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백악관의 밀월…그들은 피와 돈을 바꿨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7> 경제 개발, 세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서어리 기자 2014.12.27 10:57:07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국 경제가 1960∼1970년대에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 중 하나는 그 이전에 비해 자금 사정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서중석 : 자본이 없으면 경제 발전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 상당한 자본이 들어오게 됐다. 서독에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돈을 보내왔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청구권 자금이 들어왔다. 제일 큰 건 베트남전쟁 특수였다. 이런 것들이 어떤 한 사람 때문에 된 건가 하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광부와 간호사 파견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서독이 요청한 것이다. 요즘 3D 산업을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가난한 국가 사람들에게 맡기려고 하듯이, 당시 서독에서도 석탄 캐는 일, 간호사 일을 안 하려고 하니까 부지런한 한국 사람한테 와달라고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학생 같은 고학력자들이 상당수 광부에 지원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광부와 간호사로 간 분들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억 달러나 송금한 걸로 돼 있다. 그 당시 1억 달러는 큰돈이다. 

프레시안 : 당시 서독 사정을 조금 더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패배 후 급속히 경제를 재건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한 상태가 된다. 서독은 이 문제를 풀고자 외국인 노동자를 대거 불러들였다. 이것이 사양 산업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지 않던 탄광업과 성장 산업이었지만 자국 내 인력 공급은 오히려 줄어들던 보건 의료 산업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광부와 간호사가 늘어난 기본 이유였다. <관련 기사 : 독일 간 간호사들은 왜 '박정희 신화'에 도전했나> 

광부의 경우, 이러한 서독의 필요성에 더해 5.16쿠데타 이전부터 한국 정부에서도 파독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2009년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가 펴낸 <파독 광부 백서>에 따르면, 장면 정부 때 대한석탄공사와 서독 지멘스 사는 루르 탄광 지대에 한국 광부를 고용한다는 각서를 체결했다. 광부 파독 계획은 5.16쿠데타로 일시 중단됐지만, 1962년 5월 뉘른베르크의 한 회사가 한국 광부 500∼1000명을 고용할 뜻을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에 밝히면서 다시 급물살을 탔다. 1963년 초 양국 정부 간 공식 교섭이 시작돼 그해 12월 한국 광부 1진이 서독으로 떠났다. 한편 서독에서 한국 광부를 원한 데에는 일본 광부를 고용해본 경험도 작용했다고 한다. 1957년부터 1963년 8월까지 일본 광부를 고용한 서독 측은 그것을 통해 동아시아인이 몸집은 작지만 성실하고 능력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을 '박정희 신화'를 강화하는 데 활용하려는 이들이 일각에 있다.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일이다. 이제 일본 쪽에서 들어온 자금 문제를 되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전에 이야기했듯이 1960년대 초반에는 누가 정권을 잡았더라도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게끔 돼 있었다. 한국의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도 그랬다. 장면 정권이 경제 제일주의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 데서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지만, 그건 다른 정권이었어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허정이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건 김종필이 정권을 잡았건 마찬가지라고 난 본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일본 역사상 최대 호황을 누렸다. 일본 자본에 여력이 생긴 것이고, 그걸 제일 가까운 나라에 투자하고 싶은 자본가들이 생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일본도 미국 눈치를 봐야 하지 않나. 친미 국가로서 미국의 요구가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오면 이젠 이승만 정권이 계속됐더라도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미국의 압력이 커지고 있었다. 그전에도 한미일 안보 통합 정책을 미국이 추진은 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는 안 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자 기시 노부스케 정권과 미일안보조약을 갱신하면서 새로운 안보 시대로 들어가는 걸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소련만 큰 게 아니라 중국이 계속 커지고 있지 않았나. 1964년이 되면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중국을 승인했고, 중국에서 핵 실험에 성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이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월맹(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을 대단한 규모로 하지 않나. 통킹만 사건은 월맹 쪽에서 (선제공격을) 한 것처럼 발표는 됐지만 사실은 미국이 일으킨 것이었다. 다시 말해 1964년에 들어서면 미국이 월남전에 깊숙이 개입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걸 보더라도 한일 국교 정상화는 미국에 아주 중요했다. 이런 세 나라의 이해관계를 볼 때 한일 국교 정상화는 1960년대 초, 아무리 늦어도 1964∼1965년경엔 반드시 되게 돼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한일 회담 반대 투쟁도 치열했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 조인·비준 반대 운동이 그야말로 각계각층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그렇게 된 데에는 박정희 자신이 외교 교섭 부문에는 경험이 전무했던 것도 작용했다. 그래서 미숙한 면이 많았는데도 군인 정신으로 하려 하지 않았나. 그뿐만 아니라 군국주의 침략의 원흉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만주 인맥 핵심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려고 했다. 더욱이 중앙정보부장을 보내 그걸 밀실에서 처리하려 하고, 평화선도 너무 빨리 포기해버렸다. 이러니 한국인들이 '저건 참을 수 없는 굴욕적 저자세다. 도대체 자존심도 없느냐', 이렇게 여기면서 강력한 반대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조금 더 빨리 될 수도 있었던 한일 국교 정상화가 그런 문제들 때문에 오히려 늦어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맨 처음부터 다른 모든 것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청구권 자금에만 매달렸는데, 청구권 자금 명분도 참 이상하게 돼버렸고 액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비교해 볼 때 적게 받은 것 아니냐', 이런 것도 작용하면서 그것에 대한 반발도 컸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다른 게 아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도 어떤 정권이 들어섰든 이 시기에는 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청구권 자금이라고 알려진 그 자금은 누가 정권을 잡았더라도 들어오게 돼 있었다는 것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서독이 요청한 광부·간호사 파견, 어떤 정권이어도 하게 돼 있던 한일 국교 정상화

프레시안 : 베트남 특수를 짚을 차례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서도 왜곡과 신화가 많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1999년에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 등을 계기로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적지 않았지만, 왜곡과 신화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예컨대 1970년대에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은 2000년대 들어 베트남 파병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행해진 전국 규모의 대규모 해외 연수", "한국인의 국제화의 출발점", "오랜 열등의식, 피지배 의식에서 벗어나 (…) 자부심을 갖게 된" 계기라고 주장했다. 이런 인식은 오원철만이 아니라, '박정희 신화'를 지지하는 이들 중 여러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한국인이 목숨을 잃었고,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으며, 파병 군인 중 상당수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던 베트남 파병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서중석 : 가장 중요한 문제로 베트남 특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월남에 1965년 맹호·청룡부대, 1966년에는 백마부대를 파견했다. 그때부터 5만 명 정도가 전투 부대를 중심으로 있었고, 1973년 3월 한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2만 명이 주둔했다. 육군본부와 해군본부가 낸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는 순직자를 포함해 5099명, 전상자는 1만962명으로 돼 있다. 한국과 관련해 상당히 큰 전쟁이었다.

이 베트남전쟁에 관해선 정말 가르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아마 한국 현대사 중에서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아닌가, 그렇게 얘기를 한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면으로 혜택이 너무나 컸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베트남에 가기를 잘했다'고 가르치기도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 당시 전 세계가 한국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 한국이 베트남에서 뭘 했느냐에 대한 비판 같은 여러 가지를 볼 때 그렇다. 그래서 이 베트남전쟁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 이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고 본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전쟁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랬다. 베트남전쟁이 한국전쟁보다 더 컸거나 비슷하지 않나 싶다. 미군이 거기서 5만여 명이 죽은 것으로 돼 있다. 한국전쟁에선 미군 전사자가 3만 명이 좀 넘지 않나. 그리고 남과 북의 베트남 병사가 100만 명은 죽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얘기한다. 

한국은 역사 이래 여러 차례 외국에 원정을 나갔다. 고려 때는 몽골의 강요로 일본 원정을 가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광해군 때 명나라의 압력으로 후금을 치러 간다. 효종 때는 청나라가 요구해 흑룡강, 그러니까 아무르강 동쪽 지대에 조선에서 키워온 조총수 수백 명으로 이뤄진 조총 부대를 파견했다. 이런 것들은 한국이 원해서 원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베트남전쟁은 다르다. 그 점에서 차이가 난다.

5000여 명 전사한 베트남 파병이 "해외 연수"? 

프레시안 :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이던 1961년 11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베트남 파병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때는 미국이 베트남에 전면 개입하던 시기가 아니었기에 이 제안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본격적으로 파병이 이뤄지는데, 이것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서중석 : 누가 집권했든 베트남전쟁엔 반드시 참전하게 돼 있었다. 이미 이승만 정권 때 인도차이나 사태가 심각해지니까 거기에 파병하겠다고 이 대통령이 얘기하기도 했는데, 난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베트남전에 한국이 반드시 참전하게 돼 있었다고 본다. 

우선 군부가 적극적으로 원했다. 장교들은 전쟁이 있는 곳에 가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예컨대 1979년 12.12쿠데타를 일으킨 자들 대부분이 이때 월남에 가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등 신군부의 핵심 인사들이 그렇게 베트남에 다녀왔다. 이에 앞서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지도, 군대 내에서 책임을 져야 할 이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지도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베트남으로 간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고 겪은 전두환 일당은 훗날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외면한 대가를 한국과 베트남은 그렇게 참혹하게 거듭 치러야 했다. '편집자') 아울러 한국이 1960년대 들어 경제 발전을 그렇게 절절히 원하고 있었는데, 월남 파병이야말로 경제 발전을 하는 데 아주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정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한국인 상당수가 그 생각을 했다. 또 미국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지 않았나. 이제 그 보답을 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까지 만들면서 강하게 요구했다. 그것에 반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다른 집권자였다면 박정희처럼 5만 명까지 보내진 않았을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집권자도 적어도 5만 명에 가까운 인원은 파견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거듭 말하지만 군인들이 가기를 원했고 정부도, 많은 일반 국민들도 경제적으로 유리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 미국이 다른 데서 군대를 별로 파견하지 않으니까 특히 한국에 매달려 강력히 요구하는 면도 있었다. 그것 말고도, 미국이 제시한 조건이 한국 정부나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아주 좋았다. 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유리한 새로운 조건들이 브라운 각서에 많이 들어갔다. 군사 지원 측면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미국이 '너희들이 월남 파병을 많이 하면 도와주겠다'고 한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브라운 각서는 1966년 3월 미국 정부가 윈드롭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한 문서다.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 파병에 대한 미국의 보상 조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수년간 장비 지원, 추가 파병에 필요한 장비 제공 및 비용 부담, 베트남 파견 병력을 대체할 보충 병력에게 필요한 장비 제공 및 재정 부담, 주월 한국군에게 필요한 보급 물자 용역 및 장비는 실시할 수 있는 한도까지 한국에서 구매, 미국 정부 및 업체들이 베트남에서 실시하는 건설 사업에 한국 업체들이 참여할 기회 및 한국인 민간 기술자들의 고용을 늘릴 것, 기술 원조 강화 및 추가 자관 제공 등이다.

브라운 각서 이후에도 한국과 미국은 더 많은 병력 파견 및 그에 따른 추가 보상 문제를 두고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 비용은 미국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점점 불어났고, 반전 시위도 거세게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자국 군대에 비해 비용이 훨씬 덜 들고 반전 시위 문제에서도 자유롭던 한국군은 미국 정부에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편집자') 

이런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 60만 명 상한, 어떤 곳에서는 실링(ceiling)이라고도 표현돼 있는데, 그 실링을 미국이 해제해줬다. 다시 말해 월남에 파견된 인원은 60만 명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한국에 남아 있던 군대와 베트남 파견 병력을 더하면) 60만 명이 넘는 인원인데, '한국은 군대를 더 늘려도 된다. 그것도 미국이 돈 다 대준다'고 하면 그 당시 분위기에서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이 점도 많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래서 난 박 대통령이 아니라 다른 집권자였어도 많이 파병했을 것이라고 본다.

당시 장교들은 서로 지원했다. 경쟁이 심했다. 사병의 경우 초기에는 자의와 상관없이 훈련 받고 월남으로 파병됐지만, 그 이후에는 '가면 돈 번다'고 해가지고 부분적으로는 자원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베트남전을 그린 영화 <하얀 전쟁>(감독 정지영, 1992년)의 한 장면. 안정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 베트남전을 그린 영화 <하얀 전쟁>(감독 정지영, 1992년)의 한 장면. 안정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누가 집권했든 한국군은 베트남에 가게 돼 있었다 

프레시안 : 당시 한국에서는 파병 반대 흐름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서중석 : 월남 파병은 굉장히 큰 사건인데도 반대가 많지 않았다. 한일 문제하고 또 달라서, 반대하고 싶어도 반공주의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 자유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러 간다는데 반대를 하면 자유 세계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 강한 반공주의 앞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 논리를 세우고 시위한다든가 반대 글을 쓴다는 게 아주 어려웠다. 나중에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할 때 굉장히 강렬한 반대가,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참 격세지감이 들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장준하 <사상계> 사장 그리고 전남대 학생 등 대학생 일부가 반대를 했다. 특히 윤보선과 장준하는 아주 강한 말을 쓰면서 반대했다. 윤보선은 1966년 5월에 "박(정희) 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전쟁의 청부 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월남 파병으로 박정희 정권과 미국은 그야말로 밀월기라고 하는, 아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한미 간에 역사상 최고로 사이가 좋았다. 1960년대 후반기에 그랬다고들 이야기한다.

프레시안 : 베트남 특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중석 : 무엇보다도 월남 파병에서는 경제 문제가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기에 얼마만큼 경제적으로 이득을 봤는가 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한 자료를 보면 1966년에서 1972년 사이에 베트남전쟁을 통해 약 8억5800만 달러의 소득이 있었다고 돼 있다. 거기에는 용역 수출, 주월 한국군 송금, 군납, 기술자 송금이 다 들어 있다. 베트남에 기술자들이 가 있지 않았나. 또 미군 1명한테 지불하는 돈으로 한국 군인 5명 정도를 쓸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미국에 유리했다고 돼 있다. 미국 측으로서는 한국인 군인 수당을 지불하는 게 참 적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한국 측에서는 그걸 그렇게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월 한국군 송금이 약 2억 달러, 서비스 및 건설 분야에 진출해 1972년까지 국내에 송금한 액수가 2억3800만 달러, 민간 기술자로 해외에 진출해 송금한 것이 약 1억6600만 달러로 나온다. 그런데 다른 한 자료를 보면, 이와 비슷하긴 한데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이런 여러 부문의 총수입이 10억3600만 달러로 나온다. 그래서 대개 10억 달러라고 한다. 일본에서 들어온 청구권 자금 (중 이른바 '무상') 3억 달러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돈이다. 그리고 당시 군인이라든가 기술자들이 TV, 냉장고, 트랜지스터라디오 등을 국내에 보내온 것도 있다. 

이런 큰 수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이 공공·상업 차관을 도입하는 것을 미국이 엄청나게 지원한 점이다. 월남 파병을 했기 때문에 장기 차관이 들어왔고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을 통해서도 한국에 상당히 큰 규모의 저리 공공 차관이 들어온다. 이것도 한일협정 결과 들어온 차관보다 더 유리한 것들이었다. 상당히 액수가 컸다. 이런 간접 지원까지 합치면 월남전 특수로 생긴 돈이 10억 달러를 월등 넘는다.

▲ 미국 해병대와 베트콩 포로들(1965년 8월). ⓒ위키미디어커먼스

▲ 미국 해병대와 베트콩 포로들(1965년 8월). ⓒ위키미디어커먼스  

 
 


베트남 파병으로 박정희와 미국은 밀월 관계 

프레시안 : 베트남 특수가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된 건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죽어가는 남의 나라 전쟁을 기회로 삼아 적잖은 돈을 번 것을 찬양만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누린 '조선 특수'는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한국의 '베트남 특수'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 일부 사람들의 태도가 적절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 이외에도 짚어볼 문제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베트남 특수의 과실을 공평하게 누렸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베트남 파병은 재벌들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베트남에서 큰돈을 번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가 최근 '땅콩 회항'으로 물의를 일으킨 한진 그룹이다. 한진은 세간에서 '월남상사'라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로 베트남 특수를 톡톡히 누리며 신흥 재벌로 부상했다. 그러나 베트남에 가서 목숨 걸고 일하던 기술자들에게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결국 칼(KAL) 빌딩 방화 사건(1971년 9월 15일, 미불 임금을 달라는 요구를 한진 측이 계속 받아들이지 않자 노동자들이 칼 빌딩을 점거하고 불을 지른 사건)을 불러온다. 베트남 특수, 더 나아가 한국인의 베트남전쟁 문제를 생각할 때 이런 부분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서중석 : 그렇다. 베트남 특수 규모가 크긴 했지만 '그러니까 베트남 파병은 잘한 일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전쟁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자유를 위해 고귀한 피를 흘려야 한다고 초기에는 강조했지만, 나중엔 그런 이야기를 덜 하거나 안 하더라. 

국제 사회에서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미국이 프랑스를 대신해 월남에 들어오는데, 전쟁 확대의 결정적인 계기는 통킹만 사건이다. 그래서 북폭이 일어나는 건데, 이 전쟁은 2003년 조지 부시가 이라크전쟁을 일으킬 때와 비슷한 점이 있다. (북베트남이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다는 미국 측 발표가 사실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지 부시는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면서 전쟁을 일으켰는데 다 속임수로 드러나지 않았나. 이라크전과 다른 점도 있었다. 이라크전쟁이나 2001년에 시작된 아프간전쟁만 해도 유럽에서 많이 파병하지 않았나. 그러나 프랑스의 드골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 전쟁을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스페인이 열 명 안팎을 보낸 걸 제외하면 유럽 국가들은 사실상 파병하지 않았다. (1966∼1970년에 최소 7명, 최대 13명의 스페인 병력이 베트남에 있었다. '더 많은 깃발'을 원한 미국의 뜻에 따라 상징적인 숫자만 보낸 셈이다. '편집자') 그야말로 유럽에서는 이 전쟁을 패권 전쟁 또는 신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냐고 봤다.

이 전쟁은 세계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 데에는 1968년 1월 30일에 있었던, 베트콩의 구정 공세라 불리는 그 유명한 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 이때 베트콩은 사이공만 공격한 게 아니라 남부 베트남 전역에서 공세로 나왔다. 그래서 7개 성도를 일시적으로 점령했고, 1월 31일에는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에 깃발까지 꽂고 대사관을 장시간 점거하는 놀라운 사태가 일어났다. 2월 1일에는 고도(古都)이자 중부의 중요 도시인 후에를 점령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베트남 주둔 미군이 50만 명을 돌파해버렸다.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휘하 병력이 55만 명에 육박했다.

이러면서 미국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반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8년 하면 우리 모두 기억하는 게 있지 않나.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68혁명이 일어난다. 그런데 바로 미국에서도 엄청난 인원이 베트남에 가게 되고 청년들이 여기에 많이 해당하면서 반전 운동이 커졌다. 그런데 미국에서 일어난 반전 운동에는 인종 문제까지 개재됐다. 1968년 4월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지 않나. 이를 계기로, 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41개 도시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나고 그게 80개 도시로 확대되는 속에서 연방군이 출동하면서 72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다쳤으며 8900명이 피검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소요 발생 도시 및 사망자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예컨대 "125개 도시", "168개 도시" 혹은 "최소 46명 사망"으로 돼 있는 것도 있다. 분명한 건 민권 운동 지도자이자 희망의 상징이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절망과 분노를 안겼고 그것이 거리에서 폭발하며 미국을 뒤흔들었다는 사실이다. '편집자')

그때까지는 백인들이 아시아인을 아주 깔봤다. 정말 무시했다. 흑인에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유색 인종은 사람 취급을 안 했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도 그랬다. 그런데 68혁명은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하는 데 굉장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교육 혁명이라고도 하지 않나. 교육관, 여성관, 인간관, 이 모든 것에 대한 혁명이었다. 인간, 생명, 평화에 대한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청년, 대학생들의 사고, 의식이 많이 변화했고 문학, 음악에도 영향을 줘서 우리가 많이 듣는 조안 바에즈 등의 반전 음악이 나왔다.

▲ 1971년 4월 워싱턴에서 벌어진 베트남전 반대 시위. ⓒ위키미디어커먼스

▲ 1971년 4월 워싱턴에서 벌어진 베트남전 반대 시위. ⓒ위키미디어커먼스

 
 


반전이 세계를 뒤덮던 때 죽음의 밀림으로 간 한국 젊은이들 

프레시안 : 반전 운동이 세계를 강타하던 그때 한국은 반전의 무풍지대였고 오히려 국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중석 :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로 파병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여러 나라가 파견한 병력을 다 합친 것보다도 한국이 파견한 병력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월남 파병은 한국전쟁 이후 다시 한국이 알려지는 한 계기는 됐는데, 1970년대에 한국이 세계, 특히 미국에 크게 알려진 코리아게이트 사건(박정희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정치인과 관리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폭로가 1976년에 나오면서 불거진 사건)처럼 한국 인상을 안 좋게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이른바 용병 시비도 끊이지 않았고, 일본 같은 데서도 한일협정을 반대할 때 그것과 함께 꼭 끼워 넣은 것이 베트남 문제였다. 거기에는 은연중에 '한국이 파병하고 있다', 이런 문제도 들어 있었다. 나중에 일부 일본 사람들이 과거사를 이야기할 때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가지고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지 않나. 참 씁쓸한 일이다. 

사실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큰 특수를 누렸다.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베트남 특수가 큰 도움이 됐다. 베트남 파병을 두고 우리를 비난하지만 진짜 큰돈 번 건 일본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용병 시비 문제는 한국군 파병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가와 관련돼 있다. 1966년 브라운 각서에는 '모든 무기와 장비는 물론이고 증파에 따른 부담도 미국이 다 지겠다', 그리고 '한국의 3개 예비 사단을 정규 사단화하는 것도 인정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한국 군부로선 정말 원하던 것들이었다. '별'(장군)들의 자리가 늘어나는 것 아닌가. 하여튼 미국은 파월에 따른 한국군 병력 및 장비 보충에 필요한 경비도 자신들이 부담하겠다고 하면서 많이 파견해달라고 했다. 

이와 관련,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포터는 1970년 2월 미국 의회 비밀 청문회에서 "한국의 신병 1인에 대해 하루에 1.25달러, 중장의 경우 10달러의 해외 수당을 미국이 직접 지불했다. 직접 지불 방법은 전례가 없다"라고 인정한 것으로 돼 있다. 상원 소식통은 여기서 한국의 파병에 고용적 성격이 꽤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주월 한국군을 유지하기 위해 1965년에서 1969년 사이에 9억2750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나와 있다. 이런 것들이 해외에서, 특히 일본 같은 데서 용병 시비의 한 사례로 이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용병 논란과 관련해 한국군 사단장이 미국에서 받은 월 급여가 354달러인 반면 필리핀군 소대장은 442달러, 타이군 소대장은 389달러였고, 일반 사병들은 남베트남 군대의 월 급여에도 못 미치는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이 2000년에 나왔다. 사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파병 당시에도 나왔다. 하여튼 이런 주장이 논란의 대상이 됐지만, 나는 액수가 핵심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어떤 태도로 박정희 정권이 이 전쟁에 임했느냐, 그게 중요하다고 본다. 

프레시안 :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건 용병 시비만이 아니다.

서중석 : 파병 과정, 전투 행위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근래 박태균 교수가 많이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왜 베트남에서 한국 군대가 그렇게 늦게 철수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있다. 1967년 클라크 클리포드(해외정보자문위원회 위원장, 1968년 미국 국방부 장관에 취임)가 태평양 연안의 여러 미국 우방국에 증파를 호소했어도 우이독경이었다. 베트남의 이웃 나라인 타이도 그해 베트남 주둔 병력이 한국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2205명밖에 안 됐고, 바다 건너 이웃이자 미국과 그렇게 가까운 나라였던 필리핀은 '반대 세력 때문에 파병이 어렵다'면서 의무단, 공병 대대를 파병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논리인 도미노 이론(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주변 국가들도 차례로 공산화된다는 주장)에 의하면 두 나라가 제일 먼저 영향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두 나라는 한국에 비하면 파병을 얼마 하지 않았다. 한국은 대규모 전투 부대를 파견하지 않았나. 철수할 때도 필리핀은 이미 1969년 말에 '공병단도 철수하겠다'고 하고 1970년에 가서 철수하는 걸 볼 수 있다. 타이도 1970년 8월에 철수를 발표했고 호주, 뉴질랜드도 1970년 11월에 일부 병력을 철수했다. (베트남 주둔 타이군은 1969∼1970년에 1만1500여 명으로 늘기도 하지만 1971년에 다시 그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고 1972년에는 38명만 남는다. 1967년에 2020명이던 필리핀군은 1968년에는 4분의 1 정도가 줄어든 1576명이 됐다가 1969년에는 189명으로 대폭 감축된다. '편집자')

이 무렵(1971년 3월) 주한 미군 제7사단이 23년 10개월 만에 철수했다.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이미 1970년부터 주월 한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그런데도 한국군은 철수가 늦었다. 그래서 박태균 교수에 따르면 1971년 5월에는 베트남에 있던 외국 군대 가운데 실질적 전투 부대가 한국 군인밖에 없었다고 한다. 1972년 한국군은 외국 군대의 60.5퍼센트, 그러니까 미군(2만4200명)보다 더 많은 3만7438명이었던 것으로 돼 있다. 한국군이 5000명 넘게 사망하고 1만1000명 가까이 부상자가 생기는 등 피해가 커진 것에 이처럼 늦게 철수한 것도 많이 작용하지 않았겠나. 당시 미국이 주장한 것처럼 경제 문제가 작용했다면, 이렇게까지 경제를 생각한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주한 미군 일부 철수 및 주월 미군 철수 계획 발표 후에도 미국 국무부는 한국 측이 수익성이 좋은 베트남에 오랫동안 주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봤다. '편집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책임 묻지 못한 후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프레시안 :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민간인 학살 문제는 참 뼈아픈 일이다.

서중석 : 내가 대학 다닐 때 월남에 파병된 친구한테서 민간인들에 대한 잔혹 행위 같은 걸 들으면서 '참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1970년 말 이효상 국회의장이 베트남을 방문했는데 그때 기자의 첫 번째 질문이 "한국군이 파월된 이래 6000명을 살해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월남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잔인한 행위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8년 2월 미군 보고에 의하면 한국군이 퐁니·퐁넛이라는 농촌 마을을 공격했는데 이때 늙은이, 어린이까지 74명이 죽었다고 한다. 1968년 1월 20일에는 투이보에서 145명이, 2월 22일에는 하미에서 138명이 죽었다. 이와 같이 여러 군데에서 잔혹 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1999년에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한국에 처음으로 알린 구수정은 1968년 1월에서 1969년 11월 사이에 꽝남성에서 40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구수정은 2002년 제주도 인권학술회의에서 80여 건의 학살이 있었고 90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발표했다. 빈딘 지역에서 학살된 민간인이 1000여 명이라는 자료도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베트남 정부에서 발표한 '남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에는 한국군에 의해 5000명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돼 있다고 한다.

프레시안 : 한국군 철수 후에도 베트남 파병의 후유증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엽제 문제다. 

서중석 : 고엽제는 베트남전에서 나뭇잎의 성장을 억제해 정글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용된 다이옥신 계열의 제초제다. 베트남전이 끝난 후 유엔은 이것을 제네바 의정서에서 사용을 금지한 화학 무기로 보고 고엽제 사용을 감시하고 있다. 

한국 군인들도 피해가 많았다. 2000년대에 나온 국가보훈처의 한 자료에 의하면, 고엽제 피해자는 총 8만9772명으로 돼 있다. 이 중에서 환자는 3만9909명, 후유의증 환자는 4만9799명, 2세 피해자는 64명으로 나와 있다. 거의 전부 월남전에서 생긴 피해자들인데, DMZ에서 고엽제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일부 있다. DMZ 고엽제 피해자는 1000명이 안 된다고 한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당시 한국 경제 규모를 볼 때 베트남 특수는 대단한 규모였다. 지난번에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67∼1971년)에 제일 성장률이 높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까지 높아지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베트남 특수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 베트남 특수의 역할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일협정 결과 청구권 자금에 해당하는 3억 달러하고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 그리고 일본 정부가 알선한 상업 차관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서 쪼개서 줬다. 그것은 제2차,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때 베트남 특수만은 못하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됐다.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한 것도 기여했다. 광부와 간호사 파견은 서독이 요구한 것이었고, 월남 파병이나 한일 국교 정상화는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어느 정권이 들어섰더라도 다 하게 돼 있었다는 걸 강조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박정희 한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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