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육체의 병(病)을 치료(治療)하는 법
육체는 단지 마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마음에 부조화(不調和)가 생기면 그 반영(反影)으로서, 육체(肉體)의 부조화(不調和)인 “병(病)”이 발생(發生)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表現)하는 총체적(總體的)인 의식(意識)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불멸(永遠不滅)하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애자재(無碍自在)하며, 대자대비(大慈大悲)하다”는 등의 원천(源泉)이 되는 “본성(本性)”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는 현재의 의식(意識)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는 마음이 있으며,
셋째는 지금 의식(意識)하고 감지(感知)하는, 통상 인간이 “느낀다, 감지(感知)한다”는 등의 “현재의식(現在意識)”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산(計算)하고, 계획(計劃)하고, 노력(努力)하는 모든 분별심(分別心)이 현재의식(現在意識)입니다.
한편 이 현재의식(現在意識)이 부조화(不調和)의 씨를 가장 먼저 만듭니다. 이 만들어진 병(病)적인 부조화(不調和)의 씨는, 시간(時間)이 지나면서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축적(蓄積)됩니다.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등의 부조화(不調和)가 일어날 수 있는 씨앗을 현재의식(現在意識)이 심어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씨앗이 발아(發芽)하여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의 열매가 맺히면, 사람의 육체(肉體)에는 병(病)이 오고, 삶에는 불행(不幸)과 고난(苦難)이 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현실(現實)은 결과(結果)이지 결코 원인(原因)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는 현실(現實)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지금의 행위(行爲)가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업(業)”이니 “업인(業因)”이니 “업장(業障)”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절대권능(絶對權能)인 본성(本性)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인간에게 벌(罰)을 주신다든가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을 주시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認識)하십시오.
예수께서도 “지은대로 받느니라”하셨습니다.
자신이 지은대로 거두는 것이지, 자신이 짓지 않은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지은대로”라는 말씀은 자신의 잠재의식(潛在意識)과 현재의식(現在意識)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이 잠재의식(潛在意識), 현재의식(現在意識)이란 인간의 참 모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인(聖人)들께서는 말씀하셨고, 그 비존재(非存在)의 모습에 인간이 현혹(眩惑)되어 살고 있으므로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은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없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성인(聖人)의 빛은 일월(日月)과 같다고 했습니다. 해나 달이 누구에게나, 설사 악(惡)하게 보이는 사람에조차도 차별(差別)을 두지 않고 그 빛을 골고루 비춰 주심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계시는 절대신(絶對紳)은, 결코 인간을 괴롭고 불행하게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원인(原因)을 찾아 들어가 보면 상당 부분이 잠재의식(潛在意識)과 현재의식(現在意識)속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죄의식(罪意識)”이라는 것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위 “죄의식(罪意識)”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체(生命體)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양심(良心)이라는 것의 선의(善意)의 발로(發露)라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며, 또 그것으로 선(善)과 악(惡)을 구별 짓는다 해도 지나치진 않습니다.
하지만 양심(良心)이라고 하는 이 마음도 현재의식(現在意識)을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에 불과하며, 어느 특정의 한 가지에 국한(局限)할 경우에는 옳을 수도 있지만, 전체(全體)라는 개념(槪念)에서 볼 때는, 바로 이것이 가장 위험(危險)한 함정(陷穽)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나름대로 규정(規定)하여 지키려고 하는 조그만 양심(良心)과 선(善)을 위해, 그보다 더 큰 악(惡)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 또한 인간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당사자 스스로는 양심(良心)과 선(善)이라는 미명(美名)을 내세워, 자신의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에 젖어 있는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미망(迷妄)입니다.
약(藥)이 조금만 지나쳐도 독(毒)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치(理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스스로가 만들어 심어 놓은 “죄의식(罪意識)”이라는 것도, 양심(良心)이라는 미망(迷妄)이 상대적(相對的)으로 만들어 놓은, 가장 큰 함정(陷穽)중의 하나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신은 전혀 그러한 적이 없다고 항변(抗辯)하는 이들도, 그네들이 잠재의식(潛在意識)을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는 것은 현재 자신이 느끼는 모든 의식(意識)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겠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현재(現在)한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잡고보면 과거(過去)입니다. 이미 흘러 지나간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지나가 없어져 버린 과거(過去)의 불평(不平), 불만(不滿), 갈등(葛藤) 등을 붙잡고, 자신뿐만 아니라 그 일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즉, 부조화(不調和)된 현재의식(現在意識)의 잠재화(潛在化)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소(要素)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의 훌륭한 원인(原因)들 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부조화(不調和)의 주된 행위(行爲)의 제공(提供)은 잠재의식(潛在意識)이 하며, 이 잠재의식(潛在意識)은 현재의식(現在意識)의 누적(累積)이며, 당연히 있는 듯이 보이지만 참으로는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없다고 생각하여 그 염력(念力)을 강하게 하면 당연히 사라질 뿐입니다.
병(病)이 생겨나는 원인(原因)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잠시 나타났다가 물질적(物質的)인 치료(治療)나 정신적(精神的)인 치료(治療)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 병(病)을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주변(周邊)의 사람들을 지배(支配)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관심(關心)과 위로(慰勞)를 받고 싶다든가, 자신에게 주어진 학업(學業)이나 취업(就業) 등, 마음의 부담(負擔)이나 짐을 털어내기 위한 구실로, 또는 때에 따라 자기학대(自己虐待)의 구실 등으로 삼으려는 바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가 느끼고 있으면 병(病)은 결코 호전(好轉)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자기합리화(自己合理化)를 위한 “변명(辨明)의 구실”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힘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육체의 병(病) 또는 건강(健康)하지 못함 등으로, 자신을 보호(保護)하는 무기(武器)나 방편(方便), 또는 구실(口實)로 삼고자 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 존재하는 한, 병(病)을 비롯한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은 결코 호전(好轉)되지 않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이러한 자신의 영역(領域)을 지키려는 마음은 진정한 이치(理致)를 모르면 모를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참 이치(理致)를 알게 되면 자신의 이 조화롭지 못한 모습은 영혼(靈魂)의 진화(進化)를 위한 학습(學習)의 과정이거나, 과거(過去)의 잘못된 생각이 씨앗이 되어 지금 나타난 열매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또 그 원인(原因)을 찾아 씨앗(因)을 제거(除去)하여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 그 열매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에게 생기는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 모든 조화(調和)롭지 못한 모습의 근본적(根本的)인 치료(治療)는, 마음으로 행(行)하지 않으면 거의가 재발(再發)합니다.
조금 전의 설명에서 마음속 병(病)의 원인(原因)을 우리는 “인(因)”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 “인(因)”이 발아(發芽)하여 육체(肉體)나 주변(周邊)에 나타나게 되는 여건(與件)이나 환경(環境) 등을 또 다른 “외부의 인(因)”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因)”과 “인(因)”이 서로 만나는 것, 즉 “인연(因緣)”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서로 연관(聯關)되어 작용(作用)이 일어날 수 있는 “인(因)”과 “인(因)”이 만나는 것을 “인연(因緣)”이라고 합니다.
더러는 “인(因)”을 직접적(直接的)인 원인(原因)으로, “연(緣)”을 간접적(間接的)인 원인(原因)으로 풀이합니다만, 어떠한 일이든지 “직접적(直接的)이고 간접적(間接的)이고”라는 상대적(相對的)인 의미(意味)는 가치(價値)가 없습니다.
서로의 상관작용(相觀作用)으로 인하여 어떠한 결과(結果)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은, 각자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직접적(直接的)일 수밖에 없겠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 즉, 부부(夫婦)라는 “인과(因果)”는 각각의 “인(因)”들인 처녀와 총각의 만남 (因緣)의 결과라 할 수 있고, 가정(家庭)과 가정(家庭), 국가(國家)와 국가(國家) 등, “인(因)”이라는 개념은 사람 하나를 형성(形成)시키는 모든 한 부분씩의 원인(原因)들일 수도 있고, 그 범위(範圍)를 확대(擴大)시키면 우리의 지구(地球) 자체(自體)도 하나의 “인(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병(病)이나 현재의 상태(狀態)라는 것은, 결과(結果) 즉 “인과(因果)”인 것입니다.
“인(因)”과 “인(因)”이 만나서(因緣) 그 작용(作用)으로 “인과(因果)”가 생김은 순리(順理)라 하겠습니다. 이런 연유로 치료(治療)의 최상책(最上策)은 바로 그러한 자신속의 “인(因)”자체를 없애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신 속에 씨앗이 없으면 어떠한 경우의 여건(與件)이나 환경(環境)에서라도, 즉 “외부의 또 다른 인(因)”을 만나는 경우에도 결코 발아(發芽)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약(藥), 음식(飮食) 등의 물질(物質)에 의하거나 물리적(物理的)으로 행하는 치료(治療)의 대부분은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인(因)”을 그냥 둔 채, “외부의 인(因)”의 제거작업(除去作業) 또는 완화작업(緩和作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외부의 인(因)”을 제거(除去)하거나 완화(緩和)하는 방법도 옳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속에 “인(因)”이라는 씨앗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또 다른 여건(與件)이나 환경(環境), 즉 상호작용(相互作用)으로 “인과(因果)”를 맺을 수 있는 “외부의 또 다른 인(因)”을 만나게 되면, 당연히 “인과(因果)”가 맺힐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근본적(根本的)인 처방(處方)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해서 인체의 질병(疾病)에 대한 모든 근본적(根本的)인 치료(治療)는, 역시 그 당사자 마음의 치료(治療)가 우선인 것입니다.
“욕치기질(欲治其疾)이면 선치기심(先治其心)이라” 즉 질병(疾病)을 다스리고자 함에 있어서는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려라 함입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마음이 아프면 병(病)이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병(病)이 된 경우를 주위에서 더러 보셨을 것입니다.
마음이 아파서 病이 되었다면, 마음이 즐거워지면 그 즐겁고 밝은 마음만으로도 병(病)은 낫게 됩니다. 진리(眞理)가 담긴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이 밝아지므로, 어두운 부조화(不調和)의 씨앗들이 제거되어 병(病)도 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眞理)는 곧 본성(本性)이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현상(現象)의 세계는 “외부의 인(因)”을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반면에, 진리(眞理)는 제각기 자신속의 “인(因)”을 만들기도, 없애기도 하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자신속의 모든 “인(因)”을 만들 수 있는 것 역시 자신속의 본성(本性)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본성(本性)에 대한 그 가치(價値)와 의미(意味), 또 능력(能力) 등을 정확히 느끼기만 하면,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의 부조화(不調和)들은 근본적(根本的)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본성(本性)을 인식(認識)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을 완전히 무시(無視)한 상태에서, 현재의식(現在意識)의 파장(波長)을 본성(本性)에 맞추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식(現在意識)의 일부가 누적(累積)된 것이 잠재의식(潛在意識)이므로, 현재의식(現在意識)을 진리(眞理)에 젖어들게 하면, 잠재의식(潛在意識) 또한 그와 같이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방송(放送)의 전파(電波)가 뒤엉켜도 주파수(周波數), 즉 파장(波長)을 맞춘 방송만이 시청(視聽)되듯, 우리들 마음의 파장(波長)도 본성(本性)에서 보내는 대조화(大調和)의 파장(波長)에만 맞추면, 어떠한 조화(調和)롭지 못한 모습이 잠재의식(潛在意識)이나 현재의식(現在意識)에 존재(存在)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에 그 부조화(不調和)는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므로써 병(病), 불행(不幸) 등이 나아지는 것은, 책(冊) 속의 좋은 진리(眞理)의 말씀을 읽어, 맺혀진 마음이 풀어지고, 공포심(恐怖心) 등이 사라지며, 마음이 자유(自由)와 평화(平和)의 파장(波長) 속으로 젖어들기 때문입니다.
자유(自由)와 평화(平和)와 사랑의 대조화(大調和)를 자신의 육체와 환경에 나타나게 하려면 조금의 노력(努力)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완전한 생명(生命)인 본성(本性)과 파장(波長)을 맞춘다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 병(病), 불행(不幸), 고난(苦難) 등등의 조화(調和)롭지 못한 모습이 보일지라도, 그러한 상황은 가짜의 모습, 그림자라고 생각하십시오.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영(靈)적인 진보(進步)와 진전(進前)에 틀림없이 필요(必要)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수긍(首肯)하고 수용(受容)하려는 노력(努力)을 해보십시오.
또 자신이 나쁜 행위(行爲)와 잘못된 말, 어두운 생각들에 젖어있다 할지라도, 위축(萎縮)되거나 의기소침(意氣銷沈)해서 자책(自責)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본모습, 본생명(生命)은 자신의 행위나 말, 생각 등에 상관없이, 항상 대조화(大調和)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意志)나 행위(行爲)로 어떤 일을 해결하려 마시고, 모든 것을 자신속의 하느님, 자신 속의 부처님의 본성(本性)에 위임(委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본성(本性)에 일체(一切)를 위임(委任)한다는 것도, 내면(內面)의 진정한 뜻을 정확(正確)히 모르면 무조건(無條件)적이고, 때로는 나태(懶怠)와 오만(傲慢)을 포함한 의존(依存)이나 의지(依支)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생명(生命)의 존재(存在)와 의미(意味), 가치(價値)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들 삶 속의 모든 일들 중에 바로 지금 자신 앞에 와있는 일에 대한, 지극(至極)한 성실성(誠實性)과 열심(熱心)의 노력(努力)이 바탕 되는, 그런 위임(委任)이라야 제대로 된 위임(委任)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을 충실(充實)히 대처(對處)하고, 지금 하는 일에 최선(最善)의 노력(努力)을 기울인다는 것은, 모든 생명(生命)의 기본적(基本的)인 자세일 뿐만 아니라, 그 존재(存在)함의 의미(意味)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오직 본능(本能)만을 따르는 뭇생명(生命)이 아닌,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생명(生命)에게만은 “바로 지금”의 열심(熱心)과 성실(誠實)이, 틀림없이 알찬 과거(過去)와 밝은 미래(未來)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시점(時點)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은, 전(前)과 후(後)를 포함해서 영원토록 자신의 생명적(生命的) 존재(存在)에 대한, 어떠한 가치(價値)나 의미(意味)도 기대(期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서 상대적(相對的)인 개념(槪念)을 뛰어 넘은 절대적(絶對的)인 개념(槪念)의 선(善)이라는 것도, 인간의 능력(能力)속에는 이미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지(境地)를 찾고자하는 모든 노력(努力)도 당연히 그 가치(價値)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마음을 파장(波長)을 맞추어 마음이 정화(淨化)되고, 매사(每事)에 감사(感謝)하고 기뻐하면 그 즉시로 대조화(大調和)의 파동(波動)이 자신에게 젖어들어, 육체(肉體)와 환경(環境)에 무한(無限)의 조화(調和)와 조화(造化)가 틀림없이 나타납니다. 더불어 반드시 건강(健康)하고 행복(幸福)한 삶이 전개됩니다. 자신속의 분별심(分別心)에서 탐(貪),음(淫),진(瞋),치(癡)가 자기 몸의 건강(健康)을 해치는 씨앗이 됩니다. 자신이 화내고 불평(不平)했던 마음이 사라질 때쯤에, 씨앗은 썩고 열매인 병(病)이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속 병(病)의 원인(原因)이 되었던 조화롭지 못한 마음을 제거하면, 병(病)의 뿌리가 끊어져 육체(肉體)는 건강(健康)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