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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전11권 중 제3권

강론:금오 김홍경 도서출판 신농백초

(7)

이 단락에서는 첫째, 선문답의 등장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고

둘째, 유심적인 관찰에 의한 기존 음양관의 혼란유발이 또한 특징입니다.
이 오운육기를 그동안에도 자꾸 조금씩 나열해 드렸던 이유는 전체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겠지만 갑 을 병 정...을 천간이라고 하고 자 축 인 묘...를 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말을 써 놓았는지 알 수가 없고 무슨 뜻인지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지를 보면 동물에 대한 취상이므로 이해할 수가 있지요.
천간은 오행곱하기2, 지지는 육경곱하기2로서 오행과 육경이 둘로 나뉘어진 상황임을 알 수가 있는데 그러면 왜 오행이면 다섯 가지만으로 분류를 하고 육경은 여섯 가지로 나누지 않고 둘로 나누는 상황이 필요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소음이라 하더라도 양소음, 음소음이 있고, 목인 봄(춘)이라 하더라도 양춘이 있고 음춘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성을 보더라도 여성적인 여성이 있고 남성적인 여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나누고자 하면 한이 없어요. 편의상 이렇게 둘로 나누어 놓은 거지요.

우리 인간을 볼 때 최초에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고, 남자와 여자가 분리된 것에서 다시 남성같은 여성, 여성같은 남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여성같은 남성 중에 더 여성같은 성격... 이런식으로 분류해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곱하기 나누기를 한 십간십이지는 64괘에서 수화개제, 화수미제, 중천건, 중지곤괘를 뺀 60괘가 서로 맞물고 돌아가는 겁니다.

토중에도 로방토가 있고 벽상토가 있지요. 길거리에 있는 흙과 벽에 붙어 있는 흙이죠.
또 목이라 하더라도 평지목과 산중목, 갑자을축 해중금...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주 보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 대한 예만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이 오운육기 각론은 너무 어려워서 확대해석이 어렵습니다.
'갑자을축 해중금'이런 말이 나오는데 저는 갑자을축 해중금에서 꽉 막혀버리면 그 다음으로 진척을 안하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연구를 하다가 시간도 없고 놀기에도 바빠서 공부를 못했습니다.
같은 금이지만 옛사람들은 음금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면 해중금 즉 바닷속에 있는 금과 모래속에 있는 사중금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옛날 선승들은 수수께끼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여학생들이 오면 꼭 물어 보는 것이 있는데, 여학생들만 한 번 대답을 해 보세요. "무우말랭이에 꼭 들어가는 것이 뭐겠습니까?" 공안법에서는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돌리지 않는 것을 칭찬합니다.
무우말랭이에 꼭 들어가는 것은 무우거든요.
그런데 학생들은 이것을 꼬집어 내지 못하고 고춧가루, 참기름, 설탕, 미원 등... 복잡하게 대답을 하거든요. 계속 '틀렸다, 틀렸다'라는 것을 되풀이 해 듣다보면 그제야 무우 라는 대답이 나오는 거예요.

공안에 접근하는 길은 단순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이 바로 공안에 근접해 있는 거지요.
십우도(십우를 나타낸 그림.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시함 것임. 십우란 자기의 본심을 찾아 진리를 깨닫는 순서. 인간의 본심을 소에 비유하여 소를 찾고 얻는 순서와 이미 얻은 뒤에 주의 할 점을 10가지로 설명함)중의 하나를 보면...

반본환원

본래 청정하여 한 티끌도 받지 않는다.
유상의 영고성쇠를 보고 무위의 응적에 이르니
환화와 같지 않으므로 어찌 수치를 가할 것인가.
수록 산청으로 앉아서 성패를 본다.

본래청정하여 불수일진이로되
관유상지 영고하고 처무일위지의숙하니
부동환화개가수치리요
수록산청하니 좌관성패로다

오운육기는 이 정도로 천진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겁니다.
교활하게 잘 돌아가는 머리가 아니라 천진한 눈, 순수한 머리만이 이것을 이해 할 수 있는 겁니다.
저희 한의원에 외국인 교수 하나가 "주역"을 배우러 가끔 오는데 "주역"64괘는 저도 잘 모르니까 주로 유심적인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죠.
그런데 이 친구가 저에게 하도 공안 문제를 가지고 당하다 보니까 어느날은 자기가 공안 문제를 하나 내겠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그 친구의 'American chicken' 공안은 조금 저차원 공안이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에게 공안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통밥"을 굴리는 공부만을 해 왔으니까 여기서는 "통밥"을 쉬는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치킨공안(?)이라 하는 것은 미국에서 어린이들이 많이 하고 있는 것인데, "병아리가 횡단 보도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왜 건너 갈까요?" 길이기 때문에...?, 집이 그쪽이기 때문에...?, 건널목이기 때문에...?, 가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다 틀렸습니다. 또 다른 분 대답해 보십시오. 신호등 불이 켜져서...지금 가장 통밥을 잘 굴리는 사람의 가장 유치한 통밥이 하나 나왔습니다. 벌써 파란 신호등까지 생각을 한겁니다.
지금 신호등 불이 켜져서라고 대답하신 분 성이 무엇입니까? 허 씨요? 예! 앞으로 학생의 이름은 '허 유통'이라고 하십시오.
유치한 통밥의 대가, 허유통 씨, 머리 좋은 사람들은 파란 신호등이 있으니까, 엄마 보고 싶어서, 엄마 따라서, 켄터키 치킨 집이 있어서 등등... 온갖 대답들이 다 나오는데 이것은 지식입니다.

이 답은 간단합니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지요.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운육기에서 갑자을축 해중금, 사중금 또 로방토, 벽상토, 평지목 등 이런 말들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오행을 가지고 곱하기 나누기 하시면 안풀어지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강의 듣다가 강사분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질문을 그만 두었었는데 어떤 주역학자가 시원하게 풀어주더군요.
그 분은 완전히 직관에 의해서 설명을 해 주셨는데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오행의 이론에 의해서 해중금은 금과 수, 사중금은 금과 금이 아니고 해중금이라고 하면 바다 속에 금이 있는 그 상황, 사중금은 모래 속에 금이 있는 그 상황을 보고 그 차이점을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오행적으로 금과 수가 부딪치는 상황을 생각하지 말고 어떤 비교기준에 의해서 이 말을 써 놓은 것이므로 그 비교기준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벽상토, 벽에 바른 흙과 로방토, 길가에 버려진 흙이라고 했을 때 그 기준을 어디에 두었을까요? 모든 것은 기준이 있을 때 음양이 정해지는 것이지, 기준이 없으면 음양도 정해 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주볼 때 소위 명리학(하늘에서 주어진 명과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주로 쓰는데 인간사에 이용할 때는 "당신은 꼭 로방토와 같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흙과 같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무튼 어떤식으로든 확대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지하게 어렵지요. 여기서는 직관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족궐음간경은 피리요, 어쩌구 하면서 취상을 하였는데 어느 정도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 보시고 명상 재료로 삼으세요.
이것을 해석을 잘 하면 오운육기 명리학이 끝나는 것이라고 하던데 어떤 선생님은 처음에 오행적으로 공부를 하다가 주역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그제서야 인간사에 비유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아까 어떤 여학생이 해중금과 사중금을 유용과 무용의 용, 불용의 차원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 했는데 이 지구상에는 모든 것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무, 귀천, 강약, 상하, 빈부, 완급, 대소, 생사...이런 것을 30가지로 분류한 것에 불과한 거지요.
그러니까 이러한 괘가 나오면 해중금과 사중금의 차이점을 보아야지 어느 한쪽만을 공부한다고 하면 100년을 공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내경"오운육기편에 보면 음양은 5로도 10으로도 천 만...으로도 나눌 수 있다고 했거든요.
제가 "내경"에 있는 근거를 대드리면 여러분들은 아하! 이런 것을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내경"오운육기편 오운행대륜에 보면 "여가 알기에는 십간의 오행적 관계나 십이지의 방위적 관계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상의 음양이나 오행의 분류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대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기백이 대답하여 말씀드린다.
"그것은 분명한 도리가 아니겠사옵니까? 귀유구가 아뢰온 것은 천지를 운영하는 오운 육기상의 음양이나 오행이옵고,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지 인간들에게 관계가 있는 일반적인 음양으로 이것 또한 오행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다른 2개의 법칙을 합하여 생각해 보아도 거기에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체로 음양 등 2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활용하여 십으로 분류하거나 백으로 분류하거나, 혹은 또 천으로도 만으로도 분류할 수는 있는 것이므로 형편에 좋도록 적의 융통무애하게 분리하면 좋을 것이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운육기의 음양 오행의 이치가 상식적인 음양. 오행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좋은 것이옵니다" (오운행대륜)

그러니까 오운이라고 하는 것은 사계절의 변화, 즉 춘 하 추 동이고, 육기라고 하는 것은 풍 한 서 습 조 화인데 봄이라고 하여 바람만 있습니까?
태양이 비치고 추운 날도 있고 풍 한 서 습 조 화가 다 있지요.
그러므로 지지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천기, 즉 기운에 해당하는 것이고 천간이라고 하는 것은 춘 하 추 동의 변화를 말하는 겁니다.
대다수의 많은 학생들이 오운육기라고 하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까 어떤 교수들은 "그 사람은 오운육기파야 오운육기파..." 그렇게 이야기들을 한다고 하던데 아니! 세상에 오운육기파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운육기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실상을 종합해서 이야기 하려는 노력인데 우주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 파가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선입관을 가지지 마세요.

제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오운육기는 갑자을축...에 대한 해석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앞에서 공부한 육기적, 차원인 소음, 궐음, 태음, 소양, 양명, 태양과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목, 화, 토, 금, 수를 혼합하여 얼마나 확대해석을 잘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확대 해석을 잘해야 명리학의 대가가 되고 또 한방으로 들어오면 기후라든가 사람의 병변을 보는 대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해중금에 대해서 한 번 해석해봐라" 이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금에 대비된 해중금이냐 하는 기준이 있어야지요.

황제가 기백에게 "짐이 듣기에는 십간의 오행적 관계나 십이지의 방위적 관계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음양이나 오행의 분류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본인도 이 점에 동의합니다. 예를 들어 소음군화는 방위상으로 어디에 속해야 할까요? 일반적인 오행상으로 보면 남방에 속해야 합니다.
수소음은 남방에 속한 것이 사실인데 족소음은 제일 북방에 속해 있거든요. 또 양명조금만 하더라도 서방에 속해야 하는데 수양명은 동방에 속해 있거든요.
더구나 수양명같은 경우는 오운과 육기가 모두 금인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참 이상하지요.
제가 앞에서 조금 이야기하다가 그만두었는데 겨울철에 우물물이 따뜻해지는 것과 여름철에 우물물이 차가와지는 것이 단순히 감각적인 차원이겠습니까?
아니면 실제로도 온도가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감각적이라는 쪽이 절대적으로 우세할 겁니다.
그렇지만 몇몇 분은 실제로 온도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온도계를 가지고 실험해 보세요.
단순히 감각 차이라고 중고등학교때 배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틀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여름철에 떠온 샘물을 더울 때 먹으니까 시원함을 느낀다고 했는데 냉방이 잘 된 방에서 그 샘물을 마신다고 하면 다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또 겨울철에 먹는 샘물이 춥기때문에 따뜻함을 느낀다면 히타 장치가 잘된 방에서 그 샘물을 먹는다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실제로 실험해 보세요.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에 많은 혼란을 드렸는데 그 이유는 제가 오운육기를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겁니다.

황제는 십간십이지에서 혼란을 느껴 "어째서 소음이 북방으로 가고 상식상의 음양이나 오행의 분류와 다른 것이 어떤 연유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기백은 "그것은 바로 당신이 알고 있는 인간사에서만의 이야기이고 천체 우주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겨울이면 무조건 추운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꼭 그런것만은 아니죠.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에서 이것을 평면적으로 본다면 임계는 북방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갑기 합토가 되거든요. 솔직히 내용상의 문제는 저도 어려워서 모르겠고 이걸 설명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임계는 북방수로 이것이 풍 한 서 습 조 화와 서로 어울려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겨울철에 바람이 많다고 하면 임과 궐음풍이니까 임사가 되고, 겨울철에 유별나게 춥다고 하면 태양한수에 해당하는 진 술이 더해지게 되면 임술이 되겠지요.
하지만 오운육기를 해석하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예는 여러분들을 평면적으로 이해가 쉽도록 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니까 이것을 외우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옛날에 제가 오운육기를 배울 때에는 오운육기를 이해하려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번 관찰해 보고 낮의 모닥불과 밤의 모닥불을 관찰해 보라고 했거든요.
똑 같은 소음군화라고 하더라도 춘하추동에 작용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상상력과 추리력을 많이 키워야만 합니다.
특히 지금 말씀 드리는 부분은 더욱 그러하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육십갑자를 써오라고 했는데 이것은 꼭 쓰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것을 외우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한 번 씀으로해서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무조건 외우지 마시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갑자년이라고 하면 그 갑자년의 의미를 터득한 사람만이 오운육기에 접근한 사람이죠.
'천화동인'의 괘가 있다고 할 때 1효는 어떻고 2효는 어떻고를 외우는 것보다 천화동인의 천괘와 화괘를 확실히 고민하여 보고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여 생각해 본 사람이 진리에 가깝게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육십갑자를 써 보면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괘가 무슨 괘입니까? 족소음신에 해당하는 지뢰복괘죠. 위에 있는 괘는 무슨 괘입니까?
팔곤지괘에 해당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팔괘를 모르시는 분이 있으면 절대 안됩니다.
팔곤지괘는 임맥에 해당하고 아래에 있는 괘는 사진뢰에 해당하는 소양경입니다.
그러면 소양경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배경은 쌀쌀맞고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겠죠.
그러니까 상화만 하더라도 '인신상화의 해에는 장군이 태어난다. 난리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더위가 밀어닥칠 수도 있다. 가뭄이 온다' 등의 여러가지의 해석이 등장하게 되죠.
또 인신상화가 들어간 사람은 '장군감 아니면 깡패다'라고도 하는데 하나는 좋게 작용한 것이고, 하나는 나쁘게 작용한 겁니다.

우리가 선천과 후천의 이야기를 참 많이 하고 있는데 이 선천과 후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맥문동씨가 있다고 합시다. 본래 맥문동종자는 좋은데 바람에 날려서 건조한 땅에 떨어졌다고 하면 이건 선천(맥문동종자)은 좋은데 후천(건조한 땅)이 나쁜 경우죠.
그런데 이 맥문동 종자가 습한 땅을 만났다고 하면 선천도 좋고 후천도 좋은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주 지혜도 좋고 공부도 잘 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태어난 곳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게 되어 공부를 하려고 하면 엄마가 나가서 돈벌어야 하니까 동생 보라고 하고, 또 나가서 돈벌어오라고 하면 사람이 쪼그라붙어서 말년까지 가난한 신세 못 면하게 되고 그저 죽을 때까지 자신의 환경 탓 만을 하다가 죽게 됩니다.

@[(8)@]

여러분! 숙지황밭에 무엇이 들어가면 다 말라 죽습니까?
무우가 들어가면 숙지황이 다 말라죽게 되지요. 옛부터 전해오는 것 중에 숙지황 먹고 무우를 먹지마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무우를 식물학상으로 볼 때 어느 부분이 성합니까? 또 무우를 던졌을 때 어떤 부분이 먼저 떨어집니까?
물론 아래 부분인 뿌리가 먼저 떨어지겠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을 종합해 본다면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어디로 작용하는지 짐작이 갈겁니다.
우리가 무우를 먹었을 때 트림이 먼저 나옵니까? 방귀가 먼저 나옵니까? 트림부터 먼저 나오지요.
무우가 소화된다는 것은 기를 위로 올림으로써 아래가 뚫리는 즉 기를 위로 상기시키면서 소식시키지요.
그런데 숙지황은 어떤 작용을 합니까? 보혈, 보음 시키는 작용을 하지요.
그러니까 기를 위로 상기시켜 주는 것과 보음시키는 것을 한데 섞어놔 두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새로 개업한 똑똑한(?) 젊은 한의사들은 "괜찮아요. 옛날 사람들이 그저 모르고 한 소리니까... 과학적인 근거가 없거든요" 이렇게 곧잘 이야기합니다.

제발 여러분들 만큼은 이렇게 똑똑한 한의사가 되지 마세요.
얼마전에 어느 대학교 연구팀이 녹용에 대해서 연구발표를 하였는데 "녹용은 약간의 제라틴 성분과 섬유질 성분 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을 사용하고 있는 한방의학이 한심하다" 그러더군요.
그러고는 뒷 구멍으로 자기 자식을 귀비탕 먹이고, 얼마나 우습습니까? 정말 녹용에는 약간의 제라틴 성분과 섬유질 밖에 없을까요? 왜 옛사람들이 녹용을 사용했을까요?

"개에게 돌을 던지면 돌을 쫓아 다니고 사자는 바로 사람을 문다(한로축괴사자교인)"고 했거든요.
녹용을 알려면 사슴을 관찰해야지요. 녹용은 좋아하면서 사슴은 관찰하지 않거든요.
사슴의 생태를 잘 관찰하면, 녹용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여러분! 돼지가 양적인 동물입니까? 음적인 동물이겠습니까?
돼지를 족궐음간경에 배속을 시켜놓았지만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음적이 될까요? 우선 많이 먹는다는 측면에서는 음적이 되겠지요.
무엇이든지 취하려는 기운은 강하고 내 놓으려는 기운은 별로 없지요.
돼지가 방귀를 뀌거나 트림을 하는 것 보셨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이므로 잘 내놓질 않죠.
그런데 스컹크나 오징어 같은 것은 조금만 건드려도 내뿜습니다.
그러면 이런 놈들은 --지기가 강하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이 소양인지 태양인지는 딱 잘라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들어 마시는 쪽보다는 내 쏘는 쪽이 강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돼지는 흡수하는 기운이 강한 것으로 보아 음적이지요.
이렇게 본래 음적인 돼지의 신체구조 중에서 제일 아래에 돼지 족발을 쓰게 되니까 몸에 물이 고이겠습니까? 안 고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물탕과 돼지족발을 잘 쓰면 여자들 젖 안나올 때 좋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다리부분과 머리 부분을 비교해 볼 때 어느 부분이 양이 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머리 부분이 양이 될 것입니다.
사슴을 보면 아주 짧은 털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추위를 잘 견디고 오히려 눈에서 막 뒹굴지 않습니까? 눈 위에서 뒹굴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가 덥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들은 사슴의 생태를 관찰하고 사슴의 경락을 관찰한 거지요.
그러면 경락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관찰해야 그 특징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사슴의 성격을 알아야지요. 사슴은 옆에서 바스락하는 소리만 나도 잘 조동하고 튑니다.

잘 튄다고 하는 것은 양적일까요. 음적일까요? 일단은 양적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니까 사슴고기 많이 먹고 녹용 많이 먹으면 아무일에나 잘 놀래고 반응이 빠르고 괜스리 민감해집니다.
어린아이들한테 몸이 더울 때 녹용을 쓰면 부작용이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기 뒤끝에 여열이 불퇴했을 때, 녹용을 쓰면 안됩니다.
세간에 떠도는 녹용 먹고, 부작용 났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한의원에 식물학을 전공한다는 여학생이 왔길래 사과와 배 중에서 어느 것이 건조한 땅에 잘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 대충 생김새, 맛, 색깔만 보더라도 그것의 정체를 알 수가 있지요.
바로 이것이 사물의 말미만 보고도 근본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운육기의 근본 또는 상황을 보자는데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내경"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만 상황을 깨어서 단순하게 보자는 것이 저의 근본 뜻임을 여러분들은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모든 기운이 교차하는 곳을 1차로 입술, 즉 임맥과 독맥이 만나는 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두번째로 기교하는 곳은 배꼽(제)이지요.
이때에 오운육기에서는 배꼽 위와 배꼽아래로 나누어서 보지요.
상과 하로 나누어 볼 때 천간이 지배하는 것은 계절같은 것을 말하고, 지지는 그때 그때에 변하는 기후같은 것으로 변수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가 음양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것을 10으로 넓혀서 분류한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더욱 더 연구하여 산술학적으로 발전한다면 이것을 20으로 분류한 사람도 나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사주를 볼 때 년 월 일 시를 따져서 어쩌구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꼭 100%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루 중에도 자 축...신유 술 해가 있는데 예를들어 자시라고 하여 꼭 춥겠습니까?
한여름 밤의 자시는 춥지 않지요. 또 오시는 춥거든요.
그렇다면 사주라고 하는 것이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만약에 사주가 전부 맞는다고 하면 년 월 일 시가 똑같고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하면 그 사람들의 운명도 똑 같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자시라고 하면 이 두 시간 안에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당나라 시대 때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당대에 배휴와 배탁이라고 하는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일란성 쌍생아 였습니다.
그러니까 얼굴 생김새가 똑같았지요. 둘이 태어날 때 등이 붙어서 나왔으니까 거의 동시에 나왔지만 배휴가 발을 먼저 디뎌서 형님이 되고 배탁이 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쌍동이의 부모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세상을 떠나 하는 수 없이 외삼촌 집에서 배휴와 배탁은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인 배탁은 외삼촌 집에서 도망가버리고 형인 배휴만 남게 되었지요.
이 쌍동이는 어찌나 못생겼던지 둘 다 이빨은 완전히 옥니박이에다가 머리털은 하늘로 뻗치고 눈썹은 송진 붙여놓은 것같고 인상은 항상 찌부러져 있고, 너무 못생겼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가 배휴를 보더니 "저 아이가 있으면 이 집안이 망하게 됩니다" 하고는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옛날 할아버지나 할머니께서 집에 가정부가 잘 들어오고 못 들어옴에 따라 집안이 흥하고 망한다고 하는 '업덩어리'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집에 업덩어리 하나 들어왔어" 그러거든요.
이 말 안에는 사람이 하나 들어옴으로 해서 우리집을 잘되게도 못되게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거여요.

어느 날 가정부가 하나 들어왔는데 거지가 동냥하러 오면 며느리는 "아니! 사지가 멀쩡해 가지고 동냥하러 다녀요?" 하면서 내쫓아 버리는데 새로 들어온 가정부는 몰래 뒷구멍으로 거지를 불러서 쌀독의 쌀도 내주고 밥도 먹여 보내거든요.
또 어떤 때는 자기 돈으로 동네 할머니들 모셔다가 밥도 지어드리고 도시락도 싸 보내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아들이 하는 일이 잘 되고 집안의 분위기가 이상스럽게도 화평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또 어떤 경우는 파출부 하나가 집에 들락거리면서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어제 20원을 전화거는데 쓰고 나머지 80원 하고 토큰 두 개를 책상위에 올려 놓았는데 찾아 보니까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동생이 가져갔나 보다'하고 "얘! 말자야. 내 책상위에 토큰이랑 80원 가져갔니?" "아니? 세상에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하면서 신경질을 냅니다.
그러면 혹시 엄마가 가져갔나 싶어서 "엄마! 혹시 책상위에..." "얘! 치사하게 엄마가 그걸 가져가겠니?" '그렇다면 혹시 아빠가...아니야. 아빠가 가져갔을리는 없어' 그러면서도 의심이 딱 생기게 되는거죠.
또는 아버지가 소중히 여겨온 만년필이 책상 위에서 없어진 것입니다.
"차라리 돈 2--3만원이 없어지는 것이 낫지 추억이 담긴 만년필이 없어질게 뭐람"하며, 아들을 불러 세웁니다.
"야! 이리와, 벌써 아버지 물건에 손을 대!!!" "아니예요. 저 필기도구 많아요" "어-엉! 그래? 그러면 아빠가 잘못 생각했구나"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왠지 석연치가 않지요.
엄마가 어느날 아빠 드리려고 손수건을 사다가 부엌에 두었는데 그 손수건이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야! 너는 아빠 드리려고 손수건 사두었는데 네가 가지면 어떡하니?"하고 야단을 칩니다.
"에이! 왜 자꾸 나만 가지고 매일 그래!! 나 안 훔쳤단 말이야"
자, 그러면 지금 이 집안에 전부 없어진 것을 합쳐보면 불과 몇 천원도 안 되는데 전부 의혹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더니 이 집안이 망해요.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파출부가 들락거리면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가져간 것이거든요.
"야! 이 볼펜 좋다. 재수하는 우리 아들 갖다 주자. 또 손수건 챙겨서 우리 남편 갖다 주자.
이 토큰 두 개 정도야 이 집에서 괜찮겠지"하는 도심이 발동한 거지요.
나중에 그것이 모두 파출부의 짓이라는 것이 들통이 났어요.
그래서 "아니 그런 짓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하니까 "뭐 전부 합쳐봐야 만원도 안되잖아요" 돈 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도심은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한사람으로 인해서 그 집안의 운기가 바뀐거지요.

제가 아는 어떤 집에는 파출부는 3시간 일해주러 와서 6시간 일해주고 가고 아이들 노래도 가르쳐주고, 그림도 가르쳐주고, 책도 읽어주고 함께 놀아주니까 아이들이 안떨어질려고 하는 겁니다.
나중에는 엄마가 질투가 날 지경이지요.
그러니까 아빠, 엄마의 기분이 좋아지고 또 집안에 대한 걱정,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안하게 되니까 아빠는 사업에 전념할 수 있고 엄마는 학교 강단에 설 수 있고, 그러다 보니 파출부 한 사람 들어와서 집이 흥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옛날에 제 관상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있는데, '관상이 불여골상이요. 골상이 불여심상이라' 관상이 뼉다구 상만 같지 못하고, 골상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마음 잘 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상이 중요한 거지요. 결국은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배휴라는 아이가 그 스님의 말을 듣고 외삼촌집에 사는데 '업덩어리가 된다'고 하니, 어린 마음에 서러운 생각도 들고, 걸식을 하고 다니더라도 이집을 망하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두 가지 생각에 외삼촌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집을 나와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우물가에서 옥띠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옥으로 만든 허리띠인데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이 옥띠를 본 배휴는 '이 좋은 물건을 잃어버린 주인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하는 생각에 사흘 밤낮을 꼬박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뛰어왔어요.
이 옥띠야말로 자기 아들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그 옥살이를 면제시키기 위한 뇌물이었거든요.
이 아주머니는 절에 가서 지성을 드린다고 우물에 와 목욕을 하는 새에 벗어 놓고는 집에 가서 옥띠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거죠.
이제 사흘이 지났으니 없으려니 하고 달려왔는데 이 친구가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사례를 하려고 하니까 본래 아주머니 것을 아주머니가 가져가는데 무슨 사례를 하느냐고 필요없다고 하면서 휙 가버리는 거예요.
요즘 같으면 ^3456,1,245,34,3456,1^이냐, ^3456,1,245,245,34,3456,1^이냐? 하고 고소 붙을 판인데 그냥 가버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여기저기 걸식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외삼촌 집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힘이 들어서 도저히 거지 노릇 못하겠으니 외삼촌집에 다시 있자고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외삼촌은 옛날에 스님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허락을 했는데 마침 옛날의 그 스님이 우연히 그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 아이를 보더니 정승이 된다고 하거든요.
아니! 옛날에 집안을 망해 먹을 놈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정승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이 아이의 운세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나중에 한 나라의 정승이 되었어요.
그 스님이 이 아이를 보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니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옥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이 "그래, 네가 네 운명을 바꾸었구나"하고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운기라고 하는 것도 여러분들의 용심에 달린 것이지요.
너무 외부적인 것에 기대지는 마세요. 관상도 못 생긴 상에다가 생년월일시까지 나쁘고 또 신상까지 나쁜데 심기를 올바르게 씀으로 해서 인생이 뒤바뀌지 않습니까?
그 후로 배휴가 자기 아우인 배탁이 궁금해서 수소문하여 찾아보니까 강나루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더랍니다.
같은 뱃속에서 같은 시간에 똑같이 태어난 이 두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운명이 다를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 오운육기를 잘못 공부하고 나면 자칫 운명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 오운육기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기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갑자년이라 하여 갑자년의 해석을 실컷하고 나면 여러분들은 갑자년이라는 것의 해석에만 매달려 가지고 자기의 심상을 평정시키려는 생각은 안하고 '나는 갑자년에 태어났으니까 갑자년생은 항상 바람을 피운다더라. 할 수 없다. 바람이나 피우자'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건 그럴 수 있는 확률이 강하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사람이 왔다고 하면 관상가가 그 사람을 보자 마자 "당신은 어느 날 사람을 죽이겠소"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이 사람은 그 말이 한생각이 되어서 자기 뇌파에 입력이 되고 자기 최면이 되어서 진짜 사람을 죽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데 여인을 겁탈하려는 놈이 있어서 두들겨 패주었다고 하면 의기아닙니까?
그러니까 똑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좋게 해석해 주어야 하고 또 힘이 있어 보이면 힘의 사용처를 일러 주어야지 나쁘게 해석을 해주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전쟁이 터져서 우리 국민들을 막 죽이고 있는데 불살생이라고 해서 적의 만행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라시대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를 정하면서 '살생유택'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불경의 보살경에 보면 "백만명을 살리기 위해 열 명의 악질이 있다고 하면 그 악질을 죽이는 것이 보살행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 보살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오운육기의 사상이 명리학 쪽으로 치우쳐서 운명론적으로 전락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후천적인 요소는 생각하지 않고, 선천적인 성품만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저는 불변이고 약간 운명론적인 선천보다는 후천적인 것이 70%이상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지요.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잘못 태어나면 후천적으로 조심을 해야 됩니다.

롤스로이스나 링컨 컨티넨탈같은 차를 물려 받았다고 하더라도 매일 200km이상 속력을 내고 아무데서나 좌회전, 우회전 하다보면 사고나서 죽는 수가 있지요.
사람이 선천적으로 튼튼하게 태어나고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교만방자하여 못된 짓만을 일삼는다면 제명대로 못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천은 롤스로이스 같이 좋은 것을 타고났는데 후천적으로 용심을 못하면 안되지요.
그런데 어쩌다 모범운전수가 되어서 얍실얍실한 포니차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매일 닦고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면 자식들 대학 보내고 딸 시집보내고 저축도 착실히 하게 되니까 말년에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물론 링컨 컨티넨탈같은 차에다가 그런 운전수를 만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그런데 모든 이 우주의 운세라고 하는 것은 길 흉 화 복이 서로 상충되게 되어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완전히 깨닫기 전에는 이 운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날씨가 흐리고 바람도 없는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라고 합시다.
외부의 이런 기운 때문에 마음은 많은 신경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하질 않고 매운 것에 소주까지 한 잔 먹어 놓으면 이성을 잃어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괜히 시비를 걸어서 싸움도 하고 싶고 길가의 돌맹이도 집어 던지고 싶어지는 겁니다.
버스 안에서 싸움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싸움은 불쾌지수가 작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기후의 영향을 안 받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천지의 기가 작용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오운육기의 피해를 안 받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있습니까? 결국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쉽게 이야기를 한다면 선천적으로 한기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비오는 날 냉한 날을 싫어합니다.
뚱뚱한 사람들은 가을날을 좋아하게 되지만 여름이 되면 헉헉거리게 되고 아이스크림 먹고, 콜라 마시고, 선풍기 에어콘 다 틀어 놓아도 답답하다고 하지요.
그러나 몸이 좀 냉한 사람은 여름철에 활동적이거든요. 그러니까 풍 한 서 습 조 화가 인간의 기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내경"을 한 번 볼까요?

황제가 말씀하신다. "천지의 기가 활동하지 않는 시기가 있을 것인가?"
기백이 대답하기를, "만약 있다고 하오면, 만물은 발생을 정지하고 화육도 하지 않는 천지가 정지된 때일 것이옵니다"
황제가 말씀하신다. "천지가 정지한다면 만물의 발생, 화육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기백이 말씀드린다. "우주의 음양의 기가 서로 출입하지 않게 되면 창조주의 기능이 소멸되어 천기와 지기의 승강이 없어져 천기는 상에 지기는 하에 있어서 서로 교류하는 일 없이 독립되옵니다.
곧, 음양의 기가 서로 출입하지 않게 되오면, 만물은 일생을 통한 생 장 장 노 사를 되풀이할 수는 없사옵니다.
천기와 지기의 승강이 없어지면, 만물은 춘하추동의 1년을 통한 생 장 화 수 장을 행할 수도 없는 것이 옵니다" (내경 오운육기편 육미지대론)

천이 위에 있고 지가 아래에 있는 괘는 불길한 괘죠.
왜냐하면 양은 양대로 움직여 버리고 음은 음대로 움직여 버리니까 기가 소멸되어서 서로 교류하는 일이 없는 겁니다.
이런식으로 하다보면 생 장 장 노 사, 즉 태어나서 자라고 장성하게 되고 늙고 죽는 것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결국은 우리가 왜 죽게 됩니까? 간단하게 대답해 보세요.
태어났으니까 죽는 것 아닙니까! 석가모니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고행을 하고 명상을 하다가 깨닫고 나서 첫번째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하는구나' 생이 있음에 사가 있다고 했거든요.
그럼 결국 생은 왜 있습니까? 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는 거예요. 자!
생사문제가 나왔는데 결국은 이러한 음양이니 뭐니 하는 분류는 10으로나 100으로나 1,000으로나 10,000으로나 분류해도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융통무애하게 분류를 하라고 "내경 오운행대론"에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 방안에 물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처치를 하겠는가?
꼭 토극수의 원칙에 의해서 흙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드라이로 말려버리는 화극수의 방법도 있고, 바람으로 하겠다는 목극수의 방법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요.
그러니까 오행의 이치는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기백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기백이 먼저 오운육기의 법칙을 얘기하면서도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훨씬 많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처음에 음양오행을 가르쳐주는 것은 어린아이 달래기 위한 사탕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사탕을 먹고 들어오면 그 다음에는 휘황찬란한 꽃밭이 있는데 이때부터는 여러분들의 직관이 작용을 해야 하는 거지요.

오운육기의 음양은 정상적인 수나 규칙으로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취상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유무, 귀천, 상하, 해중금, 사중금, 로방토, 벽상토 등 이 모두가 비교를 가지고 정하는 겁니다.
비교를 하려면 중심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라고 하지 않고 '하늘은 음이고 땅은 양이다'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어? 그럴리가 없는데...' 하며 반문을 하겠지요.
어떤 기운, 어떤 관점에서 그렇게 이야기 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손톱을 보고 음이다 양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됩니다. 비교기준이 있어야지요.
손톱을 철에 비교한다면 양적이 되지만 온도상으로 피부와 비교하면 손톱이 음적이 되는 겁니다.

제가 포항에 있을 때 손톱이 오이씨처럼 나오다가 마는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는데, 만약 여러분들이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는데 이런 환자가 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치료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울때 손톱은 어디에 속한다고 배웠습니까?
간 심 비 폐 신 중에서 간에 속한다고 배웠지요. 그러면 족궐음간경을 놓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이것이 옳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손톱을 오운육기상 어디에 두면 괜찮을까요? 양명조금에 들수도 있겠지요.
제가 지금 양명조금에 분류시켰다고해서 이것을 100%신봉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족궐음간경만 생각하셨으니까 이제부터는 양명조금도 생각을 해보라는 뜻에서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집이 한채 있다고 합시다.
철근으로 기둥을 세우고 시멘트를 바르고 안에는 도배를 깨끗이 해 놓았습니다.
또 창문을 열어 놓으면 통풍이 되는데 난방장치와 온방장치까지 두루 설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철근은 양명조금에 해당될테고 시멘트는 태음습, 난방장치는 소음군화, 냉방장치는 태양한수, 또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니까 궐음풍, 따뜻한 햇빛은 소양상화,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바람이 심하게 부니까 골재인 철근이 약해서 집이 흔들거린다고 하면 양명조금인 철근을 보충시켜 줄 수도 있지만 거꾸로 궐음풍을 사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무유정법이 불법이라'정한 법이 없는 것이 깨달은 사람의 법입니다.
제가 불법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불들은 아무래도 지겨울테니까 '무유정법이 정법이다'라고 기억해 두세요.

황제의 질문 중에 "상이라고 하는 것 즉 비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상이라고 하는, 즉 비교라고 하는 것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와 같은 것이 결국 비교된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갑이 이야기 되어질때 갑과 상대되고 그 무엇이 이야기 되어진 것입니다.
자와 오가 불이라 할 때 하나는 양화, 다른 하나는 음화가 되는 것인데 이런식으로 다섯 가지로 분류 비교한 것이 십간인 것입니다.
같은 소음군화일지라도 하나는 음화가 되고 다른 하나는 양화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나뉘어 지겠습니까?
그것은 주어진 어떤 환경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오늘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애인의 손도 잡아주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애인 역시 마음 들떠 있는 것 같고 아주 기분이 좋은 것같아요. 그러면 만나서 둘이 아주 기분이 좋은데 만약, 애인이 집에서 나올 때 아빠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남자 만나고 다니느냐", "다시 또 만나는 것을 알면 대학교 학비도 대주지 않는다"하고 옆에서 엄마, 오빠까지 한마디씩 거들다보니까 애인의 기분이 몹시 상해서 나온거지요.
그러면 나의 마음이 그렇다 하더라도 애인의 기분이 몹시 나빠있는데 내 뜻대로 할 수가 있나요?
그게 잘 안되지요.
또 물질적인 상황에서 예를 보면 겨울철에 피는 모닥불과 여름철에 피는 모닥불이 똑 같이 타오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유무, 귀천, 상하, 빈부, 완급, 대소, 생사등은 어떤 차원의 기준에서 비교한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까 깨어있는 옛 사람들의 말장난이죠.
그러니까 제 이야기의 결론은 쉽게 이야기해서 그 말장난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비교 없는 마음으로 중심만 잡고 있으면 속지 않게 되지요.
이런 관점에서 경전을 본다면 "아하! 황제는 이런 눈으로 음양을 이야기 했군 오운육기의 해중금, 사중금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군"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먼저 이론을 외우기보다는 이러한 이해의 차원을 포착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관점이 생기게 되면, 얼마든지 수많은 음양론을 쓸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천간지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림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남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천간지지를 인체에 비유를 합니다.

천간과 지지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제가 천을 사람의 머리라고 이야기를 많이해 왔는데 그렇다면 머리의 운동에 따라 대비를 시켜야 당연한 것이겠지요.
뒤에 있는 그림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를 평면적으로 이야기한 것인데 내용적이 아닌 계절적으로 배당을 해 놓은것입니다.
갑은 오른쪽 눈, 을은 왼쪽 눈에 해당하는데 병정인 입은 좌우가 없지요.
그러면 입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먹는일, 둘째는 말하는 일이죠.
그래서 일단 병은 주로 언어를 주관하고 정은 주로 먹는 것을 주관한다고 해두었습니다.
음식이라고 할 때 음은 양이 되고 식은 음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음은 마시는 것, 즉 부드러운 것을 먹는 것이고, 식은 딱딱 한 것을 먹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음식이란 말의 정확한 해석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는 색을 보면서 질을 보게 되는데 왼쪽 눈은 대체적으로 형이라든가 색을 보게 되고 오른쪽 눈은 질이라든가 광택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들으면 웃으실지 모르지만 사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하는 일이 서로 다릅니다.
실제 브라만교의 요가에서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코도 마찬가지예요. 왼쪽 코는 향을 주관하고 오른쪽 코는 취를 주관하게 됩니다.
왼쪽은 향을 주관해서 냄새가 좋으면 왼쪽 코가 예민하게 벌렁벌렁하는 것이고 오른쪽 코가 발달된 사람은 주로 기분 나쁜 냄새를 빨리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은 최근에 실제적으로 증명이 되었는데 그 증거로는 좌뇌와 우뇌의 기능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본 사람들은 계산능력이나 수학능력같은 것은 좋은데 창조적인 능력이나 종교적인 능력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창조적인 두뇌 위주로 많이 발달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민한 민족이라고 하지요. 이 좌뇌우뇌가 공히 발달해야 잘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인가 하면 의사입니다. 이것은 현재 컴퓨터 상으로도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은 우측에 있는 콧구멍, 신은 왼쪽에 있는 콧구멍이 됩니다.

무와 기는 제가 따로 이야기 할 것이고 임계는 귀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소리를 들을 때에 무엇과 무엇이 있습니까? 고저, 장단이 있고 리듬이 있지요.
그러니까 음과 율이 있는데 왼쪽 귀는 소리를 듣는다면 오른쪽 귀는 박자를 듣게 됩니다.
어린 아기들이 엄마의 젖을 먹을 때 제일 가까이 듣는 것이 엄마의 심장소리라고 합니다.
쿵쿵쿵하는 소리가 가장 기본적인 리듬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빠른 탬포의 음악, 아프리카 원시인들이 두드리는 북소리같은 것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지요?
유치원 꼬마 아이들을 모아 놓고 외국곡을 틀어주면 신나게 춤을 추는데 갑자기 한국전통의 음악인 아리랑 같은 음악을 틀어주면 금방 춤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자체의 리듬이 있지요.
우리나라는 문화가 상당히 오래 되어서 넉적지근하게 교활하고 세련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리듬은 아프리카 토인들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리듬에 가깝다고 합니다.
아기들이 모체내에서 듣는 음이 엄마의 심음인데 --태내에서는 얼마나 크게 들리겠습니까?
평소의 엄마 마음이 평정되어 있을 때에는 쿵쿵쿵하다가 불안정한 상태가되면 쿵쾅쿵쾅 요란스럽게 되겠지요. 가만히 보면 모든 북소리는 심장음과연결이 되는 것같습니다.
호흡은 1분에 12--16번 정도가 정상인데 우리 민족은 호흡의 민족이고 아프리카같은 곳은 심장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서양은 두뇌의 리듬만을 생각하지요.

여러분! 이 소리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TV를 틀어 놓고 소리를 안나오게 해보세요.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러니까 이 리듬이라고 하는 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고 또 인간들은 이 소리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거든요.
이제 무와 기가 남아 있는데, 기는 나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무는 너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앞의 그림을 보시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가 쉬워질텐데 대체적으로 나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음식을 좋아하고 향을 좋아하고 형상이나 색깔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도 리듬 위주 보다는 고저위주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이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가 전부 무엇으로 총괄되느냐?
하나는 나 위주로 생각하는 것, 다른 하나는 너 위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음이면서 기혈론에서는 혈에 해당하고, 너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양이면서 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꼭 그런것은 아니지만 중풍같은 경우에 뚱뚱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어느 쪽으로 중풍이 오겠습니까?
똥똥한 사람이 중풍이 온다고 하는 것은 기가 허해서 오는 것이거든요.
또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음적인데 어느 쪽으로 중풍이 오면 불길하겠습니까?
여자들은 선천적으로 무엇이 허합니까? 기가 허하거든요.
여자들은 본래 음이 실하고 양이 허한데 본래 허한쪽으로 중풍이 왔으니까 허한 쪽이 또 늘어져 버린 겁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음양기혈론에 근거하여 나온 말들인데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냥 설로만 들어두시기 바랍니다.
"우리 엄마는 오른쪽으로 중풍이 왔는데 잘낫던데요" 이러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설이 있다는 이야기 정도로 들어두시면 됩니다.

자! 그러면 몸통에 관하여 한 번 볼까요? 자와 오는 소음으로 자는 족소음신, 오는 수소음심이 되고, 묘유는 양명으로 묘는 수양명대장, 유는 족양명위가 되지요.
축과 미는 태음이며, 축은 수태음폐, 미는 족태음비... 이런 식으로 있는데 이 도표를 자세히 보면 상하의 관점에서 진 술 축 미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술축미는 명리학에서 우리와 같이 육기적인 방법으로 보지 않고 오행적 방법으로 보아서 토라고 합니다마는 수태음의 자리에 족태음비가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실제로 '의학입문'에 보면 앞의 도표처럼 되어 있거든요.
일단 내용상으로 도표처럼 배속을 시켜 드렸습니다.
그럼 자에 해당하는 족소음신의 괘를 한번 볼까요?
지뢰복괘라고 하는데 앞에서는 우리가 육기와 오운이 혼합된 화수미제괘로 족소음신경의 성격을 관찰했지만 이제 여기서는 계절적인 관점, 소위 춘하추동의 관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양이 하나, 두개, 세개가 되는 지뢰복, 지택임, 지천태괘는 여러분들이 주역책을 찾아서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차례로 12괘를 조사하고 나면 벌써 24괘는 공부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거든요.
이 괘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모르고 저도 잘 모르는 것이지만 주마간산격으로 대충 괘상이라도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위에 그려진 12지지에 해당하는 괘상이 진짜 괘상입니다.
그러니까 족소음신에 해당하는 자의 괘상을 그려보라고 하면 일양이 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앞에서는 육기적인 관찰을 한것인데 이는 방향적인 관찰일 뿐 입니다.
이 정도로 오운육기에 대한 개괄적인 얘기를 끝내고 좀더 세부적인 사항을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상

이 사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분들에게 많은 암시를 드렸습니다.
사상은 어쨌든 선천적인 것, 불변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사상과 이 제마 선생님의 사상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여러분들은 혼동하지 마세요.
제가 이 강좌를 하면서 사실은 무척 불안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선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너무 안다고 하는 자만심에 정신차리라고 찬물을 끼얹는 것이며 각성을 촉구시키기 위함이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사상이나 오운육기는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갑술생이다'라고 하면 갑은 목화토금수 중에서 어디에 해당합니까?
갑기 합토가 되지요. 그러면 토가 실한 것입니까? 허한 것입니까? 실한 것이지요.
토가 실하면 상대적으로 무엇이 허해 지겠습니까? 당연히 토극수가 되니까 수가 허해지겠지요.
또 토가 실하니까 무엇이 무시를 못할까요? 목이 무시를 못하겠지요.
목이 무시를 못하니까 목도 허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1차로 허해지는 수와 2차로 허해지는 목의 상황을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오운육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우리 인체에 예를 든다면 비장을 볼 때 신장도 검토하고 간장도 검토하는 것이 바로 의학적인 차원의 오운육기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명리학에서는 진술축미를 무엇으로 봅니까? 토로 보지요.
그 중에서도 어느 것이 양이고 어느 것이 음입니까? 진술축미 중에서 어떤 것이 양토이고 어떤 것이 음토인가를 구분하여 그것이 서로 만나는 상황을 플러스시켜 일어나는 일체의 일을 추리해 내는 것이 명리학입니다.
이것은 "내경"에 있는 법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명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또 혼동이 되죠. 우리는 술을 어떻게 공부했습니까?
태양으로 공부했잖아요. 그러면 태양은 무엇입니까? 태양한수아닙니까.
그러므로 태양한수와 토가실한 것(갑)이 플러스된 종합적인 상황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전반부에 태양한수가 사천을 지배하면 후반부에는 무엇이 지배하게 됩니까?
태음습토가 지배하게 되지요. 전반부 6개월을 태양한수가 지배하면 후반부 6개월은 태음이 지배를 하게 됩니다.
다음의 도표는 사천과 재천을 나타낸 것으로 여러분들은 꼭 아셔야 합니다.

(사천 재천의 순)

자오:소음군화 양명조금
축미:태음습토 태양한수
인신:소양상화 궐음풍목
묘유:양명조금 소음군화
진술:태양한수 태음습토
사해:궐음풍목 소양상화

오운육기의 해석은 명리학(하늘에서 주어진 명과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운육기에서는 비유가 많지요.
여러분 이지함선생이 쓰신 "토정비결"을 보면 마치 시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작은 글자 안에 많은 의미를 포함시키려는 옛 선인들의 노력이며, 또 이 모든 것들이 경전에 근거를 둔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 하는 사상론은 전혀 문헌적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만들어 내었는가? 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인데 제게 이것을 일러주신 분도 "그냥 그렇게 보는 법이 있다더라. 그런데 재미가 있지 않느냐? 임맥과 독맥만 가지고 보는 것이 사실적일테니까..." 하더군요.

자! 그러면 사상이란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 하면 안 이 비 구죠.
이것이 사상이라는 전제조건 하에 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이것은 동무 이제마 선생의 사상론에도 나오지요.
귀로는 무엇을 듣고 입으로는 어떻고, 눈으로는...그래서 간대폐소, 폐대간소, 비대신소, 신대비소가 등장하고 4가지의 허실을 보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저는 사상에 간비신폐가 존재한다기 보다는 팔괘에 가서 존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간이라고 한다면 육경상으로는 족궐음에 관계되고 오행상으로는 목에 해당하는 것이거든요.
오장은 육부와 상대적이니까 5장을 이야기 하려면 6부를 이야기 해야 되고 또 5장을 이야기 하려면 6경을 이야기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알기쉽게 안 이 비 구로 나누는 겁니다.

얼굴을 보면 둘은 들어갔고 둘은 나왔거든요.
눈과 입은 들어가 있으니까 음이라고 보고 코와 귀는 나왔으니까 양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얘기하는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음과 양이 갈라져 하나는 태음, 하나는 태양이 되고 중간에 소음과 소양이 되지요.
그러면 양에는 무엇이 배속되고 음에는 어떤 것이 배속될까요?
양에는 우선 코와 귀가 나왔으니까 양이 되는데 코는 태양, 귀는 소음이 배속되고 음인 눈과 입은 태음과 소양이 됩니다.

그러니까 간대폐소, 폐대간소 이런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아서 두개는 양, 두 개는 음인데 괘상으로 본다면 태양은 양중의 양, 소음은 양중의 음, 소양은 음중의 양, 태음은 음중의 음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결국은 안 이 비 구의 허실에 따라 그 사람의 선천운, 대부분의 성격 또 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질병을 추리하는 독특한 주역법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태극에서 음과 양을 낳고, 이 음양이 양양, 양음, 음음, 음양으로 분화되고 다시 여기에서 팔괘로 나뉘어지는데 양양, 양음, 음양, 음음이 비이구안이라는 서로 짝이 되는 상황을 유발시켜 놓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양양을 비라고 배속시켜 놓고, 코는 실하고 눈(음음)은 약하다고 합시다.
코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 강하고 실하니까 (양양)여기에서 갈라진 독맥과 태음이 강하겠지요.
그러므로 이 사람은 대체적으로 독맥과 수태음폐, 족태음비 쪽에 실병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대신 거꾸로 안(음음)이 약하니까 여기(음음)에서 갈라진 임맥과 간산괘인 양명경이 허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말씀 드린 것중에서 폐와 비가 실하다, 약하다 하는 의미는 경락상의 이야기 일 뿐이지 실제 장부인 간신비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절대로 혼동은 일으키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선 이 사상이 가지고 있는 도리는 어떤 것이 있는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눈 코 귀 입 중에서 눈과 입은 들어가고 코와 귀는 나왔는데 서로 상합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코(양양)와 눈(음음)이 서로 상합이 되고, 귀(양음)와 입(음양)이 상합이 됩니다.
그러니까 비대안소, 안대비소, 이대구소, 구대이소 등 4가지로 분류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코가 크고 눈이 작은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눈이 크고 코가 작은 사람을 태음인, 귀가 크고 입이 작은 사람을 소음인, 입이 크고 귀가 작은 사람을 소양인이라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다가 동무 이제마 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하여 장부를 하나씩 집어 넣는다면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됩니다.
간대폐소는 태음인, 폐대간소는 태양인, 비대신소는 소양인, 신대비소는 소음인이 되지요.
이것은 이제마 선생님의 사상론에서 각자 취상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마선생님께서 사상을 처음 의학계에 내 놓으시면서 굉장히 고민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동무선생님께서 사상의학을 내 놓느시게 된 이유는 똑같은 약인데도 어떤 사람은 감기에 걸리던, 소화가 안되던 간에 육미지황탕만 쓰니까 낫더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구태여 복잡하게 병을 볼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을 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일부 사상의학자들은 일생동안 변하지 않는 본질들을 분류해 놓고 또 거기에 혈액형까지 첨가시킨 분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이 사상의학을 깊이 연구하고 천착하여 이제마선생님의 위대하고 깊은 뜻을 더욱 발전시키시기를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이제마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5장의 허실로 분류한 장부사상론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대로 눈 코 귀 입을 보고 태음 소음 소양 태양을 분류하는 관상사상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죠.
우리는 어떤 얼굴의 생김새, 즉 코가 크고 눈이 작느냐? 귀가 크고 입이 작느냐? ...를 보고 선천적인 성품이라든가 운명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가 않거든요.
더구나 우리는 관상적인 면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성품적인 차원에서 많이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상상력과 추리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지요.
그런데 사람 얼굴을 보면 눈 코 귀 입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런 사람을 보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음양화평지인'이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제 얘기는 누구나 다 사상으로 나눌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동무(동무이제마(1838--1900) 조선말기의 한의학자. 호는 동무). 한의학을 깊이 연구하고 총정리하여 '사상의학'이라고 하는 새로은 한의학의 한 계통을 세웠다.
그의 학설은 사람이 각기 타고난 체질을 잘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치료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께서도 사상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이나 도인, 또 나름대로 무언가 화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동무선생님께서도 마지막 돌아가실 때는 회의를 느끼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일생 동안 연구를 했는데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뭔가 잘 안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실토를 하시면서 후학들의 천착을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학 중의 하나가 바로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전부 눈이 크고 코가 작고 귀가 크고 입이 작은, 즉 공식에 맞는 얼굴들만 있는 것이 아니죠.
눈이 크고 귀가 작고 입이 클 수도 있고 입이 작고 눈이 큰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제 사상론이라고 하는 것은 어거지로 갖다가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을 볼때 직감으로 보아서 조화가 있는 얼굴을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왠지 아름다와 보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덩치가 크더라도 가분수가 되면 이상하고 또 신체의 아래위가 균형이 맞는다 하더라도 눈은 큼지막한데 코가 조그맣다거나 입은 큼지막한데 눈이 쬐그만하다면 어딘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요.

이 우주는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상론에 의거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종들을 본다면 이 지구는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인 이 다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저 우리 나라 사람들만을 보고 '소음인이 많겠구나'하고 생각한다면 이건 편협된 생각이지요.
예를 들어서 서양인들을 보면 코가 상당히 크지요. 그러니까 그들의 성격은 어떻겠습니까?
살기가 많고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대신에 또 장점도 있지요.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보편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콧대가 좀 낮거든요.
그러니까 콧대가 높은 서양인을 태양인이라고 한다면 콧대가 낮은 사람이 콧대가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자기의 허한 부분을 실한 상태가 보충해주므로 기분이 좋겠지요.
궐음경이 허한 사람이 궐음경이 실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콧대가 높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행세를 하고 황제감이라고 추앙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콧대가 낮은 사람들은 거꾸로 서양에 가면 황제감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서양은 전부 코가 큰 사람들 뿐이므로 전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실하기 때문에 자기들도 괴로운 법이거든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사상의학적으로 태양인은 만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하다고 합니다.
이제마 선생님은 자기자신을 어디에 분류했을까요? 자기자신을 태양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은 태양인이라고 했거든요.
그렇다고 태양인이 꼭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나라에 가면 태양인만 존재할지도 모르잖아요.
이기주의자인 여러분들은 사상의학을 공부한 교수가 진맥을 해보고 "자네는 태양인인데"하고 이야기 해 주길 원하지요.
"자네는 국무총리감이야. 장군감이야. 자네는 리더쉽이 있어" 이런 말을 해 주면 좋아합니다.
실상은 전혀 리더쉽도 없으면서 태양인이라고 분류해주면 좋아하거든요.
저는 사상의학을 공부한 이래로 친구들만 보면 "아무래도 자네는 찾아보기 힘든 태양인 같애"하고 아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좋아 하더군요.
코도 납작하고 진취력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해서 좋아하는 모습은 정말 가관입니다.
그런데 이 태양인 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좋은 것일까요? 넷중에 하나가 분류된 것인데 말이죠.

길에서 파는 인형이라 하더라도 생김새가 오목조목하고 잘생긴 것을 갖고 싶어하잖아요.
여자가 비록 키는 작다하더라도 오밀조밀하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 덩치는 큰데 코는 한주먹에다가 눈은 아주 작고, 입은 함지박만한 여자, 이런 여자는 매력이 없거든요.
덩치가 크면 농구선수로 보내든지 씨름판에 내 보내야지 여러분들이 같이 살려고는 안하잖아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지요. 좀 작더라도 균형 있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인간은 체격 뿐만아니라 얼굴에 어딘가 균형이 있으면 아름다와 보입니다.
그러니까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균형이 잡힌 그림을 좋아하잖아요.

이 지구를 보면 어느 곳은 태양인이 많이 살고 어느 곳은 소음인, 또 어느 곳은 태음인 이런식으로 특정한 인종이 모여사는 곳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부류가 많이 살고 있을까요? 소음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유럽 쪽에서도 희랍지방 사람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서양적인 냄새가 있으면서도 동양 사람들과 비슷하거든요. 감정도 비슷해요.
그러므로 그들 또한 소음인에 가깝겠지요.
그러면 눈이 크고 코가 쑥 들어간 민족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프리카 흑인들을 보면 남녀 모두가 눈은 크나 코는 납작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을 볼 때 눈이 큼지막하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됩니까?
어딘가 마음이 약해 보이고 서글서글해 보이지요.
대체적으로 돼지코에다가 눈이 큰 사람들은 덕성이 좋고 뒤를 잘 돌보아주지만 남 앞에는 잘 나서지 않습니다. 진취적이질 못하죠.

이 우주는 완벽한 신의 작품이거든요.
그러므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실하고 허한 것을 한데 섞어 놓는다고 하면 어느 나라는 그와 상대적인 어떤 나라와 맞물고 돌아가게 되겠지요.
그래서 어떤 주역학자는 우리 나라와 미국을 괘상으로 풀어내는데 미국은 소녀괘인 태괘가 되고 우리 나라는 소남인 칠간산괘에 해당되어 소남소녀가 친하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은 제가 어떤 사람한테 들은 말인데 그저 들은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이 많아서 못살 수 밖에 없었고 미국은 평야지대이어서 곡식이 많이나므로 우주의 섭리상 미국과 한국은 친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들어보니 그럴듯 하긴 한데 '잘도 갖다가 붙이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역괘상으로 볼 때 지구는 하나로 보게 되거든요. 지구촌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는 어느 나라와 친하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어느 나라와는 밀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육경상으로나 팔괘상으로 가능한데 우리가 어떤 나라의 기후라 든가 풍습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사상적인 관점에서 생김새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겠지요.
여러분!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 코는 빈대코인데 눈이 크다 그러면 그와 반대되는 여자를 만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내가 입이 크고 귀가 작다 하면 입이 작고 귀가 큰 여자와 만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 뿐만이 아니라 친구도 마찬가지이고 사업이나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전부 맞아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의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심지어는 장부의 허실론까지 알 수가 있지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장부의 허실론이란 간대폐소, 비대신소 등이 아니고 비대안소라 할 때 태양인이 되니까 양괘에서 갈라진 건괘와 태괘가 실하게 되고 곤괘와 간괘가 허하므로 어느 경락은 실하고 어느 경락은 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마 선생님께서 언제 사상의학을 쓰셨는지 아십니까?
일반적인 처방으로 잘 낫지 않는 난치병에 많이 썼지요. 난치병에 사상방을 많이 씁니다.
환자를 볼 때 처음부터 사상방을 쓰시는 사상의학의 대가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도저히 경락상으로 포착을 하지 못할 때, 선천적인 경락의 문제가 제기될 때 이 사상방을 쓰게 됩니다.
환자를 치료하는데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그 환자의 입술이 유난히 크다는 것을 보고 '어느 경락이 실하고, 어느 경락이 허할테니까 어떤 경락을 보해 주면 되겠다'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입이 크기 때문에 오손풍괘와 육감수괘가 실하니까 궐음경과 태양경이 실하겠죠.
그런데 입이 하는 일은 음식을 먹는 일과 말하는 일인데 이 환자는 말은 잘 못하는 것에 비해 먹는 것은 잘 하므로 음적인 것이 발달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역적이고 귀납적인 추리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사암침술법이라고 하는 것은 신비한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앞으로 환자를 볼 때 이렇게 치료를 해도 안 낫고 저 방법을 써도 안 나을 때 얼굴의 균형을 한번 훑어보세요.
그 중에 눈이 하는 일, 귀가 하는 일, 입이 하는 일을 잘 생각해서 음양으로 나누어보면 그 경락이 둘로 압축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하든지 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눈코귀입이 하는 일을 다시 한번 살펴 볼까요? 눈과 입은 상하로 움직입니다.
입은 아래(하)가 동하고 눈은 위(상)가 동하지요. 그러니까 하나는 음이 동하고 하나는 양이 동하게 됩니다.
제가 앞에서 왼쪽 눈은 형이나 색, 오른쪽 눈은 질을 본다 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눈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보는 일이지요.
여러분들이 어떤 대상을 '좋다 싫다 안다 모른다'하는 인식은 우선 먼저 보고, 듣고 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경적인 차원보다는 사상론이 훨씬 더 원초적인 것이며,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어떤 대상을 보고 전부 좋다 싫다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에 눈길이 가는 곳 귀에 들리는 것이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재즈음악이 들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영화간판이 눈에 잘 띄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로얄 오페라단 공연 포스타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유난히 잘 들릴 것입니다.
왜 그렇게 똑같은 눈코귀입인데 하필이면 그곳으로 눈이 자꾸 가고 귀가 움직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물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있지요. 이 안 이 비 구 사식이 움직이는 것은 너무 빨라서 포착을 할 수 없지만, 도인들은 자기가 듣고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달으면서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하는 이 4가지 식이 움직이는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10^34^9는 무의식 세계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의 의식 세계는 1할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어느날 남편이 부인의 뒷머리를 힘껏 쳤습니다.
그런데 그만 부인의 눈이 바닥에 툭 떨어져 버렸지요. 놀란 남편이 황급히 부인의 눈을 주워서 얼른 끼워 주었는데 이 부인이 신경질을 내면서 하는 말이 "여보! 골이 보여" 남편이 급히 주워서 끼운다는 것이 그만 거꾸로 끼운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눈은 밖을 쳐다보는 안식보다는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눈을 개발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눈으로 보이는 육안의 세계만이 전부인 양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혹시 여러분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이 아닐까요?
지금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곳에 벽이 있어서 바깥이 보이지 않지만 벽을 헐어내면 바깥이 잘 보이게 될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육안이 마치 벽과 같아서 영적인 사실들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육안이 대단한 것인양 생각하시겠지만 이것이 어떤 매개체는 되겠지요. 허나 그것이 바로 번뇌의 근본이올시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이러한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으로부터 자유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안 들리고 보이는 것이 없는데 개는 왜 멍멍 짖고 꼬리를 흔듭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어떤 여자가 옆에서 노래를 부르면 왜 그곳으로 마음이 확 끌려갈까요?
개들끼리 막 짖어대고 까치들이 까깍 거리며 이리저리 오가곤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영성, 자기들만의 전달방법, 그러므로 저는 그들만이 보고 느끼는 안 이 비 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눈을 한번 감아보세요. 눈을 감았다고 잠을 자는 것은 아니죠.
깨어 있는 상태에서 캄캄한 것이 보입니다.
눈이 하는 일은 일체의 색깔과 물질을 봄인데 눈을 감으면 깜깜한 것이 보입니다.
눈도 서로 상대적인 관계가 있는데 눈이 색깔이나 딱딱한 질같은 것을 보면서 피로했다면 우린 무엇으로 풀게 됩니까? 수면으로 풀게 되지요.
눈을 감음으로써 풀게 되잖아요.
그런데 자꾸 수면만 취하면 어떻게 될까요? 눈이 안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색과 공의 상호 보완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또 귀의 역할을 우측 귀와 좌측 귀로 구분을 해보면, 하나는 성을 듣고 하나는 정을 듣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베에토벤의 교향곡에서부터 브람스, 바하 또 비틀즈, 마이클 잭슨에 이르기까지 많은 음악을 듣고 지쳤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의식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편히 쉬고 싶을 것입니다.

입은 먹는 일과 말하는 일을 하는데 그런데 말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고 합시다.
말도 많이 하게 되면 지치거든요. 그런 때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말과 침묵은 서로 상대적인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많은 진액이 소비되므로 말을 적게해서 내기를 길러야 합니다.
또 말을 너무 안하는 사람은 말을 시켜야 되지요.

그 다음에 코가 하는 일을 볼까요?
코는 주로 냄새를 맡는데 냄새 중에서 하나는 기분 좋은 냄새인 향과 기분 나쁜 냄새인 취가 있습니다.
그런데 코는 내뿜는 일과 들이 마시는 일을 하거든요. 이 호흡 말고 통과 색이라는 것이 있지요.
눈은 색과 공, 귀는 동(성)과 정, 입은 언어와 침묵, 코는 통과 색 이것이 사상이 하는 일입니다.

이 유식론은 불교에서 도통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13년을 강의해도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내관이 어려운 것이겠지요.
여러분! 종이와 붓을 꺼내 놓고 한일자를 한번 써 보세요.
어떤 글을 정성들여서 쓴다거나 명치 밑을 관하려는 마음을 갖는 즉시 호흡이 딱 멈추어지게 되지요.
기분이 나쁘거나 최루탄 연기를 마셔서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기분이 좋고 무엇인가 응시를 하게 될 때 숨이 꽉 막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멈추는 작용을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눈을 감을 때는 휴식의 방편도 있지만 '보기 싫다'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대상을 볼 때 눈코귀입이 움직이는 것이 제 각각 모두 다릅니다.
귀로 들으며 말하는 사람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래위로 훑어보는 사람도 있고 옆으로 쳐다보는 사람, 또 눈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어느 경락이 허하고 실한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경계할 때의 눈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눈을 부릅뜹니까? 눈을 감게 됩니까?
여러분이 애인과 입맞춤을 할 때 애인의 눈이 어떻게 됩니까? 스르르 감게 되지요.
만약에 눈을 안 감는다고 하면 그건 분명 섬뜩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과 입이 하는 일도 아주 미세하긴 합니다만 긍정과 부정의 뜻이 내재해 있는 겁니다.
여자가 키스를 해 달라고 하면서 눈을 부릅 뜬 경우 봤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는데 통달했을 겁니다.
'아하! 이건 시기로군', '질투로군', '이건 탐욕이로군', 이런것을 관찰했으면 이제부터는 '이건 코가 움직이는 것이로군', '귀가 움직이는 것이로군', '혀가 움직이는 것이로군'하는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이것까지 관찰해야만 천지를 초월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넓게 각성한 의식이 우리 감각을 활짝 열어 물질적인 사물과 접촉케 한다.
만일 거기에 우리에게 직접으로 접촉할 수 있는 보다 고상한 정신적 작용이 있다면, 그 정신적 작용의 심리학적 조건은 잠재의식계의 소유일 것이며, 이 잠재의식계만이 정신적 작용에 접근하는 기회를 줄 것이다. 각성한 생활의 소음은 꿈같은 '승화'로 반개 혹은 전개된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몇년 전에 읽은 오경웅(1899년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법철학을 공부했으며 그후 미국에서 중국철학과 문학, 법학등을 가르치면서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도 근무했다. 유명한 홈즈 대법관의 정신적인 제자인 동시에 법학자이며 외교관이자 철학교수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정의의 원천", "동서의 피안"등 종교와 동양사상 그리고 자연법에 관한 심오한 책들을 써냈다)의 '동서의 피안'이라는 책에서 내가 읽은 내용입니다.


이 소음이란 바로 우리에게 매달려 있는 번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른 직관을 가지려면 이 번뇌란 '놈'을 이겨야만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감정공부보다는 눈길이 가는 곳, 들리는 것마다 느끼고 깨달아 보세요.
옛말에 "여자의 고개가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눈도 왼쪽으로 내리 깔고 있거든 네 말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라 하지만 오른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으면 살기를 가지고 있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관상법에서는 움직임까지도 포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안 이 비 설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차원을 깊이 연구하셔서 이런 차원에서 가질 수 있는 성격같은 것을 많이 유추해 보십시오.
이론이나 지식의 움직임 보다는 직관적인 차원을 개발해 보십시오.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고 건강과 불건강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분리의식이 우리에게 질병을 주는 것입니다. 건강과 질병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질병이 곧 불건강이죠.
제가 처음에 여러분들에게 '묘관찰지'를 주장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도 묘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을 태음으로 치료할 것이냐, 태양으로 치료할 것이냐 하는 것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평등성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의사라 하여 "나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도대체 병은 누가 고치는 것인지, 어떤 것이 질병을 고치는 주인공인지, 과연 꼭 약물에만 의존해야만 하는 것인지 또 신이 고친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인지 이런 것을 한번 짚고 넘어가 봅시다.
결국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양명이라든지 태음이라든지 어떤 한 기운이 오래 쌓인 것이 바로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 질병이 영원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한 것일테죠.
그러나 이 우주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주의 법칙은 무상하거든요.
질병 자체도 변하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약물로 치료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관하는 능력,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게 약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몇 가지 약이나 침을 놓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환자를 치료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참으로 치사스런 얘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설령 병을 여러가지의 합병증으로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주 전체에서 볼때 있을만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또 그것 자체가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불건강이라는 차원만 이해하고 나면 또 질병 자체가 영원하다는 생각만 떨구어 버리고 나면 질병 자체에서 오는 공포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의 양방의학이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가장 무서운 세뇌공작 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불치다. 고칠수 없는 암이다.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하는 그 '불치'라고 하는 강박관념이올시다.
그런 말을 환자가 듣게 될 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 스스로는 죽지 않는것, 죽음의 공포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닫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는 겁니다.
저는 우리 의사들이 제3세계에 제3의 물결이 벌어질 이 시대에 이런 능력을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신적, 사상적 배경이 "내경"이나 우리의 경전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제게 와서 이제 많이 피곤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선문답도 던져 보고 수많은 유심적인 차원에서 많은 암시를 드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혼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이면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눈치를 채셔야 합니다.
제가 여러 잡다한 것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여러분들은 혼란에 빠지질 않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끊임없는 말장난을 늘어 놓는다면 여러분들은 나중에 제가 이야기 한것을 이론화하여 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관념의 노예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죠.
현재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과거에 사는 사람이 됩니다.
제가 사암침법을 이론과 지식으로 공부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연구하여 보자고 제창했다면 이론부터 가르쳤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이론부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사암침법 책 처음에 어떤 환자를 수양명대장경으로 치료해서 낫게 해 주었다면 '왜 수양명대장경을 썼을까'하는 한가지 만을 가지고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설명했겠지요.
저는 한 가지가 풀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을 진행시키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많은 학문체계를 완성하고 나름대로의 어떤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저는 긴세월 동안 무지무지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마치 백내장 걸린 사람이 엉터리 수술을 받아서 희끄무리하게 세상이 보이는 것처럼 그저 조금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보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식물과 광물, 모든 무생물과 인간이 모두가 똑 같은 식정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 모든 것이 신의 내재된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 모든 병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하나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고, 하나의 깨달음이 없어서 오는 것인데 그 깨달음만 얻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여러분들 중에서 사암침법을 공부하고 오운육기 조금 알았다고 해서 자기 Ego의 확대로 삼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저에게 속은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를 얻어서 이렇게도 얘기해 보고 저렇게도 이야기 해 보고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따라서 예를 다른 것으로 들어드린 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따라서 예를 다른 것으로 들어드린 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때 뿐이었습니다.

옛날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소용돌이, 나는 불교인, 나는 기독교인, 나는 한국인, 너는 일본인 이라고 하는 터무니 없는 민족주의, 종교주의에서부터 지연에 얽매이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이런 관념의 분리가 심지어는 건강과 질병도 분리를 시켜버리더군요.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분노가 있고 시기 질투가 있는데 나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지구상에 있는, 남을 건강하게 해주려고 하는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건강할까요?
한의학과 학생들이 본과 4년을 마치고 나면 국가에서 인정한 면허증을 받지마는 정말 그러면 한 생각 이전의 도리, 진리에 대한 각성, 또 진정한 의미에서의 환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는 의사로서 공부를 시키는데 있어서 질병을 치료하는데도 어떤 이론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음양이니, 사상이니 이야기 하는 것은 옛 성인들이 부득불 그렇게 이야기 했다는 것을 예를 들어 보인 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사랑하는 애인이나 정말 사랑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들이 항상 의사에게 돈 내놓고 자신의 몸을 맡기도록 해야할까요?
혼자서 병을 치료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지요. 바로 이런 것을 황제내경에서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강좌에서 여러분들이 전혀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호기심을 돋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만약 제가 매일 본마음을 찾아라. 분리 없는 마음, 공포 없는 마음, 소유없는 마음만을 강조한다면 금방 지루해지겠지요.
그러니까 몇 가지의 이론 체계를 드러내면서 신의 공덕, 깨달음의 공덕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도 이야기 해보고 저렇게도 이야기 해보는 것에 여러분이 속는다면 여러분들은 40일 동안 더 죽어서 나가게 됩니다. 사암이란 도인의 노예가 돼버리는 거죠.
도대체 사암침법을 들으러 온 놈은 누구며 궐음 소음 태음을 운운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제가 사상이 어떻고 오운육기가 어떻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필요이상으로 많이 들어있는 이론이라는 허상을 깨기 위해서 극약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개중에 영적으로 아주 개발되어 있고 사랑이 넘치고 마음이 비어 언제든지 겸손한 상태로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군더더기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한번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이 빈 상태까지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우리 한의사들이 "동의보감"의 지식만 가지고 더구나 양방지식만이 결부가 된다면 창조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이 공부의 중요성이 결국은 진리에 대한 자각에 있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선문답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문제를 주는 가운데 분리 없는 마음, 비교없는 마음, 높고 낮음이 없는 마음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 우리 한방계의 샛별이 되고, 수많은 생명들을 영적으로 개화시키고 지구를 개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에 한 부분을 담당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의 이슬에서부터 날아가는 새, 어떤 초목에 이르기까지 고요히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자붙은 도둑놈이라든지, 옛날 의사같은 면이 없다는 그런 비난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질병도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는 것, 분리나 비교가 없는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았기에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침이나 약물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깨달을 때 '아하! 진리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간명한 것이로구나, 결국 모든 것이 나한테 있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외부로 헤맸구나'하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 유명하다는 선생이나 도사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게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판단이 되어질 때 한방이 개화가 되고 창조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오운육기도 이야기를 하고, 선법도 이야기를 하고, 사상도 이야기를 하여 여러분들에게 혼란도 주지만 신선한 감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여러분들도 못듣던 소리를 해야 합니다.
무언가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직관 간명한 깨달음, 이런 것들이 먼저 선행이 되어야 지구상에 존재하는 의학이나 침이나 약물의 조잡스러운 작업을 거치지 않고 나야말로 정말 의사라고 하는 '관'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10)@]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제가 감명스럽게 읽었던 책 중에서 감동스러운 장면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몇몇 타고난 영적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교통할 수 있는 성인이 어느 의사에게 나타나서 들려준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성인이 의사에게 들려준 말이므로 같은 의사로서 같이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읽어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맥도널드 베인의 "Beyond the Himalayas(히말라야를 넘어서)"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병을 고치는 힘과 진리를 전해주는 힘을 누구나 타고 난다.
신유가운데에는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만도 하기 때문에 회의가 생기고, 신유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놀라운 치유의 본질을 부정하려는 온갖 시도가 있어 왔던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는 시어머니, 남편, 아들 이렇게 4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위암에 걸렸습니다. 위암 선고를 받고 굉장히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그만 남편과 집을 뛰쳐 나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집을 뛰쳐 나온지 6개월만에 위암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이 여자는 시어머니를 마치 벌레처럼 싫어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 여자도 문제고 또 그 시어머니도 문제였지만 이처럼 인간관계에서 얽히고 설켜서, 암이 조장되는 환경이라는 것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 나니까 암이 나았다고 하는 것이 정말 희한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간암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불공을 드리다가 자궁암이 나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어떻게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우리 한의사들은 양방에서 하고 있는 세계보다는 더욱 깊은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경락 세계를 탐사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더욱 더 깊숙한 본질적인 것은 없는지...

"신유는 어떠한 물질적 방법을 써 보아도 낫지 않는 질병에 놀라운 효과를 눈으로 보게 해주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거대한 영의 힘에 아직도 눈뜨지 못했다. 그 까닭은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넘어선 세계에까지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가 지금까지 궐음 소음 태음...등을 이야기 한 그러한 것들은 결국은 마음의 장난입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은 생각도 되고 추리도 되고 또 이것이 조화를 하여 하나의 선도 이루고 악도 이룹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개종을 했습니다"
불교를 믿다가 천주교로, 천주교를 믿다가 기독교로...이것은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러면 여자로부터 자유스러워졌느냐? 그렇지 않지요. 다른 여자와 사귈 뿐입니다.
그러니까 대상만 바뀌었지 마음이라는 문제를 한번도 해결해 본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제된 상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좋고 싫음이 정제된 상태, 인간들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심지어는 의학을 공부하는 여러분들까지도 그러한 신유라든가, 근본적인 도리, 한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음양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선악이전의 에덴동산, 지인, 진인에 대한 이야기도 먼 산 속에나 있는 달인의 경지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의사도 엄밀하게 따지면 의사가 아니라 환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의사들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환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은 마음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나, 이론을 알지 못하는 것이나, 이론은 넘어선 것은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이전의 것을 마음이 알 수가 없지요.

"신유가 일어나는 것은 실로 그와 같은 영역에서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았다고 하는 자가치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은 하느님이 고치고 돈은 의사가 받는다" 영국에서 이런 얘기도 있지요.
어떤 의사가 환자에게 "술을 끊으십시오"하니까 환자가 그냥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환자를 불러 세우더니 "뭘 잊어 버리신 것이 없으십니까?" "잊어버린 것이 있다니요? 전 아무 것도 잊은 것이 없는데..." "돈을 내고 가셔야지요" "저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는데요" "충고해 드렸잖아요" "나는 당신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낼 필요가 없지요"

요즘 의사들의 현재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한 배양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몇 가지 된다 안된다 하는, 어찌보면 뻔한 것을 팔아 먹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환자들로 하여금 이런 체질에는 이런 것이 맞고 저런 체질에는 어떠한 것이 맞는다고 하는 교육도 필요할 뿐아니라 모든 병은 이러이러한데서 온다고 하는 자체 원인의 근본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교화작업이 필요합니다.
목사나 승려들이 다하지 못한 분리없는 마음에 대한 깨우침을 우리 한의과 학생들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신유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에 있는 어떤 문제를 떠난 상태, 초월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현상이든 모두가 스스로 지혜있는 법칙에 의하여 나오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가령 자네가 어떤 일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무엇인가를 믿고 있으면, 거기에 어떤 크나 큰 지혜가 작용하여 자네가 두려워하거나 또는 믿고 있는 그것을 바로 만들어 내고 만다.
이것이 상념의 법칙내지 전자작용의 법칙이다"
소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의 파도 즉 염파, 이것이 의사에게는 유효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함과 동시에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네를 둘러싸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그 밑바닥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러한 어리석음 때문에 훌륭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인간, 그것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잠잘 때나 앉을 때나 설 때나 데리고 다니는 근원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한다 이거지요.

"수학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일 것이다. 진리와 진리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진리의 법칙을 이해할 수는 있다..."

지금 이 성인은 인간의 질병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질병을 보더라도 질병 자체를 건강과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말고 '질병 자체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창조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저는 한의과 학생들에게 수차에 걸쳐서 어느 한 쪽 분야만 지망하지 말고, 종합과를 지망하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의사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별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간장암만을 전문으로 보게 된다면, 간암이 가지고 있는 독소를 한 경락으로만 받게 되어 큰 병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만 종합과를 다루고 있는 의사는 큰 병에 걸리지를 않습니다.
요즘은 자꾸 분업화 되어서 '내가 하는 일 이외에는 모른다'라고 하는데 분명히 마음의 어떤 에너지도 한 곳으로만 쓰게 되면 병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분리 편재된 마음의 에너지 때문에 오는 것인데 사실 의사라고 하는 것은 질병 때문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질병의 근본인 에너지의 편재 즉 마음을 잘못 쓰는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죠.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눈을 거꾸로 돌려서 내면의 세계를 주시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속은 것이 되고 설령 여기에서 사암침법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환자를 볼 때 각자의 관념이 작용하게 되어서 엉뚱하게 환자를 고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의 Ego를 투영시키는 이상한 의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시로 마음이 일으키는 질병을 전부 없앨 수 있는 비결은 없겠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원인들의 결과이고, 자연의 법칙을 어기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무지, 공포, 사랑의 결여 곧 사랑을 주는 힘의 결여,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다.
병은 육체와 마음이 그 본래의 리듬을 잃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며, 동시에 그것은 본래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싸움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 허둥댄다면 마음의 주의는 나타나는 증상에 쏠리게 된다. 왜냐 하면 육체가 신경을 통해 그 증상을 마음에게 알리면 마음은 육체가 느끼는 것의 포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육체를 그 증상에서 구해내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하여 육체의 원자들을 휘저어 놓고 결국은 고통이나 불쾌감이 오게 하는 것은 마음이 육체를 구해 내려는 그 싸움이다. 이런 이치를 알 때 싸움은 멎는다")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체했을 경우 통처에 마치 물고기를 들여다 보듯이 가만히 관하는 방법, 그것이 뒤에 염화약방문에도 나오는 "정심주"라는 방법입니다.
병처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병명이 무엇일까? 원인이 무얼까? 하는 수많은 질문에 부딪히게 되지요. 그러나 그 원인을 알아 내려고 하는 노력 또한 또 하나의 마음이므로 그것 마저 떨구어 버리고 관하는 것입니다.
선가의 선사들은 처음 선가에 입문한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많이 해줍니다.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어떻고, 나는 그 속에서 어떤 구박을 받고 자랐고, 집안 식구들은 어떻고, 애인도 나를 배반하고...그러면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시기가 되면 일체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에 대답하여 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선사들은 알고 있지만 처음에는 대답을 해주는 거죠. 처음부터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범부들에게는 무리이니까요.
그러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났을 때 이 사람은 질문을 부여안고 끙끙 앓다가 질문을 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차차 공부를 하다보면 집안의 문제, 애인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고, 모든 문제는 자기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또 문제의 해결도 자신이 해결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암침법이라는 문제도 모든 사람의 병을 보는 것도 여러분 스스로의 눈으로 보아야지 결코 교수이든 누구이든 타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하나의 이론을 수용하고 잊어버리고 또 이론을 수용하고 잊어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이론에 집착을 하면 큰일나지요.

("마음은 육체의 느낌을 의식하고, 그 느낌이 어떤 '병'으로서 마음에 기록되며, 거기에 어떤 병명이 붙으면 마음은 그 병명에 사로잡히고, 더구나 그것이 어떤 불치의 병이라 하게 되면 마음은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여 부담은 더더욱 커진다")

제가 누차에 걸쳐서 양방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양방병명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어떤 환자가 왔을 때 이것을 비만증이라고 해야 할까? 음허라고 해야 할까? 양허라고 해야 할까? 자꾸 우리 의사들은 어떤 증상에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이때 병명을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은 과거의 기억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환자의 실재 모습을 보는데서 멀어지게 되지요.
환자를 보면서 "상에서는 어떠했고 오운육기는 어떠했고, 육기는 어떠했으므로 이 사람은 이런 체질이다"고 딱 규정을 짓는 순간 여러분은 실상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소음인, 태음인, 태양인, 소양인이라고 하는 사상이 난변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는 것, 제행무상이 참 진리일진대 모든 것을 고착적으로 결정해 버린다는 것은 우둔한 의사의 모습일 뿐입니다.

요즘의 의사는 환자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혈관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므로 X-ray를 찍어 봅시다, 가슴 속의 덩어리가 혹시 암이 아닐지 모르겠군요, 정밀검사를 해봅시다"등등 이런 공포의식은 마치 인간이 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목사나 승려, 신부라는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는 그 티켓을 따낼 수 없다는 논리와도 똑 같습니다.
요즈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전부 이러한 공포의 변형된 실체, 공포의 변형된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진리에 대한 각성 이전에 "이 약을 먹어야 됩니다"라는 겁을 던져주는 것이지요.
이런 공포는 심리적인 이득, 물질적인 이득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은 말하기를 "항상 공포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심리적 존경 내지는 물질적인 것을 얻고 싶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자꾸 습관화가 되면 재미가 붙게 되고 그러다보면 환자나 의사나 모두 찐득찐득한 업의 수레바퀴로 기어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환자를 볼 때 병명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하고 또 불치병이라고 하는 선고를 함부로 내리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억지로 희망을 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병이 오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환자 스스로가 모든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 가정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누가 누구를 버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장손이면서도 제사에도 안 가는 엄청난 불효자로 낙인이 찍혀 버렸습니다. 같은 서울 시내에 살면서도 서로 찾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께서 방광암에 걸려서 찾아오셨습니다.
혹시 무슨 방법이 없을까해서 저를 찾아온 것이었지요.
저는 미리 예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올 것이 온 것이로구나'하고 말입니다.
사실 제 가족의 욕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저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는 성격이기 때문이니까 그냥 들어두십시오.
저의 아버님의 성격은 긴장이 많고 공포가 많고 조심이 많은 성격인데 금방 어머니와 몽둥이를 들고 싸우다가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My darling"하면서 맛있는 것 좀 내오라고 졸지에 표변할 수 있는 교활성, 가족들에게 집안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바깥에서는 체면 세우느라고 사랑이 넘치는 행동을 하는 이런 이중성을 저는 어려서부터 보아왔기 때문에 저것이 언젠가는 병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방광암에 걸려서 왔더군요. 이것은 사형선고입니다.
"방광암은 불치입니다. 잘라내야 합니다"하고 양방의사들이 관념을 딱 넣어주니까 저와 한 달간 입씨름을 했는데도 결국은 자르고 말더군요.
그러더니 지금은 후회를 하는 겁니다. 소변기를 옆에 지니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진리에 가까와지면 질수록 제일 믿어주지 않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특히 사촌이나 동생, 아버지, 어머니를 치료할 때 전혀 믿으려고 하지를 않죠.
도나 진리를 공부하는 초반전에는 가족들에게서 받는 고통은 대단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부모는 비록 자기 자식이지만 손아귀에서 떠난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애정이 참 사랑이 아닌 소유일 뿐이거든요.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날 도를 공부하고 진리를 공부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게 되니까 그만 자기에게서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식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양방의들의 말을 듣고 방광을 떼어내고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요.
그러므로 병에 대한 관념을 여러분들이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의사들이 먼저 공포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며 정말 죽음과 삶이 분리가 되어 있는 것인지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은 실제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말이 그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말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처음 들으니까 신선한지 몰라도 저는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이므로 지루할 뿐입니다.
저는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들 손에 칼을 그냥 쥐어주고 싶고 물감과 붓을 그냥 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려 놓은 그림만 그냥 구경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그리는 그림을 아무리 이야기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저 여러분들 마음에 시비지심만 들끓을 뿐이지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고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던 친구가 개업하고 나서 환자들이 많이 밀려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학교 다닐 때 바보 같았다고 욕을 해서 될까요?
여러분들은 아는 것만 가지고 학교에서 1등을 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환자를 향한 사랑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환자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는 그런 기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사암침법 강좌를 하면서 인간이 가진 영성에 대하여 단순히 몇 개의 이론이나 박학다식한 이론관을 창조하여 내었다면 이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 안토니오가 이야기 하는 기발한 질병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 듣기 힘든 것인데 저는 이 안토니오의 질병관이 시금석으로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병의 원인이 자신의 참 모습(실상, 자아)에 대한 무지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데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때는 그 무거운 부담이 사라지며, 대 생명인 한얼이 마음을 변성시켜 육체는 자연의 완전한 작용에 순응하게 된다"


"인간은 육체에 이상이 있으면 병으로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지금 여기에서 질문자는 영국인 의사로서 티벳 지방을 여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책을 낸지는 오래 되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최근에 번역이 되었지요.

("그렇지, 육체의 세포사이에 어떤 분리가 생기면 그것은 뇌의 중추에 전달된다. 그러면 마음의 현재 의식이 그것을 불건강으로 인식한다. 근본적으로 한얼, 곧 인간의 참 모습인 완전한 힘을 깨닫지 못한 데서 공포와 불안이 생겨났다. 그러나 마음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뇌 중추에 전해지고 그리하여 육체 세포의 재건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고 불교인도 있으며 이 파도 있고 저 파도 있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자기가 속한 곳의 편을 들어 과다하게 다른 부분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분리 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한의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의사 이전에 비열하고 자기 Ego적이고 분리의식에 가득찬 추악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의 터무니 없는 망상, 분리의식이 깨어지면서 세포가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의사다, 나는 한의과 대학을 다닌다, 나는 사암침법 공부하였다'라는 그런 상이 없는 사람만이 신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의 우리 의학이 좀 더 영적인 상태로 개화하려면 깨닫는 의학, 신을 찾는 의학, 종교적인 의학으로 분명히 승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이 말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육체를 어떻게 해보려는 싸움에 사로잡혀 버리면 첫번째의 방위선인 이성의 벽이 무너져 결국 육체 세포의 부조화라는 정보를 최후의 선고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진리를 깨달으면 치유작용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마음이 강하게 충전되어 완전하고도 순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신유이다")

저는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주인공, 만약 여러분들의 육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어째서 시체는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합니까? 그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주인공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옛날에 제 사부님께 어떤 사람이 와서 "요즘 스님들은 술만 먹고, 고기만 먹고 여자들만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 사부님께서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는고?"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소문은 무엇으로 들었는가?" "제 귀로 들었습니다" "네 이놈! 귀로 들었냐? 죽은 시체는 귀가 있는데 어찌 듣지 못하느냐? 당장 꺼져라! 이놈! 어디다가 입을 함부로 놀리고..."

바로 이와 같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시비만 일삼을 뿐이지요. 이것이 선문답이 올시다.
죽은 시체도 귀가 있는데 어째서 듣지를 못할까요?
지금 제 말을 듣는 사람, 보는 사람, 생각하는 주인공이 이 우주의 영겁을 통하여 존재하여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깨달음의 근본의 자기 확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저나 혹시나 하고 의심하는 여러분들이나 모두 똑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의존하고 또 무엇하러 공부를 하고, 또 무슨 주고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의존하고 권위자가 생기고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공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처럼 되어 보려고 하고 무언가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 합니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의 소유에 해당합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이 혹시 여러분 가운데 단 몇 사람만이라도 깊은 이해가 있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병이 시작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기 존재의 진리 곧 참 나는 완전무한 절대라는 자각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불건강이라는 의식이 마음을 지배하여 쾌활함과 생동감을 잃는 것이다.
그때까지 육체를 지탱해 오던 마음이, 병이 실제로 있다는 미망의 마력에 굴복하여 진리가 한 때 사라지는 것이다")

성안토니오의 질병관은 간단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질병도 없어 진다는 것이지요.
특히 이 점을 의사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닌 한얼의 종주권에 관한 지식을 부조화 혼란이라는 세력에 내어주고 마는 것이다. 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약제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약제의 힘을 완전히 미신하게 된다. 그러다가 병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기라도 하면 완전히 미신하고 있었던 만큼 혼란은 더욱 커지고, 끝내 믿을 수 없음을 깨달으면 그대로 절망과 공포의 늪으로 빠져버린다"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서든지 회복하려고 온갖 약제에 매달리지요.
십전대보탕 쌍화탕 제미십팔탕...
그러다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혹시 내가 중병이 아닐까? 싶어서 한약도 써 보았다가 양약도 써 봤다가 X-ray도 찍어봤다가 빚을 얻어서 큰 병원에 입원도 해보고 여기 저기 검사를 다해 봅니다.
왜냐하면 불안하고 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어쩌다가 화학적인 변화로 병이 좀 낫게 되면 그 약제가 나를 낫게 했다고 완전히 맹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나빠지면 '내가 나았었는데 왜 또 병에 걸렸을까?'하고 병의 상태가 나빠진 만큼 절망과 공포의 늪으로 빠지게 됩니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인데 그 실패로 인한 공포감, 좌절감 또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이 왔을 때 병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병에 대한 연상, 죽음을 죽음자체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절망과 공포가 문제라는 거지요.

("육체는 화학작용의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깊이 알아야 한다. 육체에는 지혜와 기능과 육체의 영위를 유지하는 놀라운 짜임새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것이 곧 대생명의 활력이고, 그 대생명의 활력이 육체의 운동과 변화를 일으키는 바탕이다.
약초나 생약, 호메오파디(동종요법), 수치료법 등의 자연요법은 대개의 경우 세포에 작용하여 생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그것이 강력한 암시가 되어 그 암시에 따라 마음이 작용하게 된다. 마음에 미치는 이런 작용이 결국 건강의식과 몸속의 균형 조화를 회복시키고 재생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내재의 영력의 법칙을 깨닫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다음에 오는 2차적 상태는 처음의 그것보다 더 나빠지기 일쑤이다. 병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자아뿐인 것이다. '얼(영)'은 병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이기심, 빼앗고 받기만 하는 마음, 탐욕, 미움, 적의, 인색, 완고, 난폭은 자아의 것이며 이것들이 거의 모든 병의 원인이다. 비인격적이며 치우침 없는 한 얼은 그런 부덕에 대하여는 아는 바 없다. 따라서 치우침 없고 비인격적인 것이 신유이다. 비인격적으로 되면 될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친절해진다. 왜냐 하면 사랑은 비인격적인 것이며, 사랑은 용서요, 치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이며 사랑은 무릇 반작용이 따르지 않는 완전한 작용의 바탕이다")

우리는 보통 인격체가 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의외로 여러분의 생각 속에 있는 그런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람인자 옆에 아니불자를 쓴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 불자 아닙니까?
사람이 아닌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리 분별을 초월한 세계를 이야기 한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라고 했습니다.
공자에게 "일생동안 한 가지 글자를 일러주신다면 무엇을 일러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서하는 일이다. 오로지 서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너그러운 척 하면서 무엇이든지 '잘했다'라고 칭찬하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딸이 엄마와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나 오늘 남자친구 만났어" "응, 그래! 그건 너의 자유니까..." 이건 용서가 아니죠.
"엄마! 나 그애하고 싸웠어" "응, 그래! 그것도 잘했구나" 이것도 용서가 아니죠. 사랑도 아닙니다.
딸의 심리적인 진행 상황을 이해하고 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이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들 마음 속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후배들의 정신적인 고통이나 학문적인 갈등을 함께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해 보셨습니까? 선배는 후배를 이용하고, 후배는 선배를 존경해 주는 척하는 관계 속에 운영되는 대학풍토에서는 신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이용하러 와서는 안됩니다.
오직 제가 가지고 있는 것만 받아 먹으려해서는 안됩니다.
저를 통째로 마시러 와야 됩니다. 뭔가 깨달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인가 풀어내 놓는 주인공에 핵심을 맞추지 못하고 제 말끝에만 끄달리면 여러분들은 제게 철저하게 속는 결과가 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음양 이전에 선악이 없는 마음, 시기 질투 없는 마음, 욕망이 없는 마음의 상태로 모든 사물을 관해서 보게될 때, 즉 그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여러분들이 곧 신농씨요, 황제요, 기백이요, 예수요, 석가요, 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목은 잊어버리고 자꾸 자기 자신을 비열하게 낮추거나 또 터무니 없는 몇 가지 지식만을 가지고 자기를 높이려 한다면 결국 이런 사람에게는 사랑을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옛날에 조주스님이란 분이 하루는 설법을 하러 올라가서 개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날 설법을 들으려는 대중이 250명 정도가 되었는데 조주 스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너무 대중의 수가 많았던 것이지요.
조주스님께서 개다리를 뜯고 있으니까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5명만 남았답니다.
그러자 '너희가 진짜 대중이다'하면서 설법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250명 가운데는 잘 자라는 싹마저 꺾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도의 익은 마음보다는 도인이 되어 봐야 되겠다고 하는 즉 뭔가 되어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거든요.
이러한 야심가는 언젠가는 자기 스승이고 친구고, 가족이고 간에 전부 다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암침법을 개설하게 된 동기는 나를 내던질 사람과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러 온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내놓은 사람들만이 모여서 지금 절망에 빠진 한의학을 고민해 보고 활로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연구해 볼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작은 라디오도 채널만 맞추면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데 여러분들이 이 우주에 무한히 떠다니는 염파, 텔레파시를 못잡는 이유는 여러분 스스로가 채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심법', 즉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불이법', 둘이 아닌 법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남의 말에 끄달리게 되고, 의사가 되어가지고도 병을 치료하러 다른 의사에게 가는 것이거든요.
그건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법의 근본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개체의 자아가 끊임없이 외적인 것과의 충돌과 갈등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을 깨달았음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인격적 내재진아가 해방되어 대생명의 모든 힘이 방사되며, 그 자연의 힘의 전자파가 마음과 육체를 변질시키기 시작한다.
이 안에서의 원자 작용이 잠재의식층에 대해 암시를 준다.
그러면 잠재의식은 순간적으로 온 몸에서 반응이 일어나게 하여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 놓아 그 흐름이 향하는 곳에서 불순한 것을 밖으로 쓸어내고 혼란을 가라 앉힌다"

궐음병은 소양으로 치료하고 소양은 궐음으로 낫게 한다고 제가 이야기 했다고 해서 병이 꼭 공식에 맞게 궐음 소양 태음 이런 식으로 될까요?
옛날에 임제스님이 "밝은 것은 밝은 것으로 치고 어두운 것은 어두운 것으로 친다"하고 돌아다니는 기승에게 묻기를 "밝은것도 오지 않고 어두운 것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묻자 "내일 저 위에 있는 대비원에서 제사가 있느니라"하고 휙 가더랍니다.
그제서야 임제 스님께서 "역시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구나"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궐음으로도 오지 않고 소양으로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경주에 있는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그만둘 때, 저는 학생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했는데 학생들이 받아들이질 않더군요. 학생들의 태도가 엉망이었습니다.
강의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나서 한 학생이 일어나 하는 말이 "선생님, 저희들 데모좀 해야 되겠습니다" "무슨 데모인데?" "아니 한의사가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양약사가 한약 제조하는 것에 대한 데모 아닙니까?"
이왕 시작하려면 강의 시작하기 전에 할 것이지 강의 시작한지 10분 정도 지나서 한 학생이 일어나서 유인물을 휙 뿌리더군요.
그래 좋다. 데모도 남자다운 기개니까 얼마나 잘 하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으쌰으쌰하면서 조금 나가다가 시내에서 검은 차 하나 들어오니까 30분도 못돼서 밀려 들어오더군요.
"야! 오늘은 못하겠다. 내일하자" 그러면서 데모를 끝내더군요.
저는 한번 강의를 시작하면 4시간, 다섯시간 쉬지 않고 연속 강의를 했고 또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가지고 내려갔는데 시꺼먼 차 하나 오니까 밀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속았다'라는 진한 배신감이 느껴왔습니다. 이런 대접 받고는 도저히 강의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모를 하려면 아예 예수나 석가처럼 하시오"하는 사행시 한번 읊어주고 강의를 끝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연민의 정이 있어서 혼란으로 지내온 여러분들이 안타깝고 정말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 풍토, 제 나름대로 지내온 13년 동안의 괴로움을 여러분은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일념에서 그것을 전해 주려고 했는데 그것을 그냥 잔소리 정도로 받아들이더군요.
그래서 그만두고 올라왔더니 이제는 아쉬워 가지고 "잘못했습니다. 강의를 해주십시오"하더군요.
제가 그때 돈을 많이 번 종합병원의 원장으로서 자가용 굴리고 내려갔었더라면 아마 제게 그런 대접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강의시간이 되면 눈이 빠지게 기다렸겠죠.
매일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으로 대 여섯 시간 강의를 하고 생맥주 한잔 마시고 올라오니까 은연중에 가볍게 보아도 되겠다는 식으로 여겼던 거지요.
지금은 학생들은 진실한 의사관, 진실한 진리, 의사로서 정신을 진심으로 알려주려는 사람보다는 돈이 많고 권력 있는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따릅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그래서 저도 '광화문 네거리에 간판을 하나 내걸고 왕창 돈이나 벌어야 되겠다. 왕창 돈을 긁어모아서 부자가 된 다음에 그 다음에 강의를 한다고 하면 벌떼같이 올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에 5년 후에나 강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돈을 빌려 개업을 하고 비록 극소수의 학생일망정 올바르게 공부하려는 사람을 위주로 강연하기 위해서 선실을 열어 두었는데, 제 나름의 신념에 100^34^1도 못 미치는 것을 느낄 때에는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자각적인 종교, 자각적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서 학문을 재정립하려고 해야 합니다.
지금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황제내경" 한 페이지를 찢어들고 산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혼자 명상하는 사람이 태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한 것을 여러분들의 후배에게 물려 주어야 합니다.
후배들에 대한 사랑, 후배들에 대한 교육을 외면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나는 내가 공부할 때 얼마를 투자했으니까 너희들도 돈 내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돈을 벌어서 아버지한테 돈을 갚으러 왔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기가 막혀서 "야, 이녀석아! 너는 이 다음에 네 아들에게 돈 빌려주면 갚으라고 할래? 가져가거라"
우리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대학 6년 졸업하고 나서 개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대학원 들어가기도 힘들지요.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돈은 없고, 월급쟁이하러 제기동이나 종로에 나가 보세요.
어설픈 사람들 틈에 끼어서 "원장님, 담배라도 한 대 피우시고 다방에 가 계시죠. 제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슬슬 놀다가 오세요" 저녁때 다섯시쯤 돼서 들어가면 "원장님! 책상에 5,000원 놔뒀습니다. 가져가세요" 이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체계적인 학문없이 경험만으로 유지해 온 사람들도 십전대보탕, 쌍금탕, 쌍패탕에 무슨 약 무슨 약이 들어가는지 외우고 있는데 우리 한의사들이 외우질 못하는 사람도...

지금 양의사들이 얼마나 권력을 잡고 있으면 한의사들이 군의관도 못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뼈저린 현실입니다.
'우리집은 시골에서 부자니까 내가 졸업하면 개업시켜 주겠지' 이렇게 나 하나만 생각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한의학 전체가 무너질지 모르는데 나 혼자만 생각해서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한의학의 전통이 무시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황제내경, 오운육기법을 다른 사람에게 교육시킨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은 여러분들도 수없이 깨달을 수가 있지요.
그러나 미래의 교육자로서 나서기에는 어마어마하게 힘이 듭니다.
나름대로 깨달은 뒤에 뼈저린 고통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안일무사합니다.
'그냥 졸업만 하면 어떻게 되겠지' 여러분들 졸업하면 여러분들을 받아줄 만한 곳이 있는 줄 아십니까? 또 개업하려고 해도 여간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니고 또 연륜도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1년에 600명씩 쏟아져 나오게 되거든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칼날같이 무서운지는 여러분들이 졸업하고 나오면 잘 알게 될 겁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각의 힘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무엇인지, 음양 이전이 무엇인지, 한 생각 이전이 무엇인지 이런 영적인 깨달음 이외에는 우리 한방을 존속시킬 힘이 없습니다.
지금의 학문 체계에 도취되어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학교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 한의학의 장래는 암담할 뿐입니다. 젊고 뜻있는 여러분들이 이 한의학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 혼란이 가라앉는 것에 호응하여 '병'이라는 관념을 떨쳐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만 참된 평안이 확립되며, 그리하여 육체의 호소와 반란이 멎고 조화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 이렇게 앎으로써 조화가 회복되면 마음과 육체는 병의 성질이나 증상이 계속되어 기간 여하에 관계없이 변화한다.
진리에 따라 이끌어 줌으로써 병자는 고통이 한 때의 것이고 스스로 지어낸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앞으로 환자들한테 "나만 믿으세요. 우리집 약만 믿으세요"이런 식으로 맹신적인 차원보다는 병의 원인이 당신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무릇 나타나는 현상은 한때의 것이며, 한때의 것은 그저 끊임없이 유동하고 그 자체의 근거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밖의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지한 자아 뿐이다.
실재는 이 무지한 자아와는 전혀 다른 것, 실재야말로 완전하고 비인격적인 참 나이다.
만약 병이 실재라면 그것은 고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재는 불변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공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뿜어내는 암시를 받아 공포 속으로 더욱 깊이 빠진다"

의사가 공포를 느끼면서 환자에게 '불치입니다'라고 선고를 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 말한마디에 환자가 받는 암시는 대단한 것입니다.

"죽음에의 공포가 인류라는 한 가족에 스며 있는 여러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 공포를 떨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인 것이다.
이 살아있는 우주에는 단 한 분자라도 죽은 것은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주기 바란다.
대생명에게 죽은 부분 같은 것은 한 구석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지금 자네가 보듯이 생과 사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 속에서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옮겨감에 불과하다"

생과 사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듣고 보고 느끼고 하는 그 주인공은 전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과 삶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좋은 물건을 엉터리로 쓰고 있거든요. '죽는다, 산다'하는 겁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명상을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들 내면 깊이 들어가 있는 공포를 한번 파고 들어가 보세요.
엄청난 긴장과 남에게 인정받지 못할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질병의 공포, 종교가 주는 공포, 여자들 같으면 얼굴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포가 자리잡고 있지요.
이런 것들이 먼저 해결되기 전에는 의사 노릇해서는 안됩니다.

"생명은 보다 완전한 집, 곧 영체같은 보다 정밀한 몸 속에서 존재를 계속하면서 개체 생명의 의식이 차츰 확대 심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가 마음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리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의식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

환자들은 이러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병이 왔지만 의사야말로 우리 인간의 존재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다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죠.
이미 그전에도 있었고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나게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일 겁니다.
옛날에 이르기를 "인신난득이요. 정법난득이라" 즉 사람 몸을 받기가 어렵고 정법을 얻어 듣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정법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말을 툭 터놓고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기가 낮은 사람은 의혹하고 근기가 높은 사람은 힘써 행해서 자기 근본을 찾으로 수행하러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차원이 되면 일당 백입니다. 혼자서 천명 만명을 당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의 구원을 호소합니다. 여러분 하나가 개화되세요.
사향냄새를 막으려고 아무리 겹겹으로 싸 놓아도 그 향기는 널리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익으면 자연히 냄새가 나서 벌이 꿀을 찾아 모여들듯이 '불우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진리를 들으러 여러분에게 모여들 것입니다.
저는 이 사암침법을 빙자해서 '불분리성, 불이법, 무상대성'등 이런 정보를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로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위로는 예수, 육조, 부처님의 뜻이라고 나는 확고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제가 한의학을 이야기하면서 종교를 이야기 하느냐?
그것은 여러분들 속에 내재해 있는 불교를 비판한다든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또 기독교가 선하다든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 주인공에 대한 인식을 빨리 가져달라고 하는 것이올시다.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그 주인공에 대한 인식을 말입니다.
"심신의 완전한 치유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소멸 되었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자네가 남을 도울 때는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가장 우둔한 마음일지라도 진리의 빛을 받은 의식은 그 속으로 침투할 수가 있는 법이다"

여러분들이 남을 돕기 위해서 "내혁 일심 귀원 요익창생"이라는 명분론을 먼저 공부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이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사이기 이전에 전 중생계에 전부 필요한 말입니다.

"진언(만트라)은 공포에 찬 마음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괴로움이라는 관념을 도리어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하여 사람들은 대립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건강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관념과 싸우며 선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악이라는 관념과 싸우는 것이다. 이 싸움은 끝이 없다"

지금 이 말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다시 한번 증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깨달으면 성경이나 불경이 여러분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지 성경이나 불경을 여러분들이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깨닫고 보면 "황제내경"이 여러분을 증명시켜주는 것이지 내경을 여러분이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농씨가 가지고 있는 혀는 어떤 혀이며 기백의 눈은 어떤 눈입니까?
시력이 5.0이나 10.0정도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눈인데 그런 심안이 있었을까요?
요컨대 우리 마음에 있는 시기, 질투, 공포, 분리의식 등 이런 것을 떨어버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떠들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갈을 치우기 전에 씨를 뿌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지금 사암침법을 공부해서 어떤 소득이 있었다거나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잊어버리시고 '깨달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은 사람들이 도대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멍한 눈, 얼빠진 표정, 혹 무슨 이야기를 하면 난 모르겠노라는 식이예요.
강좌에서도 이전에는 문제하나 던져 놓으면 여기 저기서'혹시 이것 아닙니까?' 하면서 질문도 많았는데 요즘에는 어찌 그리 무관심한 얼굴의 사람들 뿐인지 모르겠어요.
이건 마치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과 똑같은 느낌입니다.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저희 엄마가 이빨이 아픈데 어디로 모셔올까요?" 또 "제가 허리가 아픈지 얼마가 됐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이야기 해주고 또 육적인 문제까지 다 치료해 주고 그러면 아예 보임까지 다 해서 보내드릴까요?

"제가 공안을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 제 의견에 선생님 뜻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이 없더군요.
제 친구가 어느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야, 이친구야! 지금 이 선실에 앉아서 강의 듣고 있는 이 학생들이 진짜 중병 환자야, 이 사람들은 지금 환자를 치료할 사람들인데 바로 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더 급해" "허긴 이 친구들이 나중에 내 고향에 가서 개업할지 모르니까..."라고 하더군요.
문앞에 와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오히려 우선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저와 일대일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번 소견을 잘못 먹으면 천명, 만명, 수십만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또 지금 이중에는 나중에 강단에 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교수로 나갈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교수가 깨어있지 못하고 몇 가지 외운 지식으로 남의 말만 인용을 한다면 밑도 끝도 없고 제자도 지루해지고 선생도 지루해지는 겁니다.
그리고는 똑똑한 제자가 나타나면 업수이 여기려고나 하고 또 쓸데없는 자만심을 넣어줘서 안하무인격이 되어 버리죠. 이런 것은 도가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깨달은 의식의 슬기로운 말의 방편을 쓰면 환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협력하게 되며, 그리하여 변화가 순간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실재 실상의 진리가 전자력의 파동을 발생시키고, 그 파동이 환자의 마음에 도달하면 그때까지 그를 얽어매고 있던 소극적인 정신상태가 타파되고 만다.
이런 방법으로 가까운 곳에서든 먼 곳에서든 환자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순간에 마음은 치유되었던 것이다.
'딸아, 마음을 밝게 가져라.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느니라'는 말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
자네들은 이런 말들을 늘 듣고 있지 않은가. 이제야말로 그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의 믿음이 낫게 했느니라"라는 말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진리를 알 때 '오오라'가 맑아지며 상념이 강력해진다"
'오오라'라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의학에서도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소련에서는 이 오오라를 X-ray로 투시하는 기계를 만들어 내었거든요.
그래서 몇 가지 광명의 색깔로 구분해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육체적인 질병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하며 진단법에 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오라가 눈에 띤다고 합니다.

"그때 대자연 속의 그 어떤 것도 그를 해치지 않게 되며, 그 또한 자연 속의 어떤 것에도 해를 미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네가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자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지배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네는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힘과 주권을 이미 부여 받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반대관념인 공포를 거쳐서가 아니라, 깨달음 곧 속속들이 아는 것으로 참 믿음을 세우라.
공포에서 나오는 것은 믿음이라는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도리어 관념의 대립을 격화시켜 사람을 더더욱 대립 속에 갇히게 할 뿐이다.
기꺼이 귀 기울여 잘 듣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마음에 스스로 지워 놓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은 병자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모든 사람의 '참 나'가 병이나 죽음, 선이나 악, 실패나 성공으로 어떤 영향도 받는 것이 아님을 알고, 인격적 내지 인간적인 것을 넘어,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고요히 봄으로써 비인격적, 초인간적인 자네가 되어야 한다"
고요히 관조하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 하는군요.
"관심하라, 고요히 네 마음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체의 의식까지도... 네가 어떤 말이 나오려 할 때에 좀 더 깨닫고 쉬어라. 왜냐 하면 말은 곧 생각이기 때문에...
자네는 병자가 치유를 경험해 주기 전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은 병자의 치유를 경험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의사 자신을 치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제가 하는 이 말을 단순하게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질병에 대한 이론보다는 깨달음 위주로 직관위주로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깨달음이 없으면 학교에서는 교수에게 속고, 저에게 오면 저한테 속고, 대가에게 속고, 권위자에게 속고, 도인에게 속고, 말에 속고, 경전에 속고 이렇게 속고 속다가 일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이 책 다음 부분에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뜻이 등장을 하는데 식물이 어째서 우리 인간의 여러 가지 다른 차원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식물이 갖고 있는 영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식물이나 광물이나 또 우리가 일으키는 감정적인 차원을 옛 성인들이나 지금의 깨달은 사람들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에 있는 커텐이나 사물들도 내 생각, 내 상념이 물질화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물며 식물이 그렇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식물도 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불확실하게 이야기 한 것은 '그렇다'라고 단언적으로 이야기 하면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깊숙한 진리의 차원을 이야기 하면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념은 털끝만큼도 더하고 덜한 것이 없고 실제로는 그것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적인 현상 중에 미세한 것은 마음이요, 거친 것은 육체요, 물질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시려면 "히말라야를 넘어서"를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유심적인 오운육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논문을 보고 주위사람들은 '한의학에 종교와 공안을 접목하는 작태'라는 등 많은 혹평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 친구는 오운육기파야' 저도 이런 소리를 다 듣고 있습니다.
정말 당치도 않은 이야기죠. 제가 왜, 오죽하면 종교를 집어넣었겠습니까?
한의학을 정면으로 도전했다가 실패를 하고 워낙 힘이 드니까 명상법, 관심법을 통해서 도전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한때는 충분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성질이 끈기가 부족하고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걸 끝까지 지속시키지 못하고 겨우 3%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도 '이 정도 40일 동안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솔직히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쉽게 하는 한 마디를 얻기 위해서 6개월, 1년, 2년씩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워듣기 위해서 전국을 헤매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제게 어떤 감사의 마음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심리적인 이득이나 공경을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여기는 하나의 살풀이 장소입니다. 혁명의 장소입니다.
여러분들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와는 어떤 거래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의 자발적인 참여만을 강조할 뿐입니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서산대사의 마음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대는 거문고 안고 큰 소나무를 의지하나니(군포금혜의장송)
큰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요(장송혜불개심)
나는 길게 노래하며 푸른 물가에 앉나니(아장가혜좌록수)
푸른 물은 맑고 빈 마음이다.(록수혜청허심)
마음이여 마음이여(심혜심혜)
나와 다만 그대로다(아여군혜)

이제부터는 중반전에 접어들었는데 중반전 이후는 일종의 전투와도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말을 들으면서 명상의 경지로 몰입해 보려는 관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름대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또 거부되는 것은 왜 거부가 되는지 그래서 다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또 틀리는 것은 수정해 나가는 그런 분위기가 주어져야 합니다.

@[(11)@]

자! 그러면 앞에서 이야기 했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각 인종별로 태음 소양 소음 태양을 나눠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전부 해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사상을 두 개는 튀어나왔고, 두 개는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저는 사실 이것을 굉장히 어렵게 얻어들은 것입니다.
이것을 어느 주역학자에게 전해 듣고 보니까 관상설의 기본적인 의미를 알겠더군요.
눈은 상하운동을 하는데 주로 상(위꺼풀)이 움직이고, 입은 하(아래턱)가 움직이는데 입은 토하는 언어가 있고 취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귀는 좌우가 있고 코는 전후를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이 아래로 감겼을 때는 긍정의 표시이고 눈이 떠졌을 때는 주로 윗꺼풀이 많이 움직이니까 부정적인 측면으로 감시하는 표시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눈을 사르르 감고 죽는 사람은 굉장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 이제 내가 갈 때가 되었구나. 이제 조용히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눈을 부릅뜨고 죽는 사람들은 죽기 싫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윗눈꺼풀은 독맥에 해당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부정과 감시, 경계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또 입은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토한다"라고 했는데 취한다고 하는 것은 생을 영위하고자하는 수단이고 토한다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서 말이 등장하는 거지요.
귀는 왼쪽과 오른쪽이 있는데 왼쪽은 혈, 오른쪽은 기에 관계되므로 기혈에 관계되는 것이 귀입니다.
코는 전후이므로 전진은 동, 후진은 정의 관계이며 한과 통의 작용을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한번 잘 생각해 본다면 일반적으로 눈이 잘 발달되고 코가 발달이 안된 사람(태음인)과 코가 잘 발달되고 눈이 잘 발달되지 못한 사람(태양인)을 식정인 차원에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총론의 앞부분에서 유심적 차원에서 본 팔괘 유추라는 도표가 있었을 것입니다.

유심적 차원에서 본 팔괘 유추의 도표를 보면 좌측을 음, 우측을 양 또 좌측을 나, 우측을 너라고 했으며 아래쪽을 안다, 위쪽을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음양인, 즉 눈은 크고 코는 작은 사람을 도표에 집어 넣는다면 우측 아래가 되겠지요.
이러면 하나의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지 이론이 따로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식정으로 표현된 네 가지 표정을 여러분들이 한번 연구해 보시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태음인인 경우 '나는 안다'고 하는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고 무엇이든지 모른다는 소리가 잘 안나오겠지요.
친구를 소개받아서 겨우 대폿집에서 술 한잔 마신 사이이면서도 "야! 우리 서로 편하게 대하자"고 하는 사람. 어떤 측면에서는 사교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제가 힌트만 드리는 것이니까 정신적인 특징을 여러분들이 조사해 보세요.
소음인은 대체적으로 헌신적으로 소양인은 자기 반성이 강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saddism 즉, 자기 자책이 강하죠. 자기 학대를 잘합니다.
무엇이든지 "잘했다. 잘했어"라고 칭찬을 잘하는 사람은 소음인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인물 중에 많겠지요. 여러분들이 이런 차원에서 깊이 연구해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사상의 특징을 풀어나가는 열쇠입니다.
여기에서 얼마든지 확대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직업도 여기에 맞추어 분류할 수가 있겠지요.
소음인이라면 남에게 헌신적이니까 여기에 맞는 직업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소음 소양 태음 태양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육경적인 것과 혼동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육경에서 나오는 소음 소양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

여러분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사상의학을 더욱더 보완한다면 앞으로 여러분들의 후학들은 공부를 좀더 현실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자리에도 사상을 공부하신 분이 계시겠지만 그런 분들은 좀더 관념을 넓혀서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장하는 눈 코 귀 입 이것을 알기까지는 저는 1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어떤 주역학자가 이것은 비밀이라고 하면서 죽어도 안 가르쳐 주고 비밀로 자기네 문중에만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렇게 쉬운 것이었습니다.
어느 곳에는 입술 보는 법만을 가지고 있는데, 임맥과 독맥의 움직임을 사행시 칠언절구로 써놓은 노우트 한 권이 있더군요. 그것을 베껴 오지는 못했는데 절대로 넘겨 주질 않더군요.

동무 이제마 선생님께서도 결국 사상은 눈 코 귀 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간 비 신 폐 이런 식으로 장부와 연결을 시킨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상의학의 힌트는 주역에 있는데, 주역에서 천 지는 몸통과 머리(천도지방)를 나눈 것이고 얼굴에 있는 4가지 움직임을 사상이라고 하고 그 밑에 팔괘의 천과 지가 임맥과 독맥에 해당하고 나머지가 12경락에 해당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간명하고 어찌보면 억지로 붙여놓은 것 같은데 참으로 기발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기발한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놀랠 줄을 모르는군요.
왜냐하면 그동안 주역을 가지고 씨름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깨쳤다고 하는 기쁨 또한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그 환희감, 어떤 선승이 "팔괘에서 천지를 뺀 것이 육기다. 그 안에 소음군화 태양한수 궐음풍...이 다 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1, 2, 3차 욕망이 다 들어 있다"라고 일러 주었을 때 그 진리에 대한 확인감이란 실로 큰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역의 이론체계의 모든 것이올시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유심적으로 대비시킬 수만 있다면 여러분들은 저보다 더 강의를 잘 할 수가 있고 새로운 한의학의 학설을 발표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것들이 우리 한방계에 박사논문이나 석사논문으로 천착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쥐나 토끼를 갖다 놓고 감초가 어디에 미치는 영향 등이나 발표하는 이런 풍토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우리 한의학계가 부흥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목통이 이뇨작용이 없다는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목통을 마른 사람에게 먹이니까 이뇨작용이 있을 수 있겠어요?
지금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삿된 논리가 들끓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작업은 '파사현정'으로서 삿된 것은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내자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정말 지금의 이 정도 이야기만 들어도 10년 세월은 단축한 것입니다.
대학시절에 이런 말을 지나가는 풍월로만 들어도 40일 동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태극의 상태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근본으로 귀일하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제 강좌는 심신부흥 운동입니다.
저는 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강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영원한 존재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 '내가 바로 신이다.
신농씨다. 나도 황제처럼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의심 대분심 대신념"을 가지고 마음을 움직여야 뜨거운 에너지가 마구 굽이치는 겁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분위기 입니다.
무당도 옆에서 돈을 얹어주어야 신명나는 법인데, 강사라고 하는 것은 듣는 쪽에서 자발적인 느낌이 없이 질질 끌려오는 것 같으면 금방 지루해져 버립니다.
닭이 천 마리이면 봉황이 한 마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전국 한의과대학생이 약 3,000명인데 그 중에 깨어있는 사람 세 사람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어느날 도를 깨달아 버리면, 한 생각 이전으로 도달하면, 지금의 어수선한 한방계에 샛별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배운 바가 부족하여서 "내경"의 한자도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은 양방지식도 알 것이고 한문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을 것이니 많이 섭취한 지식을 깨달음과 함께 병행한다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저는 의학사상 노벨상이 나온다면 틀림없이 한국에 있는 한의과 대학교 중에서 나와야 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공은 공산주의 물결에 수축되어 있고 대만이나 일본은 양방의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만이 주역학자나 선학자들을 통해서 독특한 한의학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제마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1세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의학 5,000년 역사 중에서 이제마 선생님처럼 독창적인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제마 선생님이 왔다 가신 것이 우리 한방계가 일어날 징조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제마 선생님의 사상은 주역에 근본을 두고 있는 진리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한방계를 자기멸시적인 눈으로 보지 마시고 창조적인 안목을 가지고 넓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사상에 대한 것은 이제 여러분 각자가 추리를 해 보기로 하고 그 다음에 오운육기에 관한 것인데 여러분들이 천부니 세회, 승, 복 같은 말은 "내경"을 찾아서 공부하셔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축인묘진...각 방위에 대해서는 외우라고 했기 때문에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오운육기라고 하는 것은 오행과 육기의 성분을 많이 확대해석하는 사람이 명쾌히 해낼 분야임으로 상당히 많은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요. 오운육기는 완전히 수학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 이전을 확 깨달아서 영성을 개발한 사람이나 또 잔머리를 굴려서 이해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제가 직관을 굉장히 강조를 합니다만 직관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쉽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직관을 개발하여 오운육기법을 터득하시든지 잔머리라도 많이 굴려서 이해하시든지 저는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직관을 공부한 사람은 직관으로 들어가고, 오운육기운용에 곱하기 나누기 많이 하신 분은 또 나름대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태음(안)-상하, 나는 안다, 사교적 이기적
소양(구)-상하, 나는 모른다, 자기반성 saddism
소음(이)-좌우, 너를 안다, 헌신적 종교적
태양(비)-전후, 너를 모른다

'부화'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목운이 정상적으로 들어 올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승명'은 또 뭡니까? 화운이 정상적으로 들어올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비화 심평 정순...등을 꼭 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것은 못 외운다 하더라도 수운이 미치지 못 할 때의 상황, 목운이 미치지 못할 때의 상황을 이해하면 되겠지요.
예를 들어서 목운이 미치지 못한 해에는 어떻게 될까요? 토가 성하고 금이 성하게 되겠지요.
이런 상황을 잘 추리하시면 됩니다. "내경"에 보면,

"목이 불급한 해는 위화라 하는데 목에 속하는 발생의 기가 부족하여 금 토에 지므로 승생이라고도 한다. 봄의 발생작용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고, 여름의 성장작용은 보통이며 여름의 토용, 곧 장하의 화성작용은 부탕하고, 가을의 수검작용은 조기에 행해진다... 그 기는 어떻고... 그 장은... 그 과는...."

이런식으로 내경 약 1쪽 반 이상을 위화에 대한 설명으로 할애를 해 놓았는데 여러분들이 이것을 꼭 읽어 보십시오. 이것을 읽어보시면 아마 충분히 이해가 가실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목운불급, 화운불급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라고 하면 상당히 숙고를 해야 하실테니까 황제가 해 놓은 것을 활용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오운육기책을 활용해서 꼭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오운육기의 허실을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 갑진년생의 사람이 있습니다.
갑은 갑기합토에서 양간이고 진은 명리학에서는 토에 속하지만 육기학상으로 뭡니까?
태양한수에 해당하지요. 그 중에서도 족태양입니까, 수태양입니까? 족태양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족태양의 한수가 들어온 것과 토기가 실하니까 무엇이 억제를 받고 있을까요?
수가 억제를 받는 해에 태어났습니다(토극수 원칙에 의함).
또 무엇이 별로 기운을 못쓸까요? 목이 토를 극해야 하는데 토가 너무 강하니까 목이 기운을 못 펴겠지요.
이때 주의 해야 할 것은 태양한수, 즉 찬물이 자꾸 누르는 것이 아니고 생장화수장의 관계로 보아서 거두는 작용, 장하는 작용, 발생하는 작용이 힘이 없고 주로 변화하는 작용, 성숙하는 작용이 굉장히 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만 따지고 보면 열매는 탐스럽게 성숙하고 결실도 잘 되겠지요.
왜냐 하면 목이 조금 허하니까 금도 조금 세겠죠.
결실까지는 잘 되는데 봄에 싹이 잘 안납니다.
겨울철에 간직이 잘 안되지요.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결실이 되긴 되는데 씨 안에 핵이 잘 안된다는 뜻입니다.
또 그 해에는 유별나게 장마가 진다거나 하지요. 이런식으로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만 이것을 인체에 비유해서 병리학적 생리학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와 태양한수가 만난 상황을 플러스시켜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갑진년에 대한 해석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는 의야라'의사는 뜻을 얻어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갑진이라고 하는 복합적인 상황은 열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갑진이라는 상황 하나만 놓고도 토기가 실하니까 신장이 허하고 목이 허하니까 어떻고 간이 어떻고... 이건 전부 그저 하는 말이죠.
발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뜻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여기에서 수가 없는 것을 태양한수가 보충이 되어 주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해에 비해서는 무난한 해입니다. 평운의 해라고 하지요.
육기상으로는 무난하다고 하는데 명리학상으로는 토와 토가 겹쳐서 좋지 않게 보거든요.그러나 명리학은 따로 명리학자에게 가서 하십시오. 그 곳은 그 곳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으니까. 명리학에서는 내용물은 보지 않고, 계속 그릇만 보거든요.
사실 자 축 인 묘 진...가 분명히 육기학상으로는 질에 관한 것인데 그릇으로만 본다는 것이 저는 불만이죠. 오운육기에서는 명리학에서 보는 사주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죠.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갑진이라고 하면 태양한수로 보도록 하십시오.
이 해에는 전반부에 태양한수가 지배하니까 후반부에는 무엇이 지배할까요? 태음습토가 재천을 지배하겠지요.
그러니까 후반부에는 토와 토가 끼어서 장마가 많이지게 되고 날씨가 축축할지 모르지만 전반부 6개월은 길합니다.
이 해 후반부에는 어떤 사람이 병에 많이 걸릴까요? 마른 사람보다는 뚱뚱한 사람이 병에 많이 걸립니다. 오운육기를 공부하고 나면 이런 것을 미리 예고해 줄 수가 있지요.

86년은 병인년입니다. 병은 수이므로 수와 소양상화가 플러스된 상황이지요.
전반부에 소양상화가 사천하면 후반부에는 무엇이 지배하지요? 궐음풍목이 지배하거든요.
그러니까 후반부에 병은 태양한수이고 궐음풍목이 혼합된 상황이니까 몸이 냉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뚱뚱하거나 말랐거나 설사 잘하고 몸이 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 여자들 중에 냉이 많은 사람은 후반부에 가서 고통이 심합니다. 이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도 건강이나 육계, 오수유같은 것을 많이 쓰면 좋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오하고 신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많은 추리를 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맞아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언제겠습니까?
아까 갑진년을 예로 들었는데 토가 실하면 장마가 들어야 하는데 장마도 안지고 다른 병변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평기의 해라고 하는데 이때는 천하가 태평하고 정치가 잘 되고 인심이 유화하고 모든 사람들의 덕성이 다 원만할 때는 오운육기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년 중 금년도에 평기가 들어오느냐 들어오지 않느냐 하는 것을 언제 점치는가 하면 1월 1일 날 하기도 하고 일양이 생한다는 동짓날 자정을 기해서 하기도 하고 별빛을 보고 한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너무나 심오합니다.
평기가 들어오는 해는 어떤 해인가 하면 전년도에 인간들이 적선을 많이 하고 모든 중생계가 서로 살기없이, 투쟁없이 원만하게 생활을 했을 때에 들어 온다고 합니다.
제갈량이 죽을 때에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금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점치는 방법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아주 극히 작은 일부분만을 알고 잘난 척하는 거지요.
85년을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85년은 을축년이었는데 을축년이 가지고 있는 특성대로 움직였지요.
여름에 유행한 병이 무엇이었습니까? 괴저병이었지요.
갯벌의 피조개에서 나오는 독소가 괴질을 많이 일으켰잖아요.

86년을 살펴봅시다. 86년의 감기는 지독해서 최소한 3--4주씩 고생을 하더군요.
특히 몸이 냉한 사람들, 냉수나 맥주 많이 먹고 몸이 냉해진 사람은 조심해야 됩니다.
85년도 을축년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습열로 많이 쓰러졌습니다. 중풍에 많이 걸렸지요.
여름철에 무리를 하면 가을철에 걸리고, 가을에 무리를 하면 겨울철에 걸린다고 이야기하죠?
이 오운육기상으로는 사람이 깨닫기 전에는 언젠가 한번은 하늘의 벌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나중에 다 하늘이 벌을 내리거든요.

그러면 정묘년을 살펴봅시다. 정이 무엇입니까? 정임합목인데 정은 허한 목이죠.
묘는 양명조금에 해당합니다. 목이 허하니까 금이 목을 누르고(금극목), 또 목이 토를 눌러줘야 하는데 목이 허해서 토를 눌러주지 못하니까 토가 목을 경멸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마른 사람들은 정묘년에 살 좀 찔 생각을 해야지 괜히 사우나탕에 가서 땀 빼고 매운탕 먹고 여자를 가까이 하게 되면 큰일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정묘년 정묘월 정묘일 정묘시에 위험합니다.
만약에 죽지 않더라도 큰병에 걸리게 되지요.

요즈음 바이오리듬 공부하는 사람들이 예언(?)을 하지요.
이것은 오운육기를 본 것이 아니고 리듬의 낙차가 큰 날, 즉 '큰 위험일(critical day)'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이오리듬 보다는 훨씬 더 세밀하게 나오지요.
색을 지나치게 밝히는 사람은 다 때가 되면 하늘이 벌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방탕한 사람은 소음군화의 해에는 위험합니다.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 색을 밝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금방 고치려고 마세요.
오운육기법만 알면 '금년에는 누가 큰일을 당하겠구나'하는 것을 미리 예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활용하는 오운육기법은 그 사람의 사주를 보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생김새, 성격을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소양상화지기가 꽉들어찬 해에는 창백한 얼굴에 남 욕만 하는 사람은 큰일나는 겁니다.
아주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죽습니다.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요.
그러니까 이 오운육기의 활용이라는 것은 신비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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