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작스러운 공안정국 뒤에 김기춘 비서실장 그림자?
유신 시절부터 대공수사 진두지휘… 이번에도 모종의 역할 가능성경향신문안홍욱 기자입력2013.08.30 22:41수정2013.08.31 02:06
지난 5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74·사진)이 임명된 날, 민주당의 첫 반응은 "공안정치의 신호탄이 아닌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섬뜩한 공안정국 조성용 인사"라고 했다. 민주당의 우려가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국가정보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해 본격 수사에 나서면서 여야 대치정국은 삽시간에 공안정국으로 바뀌었다. 내란음모죄 적용은 33년 만이다.
국정원의 특성상 사건의 내사 과정과 수사 내용, 공개수사 착수 시점을 청와대에 보고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절차다. 이정현 홍보수석도 국정원 압수수색에 대해 "내용의 엄중함으로 봤을 때 대통령이 보고받지 않았겠나 싶다"고 했다. 그래서 김 실장이 주목받고 있다. 1970~1980년대 대형 공안정국을 주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미스터 법질서' 외에도 '공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검사 출신인 그는 유신 시절인 1974년 9월부터 1979년까지 중앙정보부 5국장(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숱한 공안수사를 이끌었다. 재야 지도급 인사들을 대거 구속한 1976년 3·1 명동 구국선언 등이 그 때 일어났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과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률보좌관으로 있을 때였다.
노태우 정권 임기 첫해인 1988년 12월 검찰총장으로 발탁됐다. 취임 석 달 뒤인 1989년 3월25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고문인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됐다. 현대중공업·서울지하철 등 강성 노조의 파업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며 정권에 부담이 되던 상황이었다. 그는 안기부, 검찰, 경찰, 보안사 등이 망라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사실상 총지휘했다. 공안합수부가 구성된 지 두 달여 동안 이재오·이부영·이창복 등 전민련 간부와 리영희 한양대 교수 등 300여명이 구속됐다.
같은 해 6월 '서경원 밀입북 사건'으로 또 한 번 정국을 흔들었다. 검찰은 8월 평화민주당 서경원 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서 의원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5만달러를 받아 1만달러를 제공했다는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김 총재를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등으로 불구속 기소했지만 돈이 전달됐음을 입증하지 못했다. 당시 대학생 강경대군 폭행치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여권은 민심수습 차원에서 1991년 5월 김 총재에 대해 공소 취소하며 정국을 진정시켰다.
정권이 고비에 몰릴 때마다 기획성 공안수사로 국면을 전환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5월 법무장관에 임명됐다. 장관 취임 후엔 당시 잇따르던 시민·대학생들의 분신 투쟁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내세워 정국의 흐름을 수세에서 공세로 반전시켰다. 법무장관 퇴임 두 달 뒤인 1992년 12월에는 14대 대선 사흘 전 당시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돕기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기로 모의한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그가 여권의 '헤드쿼터'인 청와대 비서실장에 취임한 지 23일 만에 진보당 사건이 터져나왔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긴 어렵다는 게 야권의 시각이다.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30일 "김 실장은 노태우 정권이 권력을 잡자마자 공안정국을 조성할 때 검찰총장, 법무장관에 앉힌 사람"이라며 "박 대통령도 김 실장을 데려다 쓰면서 국민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왕실장'으로 불리는 그가 이번 공안정국 조성에도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 안홍욱 기자 ahn@kyunghyang.com >
국가정보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해 본격 수사에 나서면서 여야 대치정국은 삽시간에 공안정국으로 바뀌었다. 내란음모죄 적용은 33년 만이다.
국정원의 특성상 사건의 내사 과정과 수사 내용, 공개수사 착수 시점을 청와대에 보고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절차다. 이정현 홍보수석도 국정원 압수수색에 대해 "내용의 엄중함으로 봤을 때 대통령이 보고받지 않았겠나 싶다"고 했다. 그래서 김 실장이 주목받고 있다. 1970~1980년대 대형 공안정국을 주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미스터 법질서' 외에도 '공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노태우 정권 임기 첫해인 1988년 12월 검찰총장으로 발탁됐다. 취임 석 달 뒤인 1989년 3월25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고문인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됐다. 현대중공업·서울지하철 등 강성 노조의 파업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며 정권에 부담이 되던 상황이었다. 그는 안기부, 검찰, 경찰, 보안사 등이 망라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사실상 총지휘했다. 공안합수부가 구성된 지 두 달여 동안 이재오·이부영·이창복 등 전민련 간부와 리영희 한양대 교수 등 300여명이 구속됐다.
같은 해 6월 '서경원 밀입북 사건'으로 또 한 번 정국을 흔들었다. 검찰은 8월 평화민주당 서경원 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서 의원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5만달러를 받아 1만달러를 제공했다는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김 총재를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등으로 불구속 기소했지만 돈이 전달됐음을 입증하지 못했다. 당시 대학생 강경대군 폭행치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여권은 민심수습 차원에서 1991년 5월 김 총재에 대해 공소 취소하며 정국을 진정시켰다.
정권이 고비에 몰릴 때마다 기획성 공안수사로 국면을 전환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5월 법무장관에 임명됐다. 장관 취임 후엔 당시 잇따르던 시민·대학생들의 분신 투쟁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내세워 정국의 흐름을 수세에서 공세로 반전시켰다. 법무장관 퇴임 두 달 뒤인 1992년 12월에는 14대 대선 사흘 전 당시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돕기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기로 모의한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그가 여권의 '헤드쿼터'인 청와대 비서실장에 취임한 지 23일 만에 진보당 사건이 터져나왔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긴 어렵다는 게 야권의 시각이다.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30일 "김 실장은 노태우 정권이 권력을 잡자마자 공안정국을 조성할 때 검찰총장, 법무장관에 앉힌 사람"이라며 "박 대통령도 김 실장을 데려다 쓰면서 국민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왕실장'으로 불리는 그가 이번 공안정국 조성에도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 안홍욱 기자 ahn@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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