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실종자 구조도 언딘 독점계약…"말도 안돼!"

  • 2014-05-02 06:00

  • "이름 없는 내 아들, 천당에서 편히 쉬렴"
이기사 어땠어요?

최고최고0

놀람놀람1

황당황당1

통쾌통쾌0

슬픔슬픔0

분노분노6

페이스북 4

트위터 3

해경, 실종자 구조.선체 인양 모두 언딘에게 몰아줘…언딘, 논란 예상되자 꼼수해명까지

바지선 '언딘 리베로'에서 해군과 해양경찰, 민간 잠수사 등 구조대원들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세월호 침몰사고 수습을 지휘하고 있는 해양경찰과 민간 인양업체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이하 언딘) 간의 비정상적인 유착 관계가 속속 드러나고 있어 후폭풍이 커질 전망이다.

당초 해명과 달리 해경이 세월호가 소속된 청해진해운이 언딘과 세월호 사건 수습 관련 독점계약을 맺도록 주도한 사실이 밝혀진데 이어 둘 간의 계약에는 선체 인양뿐 아니라 실종자 구조활동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한시가 급한 대규모 재난사태에서 특정 업체에게 구조를 전적으로 맡긴 것은 도저히 이해할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해경은 이처럼 논란이 불거지자, ‘언딘이 '군·해경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며 추켜세우면서도 언딘이 마치 해경과 계약을 맺은 것처럼 브리핑했다.

한동안 언론들이 이런 브리핑 내용대로 계약관계를 이해했지만, CBS노컷뉴스에 의해 계약 주체가 해경이 아닌 사고를 낸 청해진해운인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언딘 측은 "애초 청해진해운과는 인양에 대한 계약만 맺었고 해경의 요청으로 구조에 동참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계약서에는 "세월호에 대한 구난/구호 용역 및 기타 기술지원 일체를 독점적으로 수행할 것에 합의한다"고 돼 있는데 여기서 구호는 실종자 구조의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난구호법 2조는 수난구호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해수면 또는 내수면에서 조난된 사람 및 선박, 항공기, 수상레저기구 등의 수색·구조·구난과 구조된 사람·선박 등 및 물건의 보호·관리·사후처리에 관한 업무를 말한다"

해경이 청해진해운에게 언딘과 맺으라고 한 계약서는 실종자 구조에서부터 선체 인양(구난)까지 모두 언딘이 맡도록 한 것이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은 이 계약서 한장으로 상당부분 해소됐지만, 해경에 대한 들끊는 비판 여론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수백명의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특정업체와 독점 계약을 맺게 하고, 다른 민간잠수부나 해군의 실종자 수색활동을 제한하면서 총체적인 난맥상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 수백명 목숨앞에 돈문제에 치중한 꼴

해경이 이렇듯 가능한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돈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청해진해운이 계약한 구난업체를 통해 수난구호를 진행할 경우 그 비용은 청해진해운이 부담해야하지만 청해진해운과 계약하지 않은 업체가 수난구호를 진행했을때 그 비용은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

해경이 수백명의 생사가 걸린 사고 수습 과정에서 돈 문제 때문에 언딘을 제외한 다른 구난업체가 수난구호에 참여하는 것을 미적거린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선박보험에 정통한 한 보험사 관계자는 "다른 업체가 (수난구호에) 들어갔을때 청해진해운이 돈을 대야할 의무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정부에서 행정조치로 시행하고 구상행위로 청해진해운에 청구할 수 있을것 같은데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해경이 언딘이 아닌 다른 민간업체들의 수난구호를 막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이 관계자는 특히 "수난구호를 꼭 선박회사와 계약한 업체만 진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데 해경이 어떤 이유로 다른 민간잠수부들의 수난구호를 막았는지 모르겠다"고 해경의 대처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해경이 직접 수난구호를 하지 않고 민간업체와 계약을 맺고 수난구호를 진행한 것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해양사고에 정통한 한 보험사 관계자는 "인명구조는 최대한 많은 자원을 투입해서 신속하게 진행해야 하는데 특정 민간업체와 계약을 맺어 진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긴급성이 요구되는 인명구조를 해군이나 해경이 아닌 민간업체에게 맡기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과 자원을 동원해서 수색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면서 "희망을 잃지 마시고 구조 소식을 함께 기다려 주시기를 당부드린다"고 말했지만 공염불에 그쳤을 개연성이 크다.

언딘의 김윤상 대표와 해경 전현직 간부들이 자리를 꽤차고 있는 한국해양구조협회를 매개로 해경쪽에서 무리하게 언딘을 밀어주려했다는 의혹도 일찌감치 제기됐다.

익명을 요구한 구조·구난 전문가는 "언딘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해경과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를 했다는 얘기가 많이 돌고 있다"며 "그렇지 않으면 대형 사고를 어떻게 한개 업체가 독점할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황대영 한국수중환경협회 회장 "이런 큰 사고가 났으면 자진해서 나선 민간 잠수요원들도 신속하게 투입했어야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면서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선장도 계약직…곪아터진 '돈' 지상주의

  • "이름 없는 내 아들, 천당에서 편히 쉬렴"
이기사 어땠어요?

최고최고23

놀람놀람2

황당황당3

통쾌통쾌1

슬픔슬픔4

분노분노28

페이스북 16

트위터 16

세월호 참사만큼 우리 사회의 치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도 드물다. 승객을 버리고 달아난 선장과 돈 밖에 모르는 선주, 그들을 믿고 배에 남았다 희생된 학생과 승객 등등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이름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세월호 사고가 더욱 불길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호도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가 되면 누구도 우릴 구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그래서 세월호는 대한민국호의 진로를 바꿀 것을 경고한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리더십부터 다시 세우고, 선장조차도 계약직으로 내모는 금전지상주의를 일신하며, 마피아 공무원들의 철옹성을 깨뜨려 공동체 문화를 복원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꽃다운 생명들을 속절없이 떠나보낸 어른들은 모두 죄인이다. 그 트라우마는 세월이 가도 남을 것이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 이제 할 일은 아픔을 오래 기억하고, 어떻게든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세월호가 남긴 교훈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파탄 난 직업윤리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2. 선장도 계약직…곪아터진 돈 지상주의
3. 마피아 공무원과 연안부두 사람들

침몰한 세월호. (사진=윤성호 기자/자료사진)
세월호 참사의 아이러니는 세계 제일의 조선강국이 연안여객선 하나 못 만들어 외국 폐선을 수입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극단적인 이윤 추구에 있다.

우리의 글로벌 조선사들이 연안여객선을 만들지 않는 것은 돈이 안 되기 때문이며, 청해진해운이 굳이 외국 폐선을 수입한 것도 돈 때문이다.

청해진 입장에선 고물 배를 고철 값에 들여다 운항하는 게 백배 남는 장사였을 것이다.

그나마 이윤 극대화를 위해 무리한 선체 개조까지 가해졌으니 언젠가 사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다 이명박 정부는 규제완화의 미명 하에 선령 제한을 25년에서 30년으로 풀어줌으로써 참사에 일조했다.

세월호는 이후 운용 과정에서도 거추장스러운 안전 따위는 철저히 무시됐다. 물론 돈 때문이다.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복원력에 결정적인 평형수(밸러스트)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표적이다.

세월호의 승선 인원이 정확히 집계되지 않는 것도 돈의 논리에 밀려 인명이 얼마나 경시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류희인 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은 "거의 모든 사고는 돈 때문"이라며 "세월호과 10~20분 아끼려고 화물 결박을 대충한 것이나 항공기처럼 전자발권을 하지 않는 것도 다 돈이 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우리나라가 내부적으론 얼마나 불안하고 취약한지를 보여줬다"며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이윤추구 방식에 대해 그동안 한 번도 궤도수정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자료사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사이트 캡처)
세월호의 또 다른 아이러니는 계약직 선장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큰 배의 선장을 월 270만원을 받는 비정규직 직원으로 고용했다는 사실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장의 직업윤리를 비난하던 목소리도 '선장=계약직'이란 사실 앞에 잠시 멈칫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을 절감한 것이다.

이남신 한국 비정규직노동센터 소장은 "사람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홀대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 직업과 일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들에게만 전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쏟는 것은 표적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차별철폐연대 소장은 "책임과 권한은 주지 않고 일회용품 취급하면서 왜 너는 책임감을 갖지 않는냐고 묻는다면 너무 모순적"이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선장과 선원을 비정규직화하는 것은 연안여객 업계에선 이미 흔한 현상이다.

2013년도 한국선원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60세 이상 선원의 비중이 외항선에서 16.43%인 반면 내항선에선 40.91%에 달한다.

인건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임금을 적게 줄 수 있고 계약직 채용도 쉬운 은퇴자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는 위험을 외주화 함으로써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업무는 비정규직으로 이뤄진 하청업체에 맡김으로써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다.

김혜진 소장은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것보다 죽거나 다쳤을 때 책임지는 비용이 더 싸게 먹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추세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조종사 등에 대한 파견근로자 사용 허용을 정부에 건의했고, 코레일은 철도 유지보수 업무를 외주업체 비정규직 인력에 맡긴 상태이다.

다수의 생명을 책임 진 운수산업에서조차 비정규직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석훈 교수(내가꿈꾸는나라 공동대표)는 서울 주변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가 입석으로 운영되는 현실을 거론하며 "사실 서민들이 타는 교통수단은 다 위험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동체로서의 경제 공공성에 대해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모바일 시위 문화가 조금은 달라지고 있다 (현재 홍대앞 시위모습) [16]

저항하는늙은이 (pjj****)

주소복사 조회 1770 14.05.03 16:43 신고신고

이명박 정권때 줄쳐놓고 발언하고

춤만 추던 시위 문화를 깬것이

아고라의 386세대이다

동화면세점앞... 기억 하시는 분들 있으리라

그후 늙은이는 매번 시청앞 시위에대해 불만을

폭로 하였다

개때처럼 모여 누군지도 알수없는 집단에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다 성금함 이라는

명목에 삥이나 뜯기는 그런 시위는 시위가 아니라고

약 5년 전부터 시위를 할거면 홍대 신촌 대학가나

강남으로 가라고...

요즘 그 시위 문화가 조금은 변한듯 싶다

물론 아직 늙은이 성에는 안 차지만

시위는 갇힌 장소가 아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거기에 싸울수 있는 도구가 포함되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사진은 오늘 3시 반 홍대앞 이다

다이빙벨 실패 이유가 밝혀졌군요. [3]

호이겐스 (hu-****)

주소복사 조회 784 14.05.03 16:53 신고신고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가 '다이빙벨' 철수에 대해 언급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 16일째였던 지난 1일, 그동안 많은 논란이 됐었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의 수중 잠수장비인 '다이빙벨'이 수색작업 현장에 투입되면서 실종가족을 찾는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다이빙벨은 사고 해역 25m 정도 들어가 2시간가량 머물렀지만 선체 내부에는 진입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상호기자 다이빙벨실패 이종인대표

이같은 소식에 이상호 기자는 자신의 트위터에 "단 한 번 내려가 실종자를 수습 못했다고 실패라니. 2시간 가까운 잠수동안 감압시간 빼고 50분 가량을 선내 머물며 선미 좌현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치웠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영상이 있음에도 실패로 몰고가는 대한민국 언론이야 말로 '실패'"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기자는 "선미 좌현은 범대본에 따르면 '구조물이 무너져 인양 이전에는 수색불가능한 지역'. 해경은 이곳을 맡겼다. 게다가 부표의 위치도 속였다. 알파 잠수사들은 중간부를 선미로 알고 진입로를 찾느라 이틀을 낭비했다. 해경의 양심이야 말로 '실패'"라고 말했다.

이어 "벨은 유속과 무관했다. 24시간 수색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단 교체 인력이 필요했다. 불가피하게 해경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구조. 하지만 해경은 끝까지 위협과 속임수로 일관했다. 알파로서는 협업이 불가능함을 판단한 듯. 해경의 협조 '실패'"라며 "벨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한명의 생존자도 구하지 못했으니 뭐라도 해보자는 가족들의 요구였다. 하지만 아직 생존자가 상당수 있었을 1차때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쫓겨났고 2차때는 언딘이 몰아냈으며 3차때 성공했으나 협업이 불가능해 철수한 것"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 기자는 "go발뉴스는 벨이 온 날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모두를 기록했다. 당국은 구조실패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한몸이 되어 벨을 공격했으며, 권력에 줄선 수구언론들은 이에 편승해 오보를 양산해왔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보도는 계속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달 16일
청해진해운 소속 진도 여객선 세월호가 제주도로 향하던 중 침몰되는 사고가 벌어졌다. 해당 여객선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나선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 교사 15명, 선원 30명, 일반인 89명까지 총 476여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2일 현재 세월호 탑승객 476명 중 사망자는 총 226명이며 구조자는 174명, 실종자는 76명이다.

"아이들 끌어올릴 때 해경 구조대는 뒤에서 지켜만 봤다"

한겨레 | 입력 2014.05.03 10:20

[한겨레][토요판] 커버스토리


'세월호 수십명 구조' 김홍경씨 인터뷰

▶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출한 뒤 배가 바닷물에 잠기기 직전 탈출한 김홍경씨 이야기는 사고 직후 언론보도로 많이 소개됐습니다. 김씨는 의인입니다. 그런데 김씨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김씨는 사고 초기 출동한 해경의 구조작전을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입니다. 김씨는 한겨레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를 만나러 제주도를 찾았습니다. 언딘의 주검 수습 지연 의혹을 풀기 위해 인천에서 잠수사도 만났습니다.

하늘에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을 쏟아낼 듯 슬픔을 머금고 제주도를 감싸고 있었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려던 그 제주도다. 김홍경(58)씨는 28일 저녁 제주도 서귀포시의 한 거리에서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수십명의 아이들을 구출했다. 선장과 승무원, 많은 어른들이 제 살 길을 찾아 분주할 때 그는 최대한 아이들을 구하다 마지막으로 배를 빠져나왔다. 수십명밖에 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기자가 김씨를 만났을 때 방송에서는 '살려달라는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 발신 시각은 오전 10시17분으로 확인됐다'는 검경합동수사본부의 발표를 전하고 있었다.

사고 충격이 상당하지만 그는 진도에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직장이 있는 제주도로 왔다. 휴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배관 설비 기술자인 김씨는 사고 당일 제주도의 한 업체에 취업해 첫 출근을 하던 길이었다. 제주도 공사 현장에서 쓸 차량을 끌고 가야 해서 사고 당일 인천에서 배를 탔다. 그게 세월호였다.

김씨는 4월16일 사고 신고 접수 뒤 진도 앞바다로 출동한 해양경찰청 해양구조대가 너무나 어설프게 대응해 더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커튼과 소방호스를 밧줄로 삼아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동안 구조대원들은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만 보았다는 것이다. 선실 안에 남아 있던 승객들에게 바깥으로 나오라고 해경이 방송을 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해경 구조대원들의 "직무유기"
진도체육관서 방송사 기자에게
말했지만 전혀 전파 타지 않아
실수 반복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에 인터뷰 응하게 된 것

빌라촌 배관설계를 맡게 되어
제주 첫 직장 출근하러 가던 길
사고 직후 커튼과 소방호스로
학생 수십명 구한 뒤에 탈출
밤마다 침몰 때 떠올라 괴로워



시간이 없어 더 끌어올리지 못하던 그 순간

4월28일 해경은 뒤늦게 세월호 출동 현장 영상을 공개했다. 해경 선박은 선체 주변만 맴돌았고 선실 창문을 깨는 작업도 뒤늦게 했다. 학생들이 다수 있었던 세월호 4·5층에 신속히 구조대원들을 투입해 학생들을 구조했다면 더 많은 생존자가 나올 수 있었다는 여론의 비판이 나왔다.

김씨의 증언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배에 올라탄 일부 해경 구조대원들조차도 선내에 있는 승객들을 구출하러 들어가지 않고 배 바깥으로 나온 승객들만 구조선으로 옮겼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고 직후 저를 인터뷰하러 온 방송사 기자들에게 이런 말들을 했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말만 편집해버리더군요. 제가 휴대전화로 찍은 사고 당시의 영상만 가져갔어요." 세월호에 올라탄 뒤 멀뚱히 김씨의 구조활동을 바라보는 구조대원들의 모습은 김씨가 휴대전화로 찍은 동영상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김씨는 구조 도중 틈틈이 짤말짤막한 영상을 찍었다.

김씨는 28일 저녁 서귀포시의 한 카페에서 두 시간여 동안 자신이 세월호에서 겪은 일들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사고 당일에 대한 김씨의 심층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힘든 점은 없는지요?

"정신적으로 좀 힘듭니다. 더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더 끌어올리지 못하던 그 순간이 영상처럼 떠오릅니다. 밤에 잠을 자면 한두 시간 만에 깨어났다 다시 잤다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뭔가 생각하던 중에도 갑자기 생각이 뚝 끊깁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다가 몇초 뒤 다시 이전 기억과 현재의 상황이 연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면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일을 해야 해서 짬이 안 나고."

서천석 교수(서울신경정신과 원장)는 김씨의 증세를 기자로부터 전해듣고 김씨가 전형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그런 증상이 계속 반복된다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의심해볼 수 있다. 초기 대응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단 병원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다.

김씨는 배관 설비 전문가다. 새 건물을 지을 때 김씨는 난방·수도·오폐수 배관의 설비를 도맡아 한다. 배관 설비가 제대로 안되면 건물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배관 설비는 사람으로 따지면 대장과 소장 등의 장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김씨는 설명했다. 그는 30년 넘게 이 일만 해온 베테랑이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1970년대 후반부터 배관 설비 일을 배웠어요. 그때는 한창 양옥집을 많이 짓던 시기였어요. 수세식 화장실과 기름보일러 등을 새로 설치하는 집들이 많았지요. 배관 설비는 유망 직종이었어요."

구조 요청하던 4층의 100명…60명은 못 구해

김씨는 지난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간신히 회복한 뒤 제주도에 새 직장을 잡았다. 새로 생기는 대규모 빌라촌의 배관 설계를 도맡게 되어 김씨는 기뻤다. 4월15일 밤 인천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세월호를 탔다. 공사 현장에서 쓸 승합차를 갖고 가야 해서 비행기 대신 배편을 이용했다. 이날 안개가 많이 끼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16일부터 근무를 해야 해서 그는 배가 무사히 출항하기만을 바랐다.

"원래 15일 저녁 6시30분 출항할 예정인데 안개 때문에 언제 출항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밤 11시까지만 기다려보자며 대기하고 있었는데 밤 9시30분에 출항을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지요."

'쏴아' 소리와 함께 세월호가 인천 앞바다를 가르며 움직였다. 갑판으로 나간 김씨는 밤바다의 바람을 온몸으로 받았다. 반짝이는 인천대교가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오랜만에 얻게 된 새 직장에 내일부터 출근한다는 설렘이 김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선실 안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선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던 아이들이었어요. 바닥을 뒹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하마터면 안개 때문에 출항을 못할 뻔했는데 수학여행을 예정대로 가게 됐으니 아이들이 무척 기뻐했어요. 그런 아이들이 다음날 찍소리도 못 내고 죽었으니…." 김씨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객실만 5층 규모이고 높이 30m, 길이 146m에 이르는 여객선이 침몰할 거라고는 김씨도 학생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기자는 지난해 가을 세월호를 타고 제주에 간 적이 있다. 당시에도 비상시 탈출 방법과 구명조끼 안내 등을 받은 적이 없다. 배는 다소 낡아 보였지만 대형 여객선이니 어련히 안전점검 과정을 거치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청해진해운은 안전불감증에 걸린 회사였어요. 1년에 직원 안전교육비가 54만원이라고 보도에 나오더군요. 그러니 비상시 대처요령이 그랬던 것이죠." 김씨가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4월15일 이른 밤에 5층 객실(침대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의 방은 배의 오른쪽에 있었다. 부웅거리는 엔진 소리에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6시30분에 눈을 떴다. 객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아침 7시30분 '아침식사를 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침 식사는 8시30분까지 제공됐다. 김씨가 식사를 마친 것으로 기억하는 시각은 7시55분께다.

"아침을 먹고 갑판 산책을 잠깐 한 뒤 제 방으로 돌아왔어요. 정확한 시간은 기억 안 나는데 8시30분이 좀 지났을 때였어요. (해경 발표 세월호 사고 시각은 오전 8시48분) 배가 갑자기 왼쪽으로 기울면서 쿵 하는 소리가 났어요. 배가 (왼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었어요. 그 상태로 15분 정도 지속되더군요. 처음에는 사고인지 몰랐어요. 그냥 거센 파도 같은 것을 만났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요. 어떤 안내방송도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도 (9시3분께) 배가 점점 더 기울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더군요. 세번 나왔어요. 배가 더 기울어 45도까지 기울었어요. 그 상태로 40분 정도 유지됐어요. 만약 그때 해경이 투입됐더라면 더 많은 학생들을 구했을 텐데…."

-가만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는데 밖으로 나온 이유는 뭔가요?

"처음에 저는 죽을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다못해 바다에 뛰어들면 어떻게 되겠거니 했어요. 그런데 배가 15도 기운 상태로 가만있는 게 아니고 45도까지 기우는 거예요. 사고라는 직감이 들었어요. 더이상 가만있어선 안 될 것 같아 바깥 상황을 파악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바로 선장이 승객들에게 객실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야 했어요. 그러면 수십명은 더 구했을 텐데. 해양경찰 구조선이 곧 도착한다는 방송만 나왔어요."

-나오니까 어떤 상태던가요?

"다행히 제 5층 (선미 쪽) 객실은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에 배가 왼쪽으로 기운 상태가 되니까 저는 수면으로부터 가장 위쪽에 있게 된 거예요. 바깥으로 탈출하기 좋은 위치였지요. 탈출을 하려고 복도를 걷는데 '아저씨, 아저씨' 하고 (단원고) 애들이 애절하게 부르는 거예요. 순간 아래를 보니 아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배가 기우니까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앉아 있었던 거죠.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아이들 첫마디가 '여기 학생들 많아요. 도와주세요'였어요. 겁에 질려 있었어요. 엉엉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구명조끼는 끈을 단단하게 묶어야 하는데 그냥 걸치고만 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끈을 잘 묶으라고 말도 해주고…. 내가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생들은 몇명이나 있었나요?

"4층에만 100명 정도 있었어요. 내가 왔다갔다 하면서 40여명 정도를 구했으니 나머지 60여명은 못 구한 거죠."

커튼 풀어져 아이들 추락, 소방호스로 바꿔

-학생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한 건가요?

"배가 기울어버리니까 바닥이 벽이 된 상황이었어요. 높이가 6m 정도 되는 벽이 생겨버리니까 아이들이 기어 올라올 수가 없었어요. 저와 한 객실을 쓰던 사람들(김씨 외 3명)과 함께 커튼을 찾아 끈처럼 이어서 아이들이 있는 아래로 던졌어요. 아이들이 그걸 붙잡으면 어른들이 끌어올렸어요. 그런데 묶은 커튼이 자꾸 풀어져서 올라오던 애들이 추락하기도 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 소방호스를 찾아서 아래로 던졌어요. 아이들이 자기 구해줄 순번을 기다리면서 얼굴을 내밀던 모습이 기억나요."

-힘들지 않았나요?

"배가 누워버리니까 제가 몸을 지탱할 데가 없었어요. 우리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벽에 몸을 기댄 채 (아이들에게 던져준) 커튼(밧줄)을 겨우 끌어올렸어요."

김씨는 사고 순간을 떠올릴 때 무척 힘들어했다.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중간중간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원래 담배를 끊었는데 사고 이후 다시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구조대는 언제쯤 나타났나요?

"애들을 커튼으로 끌어올릴 때까지는 구조대원이 도착을 안 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구조대가 도착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제가 한 30분 동안 애들을 열댓명 더 구해냈어요."

김씨가 사고 당시의 여러 순간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방송사에 건네졌고 반복되어 방송됐다. 물이 차오르던 장면, 아이들이 구조되던 순간 등이 담겨 있었다.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영상을 찍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구조대원들이 (기울어진) 배의 바깥 난간 위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배 안으로 진입을 안하는 거예요. 왜 배 안으로 진입을 안 하는 걸까 의아했어요. 제가 아이들을 들어올리는 것을 멀뚱하게 보고만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를 반복했어요. 그래서 영상을 찍은 거예요. 이걸 누군가에게는 알려야겠다 싶어서."

-사고 순간을 찍으려는 게 아니라 구조 방식의 엉성함을 담기 위해서 찍었다는 건가요?

"둘 다예요. 대체 쟤네(구조대원)들 뭐하는 건가 속으로 생각했어요. 같이 아이들을 들어 올리자고 소리지를 경황도 없어서 저는 일단 아이들부터 끌어올렸는데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요."

김씨는 자신이 찍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검은색 슈트(물에 뜨는 잠수복)를 한 구조대원들은 김씨의 머리 위 쪽 난간을 붙잡고 가만히 서서 김씨가 아이들을 구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봤다. 영상을 보여주던 김씨가 말을 이어갔다.

"소방관이 화재 현장에 도착하면 인명을 구조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구조대원들이 배에 올라타고 나서도 선실 안으로 들어가질 않아요. 이거 직무유기 아닌가요. 배에 올라탄 해경 구조대원들이 저나 다른 어른들과 같이 적어도 배가 완전 침수하기 직전(30여분간)까지만이라도 아이들을 끌어올리기만 했다면 최소 몇십명은 더 구했을 텐데 아무런 장비도 없이 배에 올라타서 그냥 보고 있기만…."

김씨는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자신을 찾아온 두곳의 방송사 기자에게 이러한 부분을 지적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김씨의 이 말은 전파를 타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구조를 위한) 20분을 날려버린 거예요. 진도관제센터에서 세월호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몇십분 날려버리고. 배가 쓰러지고 있다면 얼른 20명이든 50명이든 구조대원들이 빨리 왔어야지요. (뒤늦게나마 도착한) 구조대원들은 잠수가 가능한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왜 도착하자마자 배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지 난 이게 이해가 안 됩니다. 2·3층은 내가 못 가봤지만 4층에는 분명 애들이 많았는데…."

세월호와 함께 잠겼다가 살아난 어느 남학생

30일 기준 선체 4층과 5층에서 20여구의 주검이 수습된 상태다. 원래 5층은 승무원 객실과 브이아이피(VIP) 객실이 있어 학생 발견 가능성이 낮게 점쳐졌지만, 사고 당시 물이 차오르자 학생들이 5층으로 대거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해경 구조대가 4층과 5층에 몰려 있던 학생들 구조에 바로 나섰더라면 더 많은 생존자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김씨는 인터뷰 도중 해경 구조대를 지칭해 거친 단어로 비난하기도 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해경 구조대가 징계받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에요. 다음에 이런 일 터졌을 때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서예요."

해양경찰청 설명을 따르면, 잠수가 가능한 해양경찰은 4월30일 기준 509명에 불과하다. 해경 122구조대에는 잠수가 가능한 해양경찰이 근무한다. 세월호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122구조대는 별도의 함정 없이 고속단정만 운용하고 있다. 고속단정은 구조대 기지에서 20㎞ 이상 해역은 접근하기 쉽지 않다. 세월호 현장은 구조대 기지에서 20㎞ 이상 떨어진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선체 침몰 시 해경이 구조 지휘의 책임을 지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의 수준이지만 정부는 해경의 이런 상태를 계속 유지해왔다.

-찍은 영상을 보면 "어 물 들어온다. 큰일났네. 다 죽었다" 이렇게 말하시던데.

"주위 사람들에게 배 안에 물이 들어찼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한 말이에요. 저는 (객실과 연결된 5층) 출구 쪽에 있어서 물 차는 게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일 수 있으니까. 물 차는 것 보고 당혹스러웠어요. 이제는 더 구출할 수 없고 무조건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배가 90도로 쓰러지면서 물이 아래(객실 쪽)에서 차올라 들어왔어요. '쏴아' 하면서 몰려오더라고요. 따뜻한 실내에 찬물이 들어오니까 수증기도 올라오고. 아이들의 비명소리도 들리고. 너무 마음 아팠어요."

-마지막에 어떻게 빠져나오셨나요?

"5층 객실 천장까지 물이 차올라오는 것을 보고 난간을 기어서 올라갔어요. 저도 긴장을 했는지 주르륵 미끄러지기도 했지요. 마음은 급한데 몸이 안 따라줬어요. 미끄러졌을 땐 순간 죽는가 보다 생각도 들었어요. 선박 난간을 붙잡고 맨 위로 오르니 어민들 배가 바깥에 있는 게 보였어요. 배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직전이었지요. 어민들은 승객이 다 나온 줄 알고 막 세월호 곁을 떠나려던 차였어요. 그런데 내가 보이니까 다시 돌아왔어요. 어선에 올라타자 세월호가 바로 뒤집혀버리더군요. 정말 조금만 늦었으면 저도 죽었을 겁니다."

-5층 객실에서 끌어올린 아이들은 다 살았나요?

"끌어올린 아이들은 다 살았지요. 마지막에 어떤 녀석(단원고 남학생)은 죽다 살아났어요. 이 녀석이 긴장을 했는지 객실에서 끌어올려진 뒤에 배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데 발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질 못하더라고요. 배(세월호)가 뒤집힐 때까지 어선으로 옮겨 타지를 못했어요. 세월호와 함께 녀석이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어요. 저는 녀석이 죽는 줄만 알고 너무 안타까워하는데 가라앉던 배 주변 바닷물 속에서 뭔가 퐁 하고 올라오더라고요. 녀석이었어요. 구명조끼 부력 때문에 바닷속에서 솟아올라온 거죠. (세월호 주변을 벗어나던) 어선을 돌려 녀석을 바다에서 끌어올려 함께 진도로 왔어요. 녀석의 부모가 저녁쯤 진도체육관으로 왔어요. "얘가 죽다 살아난 애예요"라고 부모에게 말해주니 부모가 '감사하다'고 수십번 말하더군요."

-아이들을 더 구하지 못하고 그냥 세월호를 떠난 것인데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봤나요?

"걔네들 얼굴을 내가 가까이서 봤다면 '아저씨 왜 저 못 구했어요' 하며 악몽에 나타났을 것 같아요. 멀리서 아이들을 봤기에 얼굴은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아이들 형상은 기억나요. 손을 모으고 웅크리고 있던 거."

-어떻게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용기를 냈나요?

"글쎄, 공사 현장에서 일을 많이 했기에 평소 안전교육을 여러번 받았어요. 공사 현장에는 안전관리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직원들이 있어요. 추락 방지나 화재 대피 등을 담당하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안전교육을 평생 받다 보니 일반 사람보다는 위급한 상황 때 좀 다르겠지요. 극한 상황에 대해 평소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원래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좀 차분하게 행동하는 게 제 성격이기도 하고."


"탈출을 하려고 복도를 걷는데
애들이 애절히 부르는 거예요.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첫마디가
'학생들 많아요, 도와주세요'
겁에 질려 우는 애들도 있었고"

"공사 현장에서 일해온 덕분에
평소 안전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극한 상황을 평소에도 생각했죠
어려운 상황 처해도 차분히
행동하는 게 성격이기도 하고"



배 안에서 커피 팔던 밝은 표정의 박지영씨

-아이들을 구하고 계실 때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도망친 후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나요?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탈출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괘씸했어요. 그런데 선장도 1년 계약 비정규직으로 270만원 월급 받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일을 할 때 그 사람이 보람과 긍지를 가지려면 그만한 처우를 해줘야 해요. 의무감만 요구할 게 아니라 긍지를 갖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사원으로서 적절한 예우를 받아야 책임감이 생기는 것이죠. 청해진해운이 선원과 선장의 처우나 복지에 더 신경을 썼어야 해요."

-고 박지영씨 같은 승무원 9명은 사망하거나 실종됐습니다.(세월호 총 승무원은 29명. 아르바이트생 4명은 승무원 명단에서 누락됐다가 나중에 발견됐다.)

"박지영씨가 아이들에게 구명조끼 양보하다가 죽은 승무원이죠? 그 사람 기억나요. 사고 당일 아침에 배에서 봤어요. 배 안에서 커피 팔고 있었어요. 식사 배급 때는 그분이 밥도 퍼주고 온갖 잡일은 다 하더군요. 그런데도 표정이 참 밝았어요. 누리꾼들이 의사자 지정해달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배에 실은 승합차는 어떻게 되었나요?

"바닷속에 다 잠겼지요. 배상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걸 요구할 때는 아닌 것 같아서…."

-배가 뒤집히고 나서는 생존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구조 시스템이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인지 답답해하는데요.

"저는 생존자가 더 나올 수 없을 거라고 봤어요. 배 안에 물이 어떻게 차오르는지를 본 사람이거든요. 에어포켓 얘기가 나오던데 그것은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하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해상 재난 구조 시스템은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고 초기 미숙한 대응이 결정적으로 재난을 키웠어요. 승무원들이 승객을 제대로 대피시키지도 못했고, 해경 구조대는 출동해 놓고 배에 진입도 못 했고. 우리나라가 겨우 이 정도였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구조 시스템만 제대로 갖춰져 있었으면 50~60명은 더 구했을 거라고 봅니다."

-재난이 닥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충고 좀 해주세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절대 흥분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면 됩니다."

-이번에 아이들은 차분하게 행동했는데요.

"그러게요. 어른들이 참 할 말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지요."

영웅으로 비칠까 부담…악플에 가족들 상처도

김씨는 언론 인터뷰 뒤 자신이 영웅처럼 그려질까 부담스러워했다. 언론이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김씨가 방송사에 건넨 영상에는 김씨의 얼굴 모습이 일부 찍혔다. 가끔 김씨가 웃는 듯한 모습도 영상에 담겼다. 그대로 방송을 탔다. 일부 누리꾼은 "사고 당시에 웃는 사람이 어디 있냐. 저런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냐"고 악성 댓글을 달았다.

김씨와 그의 가족들은 상처를 받았다. 김씨는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 황당하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악성 댓글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봤다. 더이상의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다가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에 대해 초기 해경 구조대원의 어설픈 대응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인터뷰 도중 커피숍 주인은 김씨의 얼굴을 알아보고 김씨에게 오렌지주스를 무료로 가져다주었다. 커피숍 주인은 "김씨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우리나라가 유지되는 것 같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인터뷰는 밤 10시가 넘어 끝났다. 김씨가 인근의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택시비를 챙겨주겠다고 기자는 말했다. 기자가 커피값을 계산하는 사이 김씨는 먼저 커피숍을 나가 바로 사라졌다. 김씨에게 전화를 걸자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냥 올바른 보도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서귀포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제법 찼다.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한겨레][세월호 참사 특별 기고]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


더이상 애도만 하지 말라! 정의로운 발언을 서슴지 말라!

조선의 창공이 원혼의 피눈물로 물들어

잿빛 같은 암흑을 드리우고

온생명의 분노가 열화같이 치솟아

암흑의 장막을 불태울 때

원망조차 잊어버린 순결한 여린 혼령들은

신단수의 하늘에서 소리친다

엄마 아빠

홍익인간의 천부인은

어디로 사라졌나요

 

대전으로 도망친 이승만, 국민들에겐 "나도 서울을 지키고 있다"

1950년 6월25일, 국민 전체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새벽부터 전쟁 발발의 소식을 듣고 우선 자기 혼자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26일 아침 8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방송에 나와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중에 있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그런데 27일 새벽부터 비상국무회의가 열렸지만 이승만은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고 열차편으로 이미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대전 도피에 관해 각료는 물론, 국회의원, 하물며 육군본부에까지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승만은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곧 특별담화를 녹음한다. 27일 밤 9시부터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고 전국민에게 전달되었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 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마십시오. 나 대통령 본인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생거짓말이었다.

이날 정훈국장교의 말만 믿은 모윤숙은 밤늦게까지 가두선전방송을 하고 다녔다. 이승만의 파렴치한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8일 새벽 2시30분 아무 예고도 없이 한강대교를 폭파시켜 버렸다. 사전 통보나 통제가 없었기에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그 다리를 건너가던 시민 500여명이 폭사하였다. 군사전략적으로 볼 때도 이것은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던 우리 국군이 퇴로를 차단당하고 와해, 희생된 것이다.

이승만은 7월1일 대전에서 또다시 도망갈 때도 목포로 가서 부산으로 배를 타고 갔다. 경부가도가 이미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전 서울 시민을 서울에 가두어놓고 자기 혼자만 살 생각을 했다. 그리고 9·28 서울수복을 했을 때 서울에 남아 고생한 뭇 시민들을 부역했다고 죽이고 고문하고
연좌제로 묶어놓았다. 우리는 이러한 이승만을 성스러운 통치자로 모시는 기나긴 정치사적 이념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비극적 상황이란 모든 함수가 최악의 길을 재촉하도록 협동을 한 필연·우연의 사태이기 때문에 그 인과를 단선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사태의 해결이나 반성에 크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인과계열 중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들이 있다.

자기만 먼저 탈출한 선장, 승객들에겐 "동요 말고 제자리를 지켜라"

우선 배에 관하여 정확한 구조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끝까지 남아서 승객의 안위를 책임지어야 할 선박직 승무원 15명 전원이 먼저 탈출하여 쌩쌩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이준석 선장과 일등항해사가 탈출하면서도 학생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객실 속에서 제자리를 지킬 것을 명령하였고 그것을 계속 강요하였다는 가슴 아픈 일련의 사태에 내재한다. 모든 비극은 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 위기상황에 누구든지 나 먼저 살고보자는 본능적 움직임은 충분히 요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과 이준석의 경우 도덕적 양심을 운운치 않더라도 이러한 생존본능의 논리조차 적용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승만의 서울 탈출이나 이준석의 세월호 탈출은 전혀 시민, 승객의 탈출과 충돌을 일으키는 사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서울을 빠져나오면서도 서울시민들에게 탈출을 권고할 수 있었고, 이준석은 세월호를 빠져나오면서도 승객들에게 같이 탈출하자는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자신의 탈출이 학생들의 탈출로 인하여 저지되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 도호쿠지진 때 미야기농고의 학생들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소·돼지 축사의 문을 열어주고 피신했다. 하물며 인간이랴! 이것은 이승만과 이준석의
디엔에이 심층구조 속에까지 사람은 존엄과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수단일 뿐이라고 하는 비인성적 무책임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 이들이 생각하는 코스모스는 다중의 죽음이다. 죽음의 질서인 것이다. 이것은 우발적인 사태가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구조적인 사태인 것이다.

의주로 도망간 선조, 임진강변 건물과 배 다 태워버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선조는 대책 없이 먼저 도망쳤다. 사실 왜군은 이순신에게 해로를 차단당해 보급이 끊겼기 때문에 식량이 없었고 지쳐 있었다. 서울은 한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그리고 당시 서울에는 화약이 2만7천 근이나 저장되어 있었다. 한강의 대형 수송배들과 지형을 활용하고 강북 강변에 군사를 배치하여 대처했더라면 왜군의 도강을 쉽사리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가마를 메어줄 사람도 없어 우중에 말을 타고 쫄쫄 비 맞고 굶으면서 북상에 북상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처럼 자기가 건넌 임진강변의 건물과 배는 다 태워버렸다. 한번 생각해보라! 그가 의주까지 도망갈 때, 그의 말을 이끌었던 말단 관리 이마와 임란을 승리로 이끈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장군 두 사람의 공훈을 평가할 때, 누굴 더 높게 평점했을까? 왜란이 끝나고 전체 훈공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선조는 이순신이 일적추(一賊酋)의 목도 베지 못했고, 일적진(一賊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생거짓말을 하면서, 왜란을 토평한 것은 오로지 자기가 의주에서 요청하여 온 천병(天兵) 덕분이라고 말한다. 선조의 의식 속에서는 이순신이나 왜적과 피 흘리며 싸운 의병들보다 자기 말몰이꾼이 더 위대한 것이다.(<호성선무청난삼공신도감의궤>)

지금 전국민의 애간장을 끓게 만드는 것은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한 최초의 시각으로부터 적게는 20분, 넉넉하게는 2시간 정도, 충분히 사태 해결을 위한 구명결단의 여백이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이 최초 절명의 황금시간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언론은 부정확한 보도로 사태를 흐리게 했을 뿐 아니라, 모든 관련된 국가행정부서의 사람들은 혼선을 빚기만 하는 다양한 대책본부를 꾸리기만 하면서 황금시간을 허송했고, 또 거짓말만 남발했으며, 그 사건 현장에 당도한 그 어느 누구도 학생들이 애처롭게 죽어간다는 것을 목도하면서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순신이 좌수사로서 당시 세태의 관행에 역행하여 임란 직전에 수군과 화포와 전술과 전함을 정렬해놓았다는 이 사실은 오로지 그의 독자적 판단에 의거한 것이다. 이러한 이순신에게 선조는 원균의 모함을 빌미로 종적죄를 씌워 서울로 끌어올리자마자 심한 고문을 가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5년 동안 나라를 구한 명장을 함부로 나국한 것이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우리 역사는 구조적으로 책임을 질 줄 아는 결단의 인물을 키우지 않았다. 호걸이란 성군문왕의 다스림이 없이도 태어난다고 맹자가 말한 그 리더십의 주인공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오로지 민중의 직감적 판단 속에서만 우리 사회의 정의는 지켜져 내려온 것이다.

이 시대 총체적 부실의 주체는 다름 아닌 박근혜 정부이다

이러한 사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역사가 총체적 부실 속에서 결정권자가 부재한 상태로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총체적 부실의 주체는 다름 아닌 박근혜 정부이다. 그리고 이 박근혜 정부의 구조적 죄악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모두 박근혜 본인에게 돌아간다. 세월호 참변의 전과정을 직접적으로 총괄한 사람은 박근혜 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의 정부의 사람과 이념, 그 모든 것이 박근혜가 창조한 것이다. 그만큼 통치의 정점은 국가의 안위에 막중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진심어린 전면적인 사과의 한마디도 없었다. 과거의 황제인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조차 불상사가 일어날 때마다 거느리고 있는 신하를 탓하지 않고 자기가 국민 앞에 직접 사죄했다. 맹자는 통치자가 진정 생도(生道)의 원리를 가지고 다스리면 죽는 사람도 죽음을 원망치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사도(死道)의 원리로써 생사람까지 죽이고 있다. 이 불상사는 99.99%의 대중을 희생시켜 0.01%의 부귀권세가들을 봉양하려는 이명박 정부 이래의 줄기찬 신자유주의적인 정책기조가 교육·경제·정치·행정·법률·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이 만들어낸 것이다. 세월호의 실소유주 유병언은 이윤 극대화를 위하여 승객을 짐짝화한 것이다.

이 사회의 주류 언론들이 이 기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소재가 있는 모든 행정조직, 또 세모-
청해진과 같은 음흉한 범죄기관을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과격한 주장을 펴지만 이것은 사태의 본질적 해결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박근혜에게 무소불위의 과거 독재자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박근혜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태를 활용하여 도덕적 제스처의 칼자루를 휘두르기만 하면 목전의 선거에서 승리를 구가할 수 있다는 계산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민족지도자가 되길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선교사 김선일 사건 때에 박근혜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건 국가가 아니며 국민 한 사람을 못 지켜낸 그러한 정부에 대하여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었다는 논조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도올은 선포한다: "박근혜, 그대의 대통령의 자격이야말로 근본적인 회의의 대상이다." 그대가 설사 대통령의 직책을 맡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허명이다. 그대의 대통령이라는 명분은 오로지 선거라는 합법적인 절차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것인데, 그 정당화의 법률적 근거인 선거 자체가 불법선거였다는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로서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이 땅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미 그대에게 대통령 사직의 권고를 한 바 있다. 트위터상에 올라오는 어린 학생들의 문구 속에도 항변의 언사들이 많다.

국민들이여! 더 이상 애도만 하지 말라! 의기소침하여 경건한 몸가짐만에 머물지 말라! 국민들이여! 분노하라! 거리로 뛰쳐나와라! 정의로운 발언을 서슴지 말라! 박근혜여! 그대가 진실로 이 시대의 민족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차마 여의치 못하다고 한다면, 정책의 근원적인 기조를 바꾸고 거국적 내각을 새롭게 구성하여 그대의 허명화된 카리스마를 축소하고 개방적 권력형태를 만들며, 주변의 어리석은 유신잔당들을 척결해야 한다. 그들은 통치능력이 부재한 과거의 유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그대의 양신(良臣)은 민적(民賊)이다.

규제를 왜 푸는가? 그대의 규제풀음은 가진 자를 위한 것이다. 그대가 풀어야 할 규제는 사상통제의 규제이며, 언론의 규제이다. 유통을 장악하고 골목상권까지 독점하는 모든 대자본에 대하여 규제를 강화하라! 중소자영업의 생활세계를 보호하라! 그것이 민중의 갈망이다! 언론을 바로 세워라!

그대는 "국가개조"를 말했다. 그러나 그대가 중심이 된 국가개조는 악순환만 초래한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의 근원적 변화는 그대의 시녀가 되어버린 검찰이나 행정체계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원칙에 따른 국민적 합의가 창출한 새로운 기관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국민이 주체가 되어 국민 스스로의 미래를 개혁해 나가는 과정을 그대가 적극 도와주는 그런 변화이어야 한다.

이제마는 말했다. 투현질능(妬賢疾能) 이상의 대환(大患)이 없고 호현낙선(好賢樂善) 이상의 대약(大藥)이 없다. 맹자는 호선(好善)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천하를 다스리기에 넉넉함이 있다 했다. 호선이란 낙문고언(樂聞苦言)이다. 쓴 말을 듣기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애타게 챙겨주며 질서를 지킨 단원의 학생들, 그들을 보호하며 목숨을 던진 선생님들, 선박직이 아닌 헌신적 승무원들, 그리고 책임을 통감하고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는 유서를 남기고 떠난 강민규 교감님, 우리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도덕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민족 구원의 빛줄기는 있다. 세월호 희생자 302명은 살아 있다.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다시 듣는 도올의 혁세격문! 니덜 다 정말 졎됐어!ㅉㅉㅉ [11]

토탈커맨더 (foresee****)

주소복사 조회 2360 14.05.02 23:11 신고신고

지난 대선때 선거전에 이런 피를 토하는 지식인의 울부짖음이 있었다.ㅉㅉㅉ 이거 들어는 봤냐?ㅉㅉㅉ

 

그런데, 개썅망국의 저주받은 상종도 못할 민중은 도대체 왜곡된 뭘? 무엇을? 택했냐? 완전 질알났었쥐?ㅉㅉㅉ

 

결국 모자란 골이 텅빈 년을 택했다. 이 질알이니 이런 져가튼 나라의 궁민은 다 뒈졌다고 말할수 밖에 없다!!!

 

내 솔직한 심정이 이런 저주받은 막장들하고는 더 이상 같은 나라의 국민을 국적을 하기도 싫어진다.ㅉㅉㅉ

 

개썅망국엔 다 뒈져봐야 정신을 차릴? 다 뒈져도 정신을 못차릴 인간 쓰레기들이 너무 많다.ㅉㅉㅉ

 

닥그네하고는 절대 죽었다 깨어나도 잘 될 턱은 없지만? 계속 해 봐라! 어찌 고꾸라질지나 구경할밖에?ㅉㅉㅉ

 

안 말릴테니 제발 계속해라! 닥사모의 나라를 망치는 개질알을!ㅉㅉㅉ 일베충의 저열한 개질알을!ㅉㅉㅉ

 

진짜 저주하고 이젠 신물이 나고 구역질이 난다. 이런 상종도 못할 한심한 개썅망국 어벙한 궁민들아!ㅉㅉㅉ

 


혁세격문革世檄文


지금 조선의 들판이 혁명의 불길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지금 조선의 먼동은 “다시 개벽”의 눈부신 햇살을 발하고 있다. 자고 있는 자들이여, 모두 깨어나라! 새 시대, 새 정치의 함성이 그대를 부른다. 깨어난 4천만의 유권자들이여, 남녀노소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투표장으로 가라!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혁명의 물결이 이 아사달 신시를 휘덮으리라! 조선의 깨인 자들이여! 남김없이 혁명의 대오에 어깨를 엮어라!


환인 하느님께서는 이 신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건국 치세이념을 내리셨다. 그런데 지금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홍익弘益이 아닌, 홍해弘害, 홍살弘殺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인의仁義를 망각하고 솔수식인率獸食人의 사리私利를 앞세우며, 진현進賢의 정도正道를 거부하고 착복과 부패의 한계를 없이 하며, 국고를 털어 치자治者 본인의 사욕을 충족시키며 주변의 승냥이들에게 떡고물을 분배하고 있다. 국토의 산수대강山水大綱을 파괴하고 4대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왜곡·오염시키며, 백두대간의 대혈인 국립공원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케이블카의 설치를 획책하고, 인천공항과 같은 공익의 자산을 사유의 질곡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농촌을 해체시키고 도시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양극화의 괴리는 재벌의 독재를 흥륭興隆케 하며 서민대중의 삶을 노예 이하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추락은 영락이요 죽음이다. 그런데 서민대중의 죽음을 현 정권의 치자들은 환호하고 재벌은 환희의 박수를 친다. 그리고 전국 골목골목의 상권을 대형마트라는 탱크와 기관총으로 후려 갈겨대고만 있다. 어찌 미국의 총기난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쳐다보고만 있는가? 자기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우리가 지도자를 잘못 뽑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민이 교사巧邪와 허언虛言의 달인達人을 지도자로 떠받들 수 있는가? 민주라는 허명에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메이저 언론의 정보조작과 선거를 둘러싼 가치의 혼란이 민중의 너무도 정당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민주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호도하는 온갖 정교한 부정이 민주주의라는 타자他者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여! 또 당할 셈인가? 현 정권의 죄악을 반성 없이 반복할 셈인가? 이제 또 안보의 위협에 대책 없이 속을 셈인가? 마지막 순간을 앞둔 깜짝쇼에 대의大義의 정조情調를 굴복시킬 셈인가? 민생의 감언에 또다시 도덕을 망각할 셈인가? 민중이여! 두 손에 가슴을 얹고 잘 생각해보라! 누가 과연 그대들의 민생을 도와주었는가? 누가 과연 그대들에게 돈 한 푼이라도 거저 준 적이 있는가? 민생은 아사달의 신시로부터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민중 스스로 해결해온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정치는 민생을 해결하지 못한다. 민생은 어디까지나 민중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란 그 민생결단의 번영을 훼방하는 행위를 정치가 제발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일 뿐이다. 오늘과 같은 악랄한 대기업의 횡포는 정부와 공권력의 비호가 없다면 당장 민중의 힘으로 타도될 것이다. 기업과 정부권력의 유착, 자본의 끝없는 폭리확대와 공무행정의 부패의 연환連環은 대중민생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이 희생에는 이제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자산가, 임금노동자를 불문하고 모든 대중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공약으로 “민생”을 우선시 한다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위선자일 뿐이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민생이라기보다는 도덕의 구현이며 정의의 확립이요 인정仁政의 구체적 실천이다. 위장된 웃음의 눈꼬리를 가장하며, 정의와 도덕을 외면하고 반성과 실천을 거부하는 위선의 심장에 이제 종지부를 찍자! 더 이상 속지 말자! 민생이 아닌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자! 그리하면 민생은 저절로 해결된다. 도덕이 바로서고 민생이 풍요롭게 되지 아니 하는 역사는 인간세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도덕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그 너무도 쉬운 해결방안이 그대 손에 쥐어져 있다. 부패와 사악의 정권을 바꾸면 된다. 어떻게 바꾸는가?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의 신성한 혁명의 권리를 행하라! 나와 같이 수십만 권의 장서를 수십 년에 걸쳐 뇌리에 입력한 자나, 만 20세의 청순한 홍안의 유권자나, 동일한 한 표의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인간 오성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신념은 반만년 인문정신의 기나긴 투쟁의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다. 어찌 이 고귀한 권리를 나태와 냉소와 방임으로 포기할 셈인가? 혁명은 어렵지 않다. 유권자의 90%만 매번 투표에 참여한다면 역사는 항상 선을 지향하며 뒤바뀌게 되어있다. 그런데 유권자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이 과연 수권受權의 자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국가기관이나 공영언론조차도 투표를 독려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직무유기를 일삼는 것이다. 국민이여! 분노하라! 분노하라! 실상을 직시하라!


과거에는 최고의 권좌, 그 천명天命을 바꾸는 혁신革新의 대업에는 수없는 인명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다. 삼일운동을 기억하라! 동학의 우금치전투를 상기하라! 정주에서 폭파된 홍경래의 염원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처절한 고립무원의 항쟁이었던가? 그대들이 손에 쥐고 있는 투표용지는 이들 선열先烈의 잘린 모가지처럼 피가 흐르고 있다. 민주의 나무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랐다. 대한민국처럼 비서구권에서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수용하고 직접선거의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이룩한 선례를 축적하여온 나라도 별로 없다. 이것은 오직 선현先賢들의 피흘림의 투쟁으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체제 밖에서 천 리를 가는 것보다 체제 안에서 한 치를 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체제 안에서 천 리를 갈 수가 있다. 우리 민중 모두가 19일 투표함으로 가기만 한다면 혁명은 이루어진다.


혁명은 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가? 이제 혁명은 폭력이 아니다. 이제 혁명은 광포한 영감이 아니다. 이제 조선의 혁명은 체제의 룰에 따라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상식적 작업이다. 그러나 이번 우리의 혁명은 바스티유감옥의 철창을 터뜨린 불란서인들의 인권선언보다, 차르왕정을 무너뜨린 러시아혁명보다,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침탈을 종식시킨 마오쩌똥의 공산혁명보다도 더 막중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혁명이다. 우리의 혁명은 열강의 모든 근대적 노략질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결과물인 세계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진정한 세계평화의 출발이다. 동·서의 언어적 편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며 남·북의 불필요한 이념의 기미羈縻를 절단하며,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고, 도농都農의 균형을 꾀하고, 세조의 찬탈 이래 끊임없이 왜곡되어온 정의의 패배를 설욕하는 대업이다. 훈구파들의 끊임없는 득세, 선조의 파렴치한 임란책임회피, 그 뒤로 이어지는 노론의 장악, 세도정치, 일본제국의 식민지통치와 친일파의 발호, 이승만의 권력찬탈과 무능한 6·25전쟁대처, 일제 만군출신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폭정, 이 모든 흐름이 “불의라도 박박 우겨대면 역사의 정의가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에 대한 통렬한 국민적 반성의 기회를 박탈해왔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올해가 임진왜란 일곱 환갑! 그 부끄러운 통치자들의 행위가 빚어낸 참혹한 민중의 삶을 일순간이라도 연상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좌표는 명료해진다. 그대들은 아는가? 가도입명假道入明의 명분으로 이 땅을 짓밟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침략군의 저주보다, 이 나라를 구해주겠다고 원정 온 명군明軍의 작태가 민중의 삶에 끼친 폐해가 구체적으로 더 심원했다는 사실을 그대는 정말 아는가? 임란의 극복의 원동력은 이순신의 서남해상권 제패와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분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장렬한 최후의 진로를 선택해야만 했고, 의병장 김덕령은 모진 고문 속에 죽어야만 했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신선을 가장하고 소리 없이 스러져야만 했다. 선조는 이들 구국의 지도자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명군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만을 찬양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여송의 사당을 만들었고 명군을 위하여 동대문 밖에 관묘를 지었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었다는 은혜, 즉 재조지은의 찬양은 결국 불과 30년만에 정묘·병자의 양 호란胡亂이라는 처참한 비극을 다시 불러왔다. 이러한 민중의 비운의 역사의 배면에는 6·25전쟁 등 현대사의 명암이 겹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다. 그러나 우리의 친미는 미국과의 정당한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인도주의적 친미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의 화해를 돕도록 만들어야 하며, 역으로 우리는 남·북한 화해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21세기 인류 최대의 염원을 달성케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생民生이라기보다는 민본民本이다. 민중 스스로가 자결의 주체성을 갖는 역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손에 쥔 투표용지 하나로 인류의 역사를 전쟁과 대결의 국면에서 평화와 화해의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사의 기나긴 좌절과 절망을 승리와 희망으로 회향시킬 수 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30만 우국지사들의 원혼을 기억하라! 좌절된 반민특위의 역사를 반성하라! 이제야말로 우리는 투표용지 하나로 반민족행위자들의 작태를 일소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에 국민이 오는 것을 꺼려하는 모든 반민족행위자들의 생애에 종막을 드리워라! 그것도 아주 평화롭게!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 땅의 깨인 자들이여! 모두 남김없이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들의 투표가 이 민족 모두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리라. 주변의 모든 동포를 설득하여 투표장으로 가라! 이 민족의 기나긴 불의와 독선과 배타와 불인不認의 역사를 끝장내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아갈 수 없다! 모든 반동은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분쇄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으로 가라!


2012년 12월 17일

도올 김용옥

...세월호의 진실...........안구한 것인가???? [8]

0a1nvzl (jah***)

주소복사 조회 661 14.05.02 23:34 신고신고

1. 영국 BBC방송 사고당일 16일 사진보면 아침 8시55분에 헬기2대 떠있고.해경이 선원들 탈출시킬때

떨어뜨린 비상구명보트 2개중 한개가 펴진채 있고..배 기울기는 해경이 선원들 탈출시킬때보다

더 기울어 있음........이말은 해경은 9시 35분이 아닌 8시 55분 이전에 선원들을 탈출시켜서 다른배에

태워서 팽목항으로 보냈다는 얘기가 됨.. 고로 한국 언론은 시간을 조작하고 있는 듯이 보임.

(영국 BBC방송국 인터넷사이트 해당 사진은 여기 아고라 토론방 "서현엄마"글 찾아보면 나와있음.

 

 

 

 

 

2. 해경이 최초 세월호에 접근할때...배 후미로 가서 후미통로로 들어가서 충분히 아이들을 빼낼

시간이 있었음.. 8시 55분 이전도착이 아니라  설령 9시 30분 도착했다는 언론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전남 어업지도선이 10시 17분이후까지 애들 구할때도 배는 상당히 떠 있었음...고로 9시 30분에 후미로 진입했으면 분명 최소한 10시 넘어서도 시간은 충분했음...

 

 

3. 영국BBC사진보면.....세월호는 사고당일 12시까지 우현 유리창이 3개나 보일정도로 상당히 떠있음.

그런데 그렇게 떠있는 세월호 주위에 구조하는 배는 거의 안보임...우현이 상당히 떠 있는데..왜 해경배는 구조를 하지않았고. 왜 한국 언론은 세월호가 10시 20분에 침몰했다고 거짓조작을 하는가?

사고당일 뉴스속보에서도 11시 40분이 넘어서 배가 침몰한다는 속보가 떴었으나..지금에와서

한국 언론은 세월호가 10시 20분경에 선수만 남기고 침몰했다는 식으로 시간조작하는게 아닌가??

 

 

4. 해경은 왜 구조하러 온 소방헬기들을 돌려보냈나?

소방서 구조요원들이야 말로 습관적으로 인명구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혹시 전원구조라는 거짓정보를 흘릴때 역시 소방헬기들을 그 핑계로 돌려보낸것은 아닌가??

 

 

5 왜 누가 조작으로 다 구출했다고 발표해서 구조를 지연시켰나?

왜 그 뉴스의 근원을 조사하지 않는가?   그 뉴스가 바로 구조를 결정적으로 지연시켰고,,

그들은 살인범과 같은 악마들이다.

 

 

6. 세월호는 BBC동영상 보면 16일 12시까지 유리창 3개가 보일정도로 떠 있었고

오후 2시에 가서야 선수만 남기고 물속에 잠김

그 시간이면 부력공기 주머니를 수십개는 달 수 있던 시간임.

왜 사고당일 부력투브를 달아서 침몰을 막지 않았나??

해군 특수부대원들을 동원했다면 충분히 부력투뷰를 침몰전에 대량으로 달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안한것인가??

 

 

 

7..왜 현대보령호 바지선이 당일날 왔다는데 돌려보냈나??

세월호가 선수부분이 떠있을때...바지선으로 고정시켰다면 침몰을 막았을 것이다.

왜 현대바지선을 돌려보내고,,,언딘바지선을 기다려야 했나??

 

 

 

 

8..왜 세월호 옆에 화물선 2척이 도울려고 있었는데...그 화물선을 세월호 옆에

붙여서 쇠사슬로 고정해서 침몰을 막지 않았나?  그 배들은 몇천톤씩 나가는 대형배로

그런 대형배라면...세월호 침몰전에 양쪽에서 묶고 서서히 갯뻘쪽으로 끌었다면

배는 갯뻘에 박혀서 침몰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는 섬에서 불과 3킬로거리로

아주 가까워서 세월호가 떠 있을때 화물선과 함께 끌었다면 충분히 침몰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화물선 2척이 계속 옆에 있었는데...왜 화물선을 이용하지 않았나??

그정도 머리도 안됐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9..왜 진도관제센터 기록을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았나?

그리고 공개한 기록은 왜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나??

 

10..왜 배안에 진입해서 해경은 구조하지 않았나?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해경 123정은 처음부터 배 후미로 들어갔어야 하는데...왜 선장,선원들 구조하는데

역점을 두었나? 후미로 간 고무보트는 왜 기관시선원들을 태우고난후..후미로 가지 않았나?

 

 

11. 헬기가 3대갔는데...왜 한대만 구조하는게 보이나??

헬기가 찍은 동영상 보면 한대만 구조하고 나머지 2대는 떠있다.,

또한 헬기에서 학생들 탈출하라는 확성기 소리도들리지 않는다.

 

 

 

12...헬기가 6명을 구조해서 거차도로 갔다는데...왜 세월호 옆의 어선이나 해경함정에

내려놓고 계속 구조하지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차도로 갔나?

세월호 옆에는 어선,해경배,화물선도 2척이나 있었는데...왜 그런 배위에 올려놓고

다시 구조에 힘쓰지 않고...몇배나 시간이 걸리는 거차도로 데리고 갔나??

 

 

13..왜 해경배의 선원들은 세월호에 내려서 구조를 하지 않았나?

선원들 구조할때도 보면 선원들 탈출을 돕는 2명빼고는 배위에서 선원들 타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애초부터 선원들만 먼저 구해오려는 생각이었나???

 

 

14. 사고당일 배가 떠있을때 왜 해군 SSu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배안진입해

구조하지 않았나?  해군 특수부대는 그런 수색작업에 특화된 부대인데

왜 투입을 안했나? 해경관할이어서 그렇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그런 대형사고에 해군이 먼저 투입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말도 안되지 않은가??

더구나 그 인근은 한미해군 합동훈련지역이 아니었는가? 

 

 

15...왜 선박내부구조를 잘 아는 선장,선원들만 먼저 빼돌렸나?

혹시 배안에 어떤 범죄자들이 있어서..이 범죄자들이 아이들을 배안에 잡아두기 위해서

범죄에 방해가 되는 선원들만 먼저 내보내고...나중에 이렇게 먼저 탈출한 선원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치밀한 작전은 아니었을까?

배 구조를 잘 알고..배 상황을 잘 아는 선박직이 배안에 남아 있었다면...혹시 있었을지 모를

범죄자들이 배안에서 아이들을 침몰시까지 잡아두는 것에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선원들이 잠겨진 문등을 열어서 아이들이 탈출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선원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또 조타실 선원들을 먼저 내보냄으로서...혹시 범죄자들이

조타실에서 아이들을 끝까지 나오지 못하게 잡아두는 방송을 하기가 쉬웠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선박직선원들만 먼저 내보낸것은 범죄자 입장에선 당연히 먼저 취해야할

행동이었다.

 

 

 

16. 배안에서 끝까지 방송하며 아이들을 묶어둔 범인을 왜 조사하지 않나?

그 범인이야 말로 사건의 핵심이다. 강모씨 운운하면서 왜 그자의 조사에 대해 함구하나?

혹시 강모씨가 아니고...애초부터 다른 범죄요원이 탑승해서  방송을 해댄것은 아닐까??

친구잃은 청소년들 촛불든다

인쇄하기 l 폰트크기 확대 축소
한겨레

[한겨레] 토요일 광화문 청계광장서 세월호 희생자 추모

참사 이후 청소년 정부대응 항의 촛불 제안 처음


10대 중고생·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세월호 침몰 참사로 수학여행길에 오른 고교생 수백명이 희생되고 주검 수습마저 보름 넘도록 지지부진한데다, 어른들의 믿기지 않는 비리와 무책임·무능 행태가 날마다 드러나고 있어서다.

청소년단체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 회원인 중고생과 청소년들이 “세월호에 탄 친구들과 안녕하고 싶은 청소년이 함께 모여 촛불을 켜자”며 3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친구들을 위한 청소년 촛불’ 행사를 열자고 2일 제안했다. 세월호 침몰 이후 10대 청소년들이 추모와 함께 정부 대응에 항의하는 독자적인 촛불집회를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학생·청소년들은 “박근혜 대통령님, 배에 탄 친구들은 왜 한 명도 살아 오지 못했나요?”라고 물으며, 교복을 입거나 차분한 옷차림으로 모여 “억울하게 희생된 친구들을 위해 촛불을 들자”고 호소했다. 애도와 추모의 묵념, 친구들과 청와대에 보내는 노래와 시, 자유 발언, 상징 의식 차례로 촛불 행사를 진행할 참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지난달 26~27일 광화문네거리 등에서 노란 리본 나눠 주기, 위로 글 보내기, 분향소 합동 참배 등을 했다. 아울러 노란 리본 만들기, 자유 발언, 편지 낭독 및 시 낭송 등에 동참할 10대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facebook.com/21heemang)과 카카오톡(아이디 vnvn10)에 신청해 달라고 제안했다. 페이스북 등에는 며칠 새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단 채 숨지거나 실종된 또래 친구들을 추모하거나 대통령과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글을 손에 쥔 ‘인증샷’ 등이 숱하게 올라왔다. 한 여학생은 “꼭 구조됐으면 좋겠어. 힘내!”라고 쓴 팻말을 들었고, 다른 학생은 “나라 꼴 참 좋네요^^ 그놈의 돈. 돈. 돈. 정말 징글징글하네요”라고 적었다.

이수범 기자 kjlsb@hani.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