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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 패밀리 - 로스차일드 250년 부의 비밀

고장군 2019. 4. 15. 18:36

 

슈퍼리치 패밀리 - 로스차일드 250년 부의 비밀

 

 

 

출판사 제공
책소개
로스차일드에게 배우는 위기 극복과 생존 전략!
세계가 하나로 묶이면서 위기의 진폭은 더 커지고, 주기는 더 짧아지고 있다. 1997년 IMF부터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2008년 금융 위기, 2011년 유럽 재정 위기까지 우리나라 기업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형태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IMF와 금융 위기는 우리나라의 문제였지만 서브프라임과 유럽 재정 위기 같은 다른 나라의 경제 위기도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리 위기에 대비하기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위기가 닥칠 것이고 그 위기는 항상 새로운 형태로 우리를 당황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새삼 로스차일드에 주목하는 것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한 로스차일드의 생존력 때문이다. 로스차일드는 지난 250년 동안 세계 대전과 대공황, 오일쇼크 등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의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았다. 때로는 정면 돌파 했고 때로는 위기가 지나가길 엎드려 기다렸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비엔나, 나폴리로 구성된 5극 체제는 무너지고 런던과 파리만 살아남아 양극 체제로 간소화되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기업을 공개해야 했고 세금으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내놓아야 했다. 유럽의 숨은 지배자로 군림하였지만 히틀러의 유대인 집단 학살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재산뿐만 아니라 혈족까지 잃었지만 로스차일드는 다시 살아났다. 어려울 땐 서로 돕지만 최고의 자리는 양보하지 않는 협력 속의 경쟁 덕이다. 최근 현대 일가의 모습 속에 보이는 경쟁만 있을 뿐 협력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각해봐야 하는 대목이다.

"황금에서 와인까지"
부자가 되려면 로스차일드에게 배워라!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라는 성만으로도 충분하다. 기타의 설명이나 수식어가 필요 없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리며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큰 부를 누리고 있다.

 


사실 부자들은 많았고, 지금도 많다. 시대를 풍미한 부자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는 2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로스차일드를 '부자'가 아닌 '슈퍼리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50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8세대 동안 부가 이어진 것이다. 부자는 3대를 못 넘긴다는 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8대 동안 부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로스차일드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이들이 어떻게 부를 형성 ? 유지하는지 잘 보여준다. 로스차일드에 대한 책은 대부분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로스차일드를 보여준다. 또한 로스차일드는 우리나라 근대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친러시아 정책을 펼친 고종황제가 일본과 맞서기 위해 로스차일드와 만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방해로 만남이 무산되지만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어떻게 슈퍼리치가 되었나!
저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금의 부를 형성,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를 다섯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가족 경영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사라진 메디치 가문이나 제한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록펠러 가문과 달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가족 경영 덕분이다. 로스차일드는 아들만 사업을 계승할 수 있다. 최근 전문경영인을 적극 활용하는 추세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이는 가문의 재산을 온전히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가문에 충성하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 외에는 없다는 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생각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744년에 태어난 암셀 마이어에 의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발원했다. 암셀 마이어의 셋째 아들 나단은 1798년 영국 맨체스터에 진출한 후 런던의 금융가를 장악하였다. 이후 1811년 막내 야곱이 프랑스 파리 분가를 형성하여 독일, 영국, 프랑스를 관통하는 거점을 만들어냈으며,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도 분가를 형성함으로써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글로벌 경영 네트워크를 창출하였다. 이러한 초국가적인 경영과 연계망은 자연스럽게 로스차일드 가문의 트레이드마크인 '가족 경영'으로 진화하였다.

 


둘째는 정보력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셀은 랍비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랍비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히브리어, 라틴어, 아랍어 그리고 거주하는 지역의 언어들을 모두 섭렵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여러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며 그 지역의 특수성을 역사적 안목과 현실적 상황에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이어 암셀이 아들들을 런던, 파리, 비엔나, 나폴리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정보가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이어 암셀은 그의 자손들을 유럽의 요지에 정착시켜 유럽 전체를 아우르고 통합시키는 국제적 지식정보 네트워크를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로 로스차일드는 당시 어떤 국가의 국왕보다도 먼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정보를 이용해 주가를 조작하기도 했으며 가문의 필요에 따라서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때 유럽에서는 로스차일드가 돈을 빌려준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믿었다.

 


셋째는 생존이다. 랍비 교육을 받으며 글로벌 인재로 자란 로스차일드 후손들은 국제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은 히브리 문자에 북동부 독일 지방의 언어를 결합해 중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구사했던 이디쉬어로 소통하는 비밀 정보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나아가 유럽과 전 세계에 퍼져 있던 랍비를 중심으로 형성된 네트워크는 암호화된 정보망과 결합해 로스차일드 가문의 전방위적 '네트워크 경영'을 더욱 강화시켰으며 이는 생존능력을 극대화시켰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이나 미국의 록펠러 가문처럼 단일 국가를 기반으로 경영을 하지 않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본가로 하되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비엔나, 그리고 이탈리아 나폴리에 진출하여 글로벌 경영제국을 구축하였다.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크가 서로 협력하며 전략적으로 움직였기에 근현대 유럽의 혁명과 전쟁 속에서 리스크를 줄이고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생존 능력 덕분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단순한 거부를 뛰어넘어 슈퍼리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넷째는 고난 극복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지역과 국가를 뛰어넘는 전방위적 네트워크 경영과 유대인의 노마드 정신을 융합시켜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 탈무드는 "기회가 왔을 때 모험하지 않는 사람은 평범한 무리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영국으로 건너간 셋째 아들 나단은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지만 6년 만에 자본금 2만 파운드를 5만 파운드로 늘렸다. 또한 나폴레옹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에 깊이 관여해 세계사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계자로 부상하고 있는 데이비드 마이어 로스차일드(1978년생)의 진취적인 모습은 고난을 어떻게 성장의 밑거름으로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2006년 남극과 북극을, 2010년에는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였다. 또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녹색경영'의 최전선에서 어드벤처 에콜로지의 주재자로 활동하고 있다. 녹색경영은 또 다른 형태의 금융산업이라는 것을 잘 아는 데이비드는 남극, 북극, 태평양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수많은 유럽의 혁명과 전란 속에서 가문을 이어온 로스차일드만의 고난극복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다섯째는 변화다. 로스차일드 런던 분가는 2004년 금 가격 결정권을 포기하고는 새로운 국제금융 질서의 재편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파리 분가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2007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행 부문을 완전히 통합하는 조직 개편을 통해 스위스에 또 하나의 핵심 본거지를 마련하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른바 '비엔나 분가'의 부활이다. 비엔나 분가 근처에서는 매년 다보스 경제포럼 및 전 세계 주요 인사들이 모여 글로벌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진 2011년 빌더버그 회의도 개최되었다.

세상 모든 것의 지배자, 역사를 바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역사적 존재로 남는 것을 거부하며 현재도 국제금융업은 물론 금, 와인, 레저, 백화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비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로스차일드 가문과 접촉하고 있다. JP 모간, 골드만삭스, HSBC 같은 금융 관련 기업은 물론이고 다이아몬드의 기업 드비어스, 무통, 라피트 같은 와인에 이르기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의 손길이 닿아 있다.

 


로스차일드는 또한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결국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1917년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와중에 아관파천 등 친러시아 외교정책을 추진한 고종의 조선왕조 역시 1910년 일제강점기에 들어섰다.

 

이러한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유대계 미국 자본가 야곱 쉬프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폭넓은 협조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를 통해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어 동아시아에서의 판도를 확대시킬 수 있었고 '동아시아 공영권'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2차 대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야곱 쉬프 가문이 일본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이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한 야곱 쉬프 일가의 방문단이 도쿄, 교토, 오사카를 거쳐 1906년 5월 2일 인천을 통과해 5월 5일 서울에 도착했지만 고종을 만나지 못하고 대전, 대구, 부산을 거쳐 오사카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쉬프 일행이 남긴 일기에 의하면 5월 5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시종 구(具)씨가 고종과의 회동을 잡으려 했으나 일본의 치열한 방해공작으로 끝내 회동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고종이 미국과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쉬프 일행을 만나 러일전쟁 이후의 국내외 정세를 논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시작부터 '글로벌 경영제국'을 지향하였고, 유럽의 왕조국가와 근대국가의 견제와 마찰 속에서도 끝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면서 이에 대응하였다. 결국 유럽은 현재 통합되었으며, 이는 글로벌 경영제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추구해온 글로벌 합종연횡의 전략이 실현된 것과 같다. 2008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강타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도 건재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글로벌 슈퍼리치' 성공신화는 신세계 질서의 재편 속에서도 계속 유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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