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이론 - 지그문트 프로이드 ▷ Social Welfare

2010.01.0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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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

1) 기본가정

정신분석이론에서는 개인의 행동과 감정, 생각 등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성적, 공격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 여기며, 결정론적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복지사는 클라이언트의 현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 특히 무의식적으로 내제되어 있는 성적, 공격적 충동을 이해해야 한다.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문제에 대한 치료적 처방을 제공하기보다는 클라이언트의 통찰력 혹은 문제인식능력과 이해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초점을 둔다.

프로이드의 인간의 성격구조의 관점 : 구조적 관점, 지정학적 관점, 유전학적 관점, 정신역동 관점이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구조적 관점

이드: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성격,끊임없는 욕구와 창동을 일으킴

자아: 초자아를 중재라며 내부세계화 외부세계 사이에서의 기능이 잘 이루어지도록 중재

초자아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과 자아이상 , 금지의 개념이 강하고 자아이상은 동일시의 결과로 나타나 개인이 닮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들을 의미한다.

(2)  지정학적 관점

인간의 내면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나누어 설명

의식 : 우리가 전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신적인 활동

전의식: 평소에 의식은 없지만 집중하거나 기억을 떠올리면 의식으로 떠올라오는 것

무의식 : 본능적 역동, 성적 본능, 충족되지 않은 소망 쾌락의 원칙의 지배

(3) 유전학적 관점

모든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현재 안에 요악하고 있다고 간주

생후 5~6세까지 인격형성에 매우 중요한 단계 경험

구강기 : 역동적 활동이 입에 있음

         구강기의 불만족 고착으로 구강 수동적 성격과 구강공격적 성격이 나타날 수 있음

          구강 수동적 성격 - 낙천적, 의존적, 인정 받고 싶어함

          구강공격적 성격 - 논쟁적, 비꼬기 , 타인을 이용하거나 지배하려함

항문기 : 관심이 배설에 있음

         항문 보유적 성격 - 고집, 인색, 복종적, 시간엄수ㅡ 지나친 청결

          항문 폭발적 성격 - 잔인, 파과적, 난폭, 적개심, 불결한 특징

남근기 : 성정체성의 기초를 형성

         오이디프스 콤플렉스 - 이성의 부모에 애정을 갖음 동성의 부모에대해 질투심

         남아 거세불안, 여아 남근 선망

잠복기 : 성적인 관심이 일싱 정지

사춘기 : 부모와 다른 성인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짐


프로이드의 심리성적발달단계이론의 중요한 개념은 고착과 퇴행

고착은 더 이상 성숙하지 못하고 특정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되행 - 현재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초기단계와 고나련된 생동으로 되돌아가는 것

사회복지사는 클라이언트가 어느 단계로 고착 또는 퇴행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개인적인 갈등이 무엇인지 파악

(4) 정신역동적 관점

성적, 본능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인다. 클라이언트가 이러한 욕구와 본능을 충분히 겪고 있는 재적 심리적 갈등와 이에 따른 개입 계획, 클라이언트의 변화에 대한 동기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

2) 주요 개념의 원칙

(1) 자아와 방어

방어기제의 사용 : 클라이언트가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방어기제를 사용, 대표적인 예

억압, 반동형성, 격리, 투사, 자기로의 전향, 퇴행, 취소 등

이드가 일으키는 갈등이 의식적으로 나타나서는 안될 경우 자아는 이를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활용

(2) 자유연상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한 치료기술

클라이언트의 억압된 충동을 발견하고 무의식을 의식 수준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다,

클라이언트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치료적 분이기를 조성하고 사회복지사는 과거의 경험을 현재와 연관하여 분석 이햐하고 클라이언트에게 해석해 줌으로써 클라이언트의 문제 이해 및 통찰력을 향상시칸다.

(3)저항

클라이언트가 치료의 목적에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저항이라고 한다.

사회복지사의 치료적 노력을 방해하거나 감퇴시키는 것

갈등과 고툥을 피하기 위해

저항은 전이적 저항 :

방어적 저항

자신이 처한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 돌리면서 외부의 원인을 제거해주거나 타인의 태도 변화를 유도해 줄 것을 기대

사회복지사는 저항이 나타나면 저항의 근본원인을 파악하고감소시키는 노력을 해야 함

저항의 형태 - 주제의 회피, 잊는 것, 늦게 옴, 감정을 숨김

(4) 전이

이전에 알았던 사람과 현재의 사람을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것

사회복지사는 클라이언트가 보이는 전이의 행동과 정서적 반응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클라이언트가 자신의 기본적인 반응 형태를 통찰해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함

(5) 역전이

사회복지사가 과거 다른 사람에게 가졌던 감정을 현재의 클라이언트체게서 느끼는 현상을 말함. 역전인로 인해 클라이언트으 ㅣ문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며 최대한 신속히 극복되어야 함

3) 개입기법과 개입목표

정신분석 이로느이 주요 기술

(1) 자유연상 :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떠오르는 감정, 생각, 기억, 환상 꿈 등을 자유럽게 말하도록 함

(2) 경청 : 클라이언트가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중립적으고 공감하는 태도로 주의깊게 듣는 것

(3) 직면 : 클라이언트에게 나타나는 저항이나 부적응적인 행동, 특정현상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하고, 이제지는 회피해왔지만 앞으로는 이애해야 할 문제로 인지하도록 도움

(4) 명료화 : 클라이언트가 직면한 심리적 현상에 대해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현상의 원인이 되는 중요한 과거력을 파헤쳐 감

(5) 훈습 : 클라이언트가 저항이나 전이에 대해 이해한 것을 반복, 심화, 확장함으로써 통합적으로 이해하도록 함

(6) 해석

클라이언트가 자신에 대한 통찰을 갖도록 클라이언트의 사고, 감정, 환상의 정신역동적 의미에 대해 해석을 하여  클라이언트에게 지적하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

(7) 꿈의 분석

꿈을 통해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소망과 욕구, 두려움을 해석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자료들을 풀어내고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함

 

지그문트 프로이드 (Sigmund Schlomo Freud)

 

Freud의 정신분석학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음도 사실이지만, 한편 이 이론만큼 전 인류의 문명에 광범위하고 깊게 영향을 미친 이론은 거의 없다고 할 만큼 20세기 서구문명에 커다란 지적 충격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Hjelle와 Ziegler, 1981). 특히 현대 심리학의 3대(三大) 주류로 꼽히고 있는 정신분석학,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인도주의 심리학 가운데서도 최초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정신의학 및 심리학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정신분석이론은 Freud 자신의 치료경험 및 자아분석과 광범한 임상관찰을 토대로 한 ① 최초의 포괄적인 성격이론, ② 이상행동(異常行動)의 치료방법, 그리고 ③ 정신과정에 관한 연구방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Freud에 의하여 창시된 정신분석학은 그의 범성욕설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일탈(逸脫)해 나간 Jung이나 Adler 등이 발전시킨 정신분석학과 구별하여 전통적 정신분석학(traditional psychoanalysis)이라 불려지고 있다. Jung의 분석이론(analytic theory)은 무의식의 과정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통적 정신분석학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Freud는 인간행동의 기본동기를 성적(性的) 에너지로 보는 반면에 Jung은 개인적인 것과 종족의 역사와 목적 및 욕망에 따라서 인간행동이 좌우된다고 함으로써 실재(實在)했던 과거와 가능성을 지닌 미래가 동시에 인간의 현재행동을 이끌어 간다고 보았다(Hall과 Lindzey, 1978). 한편 Adler는 Freud의 성(性)에 관한 주장과는 견해를 달리하여 사회적 관심 및 우월성의 추구라는 두 가지 개념을 근거로 하여 정신분석학을 발전시켰으며, 그 밖에 Horney, Fromm, 그리고 Sullivan 등도 성격의 사회적 결정인(決定因)을 중시하는 사회심리학적 안목을 가지고 정신분석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중에서 특히 Sullivan은 인간관계이론에 근거한 성격이론 및 심리치료의 방법을 발전시켰다(Hall과 Lindzey, 1978). 일반적으로 Adler, Horney, 그리고 Sullivan 등에 의하여 발전된 정신분석학은 신정신분석학파(neo-Freudianism)로 불려지고 있다.


본장(章)에서는 Freud의 전통적 정신분석학에 관해서 서술한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먼저 창시자 Freud의 생애와 이 이론의 발달배경을 살펴 보고, 그 다음 절에서부터는 이 접근의 주요개념들, 상담의 목적 및 목표, 상담의 과정과 기술들에 관해서 알아 보기로 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Sigmund Freud는 1856년 5월 6일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역에 속하는 모라비아의 프라이부르크라는 곳에서 유태인인 부모의 슬하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가난한 모직 상인이었다. 그리하여 어렸을 때의 그의 가정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그러한 이유로 그의 가족들은 독일의 라이프찌히로, 그리고 또 1년 후, 4세 되던 해에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이사를 다녀야만 했었다. 비엔나에서는 나치에 의하여 비엔나가 점령된 1938년까지 거의 80년 가까이 살았다. 중등학교(Gymnasium) 시절에는 7년 동안 계속 학급에서 수석을 할 만큼 어렸을 때부터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특히 Darwin의 과학연구의 이론에 매혹되었다고 한다(Hutchins 등, 편, 1980).


Freud는 1873년에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1881년에 M. D. 학위를 받았다. 의과대학 재학기간 동안에 그는 비엔나 대학교 생리학 실험실의 책임자(director)이었고,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생리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Ernst Brücke 교수의 지도 하에 생리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1874년에 출판된 “생리학 강의”라는 그의 저서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는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되는 하나의 역동적 체제(a dynamic system)”라는 그의 급진적인 견해에 Freud는 매료되었다(Hall, 1954), 이 밖에도 “에너지는 변형될 수는 있어도 파괴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에너지가 체계(system)의 한 부분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반드시 체제의 다른 부분에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의 기초가 되고 있는 Helmholtz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즉, Freud는 이와 같은 역학의 법칙들을 인간의 성격(personality) 이론에도 적용시켜 하나의 역동심리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Hall, 1954).


사실상 처음에 Freud는 의학자체보다는 신경학의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생활을 보냈다. 1876년에서부터 15년간 그는 신경학자로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학연구로서는 생계유지가 어렵다는 사실과 또한 그 당시 비엔나에 퍼졌던 유태인 배척운동으로 대학에서 승진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그의 스승 Brücke의 권유를 받아들여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종합병원의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간을 내어 신경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런데 Freud가 이처럼 병원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의과대학에서 신경학 교수로 남아 있었더라면 역동심리학을 창안해낼 수 없었을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병원의 임상에서 환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는 신경질환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Hall, 1954). 1885년에서부터 1년간 Freud는 그 당시 프랑스의 소르본느 대학의 유명한 신경학자인 Jean Charcot와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Charcot (샤르꼬)는 최면적 암시에 의해서 히스테리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Freud는 그의 임상경험을 통하여 최면술에 의한 히스테리증의 치료효과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지만, 당시에는 Charcot의 강의와 임상적 실험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신경학자에서부터 정신병리학자로 전환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Hjelle와 Ziegler, 1981).


1886년에 비엔나로 돌아온 Freud는 마르티나 베르나르와 결혼하였다.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세 딸 중 안나 프로이드는 나중에 유명한 아동정신분석가가 되었다. 비엔나에서 Freud는 의사인 Joseph Breuer로부터 환자가 자신의 증세에 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히스테리증이 치료된다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Breuer의 방법, 즉 정화법(catharsis)을 시도하여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고, Breuer와 함께 정화법에 의하여 치료된 히스테리증 환자의 치료사례들에 관한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 저서가 바로 “히스테리증에 관한 연구(Studies in Hysteria, 1895)”이다. 이 저서가 완성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히스테리증에 있어서 성적(性的) 요인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차이로 결별하게 되고, Freud는 최면요법 대신에 정화법과도 다른 “자유연상법(free association)”을 개발하여 치료에 적용하기 시작한다(Hall과 Lindzey, 1978;Hjelle와 Ziegler, 1981). 그는 성적 갈등이 히스테리증의 원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1896년에 비엔나 의사회에서 탈퇴

 

1885년, 프로이트는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5개월 동안 저명한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의 강의를 듣는다. 샤르코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비롯한 발작증 치료에서 최면술을 이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의 치료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후 반세기 동안 자신의 화두가 될 인간의 심신 관계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1886년에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신경질환 전문의로 개업하는 한편, 약혼 4년 만에 마르타와 결혼해서 첫 아이를 얻는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만약 프로이트가 결혼 때문에 병원을 개업하지 않았다면 정신분석학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신경질환 전문의였던 요제프 브로이어(1842-1925)와의 만남은 프로이트의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브로이어는 훗날 임상보고서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안나 O.를 비롯한 여러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문제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했다. 두 사람은 <히스테리 연구>(1895)라는 공저를 내놓았지만, 성(性)을 히스테리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 프로이트와 그렇지 않다고 본 브로이어 간에는 불화가 빚어진다. 브로이어와 결별한 프로이트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1858-1928)의 도움으로 이른바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을 구상한다. 그리고 1896년에 이르러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한다.

 

1896년,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한 프로이트는 연구 영역을 더욱 넓혀 나간다. 이후에 간행된 <꿈의 해석>(1899),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 등의 저서는 정신질환자가 아닌 일반인의 심리 분석을 통해 인간 무의식의 근본 구조를 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런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에 공감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1902년에 수요 심리학회를 창설하고, 1908년에 이르러 빈 정신분석학회로 개명한다.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나 칼 융(1875-1961)과 같은 촉망 받는 정신의학자들이 프로이트의 주위에 몰려든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10-20년대에는 세계 각지에 정신분석학회가 설립되면서 프로이트의 명성도 높아졌지만, 아들러와 융을 비롯한 차세대 정신의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의견에 반대해 연이어 결별을 선언했다. 이 시기 동안 프로이트는 꾸준히 저술을 내놓으며 정신분석의 개념을 보다 명료히 하는 데에 주력한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1920)는 삶의 본능(에로스)과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안했고, <자아와 그것>(1923)은 이른바 에고(자아)-이드(그것)-슈퍼에고(초자아)의 3박자 도식을 제안했다. <환상의 미래>(1927)와 <문명과 불만>(1929)은 그의 이론을 종교와 문명 등의 더 넓은 주제에 적용하려 한 사례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유대계인 프로이트의 저서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공개 화형에 처해진다. 주위에서는 망명을 권했지만 프로이트는 줄곧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빈에 남아 있었다. 이미 그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1923년에 구강암 선고를 받고 여러 번에 걸쳐 수술을 했지만, 1937년에 암이 재발해서 통증으로 고생했던 것이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 돌격대가 프로이트의 집에 쳐들어와 가택 수색을 실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마침내 프로이트도 망명에 동의했고, 여러 사람의 주선 끝에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39년 9월 23일,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망명지인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프로이트의 사상: 무의식의 발견과 그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무의식’의 발견이다. 애초에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서 심리적 원인이 신체적 질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때 히스테리의 원인이란 보통 어린 시절의 충격적 경험(트라우마)인데, 대개는 성(性)과 연관된 내밀한 것들이었다. 히스테리 환자는 일찍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가 억압을 통해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버린 이 원인을 의사의 도움으로 기억해내고 인지함으로써, 즉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증상이 치유되곤 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하게 된 계기였다.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연구하던 프로이트는 이것이 단순히 정신질환 환자의 경우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점을 눈치 챘다. 나아가 히스테리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최면술, 압박술, 자유연상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꿈이나 실언 등의 무의식적 행위가 어떤 억압된 것의 표출이라는 점을 눈치 채게 되었다. 이른바 에고(자아)-이드(그것)-슈퍼에고(초자아)의 3박자 도식은 무의식의 작동 방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최종적인 설명이다.

 

나아가 그는 성적 충동(리비도)이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삶의 본능(에로스)과 반대되는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의 존재를 설정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흔히 만사를 성(性)으로 설명하려 든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특히 인간의 발달 과정에 관한 설명에서 두드러졌다. 프로이트는 유아기와 유년기에 벌어진 사건이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며, 발달 단계에 따라 구강기(입으로부터 성적 쾌감을 얻는 시기)와 항문기(항문으로부터 성적 쾌감을 얻는 시기)와 남근기(남성의 성기에 관심을 갖는 시기) 등을 구분했다. 나아가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어머니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거세 공포를 느끼는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시기가 있으며,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남근 선망’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후자의 주장은 프로이트 활동 당시의 남성중심주의를 반영한 발언으로 평가되며, 종종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 혁명적 이론인가 사이비 과학인가?

 

프로이트의 업적이란 그야말로 ‘혁명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 덕분에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보다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내면에는 ‘자아’라는 단단하고 확고한 실체 대신 차마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폭로했던 것이다. 인간의 시야를 더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업적은 다윈과 아인슈타인이 가져온 사상적 혁명에 비견할 만하다. 19세기 말에 그의 학설은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주장에서 성(性)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의 정신의학자 중에서도 성(性)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한 것은 프로이트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성(性)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프로이트의 사상이 초기에 냉대를 받은 원인인 한편으로, 프로이트가 세상만사를 그쪽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가장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 요인이었다. 물론 프로이트는 성(性)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지는 않았고, 그것이 당시의 통념 이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을 처음으로 직시했을 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성(性) 이론은 ‘양성’(兩性)이 아니라 ‘남성’(男性)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한계라는 비판만큼은 일리가 있다. 페미니즘 진영의 주장에 따르면, 프로이트 본인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을 주로 놓고, 여성을 종으로 놓아 가령 남근선망 같은 잘못된 추측들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신분석이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외양과는 달리 과학적 요구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하며, 막상 프로이트 본인이 치료한 환자 중에서도 완치 여부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았을 정도로 그 효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비판이 나올 경우, 그 ‘무의식적 동기’를 파헤침으로써 어떠한 공격조차도 무력화시켰던 프로이트의 몇 가지 선례 역시 정신분석의 객관성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나아가 프로이트가 이른바 정신분석학회를 설립하고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면서, 자신의 학설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려 시도한 일부 인사들을 냉정히 제거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학설 역시 일종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처럼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이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전히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전히 불가해한 대상으로 남아있는 인간의 무의식이란 대상을 향한 프로이트의 통찰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해석, 그리고 재비판과 재해석이야말로 어쩌면 그의 이론이 지닌 탁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이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의식한 듯, 프로이트는 말년에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감히 선생님의 주장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심리학을 모르는 사람조차도 제 주장에 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아인슈타인 선생님께서는 정말 복 받으신 분입니다.”

 

 

프로이트의 주변 인물들


그의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1895-1982)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으며 특히 아동 심리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말년에 간호와 비서 노릇을 도맡았으며, 아버지의 사후에 사실상의 유언집행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때 그의 편이었으나 훗날 불화로 인해 등을 돌린 사람 중에서는 특히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와 칼 융(1875-1961)이 유명하다. 아들러는 1911년에, 융은 1914년에 프로이트와 결별했으며 이후 각자의 독자적인 심리학 이론을 구축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두 사람 모두 프로이트가 성(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1933년에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세계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아인슈타인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대계였으며, 나치의 탄압을 피해 훗날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아가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와 평화주의자였다.

 

네이버 캐스트 세계인물  글-박중서(출판기획자, 번역가) 중간 발췌

 

-박주원-
http://blog.naver.com/ghdeorj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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