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고호, 최북
- 우리미술이야기2012/01/21 09:34
아침에 그려 아침밥, 저녁에 그려 저녁밥
출처: http://cafe.daum.net/gsjoenn/EK5i/278?docid=1BkwM|EK5i|278|20110726074102&q=%C3%D6%BA%CF
최북이 언제 태어났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죽었는 지도.... . 하지만 어떻게 죽었는 지는 알고 있습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날 동대문 성벽 아래에서 얼어 죽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고호라는 화가가 불행한 일생을 살았다고 하여 그 그림 만큼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살았던 최북의 삶만큼 기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북은 숙종 임금 때(1712년경), 중인집안(양반이 아닌 천한 계급)에서 태어나 영조 임금 때(1786년 경) 죽습니다. 본래 이름은 최식이고 호는 호생관이라고 합니다. 호생관이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로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을 조금 비꼬아서 만든 것이지요.
비슷한 호가 또 하나 있는데 ‘칠칠이’라는 호입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머리가 좀 모자라는 사람 이름같기도 하고 우습지요? 최북의 ‘북’자는 한자로 ‘北’이라고 씁니다. 북쪽 북자이지요. 이 글자를 세로로 나누면 일곱 칠 자 두개로 됩니다. ‘七七(칠칠)’. 바로 칠칠이가 되는거죠. 호는 보통 점잖고 무언가 고상한 뜻이 담겨 있는 말로 정할텐데 왜 최북은 뻔히 남들의 놀림감이 될만한 호를 지은 것일까요?
여러 분, 혹시 어머님이 공부하라고 야단치시면 막 공부하려고 하다가도 일부러 다른 책을 보거나 잠을 자 버린 경우가 없나요? 아마 최북도 그런 심정에서 지었을 것입니다. 겉모습이 보잘것 없고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사회에 대한 억울한 마음과 불만이 커지다 못해 “그래, 어디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라.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최북이지만 남부끄러운 짓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테니.” 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입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최북은 열 일곱살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 와 지금의 약수동, 금호동 지역에 움막을 짓고 삽니다. 그때에는 약수리라고 했는데 그곳에는 이런 사연이 전해 내려 옵니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터전을 마련한 최북은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삽니다. 세간살이도 없는 단칸방에서 하루종일 그림을 그립니다. 아침에 한 장 그려서 아침밥을 먹고, 저녘에 한 장 그려서 저녁밥을 먹습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그림을 팔았던 것은 아닙니다. 돈푼께나 있다고 거들먹거리거나 힘이 있다고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는 바가지를 씌우거나 아예 팔지 않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냥 주기도 합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최북이 동네의 지체높은 양반집을 찾아 갔습니다.
그집 하인이 최북의 이름을 그냥 부르기가 미안했던지 “ 최직장( 보잘것 없는 벼슬의 한 종류 )이 왔습니다.” 하자 최북은 화를 내며 “너는 어찌해서 나를 최정승이라 하지 않고 직장이라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웃으면서 “언제 정승(가장 높은 벼슬)이 되셨습니까?” 하고 되물으니 최북은 “그러면 내가 언제 직장이 된 적이 있었더냐. 기왕에 가짜 벼슬로 부를 바에야 어찌 정승이라 하지 않고 직장이라고 하느냐?”라고 말하고는 주인을 만나지 않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최북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가짜로 꾸미는 것을 싫어 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최북은 술을 굉장히 좋아 했는데 밥은 굶어도 술은 하루에 5,6되는 먹었습니다. 큰 음료수병으로 9병쯤 되니 굉장히 많은 양이지요. 최북을 잘 아는 남공철이라는 사람이 쓴 “최칠칠전”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 여러 장사치들이 술병을 들고 팔러 오면 칠칠이는 집안에 있는 책과 종이 그리고 옷감을 전부 털어주고 사곤 했다. ”
이쯤되면 최북과 술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그림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최북의 그림은 대략 100여 점입니다. 그런데 모두 다 같은 사람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차이가 많습니다. 그만큼 수준차이가 난다는 것이지요. 최북은 술이 적당히 올라서 기분이 좋을 때에는 그의 성격만큼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고 대담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취했을 때는 자만해서 헛점이 많은 그림을 그렸지요. 최북에게 있어서 술은 그림에 영감을 주는 좋은 친구의 역할도 하지만 세상 고통을 잊게 해 주는 마취약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분풀이를 술로 대신하는 것인 지도 모르지요.
최북은 자기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잘됬다고 생각하는데 그림값을 적게 주면 화를 내며 그 그림을 찢어 버렸고 반대로 그림이 시원찮은데 값을 많이 주면 돈을 도로 주어 돌려 보내고는 껄껄껄 웃으며 “ 저녀석은 그림값도 모르는 놈일세. ” 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최북이 산만 그리고 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그 사람이 물어 보니 붓을 던지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아, 종이 밖은 모두 물 아니오. ”
여러 분은 미술 시간에 바탕을 모두 메꾸도록 배우지요? 하지만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 바탕을 다 메꾸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히려 적당하게 바탕을 비워 놓는데 그 부분을 ‘여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기 싫어서 비워 놓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종이 밖까지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에 산수화를 그린다면 그림 속의 산과 물이 그림 밖에까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더욱 풍부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여백의 멋’을 모르는 사람에게 최북이 멋지게 대답한 이야기입니다.
최북의 겉모습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합니다. 키는 작달막하고 등에는 항상 그림 그리는 도구통을 메고 다녔는데 옷도 남루한데다가 한쪽 눈마저 애꾸여서 영락없는 거지꼴입니다. 아이들이 “칠칠이, 칠칠이.” 하고 놀려도 사람좋게 웃기만 합니다. 그러나 비록 한 눈뿐이지만 눈빛은 살아 있고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으며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최북의 눈이 원래부터 애꾸였던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꺽이지 않는 그의 성격 때문에 눈을 잃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서 내노라하는 부자, 김판관이 찾아 왔습니다. 처음에는 하인을 시켜서 최북의 그림을 사러 왔지만 최북이 거절하자 술과 인삼, 화선지를 들고 직접 온 것입니다. 김판관은 벼슬을 하는 관리인데 백성을 보살피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조정과 짜고 장사를 하거나 돈놀이를 하여 부자가 된 사람으로 뇌물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최북이 아주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지요.
“이리 오너라.”
“누가 날 찾소?”
“나 김판관인데 값은 높게 쳐 줄테니 그림 하나 삽시다.” 김판관이 오만하게 말합니다.
“그림팔 것 없소.”
“돈을 먼저 줄테니 , 산수화 병풍 하나 그려 주시오.”
“댁한테 팔 그림은 없으니 돌아가시오.”
“뭐, 뭐라고?”
“본래 그림이란 욕심이 많은 사람이 가지면 욕심만 더 생기는 법이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망친 사람들이 댁과 같은 욕심많은 관리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그림이나 파는 환쟁이로 오해하지는 마시오.”
“아니, 이 이놈이.. 네 이 노옴. 그림이나 그려 파는 주제에 무엇이 어떻다고? 여봐라. 그림께나 그린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저놈을 어서 끌어내 주리를 틀지 않고 무엇하느냐.”
주리를 튼다는 것은 죄인을 고문하는 방법으로 매우 가혹한 형벌이라 영조가 없애려고 했으나 남아 있던 것입니다. 최북을 묶으려고 네 명의 힘센 하인들이 달려들자 최북은 김판관을 매섭게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초리가 얼마나 사나웠던지 김판관이 움찔합니다.
“ 내 비록 환쟁이이지만 너희 같은 더러운 놈들의 손을 내 몸에 대게 할 수는 없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최북의 기세에 눌려 잠시 하인들이 멈칫하는 순간 최북은 칼을 들어 자기의 눈을 찌릅니다. 붉은 피가 남루한 옷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립니다. 김판관이나 하인들이나 모두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 어허, 정말 독한 놈이로고....” 하며 물러 갑니다.
앞의 이야기를 보면 최북이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 아닌가 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못 볼 꼴을 보면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대들지만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양반, 상놈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 됨됨이가 올바르고 생각이 트여 있으면 누구든 서슴지 않고 사귀었습니다. 물론 최북의 그림이 훌륭하기 때문에 예술을 아는 양반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지요.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빼어나게 잘 썼고 시도 잘 지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최북이 시와 그림에 뛰어나더라도 그 당시는 엄격하게 신분을 따지던 유교사회였는데 양반들이 최북과 친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최북은 거침없이 바른 말을 잘하고 때로는 은근히 양반들을 놀리기까지 하거든요.
영조 임금 때에는 그 전보다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어 가던 때입니다. 백성들은 왜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앉아 글만 읽고 누구는 평생토록 밭에 나가 일만 해야할까 하고 의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양반들 중에는 서양의 발달한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하늘을 보고 별을 관찰하거나 농사를 잘 짓는 법을 연구하고 온 나라를 발로 뛰어다니며 지리를 연구하는 일들은 그전같으면 천한 일이라 하여 양반들은 손도 대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선조 임금 때부터 아주 서서히 싹을 틔워 오던 이런 학문을 ‘실학’이라고 부릅니다. 실학은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좋은 점을 실제 생활에 써먹는 학문입니다. 실학자들은 사람을 양반 상놈으로 나누어 차별하고 노비를 두어 평생 부려먹는 유교 양반사회를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영조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정조는 노비제도를 없애려고까지 했습니다.
최북이 사귀었던 사람들 중에는 실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 익은 높은 벼슬에 올랐던 학자인데 백성의 대부분이 농민인 그때 농민들을 위하여 “균전법”을 주장했습니다. 균전법이라는 것은 집집마다 농사지을 꼭 필요한 땅을 정해 놓고 그 땅은 절대로 팔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얻고 그 댓가로 땅을 팔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글쓴이: 신창중 조소영>
'좋 은 글 > 시와 음악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리(Ali) - 킬리만자로의 표범. (1) | 2012.05.26 |
---|---|
알리(Ali) - 고추잠자리. (0) | 2012.05.26 |
가시나무새-알리(Ali) (0) | 2012.05.26 |
조항조 - 남자라는 이유로 (0) | 2012.04.15 |
신유 - 잠자는 공주 (0) | 2012.04.15 |
쇼팽 녹턴 듣기 (0) | 2012.01.31 |
오우가 [五友歌] (0) | 2012.01.21 |
서산대사의 시비문 | (0) | 2012.01.16 |
모두가 사랑하는 추억의 팝송 모음곡 (0) | 2011.12.31 |
abba 히트곡 노래모음 (0) | 2011.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