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심리학자 융(C.G.Jung)은 

2009년 4월 22일 오후 10:27공개조회수 10

2002/05/18(11:10) from 211.198.1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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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가 무의식의 발견일 것이다.
인간의 정신속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세계가 존재하며, 인간의 삶은 그 세계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부르면서 처음으로 인간정신의 신비에 대해서 파고 들어갔다. 무의식은 아직 의식화 되지 않은 정신적인 요소들이나, 한 번 의식화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의식으로부터 축출된 정신적 요소들이다. 벨기에의 분석심리학자 제프 드힝((J.Dehing)은무의식은 손이나 발처럼 하나의 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고 했다.

 

 


취리히를 무대로 활동했던 분석심리학자 융(C.G.Jung)은 그의 삶을 통하여 의식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아서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알수 없지만,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어떤 요소들이 있음을 여러번 체험하였다. 그가 정신과를 정공으로 선택하려던 무렵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외에도, 꿈에 나타난 현상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거나, 어떤 문제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융은 인간의 삶이란 사람들이 의지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흐름에 이끌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융이 세살에서 네 살 사이에 꾸었던 꿈, 열두살 무렵 바젤 성당 지붕에서 보았던 무시무시한 환상, 프로이트와 헤어진 다음 1913년에서부터 1918년까지 겪었던 무의식 체험, 1927년 중국학자 리처드 빌헬름으로 부터 중국 연금술에 대한 해제를 부탁받고 연금술에 대해 연구하게 된 것들이다. 융에 있어서 부모의 불화는 성장과정에 여러 가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내면에 있으면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삶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서 프로이트가 성(性), 애들러가 열등감으로 해석했던 것을 융은 지하세계의 신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인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ㅇ랑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으로 누미노제적인 신이다. 융은 인간의 내면에는 그런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였다. 열두살 무렵에 바젤성당 옆을 지나가다 그때 하늘은 몹시 푸르고, 새로 수리한 성당지붕은 ㅎ쌀에 반작이고 있었다. “햇빛은 반짝이고 하늘은 푸르구나!” 그는 이 환상으로 무서워움을 가졋으나 나중에는 그 환상이 겉만 번지르하고 죄와 처벌만 강조하는 기존의 기독교를 부정하고, 사람들에게 참된 구운으 가져다 주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계시라고 해석했으며 평생동안 그런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였다.
3. 융에 있어서 콤플렉스는 열등감으로 첫째는 어떤 정신적인 내용이 하나의 핵을 형성하고, 둘째로 거기에 정동적인 요소가 착색되어 있으며, 셋째로 그 핵은 그것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정신 내용을 흡수하며, 넷째로 자율성을 띠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으로는 자아와 외부세계를 중재해 주는 페르조나가 있다. 페르조나란 배우들이 공연시에 쓰는 가면이나 탈을 의미하는데, 한 사람이 사회생활을 할 때, 사회에서 그에게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기대, 역할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와 내면 세계의 접촉을 중재해 주는 것은 아니마/아니무스 이다. 융은 인간정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사람들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자아는 페르조나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우리 정신에 있는 그림자를 통합하며, 아니마/아미무스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분화시켜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주어져 있는 개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굴극적인 목ㅍ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 과정을 개성화 과정이라고 불렀다.

융의 심리학은 현대에 들어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데 특성을 보면 첫째는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둥째로 막연하고 광범위한 듯이 보이는 인간의 무의식을 콤플렉스와 원형개념을 가지고 설명하고 더 구체적으로 그림자, 페르조나, 아니마/아니무스 등으로 설명하여, 인간의 무의식을 역동적이며 깊이 있게 파헤쳤다. 셋째로 집단적 무의식은 어느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만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똑깥이 생각하는 개관적인 정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신, 제의, 종교 역시 환상만이 아니라 개관적인 실재라고 주장하여 신화, 설화, 민담등 등을 통한 인간정신에의 탐구를 가능하게 하였고, 분석심리학과 종교학 및 신학연구의 협력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넷째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인 아니마/아미무스 개념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성(性)이 성격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 주목하며 여성학과 남성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심리학은 정신치료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인간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인 개성화를 제시하였다.
그의 심리학에서 좀더 발달시켜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가 주장한 집단적 무위식의 유전적 전달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어떻게 정신적인 이미지가 유전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좀더 깊이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집단적 무의식은 그의 심리학 이론에서 핵심적인 부분인데, 그것이 하나의 가설일 뿐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겉으로 들어난 그 이미지의 의미를 넘어서 또 다른 실재를 드러내는 인간의 언어적 표현이다. 한편 상징은 사람들을 사로 잡으며, 그들에게 정동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회심체험시 사람들은 종교적인 상징을 통하여 깊은 정동 체험을 하며, 그 결과 삶의 방향까지 전환하게 된다. 상징에 대한 최근의 연구도 상징이 지니고 있는 이 변형의 능력과 정동적인 특성에 관해서 집중되고 있다. 상징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상징이 대칭되는 대상을 단순하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참여하게 하는 기능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두 개의 실재 사이를 이어주고 그 둘을 궁극적으로 통합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의식과 무의식, 상상계와 실재계, 일상계와 태초, 사람과 사회 및 우주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그것을 다른 어떤 것을 변형시키는 능력이 있다. 고테가 말했듯이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형상을 그것과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 시키면서 그 전보다 더 높고 광범위하여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실재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융은 종교란 어떤 신조나 믿음체계만이 아니라 인간 정신에 있는 어떤 독특한 태도로써, 사람들이 신적인 것이라고 느끼는 강력한 것을 체험한 다음에 변화된 정신적 태도라고 주장하였다.
융이 정신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제시한 개성화 과정은 정신유형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개성화란 사람들이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자기에 도달하는 것이며, 자기에 도달하려면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은 정신적 기능들을 통합하여 인격의 전일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태도 유형에는 내향성과 외향성이 있다. 내향성은 판단의 기준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원천이 자신의 내면이나 주관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유형이다. 외향성은 판단의 기준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의 밖에 있는 대상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 진다. 이 사람들에게서는 정신 에너지가 주체로부터 대상을 향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기능에는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짐작하는 네가지 기능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기능들을 통해서 그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파악하고 처리하여 그에게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그런데 융은 이 정신 기능들을 다시 합리적인 기능인 사고와 감정, 비합리적인 기능인 직관과 감각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합리적 기능이란 그에게 주어진 사태를 이성을 통하여 판단하여 일정한 질서를 토대로 정리정돈하고, 그것이 무엇이고 그에게 좋은지 어떤지를 계산하는 기능이다. 판단과 가치부여의 기능인 것이다.
한편 비합리적 기능인 직관(intuition)은 무의식적인 지각을 통하여 “이것은 어디에서 유래 되었고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사실을 파악하는 기능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짐작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경험의 가능한 발전 방향이나 연관성을 미리 볼 줄 아느 기능인 것이다. 직관을 통해서 사람들은 어떤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 미리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감각(sensation)은 물리적인 자극을 인식하는 기능으로서 그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어떻다”고 그것의 모양이니 색깔이나 소리 등을 파악하는 기능이다. 감각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가 경험하는 것들의 특성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상징이란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어로 ‘함게하다’는 의미를 기진 동사 symballo에서 파생된 symbalon 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symbalon은 운래 도자기나 금속 등 하나로 되어있는 물건을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가, 오랜 뒤에 다시 만나서 그 나누어진 부분을 맞춰보고 그것이 원래 하나였음을 확인하는 물체였다. 따라서 상징은 본래 두 가지 의미를 하나의 이미지속에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징은 형상(image)과 정동(emotion) 의 복합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은 사람들에게 의미와 힘을 전달한다.
상징의 기능을 살펴보면 첫째 상징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차원을 연결시키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 둘째는 상징은 어떤 사실을 직접적으로 dstlr하게 해 준다. 셋째로 상징은 자신을 초월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하나의 실재를 지시할 뿐 아니라, 그 실재에 조응하는 영혼의 차운을 열어 보인다.마지막으로 상징에는변형의 기능이 있다.

융은 꿈의 원리를 정신상태의 자기표현이 보상의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꿈이란 인간의 정신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점을 스스로 표현하기 위해서 꾸는 것이며, 그 목적은 의식상태의 보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의식에 또 다른 것들을 알려주는 꿈들도 있다. 그런 꿈들애는 첫째로 예시적인 꿈이 있다. 둘째로 외상적인 꿈이 있다. 셋째로 텔레파시적인 꿈이있다. 마지막으로 경고적인 꿈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대할 때 언제나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하며, 꿈에서 어떤 단순한 정보만을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꿈속에 들어가서 그 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한다.

꿈에 나타난 이 의미들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은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 첫째로 꿈꾼이게서 그 꿈해석에 대한 반응이 나타난다. 둘째로 그 해석과 관련된 꿈을 꾸게 된다. 셋째로 꿈 이외에 다른 변화가 생긴다. 깨어 있을 때 그의 행동이 변화된다든지 그에게서 어떤 증상이 사라진다든지 하는 일이 생긴다.

융은 꿈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요소로서 첫째 꿈꾼이의 의식적인 상황, 둘째 꿈의 내용, 셋째 꿈 이미지에 대한 개인적인 연상, 넷째 꿈이미지에 대한 확충 등이 있다고 주장했다. 꿈해석에서도 필요한 것은 꿈꾼이의 의식상태에 대한 고찰이다. 그다음으로 꿈의 내용을 살펴 보아야 한다. 실재로 꿈꾼이의 연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꿈의 이미지에 대한 확충이다.
꿈의 구조는 어떤 장소, 줄거리의 전개, 절정, 소진의 단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본래 꿈과 환상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에 중요한 문제가 있을때 흔히 꿈을 꾸었으며, 꿈을 통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야곱이나 요셉, 다니엘 등은 특히 꿈과 매우 깊이 관계된 인물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꿈을 많이 꾸었거나 다른 사람들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그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구약성경의 지혜서 가운데 하나인 욥기에서도 욥의 친구였던 엘리후는 "사람이 꿈을 꿀때에, 밤의 환상을 볼 때에, 또는 깊은 잠을 잘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경고를 받고 두려워 합니다"(욥33:15-16)라고 말하면서 고대인들이 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신약성경 시대에 내려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요셉이 그의 약혼녀 마리아와 결혼하고,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가며, 이집트에서 다시 돌아와 나사렛에 정착하게 되는 것은 모두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것이었다(마1:18-2:23). 요셉이 꿈에 나타난 사실을 흘려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여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것을 보았다(행7:55-56).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행9:3-7).고넬료는 욥바에 가서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행10:2-6). 여기에서 우리는 고대 사람들이 꿈과 환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사실을 알수 있는데, 이 전통은 바울이나 베드로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베드로는 욥바에 머물러 있던 어느날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굽이 달리지 않은 짐승들의 고기가 담겨있고 그것을 먹으라는 환상을 본 다음 이방인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행10:1-43).
바울 역시 어느날 마케도니아 사람이 "어서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환상을 보고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확신하여 마케도니아 쪽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된다(행16:6-16). 베드로나 바울 모두 꿈과 환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었던 것이다.
꿈과 환상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이었던 순교자 저스틴이나 터툴리안, 오리겐, 어거스틴 등 역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며, 그것들은 영적인 세계의 진리를 알려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5세기경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자리잡고,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이 강화되면서 점차 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제도적인 가르침 이외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직접적인 계시의 통로를 인정할 경우 교회의 권위는 그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히브리어와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을 라틴어로 최초로 번역한 제롬과 교회의 제도적인 틀을 완성시킨 교황 그레고리는 꿈을 미신이라고 비판하면서 꿈을 따르기 보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중세의 카톨릭 신학을 완성시킨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자신이 꿈과 환상을 통해서 이상한 체험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미신으로부터 구하고 기독교 신학을 당시의 과학정신과 조화시키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초로해서 기독교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꿈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에 힘입어서 한층 더 심화되었다. 꿈이란 도대체 불합리하기 짝이 없으며, 그 속에서 아무런 논리적인 연관관계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꿈은 믿을 수 없으며, 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꿈과 환상은 오늘날까지도 성경의 꿈과 환상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무시되거나, 미신처럼 여겨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꿈과 환상에 대한 인식에는 일대변화가 생겨난다.
꿈은 그 안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사람들은 꿈과 환상을 통해서 무의식의 진리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1900년에 '꿈의 해석'을 발표하여 꿈에서 인간의 삶과 관계되는 상징적인 의미들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의 의미를 찾아보기 시작하였고,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심층심리학자들과 C.G 융은 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고 하였으며 꿈과 환상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한 것이다. 꿈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들의 정신을 통합시키고,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실현하게 하려는 무의식의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꿈에 좀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꿈에 나타난 상징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꿈을 통해서 우리 정신의 상태에 관해서 좀더 깊이 알수 있고, 우리 정신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통합시킬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삶의 여러가지 문제들 때문에, 때때로 어려움을 당할때 꿈은 우리에게 삶이란 의식에서 파악하고 있는 세계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꿈이 우리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형성시켜 주기 때문에 그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꿈이 하나님의 언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꿈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그들의 의식세계 보다 더 큰세계, 더 초월적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으며, 그 세계에서 가르쳐 주는 초월적인 안내를 받아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을 통해서 그런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꿈에서 그들이 그 지시를 받았던 순간은 일상적인 순간이 아니라 루돌프오토가 누미노제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 같은 두렵고 떨리며, 무엇인가 사람들을 잡아끄는 신비한 순간이며, 그들이 그 지시를 따랐을때 그들의 삶은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될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비와 초월을 어디서 체험 할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네 대한 믿음에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냉냉한 마음만 가질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꿈과 이상(환상)을 보며 주님의 음성을 들을때 영적체험은 성장하게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더하게 된다. 인간은 뭔가를 보고 듣고, 만져 봐야 확신과 믿음을 가진다는 말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꿈과 환상, 음성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리고 불가능한 모든 것들도 가능하게 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기독교인라면 그것을 믿어야만 할 뿐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었던 것도 꿈속에서였다. 그는 어느날 기브온에 있는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고 물으셨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른 무엇보다도 유대왕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헤를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면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 "솔로몬이 잠에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주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모든 신하에게 잔치도 베풀었다".(왕상3:15)

마지막으로 기독교 영성과 개성화 과정의 본질과 의미에 관해서 살펴보면 두 체험 사이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있다. 유사점은 첫째로 이 두 체험이 모두 하나님 또는 신적인 존재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영성과정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를 체험하고, 자신의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실현시키려고 한다면 개성화 과정에서 자아는 그의 내면에서 신의 이미지인 자기를 만나는 것이라 한다. 둘째로 이 두 체험에는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죄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작업은 자기 비움이 있어야 한다. 넷재로 이 두 과정에서 체험자들은 모두 수동적으로 된다. 다섯째로 체험자들은 모두 신적인 존재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두과정은 계속적인 과정이다. 영성생활에서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개성화 과정은 생명이 다 할 때 까지 계속 되어져야 한다.
기독교 영성이란 프로이트 등 일부 정신 분석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사람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우리 무의식의 일부를 투사시켜서 헛된 환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과는 전혀 다르고 우리 의식에 개관적으로 여겨지는 실재를 추구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언제나, 현존해 계시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 주신다. 하나님은 위대한 영성가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듯이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 이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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