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규모로 따지면 그가 이룩한 왕국은 무려 66조 원 정도로 세계 5위의 기업군단이다. 전세계 42개 국에 460여 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으며, 종업원 수도 18만 명에 이른다. 에어캐나다와 파나마운하도 그의 것이며, 세계 물동량의 10%를 그가 지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항의 컨테이너터미널도 그의 소유다.
홍콩은 사실상 그의 손바닥 안에 있다. 홍콩텔레콤, 홍콩전력, 슈퍼마켓 파큰숍을 소유해 홍
콩경제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홍콩에만 6만 2,000개의 빌딩과 아파트와 하버플라자 호텔도 그의 것이다. 따라서 홍콩에서는 홍콩사람이 1달러를 쓰면 5센트는 리자청 회장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돈 많다고 거만하지 않아 존경까지 받는 인물이다.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큰 곳이다. 25명에 한 명 꼴로 백만장자다. 따라서 부자가 존경받기 힘든 곳이지만 그는 예외다. 홍콩의 관광지인 피크트램에 가면 그의 밀랍인형이 서 있을 정도다. 존경받는 비결은 검소함
이다. 그는 지금도 20년이 넘도록 월급은 5,000홍콩달러(약 70만 원)밖에 받지 않고 집에서 하는 식사도 반찬 4가지와 국 한 그릇이 전부일 정도로 검소하다.
학술지원을 목표로 세운 봉사재단인 '리자청기금회'를 운영하고 있다. 26년간 여기에 쏟아부은 돈만 1조 원이 넘는다. 땀으로 정직하게 돈을 벌었고, 또한 사회 환원도 눈부시니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1928년생으로 올해 만 77세인 그는 광동성 차오저우〔潮洲〕 출신으로 1937년 중·일전쟁이 터져 대학살이 벌어질 때 그걸 피하기 위해 1940년 아버지 리윈징, 어머니 장비친과 남동생, 여동생 등 가족 모두가 홍콩으로 이주하게 된다.
홍콩에 온 리자청 가족은 일찍 자리잡은 외삼촌 집에서 있었으나 부친이 전염병인 폐렴을 앓고 있던 탓에 결국 1년 만에 나와 독립하게 된다. 그 즈음 부친이 돌아가셨고,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리자청은 13세의 나이로 교사의 꿈을 접고 생활전선에 나서게 된다. 그 역시 폐렴에 걸려 이후 21세까지 고생했으나 의지가 강했던 탓인지 저절로 나았다고 한다.
그는 찻집 종업원부터 시작해 철물점을 거쳐 시계줄을 파는 외판원을 하면서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플라스틱 허리띠 외판원을 끝으로 그는 친구들로부터 5만 홍콩달러를 빌려 1950년 혁대회사를 창립한다. 이름은 창장〔長江〕플라스틱. 창장을 쓴 이유는 큰 강은 크고 작은 시냇물을 모두 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긴 호흡과 거대함을 꿈꿨던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스물두 살.
그는 일찍이 세계 흐름에 눈을 떴다. 꽃모양을 만들어 팔면 돈이 될 것이란 얘기를 듣고 스물아홉 살이던 1957년 이탈리아로 홀로 건너가 조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자료와 상품을 가지고 홍콩으로 돌아온다. 결국 일 년 뒤인 1958년 플라스틱 조화를 만들어 수출해 당시 1,000만 홍콩달러라는 큰 돈을 벌게 된다. 그 덕인지 60년대 그는 '조화대왕'이라고 불렸다.
그의 이름 석자가 세계에 알려진 건 1979년 영국계기업인 허치슨왐포아를 인수하면서다. 당시 언론은 화교기업의 영국기업인수 신호탄으로 대서특필했고, 홍콩인은 자부심을 갖게 됐다.
1985년은 '그의 사업에 마침표'를 찍은 해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해 영국계 부동산그룹인 자딘매디슨그룹과 홍콩전력을 인수해 사실상 홍콩 최대의 재벌로 우뚝 서 지금까지 최고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그에게 큰 고비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때문이다. 1973년 석유위기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정도였는데, 그는 두 번 다 사람들 생각과는 반대로 공격적인 부동산투자에 나서 이후 자산을 불리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오히려 최근 상황이 고비라면 고비다. 2003년에는 당시 야심차게 추진했던 3G사업의 적자로 인해 명성에 금이 가기도 했다. 올해 초에도 허치슨텔레커뮤니케이션 인터내셔널은 영업환경의 악화로 인해 전체의 11%에 해당하는 1,160명의 직원을 해고하거나 재배치하는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가 어린 나이로 홍콩에 나왔을 때, 그에게 광동어를 가르쳐주던 외삼촌의 딸과 서른다섯 살의 늦은 나이로 결혼해 아들 둘을 두었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는 1990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큰 아들 빅터 리는 한때 홍콩의 조폭들에게 납치당했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적이 있으나 지금은 독립하였고 둘째인 리처드 리가 그의 가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존경받는 아시아 거부를 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올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8차세계화상(華商)대회에 참석할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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