓고, 반찬 만들고 하는 승려의 일과도 힘들었다. 가장 큰 번뇌는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싸우는 일이었다. 당시 관광사찰 백양사에는 수학여행 오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주지 스님은 대부분 절 안내를 나에게 시켰다. 어떤 여학생은 수행여행을 다녀간 뒤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환속을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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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서 장에 내다 팔았다. 장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책을 꼭 한 권씩 사 오셨다. 내가 호롱불 아래서 그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길 원했다. 그때 읽은 책들은 <홍길동전>, <전우치전>, <서산, 사명대사>, <원효대사>, <장화홍련전> 등이었다. 대부분 권선징악이었고, 영웅이 세상을 구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세상을 구하고, 민중의 고통에 일일이 화답하고 싶었다. 무책임한 소리, 현실성 없는 관념적인 말을 하지 말기로 했다. 번뇌로부터 해탈하고 위대한 혁명을 꿈꾸었다.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
 부처님은 왕자로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버렸다. ‘위대한 버림’이었다. 6년간 고행을 했다. ‘위대한 수행’이었다. 깨달음을 얻고 민중의 삶으로 파고들었다. ‘위대한 회항’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세상은 번뇌로 가득 차 있으니 해탈은 피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은 노력 여하에 따라 지옥도 될 수 있고 극락도 될 수 있다. 번뇌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솔직하게 보는 것만이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 번뇌를 갈고닦으면 자유가 되고 해탈이 된다. 어떤 번뇌라도 집요하게 그 실체를 파고들면 도통할 수 있다고 여겼다.

말로만, 입으로만, 글자로만…

  그래서 세상 바꾸는 일에 뛰어들었다. 외부 모순(업)인 독재정권에 대항한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때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이었다. 서울 광화문 성공회 성당에서 6·10대회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붙들려 갔다. 눈을 가린 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빨간색으로 도배한 방에는 작은 욕조가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소름이 끼치고, 불안과 공포가 일었다. 죽음이 눈앞에 왔다. 그때 왜 내가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가를 생각했다. 평소 생사는 ‘다반사’라고 설법하며 죽음을 초월한 것같이 행동했는데….
 생사는 일여(一如)하고 생사는 본디 없어서 나의 오고 감이 생사와는 무관하다고 도인처럼 떠들며 살아왔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겁에 질리다니 이게 될 말인가! 그때 크게 느꼈다. 아! 나는 사기꾼이었구나. 나는 앵무새였구나. 말로만, 입으로만, 글자로만,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달았고 떠들어댄 것이다. 죄지은 것 없이 옳은 일만 했는데 왜 떨린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은 안정되고, 담담해졌다.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크게 한번 죽어 다시 살아남)이다. 이렇게 희생당해 이 땅의 민주화가 된다면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면서 승려의 의무를 못한 죄가 참회된다고 생각했다.
 민중민족종교인 불교의 승려들이 전 중생을 위해 역할을 못했으니 그 죄가 무척이나 컸다. 그런데 6·29 항복선언을 국민들이 받아내며 나는 가까스로 살았다. 중생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
 z3.jpg » 백양사 뒤의 암자인 운문암으로 오르는 길의 계곡엔 낙엽이 쌓여 있다. 지선 스님은 30년간 서옹 큰스님을 모시는 홍복을 누렸고, 이 계곡길을 함께 오르내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앉은 채로 입적한 큰스님의 미소

  운문암으로 오르는 길에 고목이 있다. 2003년 앉은 자세로 입적(좌탈입망·坐脫入亡)하신 서옹 큰스님을 모시고 이 길을 오르내릴 때 그분은 항상 이 고목에 걸쳐 앉으셔서 쉬시곤 했다. 한적한 산중에 티없이 맑은 미소로 앉아 계신 모습은 천년 고불(古佛)이나 한 마리 고고한 학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이제 그런 미소를 띨 수 있을까?  큰스님에 선(禪)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은커녕 더 큰 의심덩어리만 선물하시곤 했다. 나는 아직도 선이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 큰스님을 30년 모시는 홍복을 입었는데도 말이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묻는다. “스님은 깨달으셨나요?” 나는 지체 없이 대답한다. “아뇨, 아직 멀었어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러나 깨달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실천이 없고, 관념화·신비화된 언어가 난무한다. 깨달음(覺)이 무언지는 이미 나온 교와 선에 관한 책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다. 왜 깨달으려고 애쓰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 함께 지은 업보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라는 모든 이들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 이외에 어떤 계급, 어떤 계층을 막론하고 해결해야 할 모순(문제)이 있다. 부처님은 이런 사바세계의 총체적인 문제의식에서 출가하셨고, 성불하셨다. 이런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모든 현상은 원인인 인(因)과 조건인 연(緣)이 상호관계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바른 삶이 깨달음의 목적이어야 한다. 삶의 필요에 의해 깨달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대승불교의 깨달음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것은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 깨달음은 참된 삶의 길을 터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엔 스스로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 역사의 소리에 귀먹고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멀어 비겁한 침묵을 하고 있는 노회한 자칭 도인(道人)은 속인보다 못한 인물이다. 깨달음은 현실의 모순을 고치는 데 써야 한다. 나는 그러지 못해 괴롭다.

z2.jpg » 백양사 쌍계루의 연못에 비친 가을 단풍의 모습.

그림자 비치는 연못, 가을이 깊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산에 올라와서 바라보는 백양사는 참 아름답다. 형형색색의 나뭇잎이 백양사를 품고 있다. 다시 진정한 깨달음을 생각해 본다. 현실과 밀착돼 있으며, 현실고(現實苦)에 대해 무한히 부정하고, 무한히 항상 발전해가는 영원한 진리가 깨달음이다. 문득 대학생들이 생각난다. 젊은 시절 많은 대학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독재에 항거하고, 그대들의 삶을 바쳐 이 나라를 갈아엎어야 한다고…. 지금 와서 생각하니 미안하기만 하다. 나도 못 지킬 것을 마구 뱉어낸 셈이다.
 나는 종단 개혁에도 힘썼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권력과 자본과 결탁해 마치 종교를 고급 취미 생활처럼 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집착을 없애야 해탈이 온다고 느끼고, 설법하지만 후회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웃어본다. 그리고 읖조린다.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여/ 부처가 되는 일/ 그러나 홀로 가지는 마라/ 거기 부처 되는 자리 없다/ 사람과 함께 울고 웃으며/ 비인간화 되어가는/ 세계의 껍질을 깨라/ 부처 되는 자리, 바로 거기다”
 백암산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쌍계루의 그림자가 낙엽이 떠다니는 연못에 비친다. 가을이 깊다.
 (※지선 백양사 방장과 지난 2일과 3일, 이틀간 인터뷰한 내용을 지선 스님의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장성/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천부경(하늘소리) 소개 / 천부경(하늘소리) 원문 / 천부경 .....엄청난 경전.....


[최치원선생님 천부경(하늘소리)원문][농은(農隱)선생 유집본 천부경(하늘소리)원문]

천부경(하늘소리)은 한민족 최고 조상님이신 하나(느)님[=한인(桓因)]께서 하늘, 땅, 사람의 우주변화이치(宇宙變化理致)를 수리(數理)로서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복본다물(復本(多勿))에 대해서 두뇌집중으로 나올 수 있도록 밝힌 우주진리(宇宙眞理)이다. 천부경(하늘소리) 원문의 전승은 일만년역사의 깊이 만큼 여러 문자형식으로 나타난다. 천부경의 문자 전승방법상 유한성을 고려해서, 여러 방식을 고안하여 널리 유포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두가지를 소개한다. 구체적인 천부경(하늘소리)원문의 기원과 유래는 천부경의 기원과 유래에서 클릭하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81자진본천부경(天符經:하늘소리)


일시무시일석삼극무 一始無始一析三極無


진본천일일지일이인 盡本天一一地一二人


일삼일적십거무궤화 一三一積十鋸無櫃化


삼천이삼지이삼인이 三天二三地二三人二


삼대삼합육생칠팔구 三大三合六生七八九


운삼사성환오칠일묘 運三四成環五七一妙


연만왕만래용변부동 衍萬往萬來用變不動


본본심본태양앙명인 本本心本太陽昻明人


중천지일일종무종일 中天地一一終無終一


 

 

 

두뇌집중 천제한인 참말씀의 홍익인간 김은식 모심


[천부경-역사-일류화 신비 우주진리완성3단계 두뇌집중]<= 카페가입



천부경은 천부인(天符印)을 설명하는 경전이다. 그래서 천부경이 천부인이며 천부인이 천부경이다. 천부인 세 개 즉, 원(○)방(□)각(△)으로 이루어진 삼신일체(三神一體)로 하나되는 천부경은 환국(桓國)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경전이다. 환웅대성존(桓雄大聖尊)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였는데 후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님이 신지의 전서(篆書)로 써진 옛 비석을 보고 천부경을 다시 한자로 옮겨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물론 위의 최치원 선생님의 81자가 진정한 천부경이 맞는가? 그 대답은 "맞습니다."입니다. 그것은 삼신한인한웅한검한민족으로 면면히 내려오는 우리의 조상을 맞이하는 한(一)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뇌집중으로서 현실적용할 수 있는 천부(天符)라는 하늘에 부합되는 경(經)으로서 모든 우주의 진리(眞理)가 다 들어있는 심오한 우주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오한 <천부경>을 모르고 주역이나 음양, 오행만으로 동양의 정신세계를 이야기 한다면 동양철학은 단순한 점술 또는 미신으로 전락하기 쉽다. 이러한 천부경은 하늘(天)의 밝은 기운을 알아야 하고, 땅(地)의 참된 기운을 알아야 하고, 인간(人)의 마음이 천지인(天地人)으로서 하나(一)로 연결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한(=一=하나님=하느님=한인)의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최치원 선생님의 81자 천부경은 우리의 조상과 하나(一)되도록 하는 우주진리의 경(經)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부경 우주진리의 핵심은 현재의 여건에서 우리의 를 우리의 최고 조상신이신 하나(一)한(一)결같이 만들게 하고 있는 경(經)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우주진리로서 두뇌집중 하도록 하여서 하나(一)되도록 함으로서 천부경의 우주진리로서 우리의 현실을 신나는 현실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설령 천부경을 시기하는 자가 최치원 선생님의 81자 진본 천부경을 부정한다고 해도 실제로 천부경은 우주진리이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시기하는 자의 부정을 필요 없게 만드는 위력서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고 천부경을 부정한 자는 81자 진본 천부경의 우주진리를 득(得)한자에게는 같은 조건의 비교에서 반드시 낙오자로서 처지게 되는 것임으로 천부경의 우주진리를 등한시 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인간이면 꼭 알아야 할 우주진리1-012360-6666이 되는 것입니다. 위의 81자 진본 천부경은 최치원 선생님께서 전서로 된 고비[전고비(篆古碑)]를 보고 한자로 번역하여서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천부경은 어느 쪽에서 칸을 세어 보아도 9칸의 구궁수가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배열에서 천부경의 형식은 9×9=81형식의 하나(一)의 우주체로서 "피라밋형식의 생명에너지"에 배열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좌우로 횡으로 9칸임을 의미할 때 형식적으로 피라밋이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이렇듯 천부경의 배열은 좌행서 우행서로서 판단하지 않고 피라밋형식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천부경은 한님(=하나님=하느님)시대부터 국가지배이념이었습니다. 천부경을 버린 후 천부경의 자리를 차지한 사상체계가 불교였고 유교였고 기독교였고 이슬람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와 웅비하는 길이 천부경임을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천부인을 설명하는 천부경은 하나(一)님의 인간계(人間界)를 위한 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一)님의 인간계(人間界)를 위한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어서 외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진리로 나오는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천부경을 외워서 암송만 하여서 기도만으로서 현실적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진리는 우주진리 1-012360-6666이기 때문에 우주진리1-012360-6666에 따라서 제대로 되는 해석의 역사를 공부하고 제대로 되는 해석의 정신을 공부하고 제대로 되는 해석의 수련으로서 스스로의 위치에서 현실적용 하여야 할 것입니다.
- 김 은식 白


참고)
지나웹을 뒤지면, 천부경 해설서를 볼 수 있다. 이제는 천부경의 자료도 지나에서 해설판까지 해서 존재한다. 최치원선생님은 8~9세기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이자 국제통이었다. 열두 살 때 당나라에 조기 유학을 떠나 빈공진사에 급제하였다. 중국에서 최치원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 최치원선생님이 벼슬을 한 적이 있는 양저우시(揚州市)에서는 당성(唐城) 유적지에 최치원선생님 기념관을 짓고 10월 15일을 '최치원선생님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 시진핑주석이 한중정상회담에서 두 번씩이나 거론한 최치원선생님을 한국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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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동영상 : 꾹 눌러보세요. - 심진섭 작곡. 역사 오페라 “단군왕검” 중 <천부경>
참고동영상 : 꾹 눌러보세요. - 김숨 - 천부경노래(제2회 ‘천부경의 날’ 학술대회)
참고동영상 : 꾹 눌러보세요. - 기천문 천부경

   
우주 차원에서 보면 지구는 에너지 레벨이 낮고 진화가 덜 된 별이다. 그래서 피라밋이 필요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피라밋의 역할은 부족한 지구에너지를 보완 공급해주는 에너지 기지인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구에너지는 차원이 낮고 양도 부족하다.
세계 각처의 피라밋을 통해 지구는 외계로부터 보다 강력한 우주에너지를 받아 들이고 있다. 뛰어난 외계문명에 의해 피라밋이 건설되었고 우주와 지구를 잇는 통로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영향력은 물론, 지구상의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된다.
 
예수, 모세, 피타고라스가 우주의 진리를 체득한 곳이 바로 피라밋 속이다. 예수는 피라밋 에너지 속에서 영적 스승들로부터 비전을 전수 받고 크리스트로 명명 받았다. 피라밋은 단순한 돌무덤이나 고대 왕들의 무덤이 아니다. 지구를 위한 성자들의 깨달음을 위한 계시 비전의 장소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피라밋은 영적인 존재를 양성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인류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입할 때를 대비해 인류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유대 민족의 이집트 탈출(출애굽: The Exodus)의 주인공인 모세는 이집트 여왕의 양자(왕자)였으며 소수의 선택받은 자에게만 주어졌던 피라밋의 비밀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거기서 우주에너지를 체험했고 모세는 유대인이 홍해에 도착했을 때 피라밋에 내장되어 있는 강력한 우주력을 사용해 물질 즉, 홍해의 바닷물 일부를 분해, 잠시 증발시켰다.
미래의 진화된 인류는 이런 종류의 힘을 이용하여 인류에게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자의 大피라밋은 피라밋 저변의 한 변이 230.34m의 정사각형이고, 네 변의 합계가 921.392m이나 이것을 높이 146.6m로 나누면 원주율(3.1415…)의 정확히 두 배인 6.28이 된다.
피라밋 구조의 특징은 극히 현재의 인류가 상상할 수 없는 고도의 물리 역학적 지식과 천문학과 우주 과학적 지식이 응용되었고 그리고 인체의 해부학, 영적 과학이 구사되고 있다.
이 피라밋은 축성한 하나의 돌 무게가 20톤이 넘는 중량물인데도 돌간의 접착면의 클리어런스(간극)가 1/8 ( 1.5mm)라는 것이다. 현재의 건축 기술상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피라밋은 일면이 정확히 오차 범위가 0.065°이하로 진북을 향하고 있다. 피라밋 파워는 진북과 일치할 때 최고의 에너지 상태가 된다. 이 오차의 각도도 일만여년 전에 지어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다시 말하면 북극성의, 하늘의 진북의 세차운동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참고삼아 얘기하면 세차운동이란 천구의 북극이 1°로 팽이 운동을 하는데 26,000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大피라밋은 144,000개의 marble(대리석)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 숫자 또한 성경, 요한 계시록(14장)의 「144,000명이 부르는 노래」와 일치한다. 이 피라밋은 「돌에 새겨진 성경」이다. 피라밋과 요한계시록은 둘 다 인체를 얘기하고 또 우주 과학과 지구 인류의 미래의 비전을 얘기하는 사명을 가졌다. 확실히 얘기하건대 이 돌에 새겨진 144,000명의 빛의 존재는

"이 지구와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예언의 완성을 위하여 길고 긴 고난의 역사와 윤회를 마감하는 생명의 노래되어 지금 바야흐로 온 하늘과 땅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 피라밋은 이집트의 「불사의 신 토트」, 그리스 「불멸의 신 헤르메스」, 「성경의 신비 에녹(Enoch)」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우리 은하계의 「불사조의 주기」를 나타내고 있다. 지금이 불사조의 주기의 끝과 새로운 시작이다. 이 주기는 우리 태양계 황도대 일주기인 26,000년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피라밋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의 도시, 지하의 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며 고대로부터 예언된「성스러운 땅의 문을 여는 열쇠」다시 말하면「에녹(Enoch)의 열쇠」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는 빛의 言語인 - 우주 창조의 원음인 AUM(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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