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군
2008. 5. 19. 07:20
2008. 5. 19. 07:20
- [특집 | 조찬모임 열풍] 나이·직위 초월한‘새벽 지식충전소’
- 한 달에 한 번, 평일 오전 9시 즈음이면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입구에선 진풍경이 연출된다. 고급 승용차, 특히 검정색 세단이 꼬리를 물고 늘어선다. 가히 ‘검정 세단의 물결’이라 할 만하다. 이 ‘때 아닌 교통정체’의 원인은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주최하는 ‘SERICEO 조찬세미나’다. 기업인과 정치인, 정부 관료 등으로 구성된 참가자 수가 평균 800명이 넘는다. 지난달 25일 열린 4월 조찬세미나에서도 840명이나 참석했다.
조찬(朝餐). ‘손님을 초대해 함께 먹는 아침식사’란 뜻이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 말의 정의는 사뭇 다르다. ‘식사’보다는 ‘(아침시간을 활용해) 공부하고 교류하는 모임’에 무게가 실린다. 일과 중 별도의 짬을 내기 어려울 만큼 바쁜 이들을 위한 일종의 ‘지식 충전소’다.
일부 CEO와 정ㆍ관계 인사로 한정됐던 조찬시장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가입 요건이 까다로워 일반인에겐 한없이 높게 느껴졌던 장벽이 허물어진 것은 물론, 중ㆍ장년 남성이 대부분이었던 참가자 구성도 ‘젊은층과 여성 증가’로 바뀌는 추세다. 여기에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적인 ‘얼리버드족(early birdㆍ‘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문다’는 속담에서 유래, 아침 일찍 일어나 남보다 먼저 하루를 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 때문인지 조찬시장은 한층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2008년 봄, 대한민국 곳곳을 휩쓸고 있는 ‘조찬 열풍’의 현장을 취재했다.
- ▲ 지난 4월 25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SERICEO 조찬세미나에 840여명이 참석,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지난 4월 23일 오전 7시 서울 리츠칼튼호텔 볼룸 A3. 이른 아침인데도 실내는 400여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행사 시작을 20여분 남긴 시각이었지만 테이블은 뒷좌석 몇 개를 빼곤 이미 꽉 찼다. 한국능률협회가 기업 임원과 부서장급을 대상으로 마련한 21C리더스모닝포럼 4월 조찬세미나 현장 풍경이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는 조미진 LG디스플레이 상무. 강의 주제는 ‘효과적인 기업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얼마나 인기인가
규모 작은 모임은 몇 달 전에 예약해야
요즘 서울 시내 주요 호텔에선 거의 매일 아침 이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날짜와 호텔 이름, 주최 측과 강사진만 바뀔 뿐 거의 동일한 형태의 조찬모임이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있다. 호텔은 한정돼 있고 모임 수는 많다 보니 예약 전쟁도 치열하다. 규모가 작은 모임의 경우 몇 개월 전부터 예약을 해야 겨우 장소를 구할 수 있고, 역사가 오래거나 참가자 수가 많은 조찬의 경우 아예 일정 주기에 따라 특정 호텔을 ‘전세’ 낸다. 삼성경제연구소의 SERICEO 조찬세미나와 메디치21은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 인간개발연구원의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는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휴넷CEO포럼은 웨스틴조선호텔 라일락룸 하는 식이다.
언제 시작됐나
35년 역사… 2002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불 붙여
예전에도 조찬모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우리나라 조찬모임의 역사는 35년쯤 된다. 시초는 1973년 첫 회를 개최한 한국능률협회의 최고경영자조찬회. 2년 뒤 비영리단체로는 처음으로 인간개발연구원이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라는 조찬모임을 개설했다. 이후 두 단체는 지속적으로 월 단위, 혹은 주 단위로 조찬모임을 가지며 지식과 정보를 교류해 왔다. 그러나 고령 경영인 중심으로 행사가 이어진 데다 새로운 후속 모델이 등장하지 않아 조찬시장은 한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조찬시장의 화려한 부활을 알린 것은 삼성경제연구소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2년 ‘SERICEO’라는 신 개념 지식 상품을 들고 나와 파란을 일으켰다. ‘CEO를 위한 상상력 발전소’를 표방한 SERICEO의 여러 서비스 중 SERICEO 조찬세미나는 단연 돋보였다. 명사 초청 특강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던 기존 조찬과 달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진이 오랜 기간 연구한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 브리핑하는 형식을 도입했고, ‘삼성’이라는 막강한 브랜드 파워까지 업으면서 순식간에 회원 수를 불려나갔다.
한때 침체기에 있었던 조찬시장도 되살아났다. 삼성경제연구소는 SERICEO 조찬세미나의 평균 참석자가 800여명에 이르는 등 큰 성공을 거두자 이에 고무돼 2005년 8월 인문학 분야에 특화시킨 또 하나의 조찬모임 ‘메디치21’을 출시했다. 새로운 조찬모임도 속속 생겨났다. 올해도 2월 초 이러닝 업체 휴넷이 ‘휴넷CEO포럼’이라는 서비스를 개시했고 4월엔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인을 대상으로 한 조찬모임을 시범 실시했다. 특히 올해는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로 유명한 이명박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이 화제에 오르며 조찬 열기가 일반인에게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 ▲ 작년 5월 인간개발연구원의 조찬모임에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강연하고 있다. photo 인간개발연구원
- 외국에서는
지식 중심 사회의 특징… 일본도 한때 열풍
전문가들은 “40년 가까이 이어져온 우리나라 조찬문화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유난함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SERICEO 조찬세미나와 메디치21을 구상한 강신장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그 원인을 한국인의 기질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적 배경에서 찾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국민처럼 하루를 바쁘게 쪼개 사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서구 열강이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룬 근대화, 산업화를 불과 몇 십 년 만에 따라잡아야 했으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제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하니 갈증이 생긴 겁니다. 선진국과는 다른 우리만의 문화가 있어야겠다는 일종의 강박이라고 할까요? 천성이 부지런한 한국인의 기질도 거기에 한몫했고요.”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를 만든 인간개발연구원 장만기 회장은 일본의 사례를 들며 “국가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조찬모임이 활성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조찬세미나를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일본에 출장 갔다 우연히 거기서 열린 조찬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행사 관계자에게 이런 모임이 얼마나 있느냐고 했더니 ‘일본 전역으로 따지면 오늘 아침에만 300만명쯤 조찬모임에 참석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일본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였거든요. 지금 우리나라도 빠른 속도로 지식중심사회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고무적인 현상이지요.”
올해 처음으로 중소기업인을 위한 조찬세미나를 기획, 4월 말 첫 번째 행사를 치른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요즘 부쩍 경영에 대한 중소기업 CEO들의 지적 욕구가 늘어나고 있다”라며 “사전 수요조사 결과 바쁜 오후 시간보다 일과에 방해 받지 않는 아침 시간을 선호한다는 의견이 많아 조찬모임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달라진 트렌드
강의 주제·강사진, 문화예술 분야로 확산
조찬시장이 몇 차례 부침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트렌드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강의 콘텐츠 폭의 확대다. 초창기 경제·경영 쪽에 집중됐던 강좌가 점차 인문학이나 문화예술 분야로 확산되고 있는 것. 강신장 상무는 이런 현상을 ‘경제가 일정 궤도에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예전엔 선진국을 따라잡고 베끼는 전략만으로도 대충 먹고살 수 있었지만 요즘은 스스로 ‘오리지널’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 경제가 성장했고, 그러기 위해선 경영인에게도 단순 지식을 넘어서는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하게 됐다는 해석이다. 결국 인문학은 상상력 빈곤에 허덕이는 요즘 기업인을 위한 일종의 ‘구원투수’ 역할로 등장한 셈이다.
콘텐츠가 바뀌면서 강사진의 면면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 단골 강사가 대기업 CEO, 대학교수, 정치인이었다면 요즘은 어느 한 부류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강사 풀(pool)이 다양해졌다. 지휘자 금난새씨나 소설가 김홍신씨 등 문화예술계 인사의 등장이 부쩍 늘어난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 조찬모임이 온라인 콘텐츠와 결합하면서 참가자의 연령대도 점차 낮아지고 있다. 요즘 조찬모임엔 30~40대 젊은 회사원이 눈에 띄는가 하면 여성 참가자 수도 제법 늘었다.
향후 과제
대부분 일회성… 소모임 통한 연구 계속돼야
많이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현재 개최되는 대부분의 조찬모임은 ‘간단한 아침식사+강연+질의응답’의 단조로운 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가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지식 습득’과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조찬모임의 양대 축 중 후자를 사실상 포기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인간개발연구원 김태균 부원장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조찬문화를 지녔지만 대부분의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버려 아쉽다”고 지적했다. “지식 재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조찬모임은 앞으로도 그 잠재력이 무궁무진합니다. 조찬이 끝난 후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소모임을 만들어 관련 연구를 계속하고 우수 강사진을 다른 분야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등 ‘세포 분열’의 노력이 더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최혜원 기자 happyend@chosun.com
이윤아 인턴기자·서울대 중어중문학과 4년
임혜진 인턴기자·서강대 철학과 2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