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으로 하늘의 비밀을 훔쳤습니다.

밝은빛태극권 보급하는 박종구 선생

황길재(정신세계 2000년 2월호)


국내에 태극권을 보급한 지 올해로 11년째가 되는 박종구(33) 선생. 태극권의 달인이라는 호칭이 영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젊었다. 훤칠한 호남아형 외모에서 풍기는 부드러운 인상이 얼핏 무술인이라기보다 수도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실, 서른 셋이라는 나이에 한 분야의 명인이라는 칭호를 듣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이는 평생을 걸려도 성취하기 어렵다는 태극권 공부를 20대 중반에 완성했다. 태극권을 만난 뒤로 다른 생각을 품을 틈 없이 매진한 결과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 그가 짊어진 사명은 태극권의 완성과 보급에 있는 듯하다. 태극권과 그이의 삶은 혼연일체였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박종구 선생은 충북 청원군 서판리에서 7형제 가운데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제시대 학교에서 유도와 검도를 했고, 7형제도 모두 운동을 해 이른바 [운동권(?)] 집안을 이루었다. 집안 분위기가 그런데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이어서 그는 자연스럽게 무술을 접할 수 있었다.

태극권과 운명적인 만남

"큰 형님이 배구를 하셨어요. 둘째 형님은 태권도 대표선수였고요. 셋째 형님이 나중에 저희들이 태극권에 처음 입문하도록 끌어 주신 분인데, 원래는 유도 선수였습니다. 넷째 형님은 소림권, 쿵푸를, 다섯째 형님은 합기도를 했어요. 어렸을 때는 넷째 형님한테 쿵푸를 배웠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검도, 고등학교 때는 태권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태극권으로 전향한 것이죠."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그해 8월 바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태극권 수련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모신 태극권 스승은 그와 12년 차이가 나는 셋째형 박종학 선생이다. 박종학 선생은 일찍부터 수련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나 서울에서 운동을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 노가식 하나를 3년 걸려 배웠는데, 노가식 형(型)이 끝나니까 눈이 조금씩 열리더군요. 당시 저는 시골에서 셋째 형님과 둘이 살았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1시간 정좌하고 5시에 산에 나무하러 갔습니다. 죽은 나무를 잘라 메고 온 다음에 형님은 서울에서 온 분들을 지도하고 저는 밥하고 빨래를 했지요. 그렇게 공부하며 배웠어요."

그가 태극권을 향해 품은 열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태극권이 생소한 것이라 그가 연습하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들이 "사내 녀석이 왜 자꾸 춤을 추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렇게 3년을 배우고, 혼자 수련하기를 3년. 그 뒤 3년 동안은 스승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그리고 나서 한참은 혼자 수련에 매달렸다.



힘을 쓰지 않고 뜻을 사용한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의문은 그이의 머리 속에 꼬리를 물고 자리잡았다. 어쩌면 그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태극권 공부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태극권 책들을 보면 여러 말들이 나옵니다. [태극권은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제압한다’ [태극권은 느린 것으로써 빠른 것을 제압한다] [태극권은 힘을 쓰지 않고 뜻을 사용한다(用意不用力)] [태극권에는 기침단전(氣沈丹田)해야 한다] [전신방송(全身放放 )해야 한다]…….
수련을 하기 전에는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게 다가오는 가르침들이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그 뜻을 헤아리기 힘들었어요. [용의불용력(用意不用力)해야 된다]고 하는데 뜻(意)은 어디에 있죠? [힘(力)을 쓰지 말고 뜻(意)을 사용해야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뜻을 알아야 사용할 것 아니에요? [마음(心)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기(氣)를 병졸(兵卒)로 삼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마음(心)은 어디에 있죠?
처음 얼마 동안은 그저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부분들이 차츰차츰 저를 답답하게 하더군요. 과연 마음(心)은 무엇인지. 어느 곳에 있는지. 또 뜻(意)이란 무엇인지. 옛날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천지만물은 다 기(氣)라고 했는데요, 무얼 두고 기(氣)라 하는지 궁금할 수밖에요. 그뿐입니까? [무위중유위(無爲中有爲)하고 유위중무위(有爲中無爲)하라] [허중실(虛中實)하고 실중허(實中虛)하라]는 얘기는 과연 어쩌라는 것인지? 점점 그런 의문이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어요."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그는 자신이 품은 의문에 답을 줄 만한 스승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도리만 깨닫는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북경에서 고수들과 만나다

93년 중국과 수교를 하자마자 그이는 북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가 한 일은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벌인 추수(推手:혼자서 하는 형의 연습이 숙달된 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대고 하는 수련)였다. 그 와중에 일본 유학생들도 많이 혼내 주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칠십 가까운 나이의 조선생이라는 노인과 맞붙게 되었다.
노인네가 다칠까 싶어 살살 조심하는 그이에게 한 마디 불호령이 떨어졌다.

"까불지 말고 최선을 다해!"

그 순간 그이는 하단전에 기를 모아 폭발시키듯 노인의 가슴을 쳤다. 하지만 공중으로 붕 떠올라 화단에 거꾸로 처박힌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이였다.

"그 순간 아픈 게 문제가 아니고 하늘이 다 노랗게 보였어요.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성심껏 닦은 것이 쓸모가 없고, 다 거짓말이었구나 싶은 게 정말로 눈앞이 깜깜해지더군요."

그 길로 한국에 돌아와 생활을 다 정리하고 다시 북경으로 들어가 몇 년을 보냈다. 그는 동생이 다치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는 셋째형을 피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수라고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추수를 계속했다.

"추수는 하나의 검증 방법입니다. 형을 열심히 해서 모양을 갖췄을 때 그 모양에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지요. 제대로 잘 익히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기는 도리
그는 중국과 대만을 오가며 수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그에게 하늘의 비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옛말에 [소성(小成)을 지나서 대성(大成)에 들게 되면 반드시 하늘의 비밀을 훔칠 수 있다], [태극권이 비록 작은 기술이기는 하나 능히 큰 도를 훔칠 수 있다] 는 얘기가 전하지 않은가 말이다. 다행히 애써 갈구한 보람이 있었는지 이에 대해선 뒤에 여러 스승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그이 스스로 깨닫게 된다.

"공부를 하면서 세 번 크게 벽에 부딪혔습니다. 한 번은 모양을 익히고 나서 제 뼈대들이 다 풀어지기 전이었는데, 제 뼈대들을 한 번 벌리고 나서 벽을 넘었어요. 두 번째는 조 선생님을 만나서 [나를 버리는 도리를 깨달아 운용하는 이치]를 배웠습니다. 그 다음에 [무위중유위(無爲中有爲)하고 유위중무위(有爲中無爲)하는 도리]를 깊게 참구(參究)하다가 어느 날 스스로 깨우쳤어요."

그 다음부터는 크게 의혹을 품는 일이 없어졌다. 그제야 그이는 귀국했다. 공부는 중국에서 마쳤지만 그 공부가 한국적인 언어와 모양을 갖춘 것은 귀국한 뒤의 일이었다.

"공부 시작 전에는 모르는 것이 많았어요. 중간에는 다 안다고 생각했죠. 지금에 와서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어요. [특이공능]이니 [육신통]이니, 하는 공능의 뿌리는 하나의 사고 작용에서 생겨납니다.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나면 응(應)에 의해서 삽니다. 응물자연(應物自然). 이제는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을 줄 압니다."

그이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무술은 네 단계를 거친다. 짐승 같은 단계, 초식의 단계, 조화의 단계, 응물자연의 단계가 그것이다.
[짐승 같은 단계]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기고,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이기는 단계다. [초식의 단계]는 기술의 단계다.
[조화의 단계]는 자연의 힘을 활용하는 단계이다. 여기까지는 소성의 단계로 아직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기는 단계다.
[응물자연]의 단계가 되면 [허중실(虛中實)하고 실중허(實中虛)하는 도리]가 생겨나게 된다. 이 도리를 알게 되면, 비로소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기는 도리를 알게 된다. 여기서는 몸을 크다고 얘기하고 마음을 작다고 얘기한 것이다. 근골을 쓰는 것을 크다 하고, 기(氣)를 쓰는 것을 작다 한 것이다. 기를 사용하는 것을 크다 하고 마음(意)을 쓰는 것을 작다 한 것이다.

태극권을 가지고 갖은 재주를 다 부려도 그것이 천지만물로 화하지 않으면 대성(大成)이라 할 수 없다. 태극권이 용(用)에 치우쳐 있으면 소성(小成)이요, 그것이 터져나와 생활의 동작과 연결되면 대성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야 공부를 마쳤다 할 수 있다.
태극권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요,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이다. 따라서 한 치의 오차가 허용하기 힘들다. 진정한 무술은 인간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연구한 하나의 결과물인 것이다. 특히 태극권은 스스로 자신의 안으로 탐구해 들어가 몸을 연구하고, 뼈대를 연구하고, 장부(臟腑)를 연구하고 그 다음에 그 안을 흐르는 에너지를 연구하고, 또 그 에너지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한다.



우리의 정서를 담은 밝은빛태극권 선보여
태극의 이치는 한순간 탁 터져나오는 깨달음을 얻으면 연습이 필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쓰임새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권의 연습이 필요하다. 태극권은 굳어 버린 특정한 형식이 아니라 태극의 원리를 구현하는 마음 자체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는 최근 밝은빛태극권의 보급에 나섰다. 정통 태극권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필요와 정서에 맞게 우리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 밝은빛태극권이다. 그는 기존의 태극권이 독특한 형식은 남아 있지만 처음에 생겨난 그 본래의 향기·모습·본질은 크게 달라져 버린 이유를 발견했다. 사람의 몸 안에서 방해 작용을 하는 원인이 그것이었다. 이제 박종구 선생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프로그램을 강조한다.

"기공을 하건 태극권을 하건, 아니면 몸을 움직이는 어떤 운동을 하건, 뼈를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공부가 항상 겉에서만 맴돌게 되요. 다시 얘기해서 기운이 표피에서만 돌게 되는 겁니다. 기운이 처음에는 표피를 돌고 근육 속을 돌고, 그 다음에 뼈대 속을 돌고, 장부 속을 돌아서 심기까지 미치고 마음까지 이르면 그 다음에 비로소 에너지가 몸밖으로 흘러나오게 되죠. 기가 이렇게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우리 몸 안에 있는 [태]라고 하는 요소들이에요. 태를 제거하지 못하거나 이것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면 공부는 절대 깊어지지 않아요."

그는 또 지금의 태극권 공부가 서양의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연역적 방식을 택한 것이 오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동양적 사고에 입각한 귀납적 방식으로 바꿀 것을 주장한다. 즉, 24식이니, 진가니 오가니 나누기 전에 체(體)를 닦고 나서 그 뒤에 용(用)을 연구하자는 것이다. 궁극에는 체와 용이 하나로, 아니 하나라고 할 수도 없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명상이나 선 같은 다른 공부와 차이가 없다. 그이는 태극권이 성명쌍수의 수행법인 것은 틀림없으나 명을 앞서 닦을 것을 강조한다.



태극권은 한 장의 보물지도

그는 태극권을 한 장의 보물지도라고 여긴다. 보물지도는 말할 것도 없이 보물 그 자체는 아니다. 그이도 태극권이라는 보물지도를 사랑하지만 다른 공부와 마찬가지로 결국 진짜 보물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그이가 굳이 태극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태극권은 검증이 빠릅니다. 공부가 되기 전에 스스로 알죠. 앞에 있는 선생과 내가 다르니까요. 도리가 금방 보입니다. 게다가 무척 재미있어요. 정말 재밌습니다."

그의 말대로 운동과 활동이 부족한 현대인에게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오락의 기능까지 겸한 것이 바로 태극권이다.
현재 형제 가운데 무예를 업 삼아 하는 사람은 그이 혼자이다. 밝은빛태극도관을 열고 난 뒤에는 동생이 와서 사범으로 도와주고 있고, 박종학 선생도 강의를 나가는 틈틈이 장문인으로서 도관 일을 돕고 있다. 그는 밝은빛태극도관과 같은 곳이 병원 숫자보다 많아져야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가 된다고 여긴다. 아마 [밝은빛]에 세상에 빛이 되라는 의미를 담은 것도 그런 깊은 뜻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는 배우는 이의 자질보다 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옛날과 달리 많은 정보가 공개돼 있고 효과적인 방법이 많아 초심자라도 안내만 잘 따라오면 3년 안에 공부를 끝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한전의 조중우, 정민수 씨는 직장을 다니며 일주일에 두 번 배워 법을 얻기까지 딱 3년이 걸렸다.

"3개월이면 건강을 얻게 되고, 형을 익히는데는 6개월에서 8개월, 방식을 이해하는데 1년에서 1년 6개월쯤 걸립니다. 그런 뒤에 이삼 년 정진하면 힘든 공부의 문턱을 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간보다는 성실성 여부가 관건입니다. 공부 빨리빨리 끝내고 사회에 나가서 좋은 일 해야지요."

그이는 태극권을 보급하는 것이 이번 생에 해결해야 할 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정신세계사에서 태극권 교본을 출판하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그 업을 푸는 과정 가운데 하나. 현재 막바지 원고 작업을 하고 있다. 되도록 알기 쉬운 우리말로 풀고 싶었지만 아직은 [허령정경, 기침단전, 함흉발배]처럼 한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말이 많다. 이런 내용까지 쉬운 우리말로 풀 수 있도록 밝은빛태극권을 좀더 우리의 쓰임에 맞게 완성해 가는 것이 그가 풀어야 할 사명일 것이다. 이를 위해 뜻을 함께 하는 인재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다. 태극도관의 지원 신청도 줄을 잇고 있어 지도자의 육성이 시급한 과제라고 한다.
태극권으로 하늘의 비밀을 훔쳤다는 박종구 선생. 그의 희망찬 행보에 기대를 걸어 본다. 그를 통해 또 한 장의 진짜 보물지도를 얻게 된다면 우리 생 또한 얼마나 풍요로워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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