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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출토 용면와. |
이번 호부터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의 ‘새로 쓰는 불교미술’을 연재한다. 강 원장은 오랫동안 한국 불교미술을 연구해온 학자로 그동안 연구해 온 새로운 사실을 독자여러분들에게 소개해 한국의 불교미술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내 학문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고구려 벽화 통해 용에 다가가
1997년 여름 어느 날,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의 용을 살피는데 너무 거대하여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앞에서는 두 눈이 보이지 않고 옆으로 가야 깊숙이 들어간 두 눈을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용이 얼굴을 정면에서 보면 전모가 보이지 않고 표현할 수도 없다.
그 순간 깜짝 놀라며 아, 우리가 지금까지 불러온 귀면 혹은 도깨비가 바로 용의 얼굴을 펼쳐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 천둥치듯 가슴에 울려왔다. 이어 우리가 그 헤아릴 수 없는 일본과 한국의 귀면(鬼面)과 중국의 수면(獸面) 모두가 용의 얼굴로 바뀌는 찰나였다.
1997년 8월8일이었다. 그 날까지 이 지구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귀신의 얼굴을 의심한 사람도 없었으며 더구나 용의 얼굴로 인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냐하면 뱀의 정면 얼굴이 불가능한 것처럼 용의 정면 얼굴은 표현할 수 없다고 굳게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어사전은 물론 한글사전이나 한문사전에는 귀면(鬼面)은 있어도 아예 용면(龍面)이란 단어는 없으므로 용면(龍面)이나 용면와(龍面瓦)란 용어는 내가 만든 셈이다. 2000년 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용면와를 주제로 택하여 정년퇴임 기념으로 강연했다.
그 이후로 단지 기와의 귀면이 용면으로 바뀌는 문제만이 아니고, 나의 학문은 대전환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으며 무슨 힘에 이끌려 이어서 고구려벽화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0년째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나의 학문뿐만 아니라 동양미술사연구의 대전환이었으며, 더 나아가 세계미술사 연구의 대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인류의 미술이 새로이 탄생하는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통일신라 월지 출토 기와 관심
채색분석 통해 용을 조형 분석
이 연재를 계속하는 동안 여러분은 귀면이 용면으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용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아 용 연구모임을 만들어 용의 조형과 상징에 대하여 계속 공부하여 오고 있다.
그 이후로 나의 학문을 빠른 속도로 변화하여 무한히 확대되고 무한히 심화되어오고 있지만, 그대로 귀면을 고집하고 용의 얼굴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10년 전, 아니 100년 전과 같은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안타까운 나머지 사명감을 가지고 귀면을 용면이라고 인식해야 한다는 강의를 전국적으로 펼치고 있다. 용에 대하여 강연할 때에는 사자후(獅子吼)가 아니고 용후(龍吼)였다.
이제 용의 조형의 구성과 상징구조를 모르면 동양미술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동양의 모든 장르의 조형은 용과 반드시 관련되어 있으니 갈수록 용의 중요성이 절실하다. 특히 여래와 보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나 이미 어느 정도 용에 대한 내 나름의 이론체계를 정립하여 두었기 때문에 함께 공부하면 빨리 배울 수 있다.
‘용이 여래다’ 혹은 ‘여래는 보주다’ 라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동안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마침내 모든 상호관계를 절실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통일신라의 걸작품 용면와(龍面瓦)는 월지(月池:안압지) 출토 녹유 용면와로 처음으로 백묘 뜨고 채색분석 해보았다. 용의 입에서 나오는 영기문만을 부분적으로 채색 분석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전체를 다루기는 처음이며 그러는 동안 새로운 점들을 배울 수 있었다. 역시 채색분석은 조형분석의 최선의 분석방법임을 재확인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귀신의 얼굴이 아니라 용의 얼굴이라고만 주장하였지 용의 입에서 나오는 무늬에 대하여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했다. 귀신의 얼굴을 용의 얼굴이라고 눈에 보였던 이후에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면서, 용의 입에서 나오는 갖가지 조형들이 동양의 우주생성론(宇宙生成論)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신의 계시였다고 생각한다.
용의 얼굴은 제1영기 싹의 集積
원래 형상 없고 있어도 변화무쌍
용의 얼굴로 말미암아 인류문화사가 새로운 국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인류역사의 본질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당대의 고승(高僧)이며 예술가였던 걸출한 양지(良志)가 만들었음직한 월지 출토인 용의 얼굴 추녀마루기와를 백묘 뜨고 채색 분석하니 실로 감회가 깊다. 귀면을 용면으로 인식하면서 10년 동안 매일, 아니 순간마다 채색분석하며 색연필이 한 번 종이 위를 스쳐 지나며 칠해질 때마다 나의 학문은 한 계단씩 드높이 올라 시야가 조금씩 넓어졌으며, 동시에 순간마다 조금씩 깊어졌다. 그러니 수 천 점을 채색분석하면서 한없이 확대되고 심화된 셈이다.
모든 작품은 볼 때마다 새로이 보였으며 모든 작품이 그 심원한 사상을 점차 드러냈다. 연재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용의 얼굴을 그려보고 채색 분석하면서, 나의 연구는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용의 얼굴을 오늘 처음으로 그려보고 채색 분석해 보았으니 오늘 비로소 용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여 일 지나 채색분석한 것을 논문으로 써보니,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새로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관찰하고, 기록하고, 사진 찍고, 백묘 뜨고, 채색분석하고, 다시 채색분석한 것을 논문으로 씀으로서 비로소 한 작품의 조사가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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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출토 용면와 도판. |
그러나 그런 과정을 수 천 번, 수 만 번 거쳐야 비로소 한 작품의 본질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니, 그 끝없는 드라마와 같은 체험을 겪으면서 ‘하나’를 알면서 ‘일체’를 파악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종교적 체험을 동시에 겪는 것이다.
용면와의 부분들을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제1영기싹의 다양한 변주로 용의 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눈은 보주이지만 차차 왜 보주인지 증명하여 보일 것이다. 코, 눈썹, 귀, 두 뿔, 갈기, 치아, 혀 등, 용의 각 부분의 형태들이나, 입에서 발산하는 영기 문은 모두 제1영기싹의 다양한 변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왜 옛 예술가들은 왜 그렇게 표현하였을까. 그 해답을 수 천 점의 영기문들을 채색분석한 다음에야 오늘날 비로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즉 물에 내재하여 있는 대생명력(大生命力)을 가시화한 것이 갖가지 영기문인데, 그 가운데 최소 단위가 제1영기싹이며, 가장 위력적인 영기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제1영기싹에서 전개되는 제2영기싹.제3영기싹은 차차 설명하게 될 것이다.
여래나 보살상을 만들 때처럼, 당대의 최고의 조각가가 용면와를 만든 까닭이나, 녹유로 장엄한 까닭은 용의 존재가 동양우주론의 중심에 있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용의 얼굴을 왜 다양한 조형의 제1영기싹으로 구성하였으며, 지붕의 추녀마루기와로 썼으며, 아래 부분을 잘라 사래기와로 쓰면서 법당이나 왕궁의 지붕을 장엄하였을까.
■ 강우방은…
1941년 생.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학사편입-중퇴, 일본 교토와 도쿄의 국립박물관에서 연수, 미국 하버드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관장 을 역임했다.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봉직하다 현재 일향(一鄕)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으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저술로는 논문 모음집인 ‘원융과 조화 - 한국불교조각사의 원리 I’와 ‘법공과 장엄 - 한국불교조각사의 원리 II’가 있다. 불교조각 개설서로는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불화에 관한 것으로는 <감로탱>이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의 조형미술을 물론 중국과 일본의 조형미술을 해석하며 일반적 조형의 원리를 다루고 있는 ‘형태의 탄생’시리즈 첫 번째 책으로 <한국미술의 탄생>을 펴냈다. 에세이 형식으로 쓴 예술론으로는 <미의 순례>,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 그리고 사진전 도록 겸 에세이집인 <영겁 그리고 찰라>가 있다.
평생 한국미술의 모태가 통일신라 미술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2000년 이래, 더 근원적인 모태가 고구려미술임을 확신하게 되어 한국미술 전체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의 미술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사’의 가능성도 제시할 수 있게 되어 그리스, 로마, 서아시아 등지의 미술도 연구하고 있다.
[불교신문 2747호/ 8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