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냐? 나는 ‘힐링’이다 [2012.06.18 제915호]
[표지이야기] 종합베스트셀러에서 강세 보이고 ‘힐링’ 내세운 TV 프로그램도… 더 이상 안정과 위로 주지 못하는 가족·조직 떠나 ‘자기치유’로
▣ 이세영
싸이월드 공감
» 치유 코드를 활용한 대표적 토크쇼 프로그램인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의 한 장면. 명사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고 위안과 교훈을 공유하는 방식은 미국 <오프라 윈프리 쇼>의 포맷과 유사하다. SBS 제공.
대세다. 어딜 가나 ‘힐링’(healing)이다. 출판계도, 방송도, 산업계도 매한가지다. 더는 각박하게, 일에 쫓겨 살지 않겠다며, 건강 좇고 웰빙 타령하던 게 10년도 채 안 됐다.
허공에 매달린 십자가(교회·병원) 수는 사회에 미만한 고통의 총량에 비례한다는 속설대로라면, 이 나라는 확실히 아프다. 그사이 무슨 상처가 그리 깊어진 걸까. 오래전 ‘국민 유행어’였던 사극 대사 한 토막을 너나 없이 읊조리는 형국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1997년 ‘21세기 시사용어’에 등장

힐링 열풍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출판계다. 인터넷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힐링’이란 검색어를 입력하면 <힐링 코드> <시골 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 등 국내 서적만 86권이 검색된다. 서점 진열대의 에세이 코너를 봐도 웬만한 책은 부제목이나 띠지에라도 ‘힐링’이란 단어가 빠짐없이 박혀 있다.

힐링 서적의 강세는 교보문고의 6월 첫쨋주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1~10위권 목록 안에서 확인되는 것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1위·혜민 지음),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3위·정목 지음), <스님의 주례사>(4위·법륜 지음) 3권이다. 상위권을 승려들의 마음 치유서들이 휩쓸고 있는 것이다.

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대표는 힐링 서적의 강세를 2010년 이후 출판계에 정착된 ‘치유·위로 코드’와 연관지었다. “영미권에선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불교 쪽 명상서적이 강세를 보여왔는데, 우리도 같은 흐름을 타게 된 거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의 진단도 다르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국내로 파급돼 불안과 스트레스는 가중되는데, 조직이나 가족은 더 이상 안정과 위로를 주지 못하니 결국 ‘자기치유’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심리치유서의 저자가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였다면, 최근엔 스님 등 ‘멘토형 조언자’가 다수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치유의 주체가 전문가에서 ‘나 자신’으로 옮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얘기다.

힐링 열풍의 강도는 방송계도 뒤지지 않는다. 치유 코드를 차용한 대표적 토크쇼 프로그램인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월요일 밤 11시15분)는 동시간대에 부동의 시청률 1위(5월 넷쨋주 기준 9.6%)를 기록 중이다.

연예인들의 말장난과 상호 폭로로 시간을 때우는 종래의 토크쇼와 달리, 유명인사를 초청해 고민을 듣고 공감과 위안을 나누는 방식이다. 프로그램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우리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줄 신개념 토크쇼. 당신의 마음을 충전합니다’란 카피가 뜬다.

박근혜·문재인 등 유력 정치인과 ‘청춘 멘토’ 법륜 등이 게스트로 출연해 국민적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 이전에는 코미디언 강호동이 진행하는 MBC <황금어장-무릎팍 도사>가 있었다. 역시 연예인, 작가, 정치인 등 명사들을 초대해 고민을 상담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힐링 토크쇼’의 원형으로는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쇼>가 꼽힌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사회학)는 “미혼모 출신이란 핸디캡을 극복하고 방송 진행자로 우뚝 선 흑인 여성이 명사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고 위안과 교훈을 공유하는 방식은 최근의 한국 토크쇼가 경쟁적으로 차용하는 포맷”이라며 “문재인이 출연한 방송분을 보면서 2004년 빌 클린턴이 출연한 <오프라 윈프리 쇼>를 떠올렸다”고 했다.


주 수요층은 불확실한 삶을 사는 20~40대

힐링을 테마로 한 여행·휴양 프로그램도 성업 중이다. 몇몇 여행사가 서울 성곽길이나 강원도 영월, 경기도 양평, 전남 담양 등에서 진행하는 힐링여행 상품에는 관광 가이드 대신 심리치료사가 동행해 명상과 요가, 감정 조절 방법 등을 조언한다.

개인 참가자뿐 아니라, 기업 등 단체 참가자들도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라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힐링을 지역 콘셉트로 내세우기도 한다. 경북 경주시는 휴양과 건강 회복을 위한 종합 리조트 ‘힐링랜드’를 조성하고 있는데, 여기엔 상담·교육·세미나 시설과 유기농 레스토랑, 아트케어센터, 치유의 숲, 숲 속 박물관 등이 들어선다.

힐링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신문 자료를 검색해보면, 1997년 11월25일치 <동아일보>의 ‘21세기 시사용어’란 꼭지에 ‘힐링산업’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다. 신문은 “힐링은 본래 병을 치료한다는 뜻으로 힐링산업은 마음을 치료해주는 산업을 뜻한다.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힐링산업은 풍요롭지만 행복을 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좌절과 분노, 불안과 고독에 지친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제공해주는 신종 산업이다”라는 해설을 덧붙여놓았다.

흥미로운 대목은 3~4년 전까지도 힐링산업의 주 수요층을 장·노년층으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보경 대표는 “힐링이 차세대 코드로 떠오를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대부분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웰빙의 연장에서 생각하다 보니 그 타깃을 50대 이상으로 잡았던 측면이 있다”며 “하지만 요즘 힐링의 주 수요층은 노년이 아니라 불확실한 삶을 사는 20~40대”라고 전했다. 극심한 취업난과 생존 경쟁에 내몰린 젊은 층의 절박함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최근의 힐링 열기를 2000년대의 첫 10년을 풍미한 자기계발 열풍과 연결짓는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문화이론)는 힐링을 “신자유주의적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에서 탈락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다수가 되다 보니 공감의 교집합이 커져 나타난 트렌드”라고 분석한다. 이런 점에서 힐링은 자기계발형 주체가 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의 측면이 강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반면 서동진 교수는 힐링을 자기계발 코드의 변종으로 본다. “자기계발이 의료의 언어를 빌려 대중문화 안에서 등장한 게 힐링”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법에 따르면 ‘치유하는(힐링) 주체’ 역시 신자유주의가 빚어내려는 새로운 인간형, 곧 묵묵히 지시를 따르는 순종적 존재가 아닌,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고 시키지 않아도 제 할 일을 찾아 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최근의 ‘힐링 코드’가 신자유주의와 만나는 접점을 서 교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발견한다. 그의 말은 최근 ‘힐링 예찬’이 놓치고 있는 불편한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할 것을 촉구한다.

‘힐링 예찬’, ‘불편한 진실’과 눈마주치길

“신자유주의가 선호하는 건 사회적 관계 속의 개인이 아니라 개별화된 인간, 다시 말해 착취와 불평등의 중압 아래 놓인 노동계급의 일원이 아닌, 좌절과 희망의 갈림길에 놓인 심리적 개인이다. 쌍용차 해고자를 삶을 뒤흔든 외부 충격 때문에 자존감을 상실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는 연약한 피해자로 부각할 때, 해고와 실업, 기업의 횡포 같은 외부의 힘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중성화돼버린다.”

“전통적인 심리치유서의 저자가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였다면, 최근엔 스님 등 ‘멘토형 조언자’다. 치유의 주체가 전문가에서 ‘나 자신’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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