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정복자들 (탈레스에서 사르트르까지)

1.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탈레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우리는 탈레스를 거론할 때 곧잘 이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주관적인 단정 때문이 아니다.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탈레스의 위대성은 오히려 이 물음에 있다. 왜냐면 철학이란 바로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니, 근원에 대한 물음, 그 자체가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탈레스의 위대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만물의 근원에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그 사실에 있는 것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것과 '만물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는 두 개의 명제를 남겼다.



모든 수의 합은 원이다-피타고라스

"신에게 고유한 숫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숫자의 합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물은 수로 이뤄져 있다'고 한 것은 모든 만물이 자기의 고유 영역이 있다는 뜻이다. 즉 자기만의 성질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물은 모두 자기 성질을 통하여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의지다.

'모든 물체의 근원은 수'라는 내 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말일 뿐이니까.

모든 숫자의 합은 원이다. 원이라 함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태양도 원의 모양을 하고 있고, 달도, 별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모두 원을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주도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별과 달과 해 그리고 이 땅이 모두 원을 그리며 돌고 있기 때문에 또 언젠가는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모든 물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영혼은 반드시 원을 그리며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도 언젠가 돌고 돌아서 다시 사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이 만든 조화의 법칙이다.

이 모든 조화가 이룩된 세계, 그것을 일러 피타고라스는 '코스모스'라고 규정했다.

이 같은 사상은 결국 생명존중 사상을 낳게 되고, 또 '우주가 곧 나'라는 물아일체 사상을 낳았던 것이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다-헤라클레이토스

어제의 자네들은 오늘의 자네가 아니고, 또 어제의 숲은 오늘의 숲이 아니기 때문이지. 어제의 자네들은 단지 어제의 숲에 오긴 했으나 오늘의 숲에 온 적은 없어. 또 오늘의 숲에 어제의 자네들이 온 적도 없는 것이지. 자네들은 지금 이 순간, 이 순간의 숲에 있을 뿐이다.

어제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틀림없으나 오늘의 내가 어제 여기에 온 적은 없어, 오늘의 나는 지금 이 찰나에 숲에 와 있는 것이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나는 다른 숲을 밟고 있는 것이네. 물론 나도 계속해서 다른 상태로 변하면서 말이지. 그래서 나는 숲을 보면서 숲의 변화를 보는 동시에 나의 변화를 볼 수 있다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계속해서 뭔가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해서 땅 속에 묻히게 되고, 썩고,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같은 강에 두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지.

이런 흐름의 원리는 단순히 홀로 생성하고 홀로 지나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흐름, 즉 변화는 두 물질 이상이 서로 부딪쳤을 때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 구름이 몰려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비가 올 수 있겠느냐?

만물의 부딪침, 즉 대립이 바로 생성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마치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흔들리는 것처럼 사물은 서로 부딪치면서 동시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부딪침은 만물 대 만물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만물을 생성시키는 힘이 된다. 따라서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자 만물의 왕인 것이다.

만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다.

만물은 서로가 자기의 힘을 양껏 발휘하여 서로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을 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만물은 매 순간 생성-대립-소멸-생성을 반복하고 있다

어떤 개념이나 학문적인 지식도 영원하지 않으며 항상 변할 수밖에 없다.

그는 끊임없는 생성의 법칙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 끊임없는 생성의 힘, 그것이 그에게는 진리요, 로고스다.



물은 흘러도 물이다-파르메니데스

그 늙은이는 장님이야. 방금 본 사람도 금세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거든. 장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눈앞에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겠나?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에 대해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만물은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으며 생성하거나 소멸하지도 않지.

머리카락은 아무리 잘라도 머리카락일 뿐이야. 그러니까 그 겉모양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머리카락은 단지 머리카락으로 있을 뿐이라는 거지.

헤라클레이토스 말대로 강물은 끝없이 흐르고 있네. 그래서 같은 장소에 매번 다른 물결이 지나가지. 하지만 그것이 흘러간다고 물 이외의 다른 것이 되는가?

물은 아무리 흘러도 물이야. 물은 어디에 있든 물일 뿐인 게야.

어쨌든 그것은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없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변하거나 흐른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길, 생성은 '만물 대 만물의 대립'을 통해 계속된다고 했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데 생성이 가능한가?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서로 대립한다는 것인가? 분명히 어딘가에 무엇인가가 있으니 대립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니까 생성은 없는 거야. 단지 있는 것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칠 뿐이야. 마찬가지로 소멸도 없는 거야. 모든 것이 소멸한다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생성하는 것도, 소멸하는 것도 전혀 없어.

모든 사물은 원래 가루야. 그것이 모였다 흩어졌다 할 뿐이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건 아니란 말이지. 즉 선이 무수한 점으로 이뤄진 것과 같은 이치지. 우리는 단순히 선을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점일 뿐이야. 한 개의 점이 바로 선의 실체지. 자네도 마찬가지야. 자네의 실체는 자네를 이루고 있는 가루야. 또 가루는 물이 될 수도, 흙이 될 수도, 정신이 될 수도 있네. 그 가루를 나는 '존재'라고 칭하겠네. 그리고 그 존재자는 결코 사라지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네.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지.



만물의 뿌리는 물, 불, 공기, 흙이다-엠페도클레스

이 세상은 하나의 나무다. 이 나무의 뿌리는 물과 공기와 흙과 불로 이뤄져 있다. 이 네가지는 때론 합쳐지고 때론 분리하는데, 만물이 모두 그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힘은 사랑과 미움에서 온다. 사랑에 뿌리들을 뭉치게 하는 힘이 있다면 미움에는 뭉쳐진 것들을 다시 분리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니 사랑과 미움은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사랑과 미움의 반복이 중단되지 않는 한 이 세상도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도 영원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다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 저곳에서 이곳으로 옮겨다닐 뿐이다. 너희 중에는 별이나 물, 구름이 되는 자도 있겠고 소, 맹수 등이

되는 자도 있으리니 그 모든 것이 사랑과 미움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에는 원자가 있다-데모크리토스

만물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근본 물질이 있게 마련이오. 그것을 나는 '원자'라고 합니다. 사람도 역시 원자로 이뤄져 있지요. 그리고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얼이 빠진 것은 영혼의 원자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쪼개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쪼개지다보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나는 원자라고 이름했습니다.

원자는 각기 자기의 모양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낫 모양을, 또 어떤 것은 구슬 모양이나 갈고리 모양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각 원자들은 그 크기도 다릅니다. 어떤 놈은 크고, 어떤 놈은 작지요. 이런 원자들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 원자들은 허골을 떠다니다가 자신과 모양이 맞는 것을 만나면 결합하는 버릇이 있지요. 자연에 있는 모든 생물과 물체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계에는 물질적인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영혼과 정신도 독자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원자와 원자의 운동에 불과하다.



2.아테네의 인간주의 철학자들

모든 것의 잣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프로타고라스

네게 신이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신은 있다. 그리고 만약 네가 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신은 없다.

신은 항상 없고, 또 항상 있다. 신은 신이 필요한 사람에겐 항상 있고, 필요없는 사람에겐 항상 없다. 너는 신이 필요한 사람이냐?

아닙니다. 저는 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너에겐 신은 없다.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바로 네 자신이기 때문이다. 신도, 종교도, 세상도 모두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네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필요로 하지 않는 신이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너는 진리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정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리다. 진리는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진리가 있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진리다. 하지만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 입장에선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바로 그런 것이다. 진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말하자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없다는 뜻이다.



너 자신을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소크라테스

저 돌을 신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저 돌은 여전히 돌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물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물은 사람의 생각에 관계없이 사물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돌로 무엇을 만들든 여전히 그것이 돌이듯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도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인간의 느낌에 따라 변하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느낌에 관계없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완벽한 원은 관념 속의 원이다-플라톤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 그리스 최초의 대학인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아카데미아는 학생들에게 철학, 수학, 천문학, 동물학, 식물학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교 정문에는 '기하학자가 아닌 자는 아곳에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만물에는 항상 변하는 것과 절대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항상 변하는 것은 감각의 세계고, 영원불변한 것은 진리의 세계다. 나는 감각의 세계를 현상계라 규정하고, 진리의 세계를 이데아계라 규정하고자 한다.

이데아는 만물을 이루는 원리 속에 있거, 또 원리 그 자체다. 그리고 이데아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감각의 세계는 어떤가? 감각의 세계는 생성의 세계이며, 모든 것이 흐르고 있는 운동의 세계이기 때문에 항상 시간과 공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감각의 세계에선 이데아에 접근할 수 없다. 이데아에 접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뿐이다.

시간과 공간, 또 우리 지각의 변화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 그것이 바로 이데아다. 그리고 이 이데아들의 집합이 곧 이데아계이다. 감각의 세계, 즉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가시 세계는 바로 이데아계의 닮은꼴일 뿐 이데아 자체는 아니다.

원과 마찬가지로 모든 물질의 완벽한 원형은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한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든 것은 흐른다'는 명제와 파르메니데스의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명제를 하나로 묶었다. 즉 만물에는 '항상 흐르는 것'과 '영원히 흐르지 않는 것'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전자를 감각의 세계이자 현상의 세계라고 규정하고, 후자를 진리의 세계이자 이데아의 세계라고 규정했다. 그의 이데아계는 보편자의 세계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집은 집이 아니다-아리스토텔레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니 당연히 이 세상에서 왔겠지요.

실체는 크게 질료와 형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질료는 물체를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재료이고, 형상은 각 사물이 서로 구별되게 지니고 있는 모범적인 상이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반드시 어떤 물질로 되어 있으며, 어떤 모양을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 물질의 근본적인 재료가 되는 것을 저는 질료라 이름 붙였고, 또 그 물질이 궁극적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모양을 형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물질이 형상을 구현한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 세계를 더 중시했다. 그는 감각 세계 속에 있는 물체 그 자체를 만물의 실체라고 했다. 그는 개별적인 물체들이 보편적인 개념보다 앞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감각의 세계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모사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내세운 삼단논법의 대표적인 명제는 다음의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3.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들

나는 개로소이다-디오게네스

나는 개같이 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개야말로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고, 어떤 위선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어떤 철학적 가르침을 행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인간은 우주가 만든 연국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제논

인간은 우주가 만든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가 연출해야 할 배역을 가지고 있으며, 다라서 자기 마음대로 대사를 꾸며낸다든지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권리가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그들의 신분이나 처지가 천하건 귀하건 그들은 어떤 부끄러움도, 자만도 가질 필요없이 우주가 안겨다준 자신의 배역에 충실하면된다는 뜻입니다. 그들 개개인의 배역은 희극적일 수도 있고, 비극적일 수도 있겠지만 각자가 맡은 바 배역을 잘 연출하고, 그 배역에 성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배역을 완벽하게 연출하고, 완벽하게 소화해낼 때 선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주의 목적에 맞는 것은 나의 목적에도 맞는 일이니까요.

어느날 한 제자가 자신의 깨친 바를 동창들에게 설파하며 스스로의 뛰어남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제논은 제자의 뺨을 때리며 말했다.

"네가 설령 다른 사람 위에 선다하여도 그것으로 스스로를 뛰어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뛰어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칼이다-에피쿠로스

자연은 항상 적의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자연은 언제나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일 뿐이다.

양은 풀을 뜯고, 맹수는 풀을 뜯는 양을 잡아 먹는다. 또 독수리는 맹수가 잡아놓은 양을 훔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 맹수를 잡아 배를 불리려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인다. 죽이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속성이다. 우리는 이 자연의 속성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은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아나더라도 금방 쫓아오고 말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자연의 위협에 시달린다.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담을 쌓아야 한다. 그것도 가급적 높게 쌓아야 할 것이다.

자기의 평정을 지키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은 자연에서 멀어지는 것뿐이다. 그리고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이 즐거움을 유지시키는 일인 것이다.

자네는 아직도 정치의 속성을 모르는가? 정치에 뛰어든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권력, 즉 힘이다.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힘은 칼에서 나온다. 따라서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칼이다.

칼엔 반드시 피가 묻게 마련이다. 피묻은 칼을 들고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침묵은 최고의 덕이다-피론

피론주의자들의 관점은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사고를 낳는다. 이는 '침묵만이 현명한 사람이 간직해야 할 최고의 덕'이라는 명제로 이어진다.

피론은 이러한 사상의 창시자답게 결코 어떠한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침묵이 회의론자의 진정한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그리스의 모세다-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의 사상적 모체는 역시 플라톤이었다. 그의 플라톤주의는 철저했고, 다분히 종교적 경향을 띠었다. 플로티노스는 단순히 플라톤의 철학을 강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생활규범으로 삼아 생활했다.

'플라톤은 그리스의 모세다'



4.중세의 그리스도교 철학자들

진리는 신에게서 단 한 걸음도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아우구스티누스

유한한 인간이 밝혀낼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신이 아니지. 유한한 존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존재뿐이기 때문이지.

진리는 영원히 진리로 남아야 하기에 유한한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지, 그리고 유한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존재, 그것은 오직 신뿐이야. 따라서 신이 곧 진리다. 진리는 신에게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지.



머릿속에 신이 있다면 현실 속에도 신은 있다-안셀무스

우리가 머릿속에서 신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현실 세계 속에 신의 원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현실 속에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셀무스는 사고와 존재는 일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모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이성으로 신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끌어들였다. 즉 이데아를 그리스도교의 신으로 대체시킨 것이다.

화가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은 아직 실재하는 그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지 실재 그림이 될 수 있다.


신 외에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이론을 통해 신을 증명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이용해 신을 증명했다.

우리가 태양만 바라보고 사물들 자체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세계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플라톤 학도들처럼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만 인정한다면 결코 지식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참된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인식이 필수적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존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다.


신은 신앙의 대상이지 결코 이성의 대상이 아니다-오컴

신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이성으로는 도저히 신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절대로 신의 의지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이성과 신의 의지가 별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이성이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까? 인간의 이성이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파악할 수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인간의 이성을 신이 지배하고, 또 인간이 그 이성에 따라 행동한다면 결과적으로 신이 인간의 이성에 한정되는 꼴이 되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신의 의지는 자유롭고, 그 때문에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는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이성은 별개의 관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개개인은 모두 영혼을 통해 자신에게 전해지는 신의 의지를 알아낼 수 있는데,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의말 중에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는 단지 소크라테스로만 설명되어질 수 있을 뿐이지 소크라테스를 보편적인 인간으로 확대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절대적인 보편 타당한 진리관, 규칙,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과학 시대의 철학자들

신은 철학 바깥에 존재한다-베이컨

신은 철학의 문제가 아닐세. 신은 철학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철학의 대상은 인간과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에 한정 되어야 한다는 뜻이야. 알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있지도 않은 돈으로 집을 사겠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지.

나는 다만 신을 숭배하고 찬미할 뿐, 결코 신을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네.

인간은 자연의 하인이요, 해석자에 불과하므로 자연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만약 관찰하지 않고 자연을 이해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또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존재하면, 신도 반드시 존재한다-데카르트

우선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들인지 의심해보십시오. 가령 돌, 나무, 새, 하늘, 땅, 바다 등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눈의 착각 때문에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나 자신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사물들과 나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나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과, 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함으로 신도 생각함을 알 수 있고, 내가 존재함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존재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불완전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데카르트가 '생각한다'로 자신의 '존재한다'를 입증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존재로서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 신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유한한 존재는 반드시 무한한 존재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명제를 먼저 세운다.

이 세계는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존재로 이뤄져 있다.

어떤 존재든지 반드시 다른 존재에 의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한자에서 무한자가 나올 수 없으므로 무한자에서 유한자가 나와야 한다.

물체가 없는 곳에는 철학도 없다-홉스

도덕이란 인간의 행위 중에 불쾌감을 없애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로,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이익에 바탕을 둔 공공의 이익을 향해 있는 것이지요.

사고작용이 뇌의 운동 결과라면, 사고 이전에 뇌라는 물질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물질이 사고작용에 앞선다'는 명제를 이끌어낸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사고작용는 새로운 것도 아니며, 또 새로운 사실도 밝혀낼 수 없게 된다.

홉스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의 모순을 지적한 다음 철저한 유물론적 논리를 전개시킨다.

홉스에게 독자적인 실체로서의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이란 단지 물체의 운동 결과일 뿐이다.

그에게 인간은 하나의 물체이며, 오성과 이성은 그 물체의 감각적인 소산이다. 또한 인간의 행위는 감각의 자극과 반작용의 힘에 의한 작용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한정된 존재다. 물체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어떤 부분이 전혀 없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그것은 곧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없으나 단지 뇌가 좀더 발달한 존재일 뿐이라는 뜻이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기계적인 장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종교도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치닫는다.


모든 물질 속에 신이 깃들어 있다-스피노자

신이 남성적인 존래라면 신은 여성처럼 생산을 하지도 못할 것이고, 또 신에게 인격이 있다면 신도 보고, 듣고, 관찰하고, 의욕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은 신이 인간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말과 같은데, 한정된 존재를 어떻게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신은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고, 어떤 것이든 움직일 수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저는 신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신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그리고 땅 위에 있는 모든 물질 속에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관념의 뿌리다-로크

장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색깔을 알 수 없어

즉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관념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지. 비록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경험을 바탕으로 생긴 관념의 변형이거나 복합일 뿐이지.

경험 외에 그 어떤 것도 관념을 가져다줄 수 없다.

실체를 거부하는 것은 선척전인 인식능력에 대한 거부다. 인식은 관념의 소산이므로 경험이 없는 인식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로크는 사회와 국각가 해야 할 일은 개인의 행복을 최대한으로 지켜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이유에서 가부장적 사회와 절대적인 국가도 거부한다.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라는, 같은 견해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홉스는 그것을 위해 무소불위의 힘이 있는 절대국가를 설정하고 있는 것에 비해 로크는 개인의 권리와 인격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각가 최소한의 권력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실체는 단자다-라이프니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쪼개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론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말 것이네. 나는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자연의 참된 원자를 '단자'라고 이름 붙였네. 말하자면 단자는 만물의 '근원적인 힘'이자 근원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네.

하지만 단자는 결코 물질이 아닐세. 우리가 데카르트에게서 배웠듯이 영원한 질료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즉 물질은 만물의 실체가 될 수 없는 까닭일세. 따라서 단자는 영혼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네.

영혼이 없어지지 않듯이 단자는 결코 소멸하거나 변하지 않는다네. 왜냐하면 단자는 가장 단순한 것이기에 더 이상 나눠질 수 없기 때문이지. 마찬가지로 단자는 다른 것들의 합성을 통해 이뤄질 수도 없다네. 단자는 외부로부터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단일한 것이란 뜻일세.


형이상학은 학문이 아니다-흄

형이상학이라 함은 물질 세계와 다른 관념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인데, 사실 물질 세계아 없는 관념의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관념은 본래 감각에서 오는 까닭이지요, 만약 우리의 몸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관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이 없이는 관념이 결코 있을 수 없듯이 물질 세계가 없는 관념이란 생길 수도 없는 것이지요.

경험의 과정에서 감각기관에 하나의 인상이 찍혀지면 그것이 감각기관을 통해 다시 재생되는데, 그 내용을 관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념은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연합하고, 그러한 연합이 우리에게 복잡한 관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진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진리를 형이상학이나 신의 세계에서 찾지 않을 뿐이지요. 오히려 모든 것을 감각에 의존할 때 학문과 진리는 훨씬 분명해집니다.

그는 결과가 원인으로부터 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결과는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비롯되지 않고, 또 특정한 원인은 반드시 특정한 결과만을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흄은, 결과는 개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과를 개연성으로 몰고 가는 것은 곧 원인이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결과를 낳고, 경험을 통해서만 그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시키기 위함이다.


6.독일의 관념철학자들

코레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하라-칸트

관념은 경험과 감각기관의 선천적인 정리체계의 합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이 생기는 과정에서 이처럼 경험 외에도 선천적인 요소의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감각 세계가 단순히 물질들의 합성상태가 아니라 어떤 원리와 양식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리와 양식은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다. 그것은 경험 이전에 감각 세계에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선험적인 체계'라고 이름 붙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항상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연이라는 대상을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이 선험적인 체계를 통하여 인간과 교감을 이룰 수 있다면 꼭 인간이 주체가 되고 자연은 대상이 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자연이 인간의 감각체계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경험의 주체가 인간에서 자연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별들이 코페르니쿠스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별들의 주위를 돌게 됨으로써 천체의 원리가 파악된 경우와 동일하다.

나는 이것을 '코페르시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세계는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다-피히테

'나'는 '나'다.

우리는 '나'에 대한 정립을 위해 가장 먼저 '나는 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 즉 '나로서의 나'를 체험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나는 동일률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동일률을 통해 '나는 나다' 그리고 '나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파악한 후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나' 속에는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다.

'나'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나 아닌 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 '나'는 '나 아닌 것'과 구별될 때 '나'로 인정될 수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도 이 같은 공존은 있다. 이것은 마치 오른쪽이 있으면 반드시 왼쪽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이것을 모순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 속에 '나 아닌 것'들이 가득하다는 뜻인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렇다면 '나' 속에 '나 아닌 것' 들은 '나'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이뤄진 나는 '전체적인 나'다.

진정한 '나'는 바로 '전체적인 나'다. 이것은 '나'의 원초적인 의식과 타자, 즉 자연과 다른 사람의 의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이 '전체적인 나'로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자연과 타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나의 의식 속에 세계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인간이 세계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말인 것이다.


세계가 없으면 신도 없다-셸링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자연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연 속에 생명체들의 현상들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생명은 반드시 영혼과 함께한다. 따라서 자연은 무한한 생명과 영혼으로 이뤄져 있다.

생명과 영혼 뒤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바로 정신이다. 이 자연의 정신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 역시 자연정신의 일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정신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신에게서 왔다. 말하자면 자연의 정신은 곧 신의 정신이다. 따라서 인간과 신은 자연 속에서 하나다. 그 하나됨이 곧 신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세계가 사라진다면 신도 사라지고 인간도 사리질 것이다.

자연이 없는 곳에는 신도 나도 없다! 그러나 자연이 내 앞에 주어지면 나는 신과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우주는 곧 절대정신이요, 신이다-헤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그렇다면 태초의 로고스는 어디로 갔는가?

창세기에 따르면 로고스는 빛을 만들고, 별과 땅을 만들고, 모든 생물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로고스는 빛과 우주 그리고 모든 생물과 인간의 모습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로고스가 우주의 모습으로 전개된 과정은 마치 씨앗이 나무로 성장하여 다시 씨앗을 배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로고스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로고스는 영원하다는 것이네. 이 말은 곧 로고스가 결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네. 로고스는 물질이 아니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 바로 정신이라는 말이지.

우주는 하나의 유기체이며, 절대정신 자체이고, 신이다.


7.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철학자들

생존은 고통이다-소펜하우어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홉스가 말했던 것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부각시키고 알리기 위해 매일같이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으려는 노력과 그런 일상의 반복에서 시작된 지루함을 벗어 던지기 위해 우리는 단 한순가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헤겔이 지껄이듯이 완전하고, 위대한 세계정신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말 낙천적이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고통입니다. 생존은 가장 잔인한 고문인 셈이죠. 항상 서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항상 주장만 앞세울 뿐 증명하지 않는다. 증명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 행동은 많은 사람에게 독단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은 전체에 앞선다-키에르케고르

마침내 나는 그녀와 약혼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다.
나는 그녀와 파혼해야 했다. 결혼이라는 족쇄로 그녀의 자유를 구속할 수는 없다. 어떤 관습으로도 개인의 자유가 구속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헤겔을 신봉하는 자들은 개인보다 전체가 중요하고, 자유보다 관습이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헤겔을 신뢰하지 않는다.
헤겔의 말대로라면 '나'는 없다. 자아도 없다. 개인이란 도대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다. 그는 '나'를 전체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계기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가 없는 세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없는 전체가 있을 수 있는가? '나'의 활동과 생각, 믿음이 없다면 도대체 전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와 전체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나'를 택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타고난 성질이다. 따라서 '나'의 행위는 고유하고, '나'의 자유는 고귀하다.
'나'가 현실 속에 살아 있는 그 자체, 즉 실존, 실존하고 있는 개인이 전체를 이룬다. 때문에 실존이 언제나 형식에 앞서고, '나'는 언제나 전체에 앞선다. 문제는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다. 실존 없이는 본질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마르크스

헤겔은 우리에게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세계정신 또는 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나는 단언하건데, 역사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나무 없는 열매가 존재할 수 없듯이 현실 없는 정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철학을 물구나무 세워야 합니다. 사유의 출발을 신에게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이란 곧 인간의 현실입니다. 인간의 뿌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철학은 반드시 휴머니즘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철학의 주제는 '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우선 사회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이미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공동의 노동을 통해 형성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노동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노동의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원래 경제적 존재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경제적 관계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토대입니다. 그 토대 위에 국가, 법률, 이념, 도덕, 예술, 종교 등의 부수적인 것들, 즉 상부구조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인간성 상실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사회를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회를 전복시키는 목적은 인간을 인간으로 되돌려놓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굴복당하고 노예로 전락하여 멸시받는 모든 관례를 뒤엎지 않고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니체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서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니체의 글들은 상징과 예언으로 가득하다. 그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더 이상 논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신은 죽었으므로 '참인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 의무는 없어지고 의지만 남게 된 것이다.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의식을 벗어던져버리고, '나는 뭔가를 하고자 한다'는 자유의지를 취하고 있다.

모든 것이 거부되는 현실, 이것이 곧 그의 허무의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무주의는 초인을 통하여 극복된다. 그렇다면 초인은 어떤 자인가? 그것은 대지의 참뜻을 아는 자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존재다.

그는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여 있는 밧줄이다. 하나의 심연을 건너가는 밧줄이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인간은 언제든지 짐승도, 초인도 될 수 있다. 초인에게로 안내하는 길잡이는 정신이다. 따라서 정신의 변화가 곧 초인을 인식하게 하는 근본이다.

8.현대철학자들

생명은 곧 신이다-베르그송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 산 채로 이렇게 숨쉬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껏 우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우리 바깥에서 우리의 근거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제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과 물질, 지식적인 논리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현실적인 사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부단히 살아 꿈틀거리는 이 생명이 모든 현상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기계론에는 지성은 있으나 삶은 없습니다. 또한 관념론에는 논리는 있으나 생명은 없고, 인식은 있으나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가 없는 인식은 강물에 떠다니는 부유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은 앎에 앞서고, 의식은 인식에 앞선다'는 분명한 명제를 세웠습니다.
존재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존재는 '생명의 약동'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고는 생명의 현상일 뿐입니다. 또한 사고에서 출발하는 논리와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지성 역시 생명의 부대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철학의 목적은 생명에 도달하는 것이며, 인간의 의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자체로 돌아가라-후설

이 세계는 항상 나의 손 앞에 '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항상 이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또한 이 세계는 단순히 나의 사상적 세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세계와 복리의 세계, 실천적 세계로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직관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멸함으로써 직관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학문의 영역에서, 경험에서 비롯된 주관을 걷어내려 했다. 순수 현상만 인정함으로써 명확하고 객관적인 현실만 받아들이자는 논리였다. 즉 모든 철학의 영역에서 '사실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객관과 본질로서의 전환'이며, 곧 현상학의 과제다.
사실 그 자체로 돌아가라!
이것은 현상학의 구호였다. 다시 말해 아무런 선입관도 없이 사물들 자체가 표현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사물들 자체의 표현, 즉 본질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은 직관이다. 본질에 이를 수 있는 이 직관을 그는 본질직관이라고 했다.

철학은 사회적 투쟁을 처리하는 도구다-듀이

듀이 철학의 출발은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철학의 가치는 단순히 주어진 대상을 파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용성에 있다는 실용주의 구호에다 생물학적 진화 원리를 응용했던 것이다.
철학이 현실과 무관하게 과거의 진리에만 집착해 있다면, 또 철학이 인간 생활과는 거리가 먼 신의 문제에만 집착해 있다면 그 철학은 쓸모 없는 철학이다.
법적, 상업적, 도덕적 문제 때문에 벌어지는 싸움을 해결해주고 더 나은 방형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철학은 무익한 철학이다. 철학은 오직 사회문제르르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때 진정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생물의 육체가 실용적인 이유로 진화해온 것처럼 철학도 살아남기 위해 무한히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철학은 언어의 비판이다-비트겐슈타인

세계는 사실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그린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실은 하나의 그림인 셈이다. 그런데 그림은 묘사하고자 하는 모습과 더불어 논리적이고 표상적인 형식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실들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인 그림은 하나의 생각이다.
하나의 생각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명제다. 또한 명제들의 총화는 언어이므로 모든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비판'이다.
과학적인 물음들에 대한 모든 대답을 했다손 치더라도 인생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물론 아무런 물음도 남아 있지 않다면 이것이 바로 그 대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그 문제의 소멸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어로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 드러나는 신비로운 것들이다. 철학의 올바른 태도는 이 같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명제 외의 것들은 철학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이성과 실존은 불가분의 관계다-야스퍼스

포괄자의 모든 양식 안에서 마주치게 되는 우리 존재의 커다란 양극은 이성과 실존이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한 쪽이 없어지면 다른 쪽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실존은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명료해지고, 이성은 실존을 통해서만 내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는 개별성은 실존으로 대표되고, 보편성은 이성으로 대표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실존과 이성에 대한 설명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을 지닌 실존이 진짜 실존이며, 실존에 근거한 이성이 진짜 이성이다. 말하자면 이성과 실존은 함께할 때만 진정한 존재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야스퍼스는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신앙을 찾아냈고, 니체에게서 허무주의를 찾아냈다. 그리고 신앙과 허무주의를 종합하여 자신의 실존주의를 엮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언어라는 집에서 인간은 거주한다. 사색하는 철학자와 시를 짓는 시인은 이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발언을 통해 존재의 모습이 언어로 나타나고, 또 언어 속에서 존재의 모습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고 존재론자라고 못박았다. 그것은 자신의 철학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실존이 아니라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언어는 말하는 순간 스스로한테서 떨어져나간다. 그때부터 언어는 독자적인 영역과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서 이탈해간 언어 속에 존재가 있다고 주장한다.
존재의 본질과 합쳐진 무의 경지가 바로 언어다. 언어만이 유일하게 인간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본재의 본질과 관계하도록 하는 것이 사유다. 하지만 사유는 결코 관계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또한 사유로 하여금 관계를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은 언어뿐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의 본질은 자유다-사르트르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는 말과 같다. 또한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다. 살아 있다면 어떻게 살아 있는가? 제각기 자기 생명울 통해 개체로, 즉 '나'로 살아 있다. 이렇게 '나'로 살아 있는 인간을 '실존'이라고 부르자.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실존적 인간의 특성은 아까도 말했듯이 살아숨쉬면서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살아숨쉬지 않으면 실존한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끝없이 행동하는 인간에겐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다시 말해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동을 제약받는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실존적인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완전한 실존으로 남으려면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곧 자유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즉 실존적인 인간은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인간인 것이다.

베렐레(berelehof)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