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BC579?∼499?)

노자가 말하는 도(道)
도(道)란 무엇인가? 그것은 길을 뜻한다. 길은 만인이 다닐 수 있고 어느 곳에나 통하여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길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길도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도라 하였다. 그런데 도가의 길은 인간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이 다 거쳐야 할 길을 뜻하며, 우주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는 절대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도(道)의 절대성을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저절로 그러함)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모든 행위를 중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집착하여 억지로 하지 않고, 거짓 꾸며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인위적 힘을 가하지 않는 자연스런 행위를 의미한다.
천지 자연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아무 일도 하는 바 없으나, 봄이면 초목의 새싹을 트게 하고, 가을에는 그 결실을 맺게 하며, 겨울이 되면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런데 인간은 감각적 인식과 편견에 사로잡혀 우주 만물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모든 가치를 인위적으로 판단함으로서 도나 자연으로부터 점차 멀어져서 자연의 덕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도 많은 혼란과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덕(德)
노자에 의하면 도는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는 근원으로서, 이 생성 과정에서 각 사물은 근원적인 도에서 얻어 가지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덕(德)이라 하였다.


유가가 말하는 덕은 인예(仁禮)의 덕으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덕이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덕은 우주 만물이 도에서 부여받은 어떤 자연스런 능력과 힘을 뜻하며, 그 자연스런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노자는 무위 자연이라고 했다. 따라서 노자는 인위적인 문화를 부정하고 어린애와 같

은 순박함과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욕망을 만족시키려 하면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부(富)가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부이다. 노자는 지나친 욕심을 버릴 것을 강조하였다. 물질적인 재산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지식에 대한 욕심도 버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통해 설명한다. 이 말은 으뜸 되는 선(善)은 물과 같다는 말로서, 물은 모든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으로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 주며,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는 겸손한 덕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물과 같은 덕을 지닌다면, 그런 사람은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 그와 맞설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그를 이길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 정치

노자는 만물의 근원인 도(道)의 성질이 "저절로 그러함"이듯이 인간을 다스리는 정치도 무위(無爲) 즉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자는 정치를 생선 굽는 일에 비유하여, 자꾸 이리 저리 뒤적이면 생선이 다 부숴지고 타 버리는 것과 같이 정치가 백성들의 생활에 간섭할 수록 사회는 점점 더 뒤죽박죽이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위정자가 기술 개발을 서두르고, 법의 조항을 세밀화 하여 많은 법령(法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오히려 인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기술이 발달할 수록 기괴한 물건이 쏟아져 나오고, 법령이 많아질 수록 도적이 더 많이 생겨나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진다.
반면에 현명한 이를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중히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도둑질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위정자의 임무는 모든 일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위정자 자신은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백성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 백성들 스스로가 저절로 감화되고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가 말하는 이상 정치이고 무위 정치(無爲政治)이다.
나라를 다스려도 다스리는 사람 없이 다스려지는 나라 이런 나라가 노자가 꿈꾸었던 정치의 이상이다.


공자의 예(禮)에 대한 노자의 비판

노자→당신이 찾는 예(禮)는 벌써 옛날 것으로 그것을 내놓은 성인들의 뼈조차 없어진지도 이미 오래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말뿐이다.
또한 군자란 시대를 만나면 수레를 타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고 때를 못 만나면 바람 부는 대로 어디론가 가 버리는 것이다.
내가 듣기는 훌륭한 장사꾼이 되면 좋은 물품은 깊이 감춰 두고 가게는 텅 빈 듯이 하며, 또 수양이 깊은 사람이 되면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은 바보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이런 때를 만나 그렇게 건방지고 욕심꾸러기이고 잘난 체하고 지나친 뜻을 가지고 있느냐?
그런 것들은 빨리 버려야 한다.


그래 보았자 아무 이득도 없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뿐이다.

공자→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짐승은달아 난다. 뛰는 놈은 그물을 쳐 잡고 헤엄치는 놈은 낙시줄로 잡고 날으는 놈은 활로 쏘아 잡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 나는 용은 어떻게 잡지?
내가 만난 노자야말로 진짜 용같은 사람이다.


인의(仁義)에 대한 공자와 노자의 대화
어느 날 공자가 노자를 만나, 가지고 갔던 십이경을
열어 보이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노자는 말의 가운데를 끊으면서 말했다.
노자:그거 무어 그리 길게 야단인가?


좀 간단하게 요령을 꼬집어 말할 수 없을까?
공자: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인의(仁義)뿐입니다.
노자: 그러면 한마디 묻겠는데 그 인의(仁義)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타고난 본성이란 말인가?
공자: 그렇지요. 군자는 인(仁)이 아니면 인간으로 완성될 수도 없고, 의(義)가 아니면 인간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노자:그렇다면 인의(仁義)란 무엇인가?


공자: 마음속으로부터 남과 같이 즐기고, 자기의 사욕을 없이하고, 널리 사랑하는 박애의 마음입니다.
노자:그런 것은 말세의 쓸데없는 허튼 수작이다.
그대가 이 세상을 구한답시고 애쓴다지만 그것은 주제넘은 걱정일 뿐이다. 하늘 땅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고, 해와 달은 중천에 걸려 언제나 밝고, 새나 짐승들도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으며, 나무가 땅위에 서있으면 족하지 그대는 무슨 문제가 그리도 많은가?
그대도 자연을 따라 살아가면 어떤가.
자연과 하나 되어 살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겠나.
인(仁)이니 의(義)니 하며 깃

발을 날리고 북을 치면서 잃은 아이라도 찾는 듯이 야단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대야말로 문제 꾸러기이고, 사람을 미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노자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서문
의미 전달에 있어서 말이라는 것은 글보다 전달 효과가 크다. 그 이유는 말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느낌까지도 전할 수 있고, 또 대화의 과정에서 말과 함께 몸짓과 눈빛이 사용되기 때문에 상대에게 자신의 의미를 보내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글자는 고정화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 뜻이 오해가 될 수 있다.

특히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언어의 틀이 담아 내기 힘든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힘들 뿐더러, 그것이 고정화되어서 이해된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것 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어에 구애를 받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언어는 도구이다.

의미가 전달이 되었으면 언어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한 가열찬 비판으로 새로운 작업의 성과가 있었으면 한다. 노자는 책이 아니다. 책이 되어감이다. 아직 완성된 책이 아니다. 자라는 나무와 같이 멈춤이 없이 자라나기 바란다. 멈추는 순간 노자는 책이 되고 지식이 된다. 노자를 지식으로 알지 않기를 바란다. 노자는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생각이 난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진리도 고정되는 순간 죽는다. 노자가 살아 숨시기 위해서는 고정된 해석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원본은 김용옥씨의 길과 얻음의 성경을 큰 틀로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미하였다. 또한 이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준 전통철학연구회의 김승훈, 김옥선, 남은경, 김인석, 김완수, 함지형 학우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글이 나오기까지 사년동안 나를 가르쳐주시고 질책과 함께 든든하게 지켜보아주신 다섯분의 은사님의 영명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1995년 11월 21일 유재용

일장
직역
도를 도라고 규정지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규정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는 것으로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가장자리를 본다.


이 양자는 같은 것이나 나와서 이름을 달리 했다.
같은 그 근원을 일러 그윽하다고 하고,
그윽하고 또 그윽하다고 하여 뭇 묘함의 문이다.

해석


도는 바람이다. 느낄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바탕이다. 도화지의 흰 여백이다.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면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그림이 완성이 되었을 때 여백은 없어진다. 여백이 없는 도화지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도화지에 그림이 꽉차 있다. 화가는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 그림은 이제 성장을 멈춘다. 고정 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도 그 도화지에는 더 이상 그릴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 비어 있는 것이 바로 바탕이다. 이 바탕의 총체가 도이다. (도화지에 그림이 꽉차면 여백은 사라지는가? 고민해 보기 바란다.)


도는 현재이다. 현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도를 도라고 규정짓는 것에 반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파를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非常道라고 한 것이다.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 말을 음미하라. 늘 그러한 도가 아닐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느 순간에는 규정지은 도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단 그 순간에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만약 순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면 노자는 非道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시간의 산물이 아니다. 현재이다. 도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 순간 도는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흘러감이 도이다. 흐르는 강물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순간적인 감정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정된 것을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단지 현재에 자신이 느끼는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도는 과정이다.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상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내속과 밖에 흐르는 생명력이다. 도는 나이기도 하고 너이가도 한 것이

다. 그리고 노자의 도는 진리, 근원이라 불리우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진리 근원의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이름이라는 것은 편의를 위해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유재용 이 말은 한 인격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한 인격체는 아니다. 이 말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한 인격체를 대변할 수 는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고정되어 나타나서, 이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실체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름이 실체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는 의사 소통의 수단이다. 책이라는 말은 한글을 아는 사람에게 통용될 뿐이다. 영어로는 book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우리는 책이라는 말에서 책의 의미만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구분 짓지 않음이다. 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인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인위가 내재해 있지 않은 것이 하늘과 땅 -우주- 그 자체이다.


이름을 짓는다. 하늘과 땅도 이름이다. 이름이 생기면 사물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의 개체가 구분되어 진다. 틀을 가지지 않은 것에 어떻게 이름을 붙이겠는가. 나와 남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다면 남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우주를 틀 지어 볼 때 이름이 생긴다. 이것이 인위이다. 틀 지어 보거나 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의식의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없이 우주를 대하면 그 묘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묘하다는 것은 총체의 모습이다. 이 총체에는 나도 들어가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경험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와 우주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묘라고 표현했다.


욕심을 가지고 보면 세상의 구체적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천하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물도 우주의 한 부분이다. 아니 우주이다. 완벽하게 우주와 구분되어 있는 것은 없다. 만약 우주와 구분 된 것이 있다고 가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양자 무명과 유명은 같은 것이다. 우주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사물에 이름을 지어서 천지와 만물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 무명과 유명의 근원이 바로 道이다. 이 도는 그윽하고 그윽한 것이다. 뭇 묘함의 문이 되는 것이다.

이장
직역
하늘 아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까닭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못생긴 것이다.
모두 착함의 착한 까닭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 주고,


길고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소리는 서로 조화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래서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한다.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을 만들면서도 잔소리하지 않고,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으려 하고, 하면서도 기대하지 않는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 공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아, 머무르지 아니하는 것이 가지 않는 것이다.

해석
아름다움은 절대적인가. 나와 네가 느끼는 미의 기준이 같은가. 책을 덮고 잠시 고민하기 바란다.

아름다움은 시대 의식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시대 의식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개체에 있어서도 미의 의식은 바뀐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한다. 이것은 개성이 말살된 것이다. 그리고 변화 의지가 박탈당한 것이다. 고정되어 있는 미는 죽은 것이다. 곧 썩어 갈 것이다. 미녀를 본적이 있는가.

그 미녀가 고정되어 있는가. 변한다. 사람(미인) 자체가 변하고, 나의 의식이 변한다. 그리고 나와 남의 미적 기준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의 사물이나, 인물을 아름답다고 하면, 그들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변화하고 싶어도 변화하지 못한다. 자유의 박탈인 것이다. 변화가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미를 미로 느끼면 그것은 이미 추악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노자는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아는 것에 반대를 한다. 착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착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난 체 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절대적으로 착하다고 규정 짖는다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위 -이를테면 노인의 짐을 들어 드리는 행동- 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가치의 절대화에 반대한다. 충이 최고의 善인적도 있었다. 임금을 위하여 전장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들, 그들은 선이라는 이름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박탈당한다. 가치가 절대화되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된다면 그것은 매우 추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된다.


길다는 것은 짧음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길다는 것이다. '길다'라는 자체가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과 쉬움도, 높고 낮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하는 것이다.
함이 없는(無爲)의 의미는 매우 반어적이다. 爲라는 것은 행위 의지를 가리킨

다. 즉 이미 출발전부터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사람을 그것에 맞추어 나가려고 한다. 이것에는 강제가 따른다. 위는 욕망을 가지고 하는 일이다. 무위라는 것은 집착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이다.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로 남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노자는 남을 가르치는 것도 반대를 한다. 말없이 행하는데 다른 사람이 본받을 만하면 그 사람을 본받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면 그것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천하에 내것이 있는가.


공치사가 무엇인지는 알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공치사라고 한다. 일 자체가 좋아서 일을 하여야 한다. 남의 보답을 바라고 자신이 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을 위해서 일을 했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한 것이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것에 머무르지 마라. 머무르게 된다면 자신은 그것에 안주하게 된다. 발전이 없게 된다. 그때 나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적을 쌓을 수 있다. 새로운 공적을 쌓을 수 없을때 과거의 공적을 내세우게 된다.

삼장
직역
지식인을 받들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라.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하라.
욕심 낼 것을 드러내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이 혼란하지 않게 하라.
이런 이유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욕망이 없게 하라,
무릇 지식이 있는 자로 하여금 감히 행하지 못하게 하라.
함이 없이 행하면 즉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해석
투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희소가치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대학에 오고 좀더 많은 공부를 하려는 것은 공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가. -잠시 생각하라-
공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공부를 해서 어디에 취직을 하고, 무엇이 되겠다는 야망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왜 사법 고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그것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럼 사법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단지 모든 사람이 사법 고시에 합격을 하려고 하고, 그것을 위해서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법관이 있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다. 진정으로 중요한 일들은 재화를 생산해 내는 일이다. 나는 쌀을 만드는 농부와 물건을 만드는 노동자가 법관보다도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법관이 되고, 소위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생산을 포기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식인이 되어 사회 지도층이 되기를 원한다. 메스 미디어, 교육이 이것을 부채질한다.

그럼 누가 생산직에 근무하는가.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낙오자로 평가한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으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낳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노자가 살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엘리트를 중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적성과 꿈을 무시 당하고 소모적인 다툼에 끼여드는 것이다. 똑똑한 이를 숭상하지 마라. 숭상을 하면 모든 사람이 괭이와 삽을 버리고 책에 매달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의 우위에 서기 위해서 다툴 것이다. 그 위에서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패배자는 다수이다. 패배자가 많을 수록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는 불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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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의미(발췌)

도덕경,체도(體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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