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사법주권의 탈환, 이것이 국민주권 개헌이다

[국민주권 개헌] ② 지역 경찰서장·검찰청장·원장 등 주권자들이 선거로 뽑아야
빼앗긴 사법주권의 탈환, 이것이 국민주권 개헌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 말은 대한민국의 권력자는 오직 국민밖에 없다는 얘기다. 재산이 있든 없든, 잘났든 못났든, 노숙자건 쪽방 수급자건 우리 모두는 n분의 1의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권력자다. 통치자이자 동시에 피통치자인 국민은 통치와 피통치의 교체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갈등과 이견을 조정하고 권력의 집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에서 국민 이외에 제왕과 같은 권력자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선거를 통해 국민이 권력을 위임한 위임 권력자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위임 권력자는 헌법 제7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4년 또는 5년마다 국민으로부터 임명되거나 해고되는 봉사자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민주주의의 당연한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재건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현실 정치 체제는 이중 권력의 대치 상태를 계속해 왔다.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 체제를 이룩하고자 하는 인민의 광장 정치세력과 그리고 헌법 제3장 40조 이하 대의제 조항을 근거로 현실에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과두정, 독재 참주정이었던 대의제 극장 정치 세력 간 대립이 그것이다. 그렇다. 민주주의의 밝은 광장 정치와 대의제의 음습한 권력투쟁 극장 정치가 벌이고 있는 투쟁은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엄연한 현실이다. 

▲ <시대의 불침번>(정경모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38도선 이남의 정부는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일본 제국주의 대신 들어선 군사 정부로서 대한민국 정부의 재건을 집행하고 제헌 헌법 제정을 주도한 실제 권력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은 1945년 9월 미군의 조선 점령 초기부터 조선 인민을 자치 능력이 없다고 철저하게 경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참고 : <시대의 불침번>(정경모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인민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빨갱이 용어라고 거부감을 보이거나 겁이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같은 거부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되찾아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다. 인민이란 말은 대한민국 헌법 초안에서도 사용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이승만조차 대통령 공식 담화문에서 버젓이 썼던 말이었다.(☞ 참고 : 2014년 8월 <프레시안> '더 늦기 전에 한 발짝 행동으로, '동무' 만만세!'))   

36년 동안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착취에서 시달리던 조선 인민에게 미군은 처음에는 나라를 되찾아 준 은인이자 해방자였다. 당시 조선 인민에게 꿈에도 그리던 자주적 민족국가의 건설은 바로 눈앞에 닥친 지상과제였다. 

그러나 해방자 미국이 일제 대신 들어선 점령자이자 억압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친일파를 부활시킨 미군정의 행태는 조선 인민들에게는 19세기 후반 수백 년간 조선과 오랜 조공관계를 맺고 있던 청을 몰아내고 일제가 침략해 왔던 역사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미군의 눈에는 해방이 되자마자 일제 권력이 물러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조선 인민들이 친일파를 제외하고 좌우합작으로 스스로 조직한 자치 기구 '인민위원회'는 공산당이 장악한 조직으로 위험했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에 진주하자마자 일제의 친일부역 조선인 경찰과 관료들을 대거 다시 미군정 경찰과 관료로 재기용했다. 그리고는 1945년 12월 12일 곧바로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자치능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강하게 추진했다. 조선 인민의 자존심과 열망을 철저하게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이 제안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을 친일파 언론과 관료들은 완전히 거꾸로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백팔십도 왜곡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거센 반탁운동을 통해 자신들이 마치 민족주의 세력인 것처럼 포장해 친일 매국 전력을 세탁하는 데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었다. 

1948년 헌법 제정 당시부터 대한민국 국민이 사법주권을 빼앗긴 불구의 주권자 신세가 된 것은 이처럼 조선을 친일파의 나라에서 친미파의 나라로 바꾸고자 했던 미국의 한반도 지배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국의 사법권은 하다못해 미국의 군(county) 단위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선거를 통한 인민의 위임 절차도 거치지 않는다. 그저 법전만 달달달 외우고 사법시험과 경찰 시험을 통과한 공무원들이 대통령과 대법원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나면 그 순간부터 무소불위의 사법 권력을 움켜쥘 수 있다.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은 이들 검사, 판사, 경찰이 갖고 있다. 오늘날 현실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법공화국이다. 하도 오랫동안 사법주권을 행사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사법주권을 강탈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국민이 태반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명백히 헌법을 유린한 범죄자들의 구속영장을 인민의 머슴인 일개 판사가 서슴없이 기각하는 기가 막힐 일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인민이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고, 헌법 파괴자들에 대한 단죄도 아예 할 수 없다. 찬탈한 사법주권으로 구체제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려는 보수반동의 현실, 이것이야말로 청산해야 할 적폐 중의 적폐다. 

삼권 분립 원칙에도 명백히 어긋나는 현행 사법부 수장의 대통령 임명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를 주요 골자로 3차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 3차 개정안 제78조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서 조직되는 선거인단이 이를 선거하고 대통령이 확인한다"라고 사법부 법관들이 대법원장을 간선으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권자인 인민들이 대법원장과 대법관, 판사들을 직선으로 임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러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을 폐기했다는 점에서는 일대 개혁 조처였다. 이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 선거가 1961년 5월 17일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루 전날인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으로 헌법 자체를 중지시켰기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모든 공무원과 국가기관은 자신에 대한 임면권을 가진 사람의 눈치를 보고 말을 듣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민이 공무원의 인사권을 대통령과 자치단체장에게 위임하는 순간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대통령과 자치단체장에게 충성하는 주구(走狗, 사냥개)가 된다.

사법권 일부를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순간 경찰과 검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때려잡는 몽둥이가 된다. 자신에 대한 인사권이 국민과 지역 주민에게 있지 않고 대통령에게 있는데, 공무원과 경찰과 검찰이 국민에게 봉사하고 잘 보여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직 인사권자의 지시 명령에 따라 충성하고 잘 보이면 된다. 

국민이 사법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재판의 주인으로서 유무죄를 결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봉사자인 법관은 국민 배심원단을 도와주는 사법 도우미일 뿐이다. 사법 도우미는 인민의 심부름꾼, 비서, 서기로서 그들의 인사권은 당연히 인민이 갖고 있어야 한다. 공무원을 채용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력은 인민의 핵심 주권 가운데 하나이다. 사법주권 행사의 두 번째는 적어도 지역의 경찰과 검찰, 법원의 장부터라도 주권자가 선거를 통해 선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국민주권 개헌이다. 

1973년 10월 19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는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을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다가 죽였다. 중정이 멀쩡한 국민을 간첩으로 만들어 죽인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1975년 4월 9일 대법원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바로 죽였다.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대한민국 법원의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이다. 2015년 10월 15일 대한민국 경찰은 시위를 하던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를 쏘아 죽였다. 경찰과 검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국민들의 수 또한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억울한 죽음을 없애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국민주권 개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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