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鏡虛, 1849년~1912년) 선사 이야기>
경허 선사
천장사와 경허 선사 부도
경허(鏡虛), 그는 누구인가?
선함과 악함이 부처와 호랑이보다 더하신 분
바로 경허 선사이시다
돌아가셨으니 어느 곳을 향해 떠나셨는가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만공 월면)
제자 만공(滿空)이 스승의 입적 소식을 듣고, <경허 법사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聞鏡虛法師遷化吟)>라는 시를 읊었다. 만공이 써 내려간 시에서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는 구절에는 제자 만공이 파악한 스승 경허의 고독했던 일생을 함축하고 있다. 술은 세속의 술이 아니다. 꽃밭은 세속의 꽃밭이 아니다.
경허의 술은 자신을 이류중행(異類中行, 중생 속으로 들어가다)에 몰아넣기 위한 미망의 술이며, 꽃밭은 경허 자신이 선택한 가시밭이다.
경허는 삼수갑산에서 쓸쓸히 입적했다. 당시 경허의 저고리 속에는 다음의 게송이 들어 있었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
속인도 아니요 중도 아닌 송경허라
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
세상 떠난 슬픈 소식은 흰 구름에 부치노라
경허 선사가 열반한지 100년이 되었다. 곳곳에서는 경허 선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경허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경허, 그는 누구인가?
느닷없이 제자와 길을 가다가 아낙에게 입맞춤을 하고 줄행랑을 치고, 술이 좋아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승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비도(非道)적인 모습이 그의 전부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불결한 피가 흐르는 한 선조의 존재를 감추려는 후손들처럼 쉬쉬하며 경허의 삶과 선(禪)을 묻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경허의 존재는 거대해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아직도 한국불교에 큰 자국을 남기고 있다.
현재 한국선이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에도 정작 경허는 막행막식(莫行莫食)의 기행을 일삼은 파계승, 선문의 이단자로 외면당하고 있다.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미치광이’ 쯤으로 여기는 이도 있다.
경허는 봉건 잔재를 깨부수고 오염된 조선불교를 깨끗이 씻어냈다. 경허를 통해 한국불교는 다시 생성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경허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들이 주도한 1954년 이후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현대 한국불교가 그 목소리를 가진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불교는 선구자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허는 잿밥에만 골몰하며 목탁을 두드리던 구한말 불교계에 선의 정신과 선종교단으로서 한국불교가 지녀야 할 전통의 복원을 이룬 인물이다.
만공이 스승 경허에게 물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합니다만, 스님은 왜 그렇게 술을 드시는 겁니까?”
경허는 만공의 말꼬리를 끊으며 말했다.
“허 참, 자네는 아주 도가 높네 그려. 나 같으면 술을 먹고 싶으면 가장 좋은 밀 씨를 구해서 잘 키워 술을 빚어서 마시고 또 마시겠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 씨를 구해다가 잘 가꾸어서 파전을 먹고 또 먹겠네.”
실종자 경허,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경허
경허는 무너져 가는 조선을 걱정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누어도 편치 않구나’라고 노래한 우국(憂國)의 선승이었다. 경허는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허는 실종자이기도 하다. 경허의 실종과 불귀(不歸)는 망국(亡國)의 조선, 식민지 대한제국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너무도 조선적인 비극이 응축돼 있다.
경허의 생애가 후대에 전해지고 검토되는 기준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전승과 기록으로 전해지는 전기(傳記)가 있다. 기록으로 남겨진 전기는 연대(年代)와 그 인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갖추어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구전된 이야기들은 선사로서의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고 때로는 엉뚱하기조차 하다.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는 현대 한국선의 달마, 경허에 관한 필자의 오랜 그리고 절실한 사랑의 기록이다. 필자는 이 평전을 쓰기 위해서 수년간 인간 경허, 시인 경허, 선승 경허의 체류지를 답사했으며, 경허선(鏡虛禪)의 세계를 축약해 전하는 1943년판 원본 <경허집(鏡虛集)>을 몇 번이고 숙고하며 읽었다.
필자는 경허의 길을 추적했으며, 왜 경허 스스로 이단자라는 운명을 감수하고 저 북방고원에서 방랑자로 쓸쓸히 소멸했는지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선의 탐구자들은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경허를 둘러싼 진부한 소문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오직 경허의 선과 인생을 알고자 하는 소수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위는, 민족사가 펴낸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라는 경허 선사 전기의 출판사 서평이다.
조선말기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난 경허 선사의 속성은 송씨(宋氏),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가 경허(鏡虛)였으며, 법명은 성우(惺牛)였다.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618m)에 있는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해 계허(桂虛) 스님 밑에서 5년을 보내며, 기초 불교경론을 배웠다. 다시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萬化) 스님에게서 불교경론을 배우면서 제자백가를 섭렵했다. 만화 스님은 경허 스님에게 법을 전한 전법사이다. 그리고 1871년 23세에 동학사의 강사가 됐다.
1879년 옛 스승 계허 스님을 찾아가던 중 천안 인근에서 폭우를 만났으나, 마침 돌림병의 유행으로 인가에 유숙할 수 없어 빗속에서 나무 아래에 앉아 밤을 새다가 생사의 일이 크고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시킨 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문 밑으로 주먹밥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서 밥만을 얻어먹으며,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받쳐 놓고 졸음을 쫓으며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3개월이 되던 11월 15일 곡식을 싣고 온 사람들이 벼 가마니를 내리면서, “중은 시주 밥만 축낸 관계로 죽어서 소가 된단다.” “그러나 소가 되어도 콧구멍이 없는 소만 되면 되지.”라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 때 스님의 제자 원규(元奎)라는 사미가 듣고는 이 말을 전하면서, “시주의 은혜만 지고 죽어서 소로 태어나되 콧구멍 없는 소만 되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말에 경허 스님은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서산 연암산(441m) 천장사(天藏寺)로 옮겨가서 보림(保任)에 들어갔다. 그 다음 해 33세 되던 6월 비로소 일대사를 마치고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오도송을 읊었다.
<콧구멍 없는 소>
어떤 사람이 콧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을 홀연히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줄 몰록 깨달았네.
유월의 연암산 아래 길에서
야인들이 하릴없이 태평가를 부르도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돈각삼천시오가(頓覺三千是吾家)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泰平歌)
경허 스님은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깨쳤다. 깨닫고 나니 삼천대천세계가 온통 나의 집이었다. 그 전에는 나의 집은 절에 있는 작은 방 하나였다. 그렇다고 온 세계를 모두 자신 앞으로 등기이전을 한 것도 아니다. 털끝만한 작은 변화도 없었는데 세상천지가 모두 나의 집이었다.
6월 연암산 아랫길에 야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비로소 태평가였다. 자신이 부르거나 남이 부르거나 모두가 태평세월의 태평가이더라는 것이다. 장부가 할 일을 능히 다 마친 것이다. 이제 마음 놓고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다.
조선 500년 동안 잠자던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킨 근세 최고 선승이라 평하고 있다. 개심사, 부석사, 범어사, 해인사 등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교화활동을 펴면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다가 마지막엔 주로 수덕사에 주석하면서,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慧明, 1862~1937), 수월(水月音觀, 1855~1928), 만공(滿空月面, 1871~1946)과 한암(漢巖重遠, 1876~1951), 용성(龍城震鐘, 1864~1940), 침운(枕雲玄住, ?), 혜봉(慧峰, ?~?)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선종 1대 조사인 마하가섭 존자 이래 75대 조사라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라 오해 받을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했고, 남의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했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돌연 환속해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해서, 서당 훈장이 돼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술 담배를 즐겨, 윤리와 도덕을 한국불교에서 깔아뭉개기 시작한 것은 경허 성우(鏡虛 惺牛) 이후라고 평하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 대표적 불교 학자였던 이능화(李能和) 같은 사람은 경허를 사악한 자, 사기꾼이라 혹평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918년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경허 스님을 음행과 투도를 끊임없이 자행한 무법자이며, 선종총림에서 마땅하게 제거돼야 할 마설(魔說)을 설한 기인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그리하여 후대인들 중에도 경허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일탈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일탈은 한두 번에서 끝나야 하고 지속돼서는 안 된다. 깨달았다고 해서 막행막식을 해도 좋다는 것은 율장 그 어디에도 없다. 부처님도 그러신 적이 없고 마조, 조주, 대혜 종고, 그리고 보조 국사, 청허 휴정 등 역대 고승들도 음주와 여색을 한 적은 없다. 심지어 장로 종색(長蘆宗賾) 선가 편찬한 <선원청규(禪苑淸規)>에는 불음주, 불사음계를 범하면 추방하라고 명시돼 있다.
경허 스님의 반복적 지속적인 술과 여색은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승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경허 스님은 선은 크게 일으켰지만 동시에 한국불교를 깊은 수령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들이 ‘깨달은 선승의 무애행’이고 ‘깨달은 분상에서 대 자유인의 경지’라고 왜곡돼선 안 된다.
무애자재란 번뇌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욕망으로 인해 본분사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차법(開遮法, 허용과 제한)이란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이다. 막행막식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 윤창화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그 큰 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 한갓 중생에 지나지 않는 처지에 어떻게 그 큰 뜻을 시비하겠는가. 참으로 경허 선사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을 함부로 하기에 버거운 분이다. 그래서 훗날 경허 선사의 제자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은 뭍 승려들을 향해 말했다.
“화상의 법화(法化)는 배우되,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 라고 경책했다. 이러한 한암 스님의 경책은 서투르게 깨달아 경허 스님의 행리처럼 무애행(無礙行)이라는 탈을 쓴 이행(異行)을 흉내 내지 말라는 말이다.
깨친 이들의 초월적 행위를 일반 도덕이나 계율로 판가름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깨친 차원에서는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무류(無謬 infallible)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극히 위험한 오만의 발상이다. 이런 일탈행위는 치졸한 자기모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고승들이 보여준 파계행위를 불교적 깨달음과 세간적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라는 치졸한 잡승들의 오류로 확장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무명(無明)과 갈애(渴愛)가 일어나지 않도록 뿌리 뽑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통한 수행이 필요하다. 이는 사성제(四聖諦)의 마지막 진리로서 명확하게 설명돼 있다. 연기법(緣起法)을 이해한 것을 ‘깨달아 해탈한 것’이라고 잘못 알게 되면, 갈애가 일어나는 대로, 혹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하게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 대표적인 예로 경허 스님을 들고 있다. 깨달음과 해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경허 스님의 막행막식을 걸림 없는 행, 또는 기인의 행이라고 평가하면서 우러러보며 따르기도 한다.
경허 스님은 연기법을 이해한 상태에 불과하며, 그 막행막식을 보면 경전에서 정의되고 있는 수다원(須陀洹) 상태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경허 스님도 말년에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허(鏡虛) 선사 스스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게송을 들어보자.
이치는 단박에 깨치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도다.
단박에 깨달아 내 본성이 부처님과 동일한 줄은 알았으나
수많은 생애를 살면서 익힌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바람은 고요해졌으나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이치는 훤히 드러났으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소위 수행승이라 이름 하면서 이토록 적나라하게 자기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 경허 선사만의 고뇌였겠는가. 이 땅에 살다 간 수많은 수행승, 그리고 오늘도 수행에 정진을 거듭하고 있는 수많은 수행승들, 그들 역시 사람인 한, 끓어오르는 번뇌 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허는 1912년 4월 함남 갑산군 웅이방 도하동에서 육신의 옷을 벗었다. 세수 67, 법랍 59세였다. 임종게만이 그의 열반을 지켰다. 경허 스님의 열반송이다.
“마음의 달 홀로 둥근데 신령스러운 빛은 삼라만상을 삼키네,
빛과 만상이 모두 사라졌으니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어떻든 현재 ‘북 송담 남 진제(北松譚 南眞際)’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 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 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경허 선사에 대한 평은 계속되지만, 고려 말 불교의 부패와 퇴락, 조선 오백년간에 걸친 불교탄압, 그리고 일제침략 등으로 거의 멸종될 위기에 있던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분이 경허 선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국 불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한 몸을 불살랐다고 본다. 당시 깨달았다는 분도 오직 경허 선사 한 분 정도였다.
당시 워낙 문맹률도 높아, 불자들은 대승불교의 신격화된 부처님과 보살들의 영향으로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인간 붓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을 뿐더러 또한 대승경전의 부처님처럼 신이나 절대자로 착각하고, 그분은 아무런 인간적인 갈등도 고민도 없는 완벽한 분으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런 상황의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데, 그것도 동조자도 없이 혼자 힘으로….
경허 선사도 깨달음을 얻은 뒤 많은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산 속에 홀로 구름과 물과 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분은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그런 삶을 포기하고 온 몸으로 직접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 행동이 막행막식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분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것이지 결코 제 삼자가 함부로 말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실론섬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天醫heal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딱 #1분 #매일 #이 #운동 #을 #하면 #일주일 #만 #에 #혈관 #나이 #가 #9 #살 #젊어 #진다 (0) | 2022.02.14 |
---|---|
자녀의 전화 한 통이 ‘어르신 우울증’ 막는다 (0) | 2021.02.18 |
日불매·집회 항의행동 1개월…10대·보수까지 나선다 (0) | 2019.08.10 |
빌게이츠가 이 남자 이름만 듣고 14조를 투자했다_세계가 황제라 부르던 남자. (0) | 2018.12.19 |
관세음보살 정근 (,觀世音菩薩 精勤) (0) | 2018.08.21 |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 뇌는 변화한다 - 02 (0) | 2017.05.09 |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 뇌는 변화한다-01 (0) | 2017.05.09 |
동영상으로 확인하는 동작침법의 치료 효과 (0) | 2017.04.06 |
지식채널 수소 (0) | 2017.03.06 |
하루살이와 개구리 (0) | 2017.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