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복된다




꽃피는 봄이 왔다.

오늘은 2018년 4월 3일, 4.3사건 70주기다.





이렇게 예쁜 유채꽃이 마구 피어나던 그 때의 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꽃피는 봄만 오면 제주도민으로써 4.3을 꽃꽃하게 기억하려 애쓰는 노총각이다.



내가 겪지 않은 역사여도 공감되고 내 일처럼 아프다.

4.3을 폭동이라 부르는 세력이 있으면 내 일처럼 분노하고.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에서 작은 교통사고까지.

이 땅에 억울한 일이 없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한 때는 대통령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젠 그냥 평화가 꿈이다.


퇴근 후 집에와서 슬픈 노래 하나 틀어놓고 4.3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김윤아 야상곡)



요즘 주말마다 귤밭에서 일하느라 온몸이 쑤신다.


열심히 일했더니 엄마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랬다.

딸기우유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만들어주셨다.


"역시 맛있어"


설탕을 넣지 않아도 맛있었다.


요즘들어 왜 그렇게 딸기우유가 먹고 싶었던지.

오늘은 직접 만들어 먹기로하고 마트로 가던 길이었다.


횡단보도 신호 대기 중 대학생으로 보이는 예쁜 여학생 둘이 4.3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빨갱이 하나 잡으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게 말도 안되지"


이런 얘기였다.


'빨갱이 잡으려고 죄없는 도민들을 학살한 게 아니다' 라고 참견하고 싶었지만 용기 없는 노총각이라 패스.

빨갱이 색출 논리는 온전히 가해자 입장일뿐.


이명박 박근혜 시절이 시작되면서 젊은애들은 정치,사회문제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틀린 생각이었다.

시대가 바뀐다는 걸 느낀다. 바람직하다. 미래가 밝다.






마트에서 사온 빨간 딸기를 믹서기에 넣었다.

믹서기에 갈려지는 빨간 딸기를 보니 70년전 제주에는 얼마나 많은 빨간 피가 흙 위에 뿌려졌을지 또 생각해본다.








벚꽃 처럼 예쁜 분홍색으로 잘 갈린 딸기.

올해도 벚꽃은 상상으로 구경했다.








딸기우유 한 잔할 노처녀 빨리 구해야 할텐데..흠흠.


아무튼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설민석 강의에도 없는 이야기들 몇가지.


4.3 사건은 자세히 알면 알 수록 더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노처녀는 자세히 볼 수록 예쁘지만.






우선 빨갱이 논리는 완벽히 가해자 논리다.

범죄에도 비슷한 논리가 많다.


'술 먹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아니냐!'


뭐 이런 것 말이다. 음주범죄 후에!


그럼 빨갱이가 대체 뭐지?

그저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함에 방해가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세월호 촛볼 시위를 빨갱이 집단이라 칭하는 세력처럼 말이다.

한반도에 전쟁대신 평화를 원하는 마음을 빨갱이라 칭하는 집단처럼 말이다.


이런 집단이 4.3사건 가해자의 후예들이란 점도 기억해야할 현실이다.


아이들을 물론 임산부, 노인까지 닥치는대로 죽였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신생아에서 뱃 속의 태아까지.


갓 태어난 신생아가 빨갱이일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보나?

4.3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서북청년단은 유독 임산부와 아이를 더욱 잔인하게 죽였다.







위 사진은 젊은 남자 3명이 총살되기 직전 모습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저 남자들은 군인이라는 점이다.

군인이 군인을 죽여? 군인 중에도 빨갱이가 있었다는 건가?


당시 9연대 장병 100여 명이 군사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왜? 


제주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형된 군인들 대부분의 고향이 제주도였다.

출신만 보고 같은 빨갱이로 몰아서 죽여버린 것이다.

군인을 보내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여야하는데 제주도 출신 군인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미리 누명씌워 죽여버린 것이다.


위 사진 속에서 처형되는 남자들이 9연대 장병인지는 모르겠다.

짧은 머리 젊은 나이 등을 볼 때 맞는 거 같다.


이렇게 빨갱이 색출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낙인 찍는 수단이었을 뿐.

반대세력을 깔끔히 제거하기 위한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다.

히틀러도 이런 저열한 수단은 쓰지 않았다.


중세 유럽 종교전쟁, 마녀사냥 때도 이런 얘긴 없는 거 같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언론인도 총살되었다는 점이다.

제주도 유일의 지역 언론사였던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 등 책임자들이 다수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고한다.

제주도에 주재 기자를 두고 있던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총살되었다.


누구든 자신들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죽였을 뿐, 인가다움은 없었다.




* 주의 *
이제부터는 더욱 끔찍한 이야기다.
비위 약한 분은 대충 넘기셔도 좋다.


두개골에 크게 부서진 4.3 피해자 유골





역시 대부분 두개골이 부숴진 희생자들의 유골 모습이다.
(지금은 구속된 이명박이 대통령되면서 4.3 유해 발굴 사업이 전면 중단)
(4.3 뿐만 아니라 6.25 희생자 유해발굴도 마찬가지)

사진 속 유골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두개골에 큰 구멍이 났거나 박살난 상태다.

살인을 게임하듯이 즐기던 그때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사진 속 유골은 사후 훼손일 수도 있음)


'총으로 죽이면 멍청이'
'총으로 죽이면 너무 쉽고 재미도 없고 총알도 아깝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산채로 불태우는 등 살인 방법도 다양했다.
그 중심에는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그 사람이 아일 맡아가지고 애기를 돌에 내부쳐서 죽여버렸어. 

그러니깐 그 꼴을 보면서 이젠 나와가지고 어멍이(엄마가) 꼭 달라붙은 것 같애. 

그러니깐 어멍을 개머리판으로 부숴버린 것 닮아. 이 해골 박세기가 바싹 부숴져버렸어. 

거 내 추측인데. 애기는 순경이 내부쳐서 죽인 것 맞아. 

돌에. 세상에 애기를 돌에 내부쳐서 죽였던 거라, 글쎄, 일곱 달 된 애기라. 참 애기도 잘 났데. 

지금 살았시민 육십일 거여. 그 애기를 돌로 내부쳐서 죽여버렸어." 

<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40쪽)>

위는 신생아의 다리를 잡고 머리를 돌에 내리쳐 죽이고, 울부짖는 엄마의 머리를 총으로 바싹 부숴버렸다는 생존자 증언이다.

서귀포 시골 출신이라 어렸을 때 늘 산으로 밭으로 놀러다녔다.
그 당시 무덤가는 공포의 존재였는데.
낮에도 말이다.
특히 무서웠던 것이 바로 아기무덤이었다.

동네마다 아기무덤이 있었다.
보통 무덤보다 작은 봉문으로 만들어진 무덤이 여러개 같이 있는.
지금은 개발이다 흉물이다 뭐다 없애버린 것 같다.

애기들이 집단으로 죽어 묻혔다는 사실이 생각 없던 초딩시절인데도 어찌나 소름 돋았던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서북청년단은 아기엄마와 아기도 예외 없이, 아니 왜 더욱 잔인하게 죽였을까?
내가 횡단보도에서 4.3사건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여학생들을 보고 흐뭇함을 느꼈던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자신들의 죄를 뼈속깊이 기억하며 자랄 아이들이 무서웠을 테니까.


이승만을 등에 업은 서북청년단은 종교인에서 경찰이되어 제주도민들을 더욱 잔인하게 학살했다.
4.3사건이 끝난 뒤에는 요즘 청년들이 그렇게 꿈꾸는 군인, 경찰, 공무원, 정치인 등으로 이곳저곳 기용되었다.
촛불을 빨갱이라 부르는 지금의 기득권이 바로 그들의 후예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난동 부리는 집단이 바로 그들의 후예다.




서북청년단에게 살인은 그저 오락이었다.
죽음의 공포를 바탕으로 상상도 못할 짓을 벌였다.

손자와 할아버지에게 서로 뺨을 때리는 게임을 시키며 매우 즐거워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였다.

자식 앞에서 부모를 죽이고 자식들에게 박수를 치게 하고 껄껄댔다.
장모와 사위에게는 옷을 벗겨 성행위를 시키며 웃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일들이 아주 많았다.

<출처 불분명>

일제시대 학살 뺨치는 잔혹한 일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일본군도 혀를 내두를 끔찍한 일을 서북청년단이 자행했다.
서북청년단에게 살인은 목적이 아니고 그저 오락이었다.
현대의 IS도 혀를 내두를 살인쇼였다.





또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란 책에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자기혐오, 그리고 극단적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미군정의 내부 기밀 보고서에서 이 집단은 흔히 남한 전역에서 테러를 자행한 파시스트 청년단으로 묘사되었다. 단원들은 주로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출신이었고, '청년'은 10대부터 중년까지 고르게 분포한 악한들이었다.

(중략)

예를 들면 하귀리 마을에서는 남편이 반란자로 추정되는 스물한 살 된 임신부 문씨는 집에서 우익 청년단에게 끌려가 창으로 열세 번 찔려 유산했다. 

그리고 아이가 반쯤 나온 상태의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여인들은 흔히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윤간한 뒤 질 안에 수류탄을 집어 넣어 폭발시켰다. 

이 병리 현상은 아마도 이전에 일본에 복종했고 이제는 다른 외세(미국-글쓴이)를 위해 활동하는 자들의 자기혐오, 그리고 가부장적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여성 혐오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


'일제시대를 겪었던 사람들이 그대로 일본군의 저질렀던 잔혹한 짓을 따라했고 가부장적 사고는 극단적 여성혐오로 변질되었다' 뭐 이런 내용으로 보인다.

유독 임신부 살해와 군중을 앞에둔 윤간(집단성폭행)이 다반사로 벌어졌던 것을 보면 단순히 여성혐오로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현대의 지식으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집단 광기였다.

이래도 단순히 빨갱이 색출에서 발생한 피해라고 말할 수 있나?
폭도 색출이라 말하기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관련기사]
임신부 찌르고, 윤간... 기억해야 할 서북청년단 4.3 만행








생존자 증언 찾다보면 유독 임산부와 아기들을 골라 죽였다 이야기가 많다.
서북청년회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돌격대였다.
대신 손에 피 묻혀주는 합법적 살인집단이자 테러리스트였다.

어떤 뉴스에서도 설민석 특강에서도 이런 끔찍한 증언을 다루는 걸 본 적이 없다.
교과서 적인 얘기만 줄줄.

피해자 증언을 중심으로 4.3을 바라봐야 한다.









이렇게 사망한 희생자 수가 정확히 파악된 게 만오천명정도.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경우가 많고, 시체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육지로 끌려가서 살해당한 경우 포함하면 2만명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부상자 수와 피해 유족 수까지 합하면 10만을 넘을것으로 개인적으로 추정해본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0만이었다.

제주도민 절반이 직적 간접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 이 광기의 살인자 집단 서북청년회는 대체 누구일까?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강당에서 대한혁신청년회, 북선(北鮮)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 청년부, 양호단, 평안청년회 등 이북 각 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여러 청년단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서북청년회는 이북에서 월남해 남한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활용해 좌익공격에 앞장서게 했다. 

서북청년회는 좌우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우익 정치인과 친일 기업가들에게서 자금을 받으면서 좌익 계열 단체의 사무실이나 신문사에 대한 습격을 비롯해 좌익계열 노동운동이 활발한 회사에 회원을 입사시켜 노동운동을 파괴하기도 했다


북에서 내려온 연고 없는 청년들 위주로 결성됐고, 미군과 친일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돌격대로 이용했다고 한다.

특히 영락교회 출신을 중심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교회 이름 아닌가?

제주도에도 있다.
제주도민들도 많이 다닌다.
흠흠..

[관련기사]
'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미국인을 신으로 모시던 당시 미국의 기독교는 대유행이었다.
그렇게 기독교는 힘을 얻고 권력이되었다.
그러면서 일부 기독교는 여러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영상에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님의 인터뷰다.

강추한다.


일부 기독교에서 민간인학살을 주도했던 역사를 쉽게 설명해주신다.

서북청년단에 대한 내용도.



그럼 현재는 어떨까?


우선 20년 전 이야기다.

4.3사건을 다룬 다큐를 만들었을 뿐인데 구속 당했다.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4.3 사건을 다룬 '레드 헌트'를 상영했던 영화제 집행위원장 서준식씨가 구속됐다.

감독인 조성봉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영장이 기각돼 간신히 구속을 면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가 시작되기까지 4.3은 금기였다.

모두가 잊고 있었다.

이 끔찍한 일을.



[관련 기사]

"4·3을 폭도의 역사로 되돌린다고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8733

 





그렇다면 최근이라고 다를까?


2014년 이야기다.

박근혜 정부 당시 새누리당은 '4.3희생자 재심의'를 주장했다.
희생자나 생존자 모두 무고한 도민이 아니라 빨갱이라서 죽고 다쳤다는 게 요지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그런 이명박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







왜 그들은 끔찍하게 학살당한 제주도민들을 아직도 폭도, 빨갱이라고 주장할까.
그 집단의 뿌리를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자유당 이승만 → 민주공화당 박정희 → 민주정의당 전두환 → 민주자유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이렇게 뿌리를 보면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4.3 사건 주범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보다 더 크게 잘못됀 아픈 역사다.


또한 최근 서북청년단이 부활했다



해골을 그려넣은 마크가 섬뜩하다.
아직 바뀐 게 없다.
바뀐 게 없기에 해결된 것도 없다.
역사를 잊었기에 역사는 다시 반복되려 한다






여기서 왜 4.3 사건 원인을 짚어보면 첫번째 원흉이자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제를 쫓아낸 미국이 그대로 우리나라 통치했다.
여기서 문제는 미국이 친일파로 악명 높던 군인과 경찰들을 그대로 재등용하면서 벌어진다.

악명 높던 일본 순사가 해방 후 경찰이 되었다고 사람이 바뀌겠는가?
일제 때 하던 짓을 그대로 자행하기 시작했고 도민들은 이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군은 제주도민들에게 상상 이상의 식량을 상납 받았다.
미군의 강도짓과 친일파 출신 군인 경찰에 불만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계기는 1947년 3.1절 행사 때였다.







수 많은 도민들이 관덕정 앞 광장에서 3.1절을 기념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 치여 크게 다친다.

일본 순사 출신에게 이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일.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는 모습에 군중은 분노했다.

사람들이 경찰에 항의하기 시작하자 경찰들은 총을 발사해 죄 없는 도민들을 사살했다.




경찰은 닥치는대로 발포했다.

15세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어린 엄마에서 나이든 농부 등이 사망했다.


일제 순사들이 경찰이 되었으니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이고 민중은 더욱 분노했다.






민주 경찰을 위해 총기무장과 고문을 폐지할 것


발포책임자와 발포 경관을 처벌할 것


경찰 수뇌부는 사임할 것


희생자 유가족과 부상자에 대한 정상생활을 보장할 것


3.1절 행사 사건에 대한 애국 인사들을 체포, 고문하지 말 것


일제 순사 시절의 악행을 그만둘 것


도민 95%가 위 내용을 조건으로 총파업을 시작했다.

그저 살기위한 항쟁이고 민주적인 제주도를 만들기위한 저항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남로당 강경파가 경찰서를 습격한다.
이후 군경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됐다.

당시 제주도를 통치하던 미군정은 이런 제주도민 70%를 좌익 동조자라 칭하고 제주도를 '빨갱이섬(Red Island)'이라 낙인찍었고 무자비학 학살을 부추기고 지원했다.






미군정 제주 사령관 브라운 대령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어떻게 시작되었든 상관 없이 내 임무는 진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무고한 도민들을 체포 고문, 총살하기 시작했다.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데려온 것도 미군이다.
그들의 잔인함을 알아본 미군정이 서북청년단을 돌격대로 이용했다.

이렇게 미국은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고 남쪽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과 미군정의 횡포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친일파에 의해
서북청년단에 의해
6.25에 의해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끔찍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됐다.




요즘 태어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은 아주 무책임하다.


몇년 전 가족행사 때 4.3을 겪은 친척 어르신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본 적이 있다.

학살이 어땠는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없었는지.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냥 폭도들이 죽었을 뿐이라는 것.

4.3은 폭동이라는 자유한국당 세력과 같은 생각이었다.


또한 당시는 워낙 무법천지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있으면 경찰에게 '쟤 빨갱이' 한 마디면 그냥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4.3을 입에 올릴 수 없는 과거를 살아온 어르신 입장에선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던 시대를 살아오셨으니.

4.3을 입에 올리게된 것도 노무현 정부 부터다.


얼마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인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았다.

또 언제 유사한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특히 강정마을 해군기지 갈등도 4.3과 매우 비슷하다.

군사시설 건설에 반대하면 빨갱이로 몰아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구속됐다.


근데 왜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려면 가까운 변산반도 쪽이나 울산 쪽이 좋을텐데?





경찰의 도민 폭행은 무죄

도민은 구속과 벌금


4.3 당시 제주도민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9연대에서 제주도 출신 군인들을 총살한 것처럼

강정마을 갈등 당시 강정마을 주민을 진압하기 위해 육지 군인이 파견됐다.


역사를 잊었기에 외지 군경에 의한 폭력은 이렇게 또 벌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일본이 왜 제주도를 군사요새화했는지 살펴보면.

제주도의 위치는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등을 공략하기에 제주도는 최고의 군사요충지였다.


지금도 제주도는 그 위치 그대로다.

일본도 그랬듯이 미국에게도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최고의 요충지일 것이다.


아직 우리 군은 육군 중심의 앉은뱅이 한반도 전용 군대다.

따라서 왜 해군기지가 최남단 강정마을에 지어야 하는지 더 자세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해군기지라는 설이 있다.

천안함이 미국 잠수함과 충돌했다는 이야기도 왜 자꾸 나오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 가정하면 미국의 군사작전에 의해 언제라도 한반도가 다시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특히 제주도.

일본군의 중심전력은 대부분 제주도에 있었다.

송악산 진지동굴, 모슬포 격납고 등 어렸을 때부터 뛰어놀던 곳이라 잘 안다.







공군기지로 활용됐던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송악산 진지동굴.


또 다시 제주도가 군사요새가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자주국방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과의 대치가 끝나야 하고.








4.3 70주년 추념식에 등장한 원희룡 도지사.

얼굴에 칠해진 분은 아이돌 출신 이효리보다 훨씬 두꺼웠다.



12년간 단 한 번도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주 지사

By 아이엠피터

http://theimpeter.com/42853


제주 출신이 핸디캡이라는 원희룡

http://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474


어쩌면 화장보다 얼굴이 더 두꺼울지도 모르겠다.







반면 엑세사리 하나 없이 민낯에 가까운 가벼운 화장으로 등장한 이효리.







서울시민이 되버린 제주 출신보다 제주도를 사랑하는 서울 출신이 더 낫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정치인 중에선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말고는 아무도 4.3 사건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투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초중고 시절에는 4.3이 어떤 일이었는지 왜 발생했는지 제대로 가르쳐주는 선생이 없었다.

대부분 제주도 출신임에도 말이다.

정부에서 교육청에서 교육하지 못하도록 압박한 원인도 있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시절 도덕 선생님이 도덕 시간에 몰래몰래 4.3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열정적으로 눈물까지 흘리며 가르쳐주셨었다.

지금은 교육청 장학사?가 되셨다고 들었다.

예쁘고 친절해서 인기가 많은 여선생님이셨는데.

노처녀로 좀 계시다가 최근 몇년 전에서야 결혼하셨다고..


아무튼 학창시절 4.3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이렇게 나이들어 이것저것 찾아가며 혼자 배웠다.

이제야 슬슬 제주 교육계에서도 4.3을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있는 거 같다.

아직도 제주엔 봄이 오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도 죽음을 생각하는 의미의 '추념식', 단순히 '사건'으로 치부되는 '4.3'이 민주항쟁으로 인정받고 제대로 보상받으려면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역사의 반복을 막으려면 까마득한 길이다.


또한 제주도에 이승만의 후예들을 추종하는 어르신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 젊은세대가 짊어져야할 숙제가 많다.


마지막으로 4.3의 완전한 해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4.3의 완전한 예방이다.

다시는 절대 평화의 섬에 아픔이 없어야한다.







추천하는 4.3 동영상



5분으로 배우는 4.3 사건 - 시리얼






제주 4.3 70주년 설민석의 역사특강




결론

4.3의 원인은 미국이다

4.3사건 대학살의 주범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 서북청년단, 군인과 경찰이다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방 완성하자

무관심도 공범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바탕으로 서북청년단이 부활했다

4.3과 같은 역사를 완벽히 예방하자

투표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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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oflove.tistory.com/341 [돌코롬헌 세상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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