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란·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진짜 이유

[전쟁국가 미국·4강-⑤] 국제석유체제와 이란, 이라크
미국이 이란·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진짜 이유
 
 
아람코 출범과 영미석유협정의 무산에서 분명해진 것은 국제 석유시장의 운영과 통제는 전적으로 석유카르텔의 몫이라는 점이다. 즉 미국이나 영국 정부의 직접 통제는 허용될 수 없으며, 정부 역할은 석유카르텔의 시장 지배를 위한 정치군사적 지원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미국 석유메이저와 정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석유메이저는 첫째 석유를 미국 및 동맹국에 합리적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둘째 중동지역의 우방 국가들에 대한 재정 지원의 통로 역할을 하며, 셋째 중동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소련의 남진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석유메이저는 거대한 독점 이윤을 보장받으며 미 국내법에 의한 반독점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묵계, 또는 관행이 확립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란의 석유 국유화다.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는 국제 석유카르텔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지만 이 도전을 막아내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카르텔의 위상과 역할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미국 정부가 마셜플랜을 통해 미 석유업계를 지원한 실상을 알아본다. 미국은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위해 1948년부터 4년간 160억 달러를 지원했는데 그중 10% 이상이 바로 미국 석유 구입이었다. 단일 지출 항목으로 최대였다.

미국은 당시까지 석탄 위주였던 유럽의 에너지 소비를 석유 위주로 바꾸려 했다. 중동 지역에서 생산되는 값싼 석유의 소비처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강력한 단결력을 자랑해온 서유럽의 탄광노조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라는 풀이도 있다. 어쨌든 미국은 마셜플랜 지원금의 10% 이상을 미국 석유 구매에 쓰도록 강제했으며 이에 따라 당시 서유럽 석유의 절반을 미국의 5대 석유 메이저가 공급했다.  

전후 유럽 석유 시장을 지배한 미국 석유메이저는 1945년 배럴 당 1.05달러였던 석유 가격을 1948년 2.22달러로 2배 이상 올려 폭리를 취했다. 유럽 국가들은 귀중한 달러를 아끼기 위해 독자적인 정유공장을 설립하려 했으나 미국정부는 불허했다. 미국 석유업계의 강력한 로비 때문이었다. 이처럼 미국 정부는 미 석유업계의 판촉 도우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내 반독점 정서의 부활과 독점 규제의 좌절 

앞에서 본 것처럼 2차 대전 발발 이후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미국 정부도 국제 석유시장에 대한 다양한 개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특히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중반 사이 석유카르텔과 정부 간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집단으로서의 석유카르텔이 미영 정부보다도 강력해진 것이다. '반공'과 '안보'를 이유로 정부의 시장 규제를 저지한 것이 비결이었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에서는 거대 기업, 특히 석유메이저들의 독점행위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의회와 법무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다양한 정부 기관에서 석유메이저의 담합과 불공정 거래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고 형사 처벌까지 추진됐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반독점운동이 재연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독점 규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초기인 1953년경 무산되고 만다. 한국전쟁과 이란의 석유 국유화가 빌미였다. 냉전의 승리를 위해서는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석유메이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가 승리한 것이다.

1946년부터 미국 경제가 침체하면서 기업 집중이 다시 일어났다. 1920년대에는 동종 업종 간의 인수 합병으로 10년간 약 1100개의 기업이 사라진 반면 2차 대전 이후에는 수평 합병이 특징이었다. 예컨대 진공청소기 회사가 살충제 회사를 흡수하는 식의 문어발식 확장이었다. 즉 자본력 있는 기업이 닥치는 대로 기업 사냥을 벌였다.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사라졌고 그만큼 대기업에 대한 적대감은 높아졌다. 특히 대형 석유기업이 표적이었다.

석유기업은 전쟁 기간 떼돈을 벌었다. 군납 석유로 폭리를 취했는가 하면 제3국(스페인)을 통해 나치 독일에 석유를 공급했다. 뉴저지스탠다드는 독일 기업 I. G. 파르벤에 협력해 연합국의 합성고무 개발을 방해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한마디로 적국에 부역한 것이다. 몰락한 중소기업과 진보주의자를 비롯해 노동조합, 여기에 중소 석유사업자들까지 가세해 석유메이저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밝혀내고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법무부 반독점국, 연방 공정거래위원회(FTC), 상원 중소기업위원회 등에서 각기 독점행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다. 이 가운데 FTC가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The International Petroleum Cartel: 국제석유카르텔에 관한 공정위 보고서)가 가장 영향력이 컸다.

FTC는 1949년부터 미국 석유산업에 대해 조사했는데 자료 제출 명령 권한(수사권)이 있었기 때문에 석유산업의 깊은 내막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아크나캐리 협정과 레드라인 협정이 체결된 1928년부터 1952년까지 오랜 기간 석유카르텔의 작동방식을 추적했다.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안보 이유로 삭제됐을 정도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 우리가 석유카르텔의 작동방식을 대략이라도 알게 된 것은 FTC 보고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04년 아이다 타벨의 역작 '스탠다드석유회사의 역사'에 필적하는 탐사 보도의 기념비적 저작이었다. 타벨의 탐사 보도가 스탠다드 트러스트의 해체를 가져온 것처럼 FTC 보고서는 석유카르텔의 몰락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런 만큼 이 보고서는 석유메이저에게 대단히 위험한 보고서였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이 보고서의 공개를 원치 않았다. 석유카르텔의 담합을 묵인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상원 중소기업위원회 위원장인 존 스파크먼 의원이 보고서를 언론에 유출하면서 철저 수사를 촉구했다. 대중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 것이다. 보고서가 공개된 이상 독점행위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해 보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둘로 갈라졌다. 국무부는 안보를 내세워 석유카르텔의 담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법무부는 공정을 앞세워 처벌을 주장했다. 결과는 국무부의 승리였다.

한국전쟁 이후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카르텔 회원사들에게 국제 사회에 대한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요청했다. 한국전쟁으로 석유 수요가 늘어난 반면 이란의 석유 수출이 봉쇄됐으므로(1951년 7월-1953년 8월) 공급을 대폭 늘려야 유가가 안정될 터였다.

핵심 동맹국인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유가 인상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애치슨의 행동은 미국 정부가 사실상 카르텔의 담합을 인정한 셈이다. 즉 반독점법 위반이다.

법무부는 이의를 제기했다. 법무부는 독점행위 조사를 통해 형사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석유카르텔의 담합 행위를 형사 기소하기 위한 대배심 구성에 착수한 터였다. 이에 대해 애치슨은 국방부와 CIA까지 동원해 국가 안보를 위해 반독점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공정 경제를 위한 독점 규제보다는 국가 안보를 위한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결국 트루먼은 애치슨의 요구에 굴복했다. 이로써 이란이 영국의 금수조치를 뚫을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란 석유에 대한 금수 조치는 석유카르텔의 담합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담합이 유지되는 한 금수 조치도 계속됐다. 이란은 미국이 "등 뒤에서 비수를 꽂았다"며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란이 아무리 싼 값에 석유를 내놓아도 구매자가 없었다. 미 국무부는 카르텔 멤버가 아닌 미국 중소 석유기업의 이란 석유 매입도 금지했다. 1952년 2월 이탈리아가 구매한 이란 석유는 예멘 근해에서 영군 해군에게 압수됐다. 이란 경제에 대한 목조르기가 완벽하게 이뤄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퇴임 직전 석유카르텔에 대한 형사소송을 민사소송으로 전환시켰다. 형사 처벌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국가안보회의(NSC) 결정이라고 변명했다. "안보적 이유 때문에 민사소송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오마 브래들리 합참 의장의 조언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석유메이저는 이란 사태의 마무리에 나서는 조건으로 이후 자신들에 대한 정부 규제를 확실하게 원천 봉쇄했다. 모사데크 축출 이후 이란을 다시 국제 석유시장에 복귀시키려면 결국 카르텔이 나서야 했다. 이는 사실상 담합 행위다. 미국의 석유메이저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대해 자신들이 뒷수습에 나서는 대신 이를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약을 요구했다.

국방부와 CIA의 강력한 요구에 못 이긴 법무부는 마지못해 그러한 약속을 했으나 메이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확실한 약속을 요구했다. 결국 NSC는 석유산업의 소관 부서를 법무부가 아닌 국무부로 이관하는 결정을 내린다. 석유메이저의 완벽한 승리였다. '안보'의 이름으로 미국 석유메이저는 정부의 모든 규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란 사태의 뒷마무리는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의 아들인 허버트 후버 2세가 맡았다. 비록 모사데크는 축출됐으나 이란 국민의 거센 반영 감정 때문에 영국이란석유회사(AIOC)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이란에 복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버 2세는 1953년 10월부터 영국, 이란을 오가며 중재를 진행했다. 이란 석유는 석유메이저들의 컨소시엄 형태로 운영하기로 했다.  

지분 구성은 AIOC가 40%, 로열더치가 14%, 미국의 5개 석유메이저가 각 8%, 프랑스의 CFP가 6%였다(5대 미국 기업은 각자 1%를 갹출해 미국의 9개 중소기업에 배분했다. 반독점 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다). 영국의 독점적 영역이었던 이란에 미국과 영국이 40%씩 동등하게 진출한 것이다. 어부지리라고나 할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 격이다.

이로써 미국은 이라크 석유의 23.75%와 사우디 석유를 100% 독점한 데 이어 이란의 40%까지 갖게 됐다. 1960년이 되면 엑슨, 셰브론, 모빌, 걸프, 텍사코 등 5개 미국 석유메이저가 중동 석유(확정 매장량 1640억 배럴)의 60%를 장악한다. 특히 1944년 미국의 4분의 3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됐던 중동 석유의 확정 매장량은 1950년 130%, 1960년 4배까지 늘어났다.

반면 이란은 원유 수입의 50%만을 갖게 됐다. 당초 영국이 제안했던 것이다. 카르텔은 여기에 AIOC 총 이윤의 20% 배당까지 제안했었지만 모사데크 제거 이후 이는 없던 일이 됐다. 이란 석유 국유화 사태의 최대 승자는 미국, 최대 패자는 이란이 된 셈이다.

이란, 이라크의 자원민족주의 

2차 대전을 고비로 세계 석유산업의 중심은 미국,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 서반구에서 사우디, 이란, 이라크 등 중동으로 넘어간다. 중동의 석유 매장량이 워낙 많은 데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어 석유 운송에 최적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석유 메이저들이 중동지역에 주목하게 된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자원민족주의다.

1938년 멕시코가 자국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했고 베네수엘라에서도 국유화 논의가 끓어올랐다. 베네수엘라는 2차 대전 동안 석유 수요 증가로 수입이 늘어나면서 국유화까지 나아가진 않았지만, 1949년 석유메이저와 원유 수입의 50 대 50 배분에 합의한다. 산유국 중 최초였고, 최대치의 양보를 이끌어낸 셈이다.  

이처럼 산유국들의 권리 요구가 거세지자 석유 메이저들은 중동에 눈을 돌린 것이다. 실제로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등은 워낙 작은 나라인 데다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석유메이저들이 통제하기 쉬웠다. 또한 사우디는 미국과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었기에 미국과 한 몸처럼 움직였다. 게다가 이들 국가는 왕정, 또는 토후국이었다. 민주국가가 아닌 탓에 국민 여론을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사우디와 함께 중동의 3대 산유국인 이란, 이라크는 사정이 달랐다. 영국의 오랜 지배와 착취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 바로 이 두 나라가 중동의 자원민족주의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가 그 시발점이다.  

이란의 경우, 1932년 영국은 대공황을 이유로 AIOC의 로열티를 전 해의 4분의 1로 일방 감축했다. 레자 샤는 공개적으로 회계장부를 불태우며 항의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상황에 따라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며 군사 위협으로 샤를 굴복시켰다. 자본주의 국가들 간에는 그토록 신성시 되는 '계약 이행의 의무'가 제3세계 국가에는 간단하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이라크는 1차 대전 이후 생겨난 신생 국가로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영국이 내세운 인물이 이라크 국왕이 됐다. 북부의 쿠르드족, 중부의 수니파, 남부 시아파 등으로 갈라진 이라크는 애당초 하나의 국가로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철권통치로 다스리면서 이라크의 국부를 최대한 착취했다.  

1921년 남부 시아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국은 공중 폭격으로 주민 저항을 분쇄했다. 국내 치안을 위한 공습은 이것이 세계 최초다. 이후에도 영국은 조세 징수관을 파견하기 전에 공중 폭격을 감행했다. 현지 주민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한 조치다. 반란의 소문만 돌아도 폭격기를 보내 경작지를 불태워 버렸다. 단 한 푼이라도 쥐어짜내기 위한 야만적 조치였다. 이러한 영국의 공습 정책에 대해 당시 이라크 주재 미국 영사는 "야만적"이라고 비판했고, 영국 의회에서도 문제가 될 정도였다.  

결국 이라크에서는 1958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국왕이 살해됐고 영국은 축출된다. 이후 이라크는 소련과 협력해 석유산업 자립화 정책을 펼치며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과 1973년 1차 석유파동 등 자원민족주의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

한편 1953년 8월 이후 미국의 맹방이었던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에 의해 반미로 180도 급선회한다. 그 여파는 이란-이라크전쟁(1980-1988년)을, 이란-이라크전쟁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1990년 8월), 이는 1차 이라크전쟁(1991년 2월)과 2차 이라크전쟁(2003년 3월)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석유 통제권을 둘러싼 미국과 산유국 간의 투쟁이 대중동전쟁이라는 참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에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와 미국 비밀공작에 의한 모사데크 제거가 있다. 비밀공작은 단기적으로는 이란을 친미국가로 만들었지만 결국에는 훨씬 더 심각한 역작용을 초래했다. 비밀공작이 이란을 극단적 반미국가로 만드는 결정적 원인이 된 것이다. 이른바 '역풍(blowback)'이다. 다음 회에는 중앙정보국(CIA)의 비밀공작(covert action)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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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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