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됐던 거대 정당들의 몰락이 현실로 확인되고 있다.” 1일 발표된 문화일보 창간 20주년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내놓은 반응이다.
국민들이 받는 고통은 외면한 채 당리당략에만 골몰하고 스스로 개혁하기를 거부해 온 거대 정당들은 그 역사가 아무리 오래 됐어도 이제 ‘변화냐, 죽음이냐’하는 심각한 선택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이는 내년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를 찍겠다는 응답이 20.3%에 달하고 아직 실체도 없는 보수신당, ‘안철수(서울대 융합
과학기술
대학원장) 신당’을 지지하겠다는 응답이 40%를 넘어서는 조사 결과는 일시적인 기현상이 아니라 현실로 닥쳤다는 진단이다. 원로 정치인과 정치학자, 시민단체 관계자 등 전문가들은 2일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이미 한나라당과 민주당도 알고 있을 것”이라며 “이제는 말로만 변화를 외쳐서는 안되며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꾸겠다’는 자세로 자기개혁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문화일보 11월1일자 1·2·3면 참조)
◆“변하라, 안 그러면 죽는다” =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거대 정당이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실천적인 변화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정당은 국민의 지지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국민들은 한나라당, 민주당 등 양대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며 “당을 해체한다는 생각까지 갖고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전(정치학) 경희대
교수는 이를 “‘자식과 마누라 빼곤 완전히 다 바꾼다’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로 강조했다. 이정희(정치학) 한국외대 교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왜 한국에서 정당이 ‘불신의 소굴’이 됐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어설픈 보여주기식 변화로는 어림없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정치컨설팅업체 e윈컴 김능구 대표는 “한나라당 일각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질서 있는 개혁’ 주장이 나오는데, 그런 발상 자체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 대표는 “젊은층은 본래도 한나라당을 별로 안좋아했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보여준 한나라당의 행태에 실망해서 다시 돌아선 것”이라며 “
간판을 바꾸고 새로운 인물 몇명 끌어들여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에 대해서도 “야권통합을 통해 덩치를 키우는 하드웨어적인 고민만 해서는 국민의 바람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정당 운영 시스템과 공직후보자 선출 등 소프트웨어적인 내부 혁신 없이는 안된다”고 말했다. 고성국 정치평론가도 “한나라당은 시민사회의 변화에 뒤처지고 ‘웰빙(well-being)당’ 행태를 보이고 있으며 21세기를 끌고 갈 이슈를 선점하지 못하고 국민과 소통이 안되는 낡은 인물들로 짜여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자세로 필요하면 당명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민주당도 싸워야 할 땐 제대로 싸워야 하지만 여야 간 대타협이 필요할 때에는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 “보다 큰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다른 야당 및 정치세력과 통합하더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당리당략 버려라” =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둘러싸고 국회가 또 다시 난장판이 된 상황을 지적하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공멸의 게임’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런 식으로 하니까 국민들에게 정치가 ‘그들만의 리그’로 비쳐지는 것”이라며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정당의 위기’ 상황을 직시하고 공생하기 위한 길을 함께 찾아야 하며, 서로 ‘우리는 잘못 없다’고 하면 둘 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당들이 당리당략을 버리고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민생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수십년 된 거대 정당들이 ‘서울시장 출마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안철수 원장의 말 한 마디에 지진 만난 것처럼 흔들린 것은 그만큼 정당들이 국민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김형준 교수는 “국민들이 아픔을 느끼는 사안이 뭔지 24시간 불을 켜고 살펴 보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면서 “말로만 ‘민생 속으로’를 외쳐봐야 소용 없고 국민들이 절실히 요구하는 것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어서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훈(정치학) 중앙대 교수도 “정당들이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안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책들을 내놔야 한다”며 “국민의 눈 높이에 맞는 정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은 “한나라당은 청와대의 꼭두각시처럼 돼 있고 민주당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면서 “20대는 대학 등록금과 실업, 30대는 전·월세난과 보육 부담, 40대는 사교육비와 불안한 노후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만큼 이 같은 국민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쪽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당 민주화 실천하라” = 윤여준 전 장관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락은 정당의 외피만 입었지 진정한 정당정치는 없었기 때문”이라며 “여야 모두 인력 충원 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장훈 교수는 “새 인물 수혈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며 “당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질 정도로 큰 폭으로 수혈하고, 새 인물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원내 활동이나 공천 등 정당 운영도 정당 엘리트들만의 행사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김민전 교수는 “새롭다고 하면 흔히 ‘무조건 물갈이 많이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얼마나 민주적 원칙을 지키느냐가 더 중요하다”면서 “당 지도부가 소속 국회의원들을 초등학생
대하듯 하고 다수당이 힘으로 소수당의 목소리를 누르는 정당정치 구조가 민주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처럼 원내대표가 무슨 법안을 처리 한다, 안한다 하는 나라는 소위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면서 “교섭단체 중심으로 운영돼 온 국회 운영도 의원 한명한명의 투표로 이뤄지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새 인물로 바꿔라” = 인적쇄신이 정당개혁의
기본임에는 전문가들 모두 이견이 없었다. 고계현 사무총장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노쇠화된 정당으로 비쳐지고 있다”면서 “신진 인사들이 들어가 구태의연한 모습을 혁신할 수 있도록 문호를 대폭 열어젖히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상향식 공천’은 기득권 유지에 악용되고 있다”며 “당의 정체성에 맞는 외부 인사들로
공천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신진 인사들의 진출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전 교수도 “외부 인사들로
공천심사위원회를 만들어 ‘눈가림’ 만이 아니라 실질적 상향식 공천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강원택(정치학) 서울대 교수는 “민주당은 야권통합 과정에서 얼마나 새로운 정치행태를 보여주느냐가 관건이고 한나라당은 보수층과 가진 자만을 위한다는 이미지를 깨야 한다”며 “변화할 때 포용력을 보이고 큰 폭의 인적 쇄신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지자·계층 대변하는 정당체제로 가라”= 박관용 전 의장은 “한국 정당이 이념을 축으로 하는 양대 정당체제로 가야 한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면서 “보수는 보수
대연합을 통해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이는 진보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정책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뭔지 정확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윤여준 전 장관도 “정당들이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들을 만들고 지지세력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면서 “지역정당을 청산하고 계층과 계급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체제로 가서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남석·김하나·김동하기자
greentea@munhwa.com
◆전문가 10인 명단 = 강원택(정치외교학) 서울대 교수,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고성국 정치평론가, 김능구 e윈컴 대표, 김민전(정치외교학) 경희대 교수, 김형준(인문교양학) 명지대 교수, 박관용 전 국회의장,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이정희(정치외교학) 한국외대 교수, 장훈(정치국제학) 중앙대 교수(명단·사진 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