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 장관 권기홍·서정희 부부



대구시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더불어 복지재단 진인마을’에는 중증 장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 복지재단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서정희(54) 원장. 그녀는 신임 노동부 장관 권기홍(54) 씨의 부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부인인 서 원장이 재단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재단을 설립한 장본인은 권 장관이다.
겉으로 보기엔 남부럽지 않게 잘살 것만 같은 이들 부부가 이렇게 복지사업에 매달리는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큰아들이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것. 그들이 세운 복지시설인 ‘진인마을’에서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돌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사생활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데, 이 부부는 어쩌면 치부라고 할 수도 있는 아들 얘기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오히려 이런 것이 무슨 기사거리가 되느냐고 반문한다.
“남들이 듣기에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기고 살 수는 없는 일이죠. 특히 이런 일은 숨기면 숨길수록 자신들만 힘들어집니다. 현실을 드러내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숨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전혀 숨기고 싶지 않은 뇌성마비 아들


아들이 뇌성마비라는 사실을 안 것은 지난 75년,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결혼한 직후 권 장관은 학업을 위해 먼저 독일로 떠났고 임신 7개월째였던 부인은 한국에 남아 아이를 낳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느 아이와 다름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생후 6개월이 지날 무렵 아들이 심한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황급히 병원을 찾았지만 곧 진정돼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후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남편을 따라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에게 그런 일이 생기리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독일에 가서도 아이의 성장이 조금 늦은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권 장관의 친구인 한국인 의사를 만났는데, ‘아이가 생후 12개월이 됐는데 걷지 못하는 게 조금 이상하니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독일에 입국할 때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별 이상이 없었어요. 그래서 걷는 게 조금 늦은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았는데 아이의 뇌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하는 거예요. 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죠.”
독일에 가기 전에 앓았던 고열의 후유증으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 그때 제대로 조치를 취했더라면 아이를 장애인으로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생후 6개월 상태에서 발육이 멈춰 언어장애가 왔으며, 제대로 걷지 못해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그때부터 서 원장은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등 유럽지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할 수 있는 치료를 모두 다 해봤으나 아이의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처음엔 점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아이들과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독일이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복지시설이 잘 돼있어서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은 것이었어요.”
그렇게 아들을 치료하는 데 매달려 있는 사이 양가 어른들은 둘째를 낳으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그들은 둘째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둘째를 가질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이들을 더욱 고민하게 만든 것은 ‘큰애가 받아야 할 사랑을 둘째가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양가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결국 둘째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의 관심이 큰아이에게만 집중돼 둘째인 딸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딸애는 몸이 불편한 오빠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모가 장애를 가진 아들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 자기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저희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키운 점도 있죠.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오빠와 함께 놀았어요. 오빠는 밖에 나가서 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작은애한테 너무 큰 짐을 지어 준 건 아닌가 미안한 생각도 들더군요.”
그렇게 제대로 신경도 못 써 줬는데 잘 자라서 너무 고맙다고 한다. 공부도 잘해 지금은 의대에 다니고 있다. 부모님이 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고 오빠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재활의학을 전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대로 놔둘 생각이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는데, 이들 가족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주위의 시선. 특히 친척들은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데 뭐하러 떠벌리고 다니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어디를 가든 아들을 꼭 데리고 다녔어요. 제 아들이 가는 걸 꺼리는 모임은 가지 않았죠. 저희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꼭 아들과 함께 오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어요.”

돌봐 줄 사람 없는 장애인 위해 복지재단 설립


지난 84년 말 권기홍 장관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권 장관은 영남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의 생활은 대구에서 시작됐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의 복지상황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이었다. 독일에 가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막상 아들이 장애인이 되고 나니 그런 것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독일에 있을 때는 장애인이 병원을 찾으면 언제나 교수가 달려나와 특진을 해 줬어요. 치료비는 전혀 받지 않았고 물리치료 받을 땐 독일 정부에서 교통비를 주었죠. 그런 시스템에서 치료를 받다가 한국에 오니 상황이 너무 다른 거예요. 한국에 와서 1년 동안 10kg이 빠질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복지 정책이나 시설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몸이 조금 불편할 따름인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장애인이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 한때는 다시 외국에 나가서 살려고도 생각했다.
한국의 현실에 어느 정도 적응할 때쯤 그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참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족상황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장애인 가족들 중에서 가장 나은 편이었다. 장애인 아이와 함께 자살하는 사람, 아이를 버리는 사람 등 삶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아이를 포함한 수많은 장애인들이 고통 속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장애인들은 신체적 고통보다 사회에서 소외되는 슬픔이 더 크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보살펴야 할 대상인데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많은 장애인들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흔히 ‘못사는 집 애들 중에 장애인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말입니다. 특별한 원인이 없는 이상 장애인이 될 확률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에 있는 장애인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꼭꼭 숨겨져 있어서 잘 모르는 것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살기에 바빠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았지만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함께 일하자고 청하는 한편 지인들을 동원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친정과 시댁 등 친인척들을 모아 취지를 설명하고 계를 만들어 월 2천원의 회비에 경조사에 들어오는 부조금까지 기금으로 넣었다. 그런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자 친구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복지재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5억원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원래 대구 시내에 만들려고 했지만 돈이 부족해 땅값이 조금 싼 교외로 부지를 옮겼다. 팔공산 자락의 민가가 거의 없는 곳이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외에 있으니까 공기도 좋고 바로 뒤에 산이 있어서 산책하기에도 좋아요. 그리고 시내에 있는 것보다 더 넓게 쓸 수 있으니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잖아요. 건물 옆 남는 땅에다 채소를 심어 직접 길러서 먹고 있어요. 시내에 있었으면 이런 재미와 기쁨이 없었겠죠.”
꿈을 이루기 위해 이들 부부는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85년 처음 복지재단 설립을 약속하고 97년에 그 꿈을 이루었으니 정확히 12년 만이었다. ‘더불어 복지재단’은 부부의 눈물과 땀이 일궈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복지재단을 만들기 위해 서 원장은 대학원을 다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서 원장은 지금도 한 명이라도 새로 들어오면 눈물을 참기가 힘들다. 대부분 버려졌거나 돌봐 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 이곳에서 장애인들을 돌보다 보면 ‘그래도 우리 아들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친구처럼 지내며 다시 신혼 즐기는 주말부부


사실 복지재단을 만들자고 한 사람은 권 장관이지만 대학 교수로 있어야 했기에 재단 일은 거의 부인인 서 원장의 몫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렇게 두 사람은 궁합이 잘 맞는 부부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모임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친구사이로 지내다가 결혼까지 하게 된 것. 특별히 프로포즈를 하지도 않았는데 오래 같이 지내다 보니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만나 7∼8년을 연애하다가 결혼했어요. 시댁이 명문가라서 처음엔 반대도 했었는데 끝까지 결혼하겠다고 하니 허락하셨죠. 시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었으나 당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랫사람이라도 사과를 하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애를 하고 명문가로 시집을 가니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그런데 복지재단에서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눈물부터 흘린다. 장관 사모님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고생을 사서 한다는 것. 친구들을 설득하는 데 조금은 힘들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저보고 ‘미친년’이라고 그럽니다. 호화로운 생활이 어울리는 사람인데 궂은 일 하며 살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전 신경 안 씁니다. 허름한 티셔츠에 몸빼바지 입고 일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이렇게 인생을 폭넓게 살게 해 준 우리 아들한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서정희 원장은 참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고 안 되는 것은 일찍 포기한다. 그런 성격 덕분에 매사를 편하게 생각하고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복지재단에서는 물론이고 어디를 가든 그녀가 있는 곳이면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바뀐다.
반면 권기홍 장관은 원칙에 충실한 사람으로 자기가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성격이다. 특히 생명의 존엄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세심하고 자상한 편이라서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어떻게 보면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큰 다툼 없이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가끔 싸우기도 하는데 주로 사소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다른 부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는 싸우고 나면 얘기하기도 싫은데 남편은 10분이면 다 풀려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합니다. 그러면 저도 자연스럽게 화가 풀리죠.”
이번에 권 장관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본의 아니게 별거중이다. 서울에서 같이 지내며 남편 내조를 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특별히 내조한 것도 없을 뿐더러 복지재단 일을 맡아서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도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와 일주일 동안의 회포를 푼다.
“이렇게 주말에만 만나니까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기분이라 너무 좋아요. 일주일 동안 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면서 기다리다 주말이 되면 가슴이 설렙니다. 식사나 빨래 등을 챙겨 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서로 이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권 장관이 공직에 있는 동안은 주말부부로 지내야 하는 신세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편안한 마음이다. 서로 일이 바빠 전화 통화도 자주 못하지만 애정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이렇게 부부간에 사이가 좋으니 집안이 화목하고 행복이 가득할 것 같다. 장관이 되고 나니 아들이 가장 좋아하더란다. 장관실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조금 쑥스러워하는 권 장관이지만 아들을 위해 기꺼이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아빠가 노동부 장관이 됐다고 하니까 우리 아들이 ‘시위하는 사람들 말리는 일을 하는 거냐’고 물어 보더라구요. 그래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죠. 그랬더니 장관실에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꼭 데려가겠다고 약속했어요.”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가족에게 장애인이라는 굴레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해야 한다는 진리는 없다. 어떤 것이든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 현명한 부모의 선택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그들에게는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능력뿐 아니라 행복을 전파하는 힘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글 _ 배만석 기자 사진 _ 김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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