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末처럼 어지러운 한국사회… 혁명가 정도전에 공감하다 나루터광장
2014/04/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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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末처럼 어지러운 한국사회…
혁명가 정도전에 공감하다
- 입력 : 2014.04.19 07:40
史劇 '정도전'에 열광하는 4050 아저씨들, 개그콘서트 안보고 본방 사수 왜?
그의 삶 자체가 드라마…천민 피 섞인 향리집안 출신 朝鮮 설계하며 개국공신 돼 …이방원에 죽임 당하며 500년간 만고의 역적으로
역사,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 권력 놓고 이합집산·다툼오늘날 정치판과 똑같아…"액션신 적어도 박진감"출판·문학계로 열풍 확산
朝鮮의 체 게바라 …목숨 걸고 혁명 주도했고 民本·爲民정치 펼쳐…꿈이 열매맺기 前 요절해 영원한 '혁명 아이콘'으로
- 드라마 ‘정도전’의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조재현. 정도전은 민본주의 국가 조선을 설계했으나, 개국(開國) 6년 만에 이방원에 의해 제거된 후 500년 동안 역적으로 낙인 찍힌 ‘비운의 혁명가’이기도 하다. /KBS 제공
회사원 이모씨는 지난 13일 저녁을 함께한 40대 중반 남자 선배가 술을 마시다 말고 귀가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드라마라고는 전혀 보지 않는 선배인데, '본방 사수'라니?"
최근 40~50대 중년 남성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KBS1 드라마 '정도전' 얘기다. 이날 방송된 드라마는 시청률 17.1%(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해 전통의 시청률 강자인 코미디 '개그콘서트'(16.4%)를 누르고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지난달 9일 이후 6주 연속 '개콘' 대신 '정도전'을 선택한 시청자가 많았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 시대의 남자라면 꼭 봐야 할 드라마" "사극이 액션 없이도 스펙터클하고 박진감 넘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등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공무원 강태웅(51)씨는 "백성을 위한 명분과 실제 권력 다툼의 실리를 모두 챙기면서 새로운 왕조를 만드는 모습이 흥미롭다"며 "이 과정에서 전략을 수립하고 반대편에 맞설 세력 규합에 나서는 모습이 마치 오늘의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고 했다.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린 드라마 '정도전'으로 촉발된 '정도전 열풍'이 출판·문학으로 확산되고 있다. 1997년 출간된 정도전에 대한 첫 대중 역사서'정도전을 위한 변명'(이하 '변명')이 17년 만에 2판을 찍고, 대형 서점에는 정도전 코너가 생겼다. '변명'의 저자 조유식(인터넷 서점 알라딘 대표)씨는 "책을 쓸 때만 해도 참고할 만한 것은 한영우 서울대 교수가 쓴 '정도전 사상의 연구' 정도였다"고 했다. 2003년에야 '삼봉학(三峰學)'이란 이름을 내건 첫 학술회의가 열렸다.
고려 말기 혼란을 딛고 조선 건국의 사상적 틀을 닦은 정치 지도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 조선의 국가 경영 체계를 확립한 1급 브레인이자 '킹 메이커'였다. 하지만 그는 이방원과 벌인 권력 투쟁(1차 왕자의 난)에서 패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고, 조선시대 내내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힌 후 잊혔다. 그 정도전이 6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정도전이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은 고려 말과 현재 우리의 정치 현실이 많이 닮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정도전의 전략과 리더십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정도전 연구 권위자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빈부 격차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들었던 고려 말,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 온몸을 던진 정도전이 수백 년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며 "정도전은 한 손에는 붓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든 영웅호걸형 선비 리더십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는 "우리는 통일, 고령화 문제 등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런 고민은 나라의 큰 틀을 새로 짜려던 정도전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은 '역사소설은 당대 사람이 과거의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무도회'라고 했다"며 "정도전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고 말했다.
고려 말 우왕을 옹립하고 친원 정책을 취한 이인임을 반대한 정도전은 그의 미움을 받아 1375년 전남 나주 유배에 처해져 9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로 치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해 민생고를 경험한 셈이다. 그가 30대에 겪은 귀양·방랑 생활은 농민들의 밑바닥 삶을 체험하고 당시로선 혁명적 발상인 민본(民本)사상을 구상하는 계기가 된다.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정도전이 귀양지에서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어울리는 모습은 국민의 의사가 실제 정치나 국가 운영에 얼마나 반영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국민의 눈길을 끌고 있다"고 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정도전의 사상은 '맹자' 등에 기반한 것도 있지만, 농민들과 생활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는 과정이 공감을 준다"고 했다.
장편 '혁명―광활한 인간 정도전'의 작가 김탁환은 "고난의 과정을 거쳐 형성한 생각을 초지일관 실천에 옮기는 모습은 말 따로 행동 따로 행태에 질린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고 했다. 조유식 알라딘 대표는 "정도전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 패러다임을 만들고 이를 현실 역사에서 구현한,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희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도전을 서양 중세의 붕괴 과정에서 근대의 여명(黎明)을 내다보고 굴욕을 감내하면서 정치 투쟁을 했던 동시대 이탈리아의 시인·정치가 단테(1265~1321)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정도전이 위기 극복 방안으로 민생과 실용을 강조한 것은 훗날 조선의 근대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사상의 싹을 미리 본 듯하다"며 "이런 점에서 단테와 정도전이 각기 조국의 위기 상황에 대응하면서 내놓은 처방전은 서양의 근세, 동양의 근세로 이어지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했다.
조선 개국 최고 공신에서 왕조 전복을 도모한 역적으로 급전직하한 정도전의 삶은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뉴 페이스'로, 그의 삶 자체가 극적인 드라마"라며 "천민의 피가 섞인 그가 신분 사회의 약점을 뛰어넘어 개국 공신이라는 최고 위치에 올라가는 과정은 대리 만족 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조선 개국 6년 만인 1398년 8월 26일 새벽, 이방원 일파가 정도전을 기습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차 왕자의 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정도전이 서얼 왕자(방석)를 끼고 다른 왕자들과 종친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선수를 친 사건이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 정황상 이방원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변란이었다. 철저히 '승자' 처지에서 역사가 쓰인 것이다. 그는 사후(死後) 467년이 지난 1865년(고종 2년) 대원군대에 와서야 한양을 설계한 공을 인정받아 복권됐다.
이인화 교수는 "자신의 설계대로 조선을 열었지만 혁명 후배 세대였던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은 '자신이 만든 체제에 의해 처형된 사람'"이라며 "혁명가의 숙명으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한영우 교수는 "혁명은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삼봉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혁명을 주도했고, 그 혁명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소설가 성석제는 "천민의 피가 섞인 지방 향리 집안 출신의 젊은이가 개국 공신이 되더니 다시 만고의 역적으로 추락한 엄청난 낙차(落差)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이야깃거리"라고 했다.
정도전은 집권에는 성공했으나 수성(守城)에 실패하고 목숨까지 잃었으니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한 혁명가인 셈이다. 장은수 민음사 편집인은 그를 '미완(未完)의 혁명가'라며,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에 비유했다. 그는 "체 게바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다가 39세 젊은 나이로 죽어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영원한 영웅이 될 수 있었다"며 "순수하고 원대한 꿈을 꾸었으나 자신의 꿈이 열매 맺기 전에 제거된 정도전도 '비운의 혁명가'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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