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자동차·조선 사업 일구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다

한국의 창업 CEO 5인②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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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서울 종로구 계동 본사옆 공원에서 회사 임직원, 마을주민등 2백여명과 함께 간편한 옷차림으로 체초를 하고 있다. /조선DB

 려대는 고(故) 정주영 전 현대 회장에게 1995년 3월 18일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 추천 이유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세웠다―“선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빈손으로 일어나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대이자 세계 굴지의 기업을 구축했다. 이것은 입지전적인 인간 승리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정주영 회장은 맨손으로 자동차와 선박 회사를 설립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세계 5위, 현대중공업의 조선(造船)은 사실상 10년 넘게 세계 1등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정신이 가져온 결과다. 그의 자서전을 텍스트로 삼았다.1)

배고파 네 번이나 가출하여 쌀가게 사장이 되다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눈 오는 긴 겨울을 아침에는 밥 해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죽 쑤어먹고 지내는 지독한 가난이 싫어서 16살 때부터 19살 때까지 네 차례나 가출했다. 그는 네 번째 가출로, 인천의 한 쌀 도매상에서 배달원이 되었다. 수소문하여 찾아온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새경으로 1년에 쌀 열여덟 가마를 받는다고 하자 아들의 가출을 허가했다. 그는 23살 나이에 일하던 쌀가게를 운 좋게 인수받아 1938년 1월에 ‘경일상회’ 쌀가게 간판을 걸고 사장이 되었다. 나이 스물 넷, 네 번째로 가출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중일전쟁이 일어나 총독부가 배급제를 실시하자 1939년 12월에 쌀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A. 자동차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을 설립하다
 
정주영은 쌀가게를 닫은 후 서울로 와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는 오윤근 씨라는 사람에게서 빚을 얻어 1940년 3월 1일에 아현동고개에 있던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다. 돈이 잘 벌렸다. 그러나 그 해 3월 20일경에, 그의 잘못으로 자동차 수리공장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섰다. 그는 오윤근 씨에게 가서 돈을 또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사정했다. 오윤근 씨는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봐서 돈 떼었다는 오점을 찍기는 나도 싫네” 말하고 거액을 다시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그는 신설동에 무허가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렸다. 그는 다른 데서 열흘 걸린다는 일을 사흘 만에 마쳤다. 일감이 쌓여갔다. 그러던 중 일제는 1942년에 기업정비령을 내려 1943년 초에 ‘아도서비스’를 ‘일진공작소’에 흡수시켜버렸다. 자동차 수리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 후 2년 남짓 광산에서 운반 일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다
 
해방 직후 한국은 어수선했다. 정주영은 미군정청(美軍政廳)이 1946년에 적산(敵産)2) 일부를 불하할 때 땅을 불하받아 같은 해 4월에 중구 초동에서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렸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처음에는 청부받아 미군 병기창에 가서 엔진을 바꿔 다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낡아빠진 일제 고물차를 용도에 따라 개조하는 일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은 한 번에 30~40만 원 정도를 받는데 건설업자들은 1천만 원씩 받아가는 것을 보고 건설업을 할 계획으로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 1947년 5월 25일, 바로 ‘현대건설’이 출발한 날이다. 그러다가 1950년 1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통합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6․25가 터져 피난처 부산에서 엄청나게 고생하다가 미군 관련 건설 사업으로 큰 행운을 잡았고, 다시 서울로 와 미8군 발주공사를 맡았다.
건설 얘기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자동차와 선박 얘기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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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포니엑셀 신차 발표회장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조선DB


100% 국산 모델 ‘Pony’가 탄생하다
 
정주영은 1967년 12월에 ‘현대자동차’ 설립 허가를 받고 오랜 꿈이었던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동차 업계는 일명 딸딸이라는 애칭의 삼륜차를 생산하던 ‘기아’와 승용차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신진’이 지배하고 있었다.
 
정주영은 기술 제휴를 목적으로 처음에는 포드자동차사와 제휴를 맺었는데 포드 실무자들이 경영권 참여까지 요구해오자 미쓰비시로 바꿨다. 이를 계기로 ‘현대자동차주식회사’는 1968년 1월 4일에 새롭게 출발했다. 그는 많은 난관을 거쳐 1968년에 ‘코티나 1호’를 생산했다. 그러나 악운이 겹쳐 코티나는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는 1969년 12월에 ‘자동차 국산화 3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한 마디로, 현대, 신진, 아세아, 기아 4개 차량 조립업자들 가운데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 셋은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여 이렇게 말했다.
 
“경쟁 상대가 없으면 제품의 질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도 없고, 생산에 박차를 가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 사건이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전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만일 정주영의 제안이 없었거나, 또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동차산업을 독점기업이나 공기업에 맡겼다면 한국 자동차산업은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발전은 경쟁의 산물이니까!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 씨는 유럽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동차에 관한 온갖 제작기술 계약을 맺었다. 정주영은 1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부어 1974년 7월에 연간 생산 능력 5만6천 대 규모의 국산 자동차 공장을 착공했고, 1년 만인 1976년 1월에 고유 모델 제1호 ‘PONY’가 탄생했다. 1차 유가파동 여파로 포니는 탄생 전부터 62개국 228개 상사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3)

한국은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국가
 
정주영은 1998년에 한국 자동차 산업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1967년에 설립한 ‘현대자동차’는 이제 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00% 국산 자동차 1호로 ‘포니’가 탄생한 이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현대자동차’는 그룹 안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현대’가 자동차 수리업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창립 배경과 역사 때문이기도 하고, 발전과정에 쏟아 부은 땀과 정열 때문이기도 하고, 앞으로 전개될 희망찬 미래 때문이기도 하다. 금액이 큰 것, 이익이 많은 것만 쫓아다니다 보니 건설이 주종 산업이 되었지만 ‘현대’의 입장으로나 국가의 입장으로나 장차 자동차가 미래의 주종 사업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4)
 
정주영의 말 가운데 나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현대’의 입장으로나 국가의 입장으로나 장차 자동차가 미래의 주종 사업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주영의 ‘비전’은 실현되었다.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이 가져온 성과다. 그 성과를 보자.
 
현대차는 1986년에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 진출했다. 그로부터 30년이 되는 2015년 1월 현재 현대·기아차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7.9%나 된다. 현대·기아차는 여러 나라에서 현지 공장을 갖고 있고, 전 세계에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며 여러 나라에서 판매 선두를 달리고 있다. 2013년 말 현대·기아차는 판매량 756만 대로  세계 5위다.5) 2014년에 현대·기아차가 대부분인 자동차의 수출액은 489.2억 달러로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5%에 이른다. ‘창업 CEO’ 정주영의 기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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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조선DB


B. 배 만들기

경험 없이 조선 사업을 시작하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짓겠다고 하자 ‘무슨 경험이 있다고 조선소를 만드느냐’고 얘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업이라는 것이 철판으로 큰 덩치의 탱크를 만들어 바다 위에 띄우고 동력에 의한 추진력으로 달리는 것밖에 더 있느냐”는 것이었다. 배를 큰 탱크로 보고 그 탱크 속에 엔진을 붙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그 무렵 정부도 제철(製鐵)을 시작했다. 덕분에 조선소는 당시 정부의 4대 핵심공장의 하나로 지정되어 제철의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

백사장 사진 하나로 선박 수주를 하다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차관(借款)을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 미쓰비시와 접촉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미국, 캐나다와도 접촉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메리도라고 하는 유태인 한 거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커미션만 챙기려는 사람이었다. 그 후 차관을 주선하는 데이비스라는 미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미 공군의 조종사 출신으로 한국전에도 참전한 사람인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1억 불 정도의 차관이 마련되었다. 영국의 버클리은행에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영국 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차관을 얻는 데는 수출신용보증국의 심사가 결정적인 관문이다. 하루는 수출신용보증국의 최고 책임자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했다. 그의 말이다―“우리는 우리나라의 권위 있는 기술회사가 당신네들이 배를 만들 수 있다고 판정을 했으니까 기술면에서 이의가 없다. 그런데 당신들이 설사 배를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배를 살 사람이 없다면 우리나라는 원리금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나에게 주지 않는 한 이 차관을 승인할 수가 없다.” 그 사람 말의 요점은 배가 팔린다는 증명서를 갖다 붙여야만 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우리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로부터 4천만 불, 5천만 불짜리 대형 선박을 사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배를 만들어 본 경험도 없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하며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나왔다.
 
정주영은 그날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로부터 배를 살 선주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다. 당시 울산 미포만의 잡초 우거진 백사장 사진과 그 지역의 5만 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스코트 리스고우 회사에서 빌린 26만 톤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을 들고 다니면서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다녔다. 정주영은 배를 살 만한 사람을 만나 이렇게 설득하려 했다―“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 하면 영국에서 돈을 빌려서 이 백사장에다 조선소를 세우고 거기에서 배를 만들어 주겠다.” 정주영은 스스로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그는 그 배를 사겠다고 나선, 정주영보다 더 미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선박 왕 오나시스의 처남 되는 리바노스라는 선주가 정주영의 배 두 척을 사겠다고 나섰다. 스위스에 있는 몬슬이라는 그 사람의 별장에서 계약을 마쳤다. 정주영이 제안했다―“우리는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서 제 때에 준다. 만약에 제 때에 되지 않았을 때에는 계약금의 원금에다 이자를 얹어 주겠다. 그것을 은행보증을 하겠다. 그리고 앉아서 찾을 수 있게 해주고 배 값도 싸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으며 중간 중간에 우리의 배 만드는 진척을 보아 가면서 조금씩 달라. 배를 다 만든 다음에도 하자가 있으면 인수하지 않아도 좋고 그 때에도 원리금을 다 쳐주겠다.”
 
정주영은 26만 톤 두 척을 4천만 불씩 8천만 불에 팔기로 계약을 하고, 계약금으로 우리 돈 13억 원을 받아와 외환은행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배를 팔 수 있다는 증명서를 첨부해 조선소를 지을 돈을 빌리게 된 것이다.

최단 시일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하다
 
차관도입 협정을 끝마치고 1972년 3월 22일에 조선소 도크를 파기 시작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를 준공했다. 그 짧은 기간에 리바노스에게 주문받은 배 두 척을 건조하면서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岸壁)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 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근로자 5천 명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최대선 건조 능력 70만 톤, 부지 60만 평, 70만 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규모의 조선소를 정주영은 2년 남짓 만에 건설한 것이다. 정주영은 1차 공사를 진행하던 도중에 다시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1975년에 최대선 건조능력 1백만 톤, 부지 1백50만 평, 드라이 도크 3기 240만 톤 시설능력을 준공하여 규모로 보아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했다.      
 
우스운 일도 많았다. 26만 톤급 배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26만 톤짜리 배가 얼마나 큰가를 설명할 사람이 없었다. 제일 크다는 배를 만들어 본 것이 조선공사에서 만든 1만7천 톤짜리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1호선을 밖에서 조립하여 그것을 도크 안으로 운반해야겠는데 그 때는 아직 골리아스 크레인이라고 하는 대형 자동이동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기술자들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트레일러에 선수(船首) 블럭을 싣고 불도저가 뒤에서 당겨가면서 속도를 줄여 도크의 경사로로 내려가게 했다. 이 과정을 정주영은 “이처럼 조선소 건설은 사람들 저마다의 고정 관념을 깨고 또 깨면서 온갖 창의를 다 발휘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최단 시간에 지을 수가 있었다”고 썼다.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두 척은 울산 조선소가 준공되는 자리에서 명명식을 가졌다. 조선소가 준공되는 자리에서 명명식을 갖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니까 배만 만들면 되는 것이지 꼭 조선소를 지어야 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만든 첫 번째 배를 보고 리바노스는 “이 배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잘 만든 배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울산 조선소는 도크를 파내는 것도, 배를 짓는 것도 모두 세계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중국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조선입국(造船立國)으로 태어났다. 한국은 조선 수주(造船 受注)에서 세계 일등 자리를 놓고 중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오지만 사실상 10년 넘게 세계 일등 자리를 지켜왔다.
 
2014년에 한국은 반도체, 석유제품, 자동차에 이어 ‘선박해양구조물 및 부품’이 품목별로 수출 4위인 398.9억 달러로, 총수출의 7.0%를 차지했다. 2014년에 ‘자동차’와 ‘선박해양구조물 및 부품’을 합한 수출액은 888.1억 달러로,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9%에 이른다. 이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정주영의 기여다.
 
각주
 
1) 정주영(1986), 『鄭周永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 삼성출판사. ___(1991), 『나의 삶 나의 이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제3기획. ___(1998),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솔.
2) 1945년 8월 해방 이전에 한국 안에 있던 일본인 재산의 속칭.
3) 정주영(1986), 『鄭周永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 삼성출판사.
4) 정주영(1998),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솔.
5) 다음은 2013년 판매량 10대 회사다: 1위 도요타(998만 대), 2위 폭스바겐(973만 대), 3위 GM(971만 대), 4위 르노·닛산(826만 대), 5위 현대·기아(756만 대), 6위 포드(625만 대), 7위 피아트·크라이슬러(435만 대), 8위 혼다(410만 대) 9위 푸조·시트로엥(282만 대), 10위 스즈키(266만 대).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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