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6전 5127기

등록 : 2012.04.20 20:38수정 : 2012.04.20 20:38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로 100년 가까이 유지되던 진공청소기의 패러다임을 바꾼 발명가 제임스 다이슨. 엔지니어란 ‘실패를 통해 배우는 사람’이라고 믿는 그는 수천번의 실험 끝에 자신만의 청소기를 만들어냈다.

<계속해서 실패하라>제임스 다이슨 지음ㆍ박수찬 옮김/미래사ㆍ1만7000원
<계속해서 실패하라>제임스 다이슨 지음ㆍ박수찬 옮김/미래사ㆍ1만7000원

디자이너서 엔지니어 변신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
날개 없는 선풍기 혁신 이뤄
자양분 된 지독한 실패 고백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첫 번째 실패에서 다음 실패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윈스턴 처칠의 이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제임스 다이슨(64)일 것이다. 이름부터 토머스 에디슨(1847~1931)과 비슷한 다이슨은 자신보다 꼭 100년 전 태어났던 에디슨처럼 평생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성공을 일궈내 ‘영국의 스티브 잡스’가 됐다. 잡스가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던 것처럼 그는 자기 회사에서 쫓겨난 뒤 새 회사 ‘다이슨’을 차려 세계 전자업계를 뒤집어버렸다.

1990년대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를 들고 나왔을 때만 해도 다이슨은 유별난 발명가 경영자 정도로만 인식됐다. 하지만 2000년대 모터로 작은 바람을 만들어 주변 바람이 모이게 해 더 큰 바람을 일으키는 ‘날개가 없는 선풍기’를 선보이면서 다이슨은 진정한 혁신의 상징이 됐다. 공대를 나온 것도, 경영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던 다이슨은 제조업이 처절하게 몰락한 영국에서 가전업체를 차려 세계적 거대 기업들을 물리쳤고, 자기 발명품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문화적 지위를 갖는 디자인 아이콘으로 올려놓았다.

국내에 처음 출간된 그의 자서전 <계속해서 실패하라>는 그의 놀라운 성공담이 아니라 실로 지독한 실패담이다. 어떻게 실패에서 지혜를 얻어냈는지, 금융과 글로벌 기업들이 기업가 정신을 말살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제조업과 엔지니어의 존재 가치를 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지, 이상주의와 실용주의를 어떻게 균형잡아 혁신을 이뤄냈는지 그는 솔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털어놓는다.

배신 때문에 시작한 도전
평범한 영국 시골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반항적으로 성장기를 보낸 다이슨은 왕립예술학교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한 뒤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독특했던 점은 디자이너로 출발해 엔지니어가 된 것이었다.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는 불편을 참지 못했던 그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수륙양용 보트, 문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정원용 수레를 만들어 일찌감치 자기 가능성을 발휘했다.

그러다가 운명적 순간이 왔다. 1978년 낡은 진공청소기의 흡입력이 떨어져 짜증이 났던 다이슨은 청소기를 분해해봤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흡입력이 약해지는 것은 먼지봉투 안에 먼지가 가득 차서가 아니라, 빨아들인 공기를 내보내는 먼지봉투의 미세한 구멍을 먼지가 막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1900년대 초 이후 진공청소기는 이 방식에서 어떤 변화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즈음 친구의 배신으로 회사에서 쫓겨난 다이슨은 새로운 진공청소기를 사업 아이템으로 잡고 집을 담보로 빚을 끌어다 실험을 시작했다.

5127, 그 숫자 못잖았던 싸움
다이슨의 아이디어는 기존 진공청소기와 빨아들이는 방식은 같되, 원뿔형 장치 속에서 바람이 회오리치게 만들어 먼지만 원심력으로 걸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지봉투가 필요없었다. 앞서 신형 손수레를 만들 때 거래처 공장에 있던 청소장치를 눈여겨본 것이 회오리 구조의 해법을 제공했다.

주변 사람들은 냉담했다. “하지만 제임스, 그렇게 좋은 진공청소기가 있다면 후버(당시 세계 최대의 진공청소기 업체)에서 진작 내놓지 않았겠어?” 그리고 기나긴 실패가 이어졌다.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기까지 2000여번의 실패를 하고도 전구가 작동하지 않는 2000가지 방법을 찾았다고 했던 것처럼 그는 실패를 자양분으로 버텼다. 그리고 5127번째 시제품에서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했다.

애초 그는 특허를 팔아 기술료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세계적 가전기업들은 모두 코웃음치거나 헐값에 특허를 빼앗으려 했고, 심지어 기술을 베껴 유사품을 내놨다. 그 바람에 끔찍한 소송전이 5년 동안 이어졌다. 처음 청소기를 분해한 지 12년 만에야 그는 ‘다이슨’을 차려 가장 비싸고 가장 아름다운 청소기를 선보였고, 단숨에 진공청소기의 지존이 됐다.

다이슨의 회사 다이슨이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에 이어 세계를 놀라게 했던 혁신적 제품 ‘날개 없는 선풍기’.
너희가 공학과 디자인을 아느냐
그 자신이 공학과 디자인을 바탕으로 했기에 다이슨은 ‘진정한 물건’의 가치를 역설한다. 물건은 안 만들고 돈만 이리저리 옮기면서 이익을 내는 금융자본이, 단기 실적만 추구하는 경영자가 제조업을 몰락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공학과 디자인은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공학과 디자인은 장기적으로 회사를 되살리고, 더 나아가 국가를 되살리는 힘이다. 하지만 런던 금융가의 살찐 부자들, 은행들, 마거릿 대처 시대가 만든 괴물들이 당장 이익을 내라고 소리지르는 동안 영국 산업계는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대신, 더 많이 잘 파는 데 몰두해왔다. 그 결과, 지금 영국에선 광고가 모든 문제를 푸는 해결책이 돼 버렸다.”

어느새 20년을 맞은 다이슨 청소기는 업계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고 매출 규모도 조 단위로 커졌지만 여전히 엔지니어가 주도하는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다이슨 본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한다. “전기를 이용한 최초의 선풍기는 1882년 발명됐다. 날개를 이용한 그 방식은 127년간 변하지 않았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도판 미래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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