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바로 알면 영원한 생명(道)을 깨달을 수 있다. 『老子』는 예수·석가의 말씀과 다름없는 보배로운 경전이다. 『노자』를 풀이함에 비교종교학적으로 다루어 영원한 생명(道)에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말씀을 비교하여 봄으로 영원한 생명(道)을 더욱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다. 류영모도 말하였다. "이렇게 유교·불교·기독교를 서로 비추어 보아야 서로서로가 뭔가 좀 알 수 있게 된다."(『다석어록』)」

<老子의 道와 德> (p.11)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의 마음은 곧을 수밖에 없다. 곧은 마음으로 인생 길을 걸어가는 삶이 덕(德)이다. 장자(莊子)도 하느님의 얼(道)을 마음 속에 지니면 밖의 몸이 놀아 날 수 없다(內保之而外不蕩-『장자』덕충부 편)고 하였다. 노자가 속나(德)의 삶을 낱낱이 밝힌 것이 삼독(탐진치)을 극복하는 三寶이다. 삼보에서 一보인 慈는 사랑으로 貪을 이긴 것이다.

二보의 儉은 금욕으로 물자와 精力을 아껴 痴를 이긴 것이다. 三보의 不敢爲天下先은 경쟁을 하지 않으므로 瞋을 이긴 것이다. 이처럼 道德은 사람에게 삶의 뜻을 이루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귀중한 것이다. 맹자는 말하였다. "사람마다 제 속에 귀한 것(德)을 지녔건만 생각하지를 못한다." (人人有貴於己者 不思耳 - 『맹자』고자상 편) 사람이 바로 생각(기도)하여 하느님인 얼(道)을 깨달아 意識化하면 속나(德)를 이룬다.

그러므로 意識에 把持된 道가 德이다. 따라서 道德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靈我)이다. 짐승인 사람이지만 얼나를 깨달으면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요한 5:24). 이러한 생명의 전환이 참된 회개요 중생이요 부활이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우리는 몸생명에서 얼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멸망할 짐승이다. 이 몸은 짐승이라 죽는다. 이 몸을 참나로 생각하면 멸망이다. 이몸은 죽어도 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다." 노자는 이를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노자』40장)이라고 하였다. 反者란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나는(反轉)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얼(道)이 출동하여야 한다. 弱者란 제나(ego)의 獸性이 아주 약해진 것을 말한다. 수성이 약해졌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얼이 일한(用) 것이다. 노자가 말한 弱者는 곧 德者이다.」

<제1장. 이름할 수 없는 님이 하늘과 땅의 비롯이다> (p.21)
「말할 수 있는 참(얼)은 늘(영원한) 참이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이름할 수 있는 님은 늘(영원한) 님이 아니다. 名可名非常名
없음의 님(무극)이라 하늘과 땅(우주)의 비롯이고 無名天地之始
있음의 님(태극)이라 온갖 것의 어머니다. 有名萬物之母
그러므로 언제나 하고픔(自我)이 없어져서 故常無欲以觀其妙


그 신비를 보고
언제나 하고픔이 있어서 그(별들의) 돎을 본다. 常有欲以觀其 
이 두가지는 한 나옴(존재)인데 달리 此兩者同出而異名
이름 부름이라.
(無·有를) 함께 이르면 검님(하느님)이다. 同謂之玄
아득하고 또 까마득하여(遠大한) 玄之又玄
뭇 오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衆妙之門」

<제2장. 말않고 가르친다> (p.25)
「세상(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워할 줄은 다 알지만 天下皆知美之爲美
이(아름다움)는 더러움뿐이다. 斯惡己
착함을 착하다 할 줄은 다 알지만皆知善之爲善
이(착함)는 착하지 못할 뿐이다.斯不善已
그러므로 있음 없음이 번갈며故有無相生
어렵고 쉬움이 되돌고難易相成
길고 짧음이 서로 견주며 長短相較
높고 아래가 서로 기운다.高下相傾
울림과 소리가 마주 어울리고音聲相和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前後相隨
이리하여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함이 없이 살아處無爲之事
말하지 않고 가르쳐 간다.行不言之敎
온갖 것이 일어나도 말리지 않고萬物作焉而不辭
낳았으나 가지지 않고生而不有
하고서도 기대지(의지하지) 않고爲而不恃
일 이룬 데 자리하지 않으니功成而弗(不)居
그저 자리하지 않기로만夫唯弗(不)居
이로써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是以不去」

<제3장.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히> (p.29)
「어진(잘난) 이를 높이지 않아야不尙賢
사람들로 하여금 싸우지 않게 한다.使民不爭
얻기 어려운 물건은 귀히 여기지 말아야不貴難得之貨
사람들로 하여금 훔치지 않게 한다.使民不爲盜
하고 싶은 걸 보이지 말아야不見可欲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못하게 한다.使民心不亂
이래서 거룩한 사람의 다스림은是以聖人之治
그 마음은 비우고 그 배는 든든히虛其心實其腹
그 뜻은 무르고 그 뼈는 세게 한다.弱其志强其骨
늘 사람들로 하여금 알고 싶지도常使民無知無欲
하고 싶지도 않게 하여
그저 하고픈 이도 구태여 하지 못하게 하여使夫知者不敢爲也
(짐승노릇)함이 없게 하면 못다스림이 없으리爲無爲則無不治」

<제4장.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얽힘이 풀린다> (p.33)
「참(얼)은 빔(없음)으로 쓴다.道沖而用之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못한다.或不盈
깊음이여 온갖 거의 마루님 (근원) 같아라.淵兮似萬物之宗
그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挫其銳
그 얽힘이 풀리다.解其紛
(맘은) 빛(얼)에 따르고和其光
(몸은) 티끌과 함께 한다.同其塵
맑음이여 아마 계시는 것 같으나湛兮似或存
내가 누구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지만吾不知誰之子
먼저 하느님을 본받으러 간다.象帝之先
(얼나로는 하느님 아들이다)」

<제5장.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같다> (p.37)
「하늘과 땅은 어질지만 않다.天地不仁

온갖 것을 꼴개로 생각한다.以萬物爲芻狗
거룩한 사람은 어질지만 않다.聖人不仁
사람들을 가지고 꼴개로 삼는다.以百姓爲芻狗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구나.天地之間其猶乎
비었는데 쭈그러들지 않고虛而不屈
움직여 (바람이) 심히 나온다.動而愈出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힌다.多言數窮
속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不如守中」

<제6장. 얼나는 죽지 않는다.> (p.41)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谷神不死
이를 하늘 어머님이라 한다.是爲玄牝
하늘 어머님의 입玄牝之門
이를 일러 하늘 땅(우주)의 뿌리라 한다.是爲天地根
한결같이 계시니綿綿若存
쓰는 데도 애쓰지 않는다.用之不勤」

<제7장. 하늘은 길이 길이, 땅은 오래오래> (p.45)
「하늘은 길이 길이 땅은 오래 오래天長地久
하늘 땅이 능히 길이 또 오랠 수 있는 까닭은天地所以能長且久者
그 제나로만 살지 않아서다.以其不自生
그러므로 능히 길이 살 수 있다.故能長生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그 몸을 뒤늦출수록 몸이 앞서고 後其身而身先
그 몸을 버릴수록 몸이 있나니外其身而身存
그 나 없음이 아니랴非以其無私耶
그러므로 능히 나를 거듭나게 한다.故能成其私」

<제8장. 가장 착함은 물같다> (p.49)
「가장 착함은 물같다.上善若水
물은 착하여 온갖 것을 좋게하며 다투질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뭇사람이 싫어하는데 지낸다.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참에 가깝다.故幾於道矣
머물기는 착하도록 땅에居善地
마음은 착하도록 깊게心善淵
주기는 착하도록 어질게與善仁
말은 착하도록 미쁘게言善信
다스림은 착하도록 바르게政善治
일은 착하도록 썩 잘事善能
움직임은 착하도록 때맞춰 動善時
그저 오직 다투지 않아夫唯不爭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故無尤」

<제9장. 가멸고(부하고) 높다고 제일인 척하면 허물을 끼친다> (p.54)
「가지고 채우겠다는 건持而盈之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며不如其已
헤아려보는 날카로움은而銳之
길게 지니지 못한다.不可長保
금(은)과 구슬(보석)이 집에 가득하고는金玉滿堂
지키는 수가 없으며莫之能守
가멸고(부하고) 높다고 제일인 척하면富貴而驕
스스로 허물을 (누리에) 끼친다.自遺其咎
일을 이루어 이름나면功成名
마침내 몸이 물러남이遂身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天之道」

<제10장. 씨알 사랑 나라 다스림에 함 없음> (p.59)
「(몸에) 맘을 싣고 (맘에) 하나(얼)을 품어載營魄抱一
떨어지게 할 수 없음이여能無離乎
(얼에) 바친 맘은 아주 부드럽기에專氣致柔
능히 갓난 아기 같음이여能如兒乎
치우고 씻어내어 하느님이 보기에滌除玄覽
능히 흠(허물) 없으리라能無疵乎
씨알 사랑 나라 다스림에愛民治國
능히 (내가) 함 없음이여能無爲乎
하늘 문을 열고 닫음에天門開闔
능히 암 됨이여能爲雌乎
네 갈래로 환히 밝히는데明白四達
능히 아는 체가 없음이여能無知乎
낳고 기르나生之畜之
낳되 차지하질 않으며生而不有
생각하되 기대지 않으며爲而不恃
어른이라 맘대로 않으니長而不宰
이를 하늘 속알이라 이른다.是謂玄德」

<제11장. 빔이 알맞아서 그릇에 쓰인다> (p.64)
「서른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함께 모여三十福共一穀
그 빔이 알맞아서 수레로 쓸 수 있다.富其無有車之用
찰진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는데埴以爲器
그 빔이 알맞아서 그릇으로 쓰인다.富其無有器之用
문이나 창을 내어서 집을 짓는데鑿戶以爲室
그 빔이 알맞아서 집으로 쓰인다.當其無有室之用
그러므로 있는 것을 이롭게 만드는 것은故有之以爲利
빈 것을 쓰게 되어서이다.無之以爲用」

<제12장. 다섯 빛깔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다> (p.68)
「다섯 빛깔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五色令人目盲
다섯 소리가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五音令人耳聾
다섯 맛이 사람의 입맛을 어긋나게 하고五味令人口爽
몰려 달리는 사냥질이 사람의 맘을 미치게 한다.馳騁田獵令人心發狂
얻기 어려운 물건은 사람을 (양심에)難得之貨令人行妨
거리끼는 데로 가게 한다.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속나를 위하지 겉나를 위하지 않는다.爲腹不爲目
그러므로 저(겉나)를 버리고 이(속나)를 거둔다.故去彼取此」

<제13장. 사랑함에도, 몰아세움에도 놀라고> (p.73)
「사랑함에도 몰아세움에도 따라 놀란다.寵辱若驚
가장 큰 근심은 여린 몸이다.貴大患若身
무엇을 일러 사랑하고 몰아세움에 따라 놀람인가何謂寵辱若驚
사랑함은 위로 함이고 몰아세움은 아래로 함이다.寵爲上辱爲下
얻으면 따라 놀라고得之若驚
잃어도 따라 놀란다.失之若驚
이 일러 사랑하고 몰아세움에 따라 놀람이다.是謂寵辱若驚
무엇을 일러 가장 큰 근심은 여린 몸인가何謂貴大患若身
내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吾所以有大患者
내가 몸이 있으므로써다.爲吾有身
내가 몸 없음에 미치면及吾無身
내게 무슨 근심이 있으랴吾有何患
그러므로 아끼는 몸으로써故貴以身爲天下
세상을 위해 일하면
가히 세상을 맡길만도 하고可以寄天下
사랑스런 몸으로써 세상을 위해 일하면愛以身爲天下
가히 세상을 부칠만도 하다.可以託天下」

<제14장. 다시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간다> (p.78)
「보아도 안뵈니 이름하여 얼나의 모습視之不見名日夷
들어도 안들리니 이름하여 얼나의 소리聽之不聞名日希
잡아도 안잡히니 이름하여 없이 있는 얼나搏之不得名日微
이 세 가지는 따지고 물어서는 아니된다.此三者不可致詰
그러므로 왼통(전체)으로 하나됨이여故混而爲一
그 위로도 밝지 않고其上不
그 아래로 어둡지 않다其下不昧
(시공으로) 끝이 없으니 이름할 수 없어繩繩兮不可名
다시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간다.復歸於無物
이를 일러 모습 없는 모습이라 한다.是謂無狀之狀
아무것도 없는 모습이라無物之象
이를 일러 황홀이라 한다.是謂惚恍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못보고迎之不見其首
따라가도 그 궁둥이를 못본다.隨之下見其後
옛부터 오는 얼(참)을 잡아執古之道
이제 있음(몸)을 다스리는 데 쓰니以御今之有
옛 비롯(하느님)을 잘 안다.能知古始
이를 일러 얼의 벼리(권위)라 한다.是謂道紀」

<제15장. 오묘하게 하느님께로 뚫리어> (pp.83∼85)
「옛날에 착함을 이룬 선비는古之善爲士者
미묘하여라 하느님께로 뚫림이微妙玄通
깊이를 알지 못하겠어라.深不可識
그저 오직 알지 못하여未唯不可識
그러므로 억지로 모습을 지으면 (그리면)故强爲之容
머뭇거림이여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豫兮若冬淑川
두리번거림이여 사방 둘레를 두려워하는 듯猶兮若畏四隣
엄전함이여 그 손님인 듯儼兮其若客
풀어지기를 얼음이 바야흐로 녹는 듯渙兮若水之將釋
도타움이여 등걸인 듯敦兮其若樸
텅 비었음이여 골짜구니인 듯曠兮其若谷
원통이여 흐린 듯混兮其若濁
누가 능히 흐린 것을 조용함으로써 천천히 맑히랴敦能濁以靜之徐淸
누가 능히 빠진 데서 오래도록 감응시켜 차차 살려내랴敦能安以久動之徐生
이 얼을 간직한 이는 (욕망을) 채우고자 아니해保此道者不欲盈
그저 오직 채우지 아니하니未唯不盈
그러므로 착함이란 묵은 것이지故能不新成
새로 이룬 것이 아니다. 」

「노자는 착한 선비(善士)의 모습을 일곱 가지로 그려 놓았다. 삼가기(豫), 두려워하기(猶), 엄전하기(儼), 너그럽기(渙), 도탑기(敦), 비우기(曠), 하나되기(混)로 되어 있다.」

「공자(孔子)의 아홉가지를 생각하라는 구사(九思), 석가가 여덟가지를 바르게 하라는 팔정도(八正道)도 인생을 삼가하면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가르침이다. 공자의 아홉가지 생각하라는 것은 ①봄에는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視思明), ②들음에 똑똑하게 듣기를 생각하고(聽思聰), ③낯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色思溫), ④얼굴 모습은 공손하기를 생각하고(貌思恭), ⑤말할 때는 충직하기를 생각하고(言思忠), ⑥섬김에는 공경하기를 생각하고(事思敬), ⑦궁금함에는 묻기를 생각하고(疑思問), ⑧성냄에는 어려워짐을 생각하고(忿思難), ⑨얻게 되는 것을 보면 옳은가를 생각한다 (見得思義-『논어』계시 편). 또 석가의 여덟가지 바른 길은 ①바르게 보고(正見): 이 세상은 거짓이다. ②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제나(自我)는 거짓 생명이다. ③바르게 말하고(正語): 제나는 죽어야 한다. ④바르게 일하고(正業): 제나의 삼독은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⑤바르게 숨쉬고(正命): 얼생명으로 숨쉬고 ⑥바르게 나아간다.(正精進):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⑦바르게 기도하고(正念): 하느님만 생각한다. ⑧바르게 자리하고(正定): 하느님(니르바나)께로 들어간다.」

<제16장. 몸은 죽어도 얼은 괜찮다> (p.89)
「(생각이) 하느님께 이르러致虛極
(마음에) 하느님을 간직한다.守靜篤
온갖 것이 나란히 일어 나타나지만萬物竝作
나와 함께 돌아감을 보이리라.吾以觀其復
그저 만물이 빽빽하나夫物芸芸
제각기 밑둥(근원)으로 돌아간다各歸其根
돌아갈 밑둥을 일컫어 고요(하늘나라)라歸根日靜
이를 일러 거듭 목숨이라 한다.是謂復命
거듭 목슴을 일컬어 늘(영생)이라復命日常
늘(영생)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일컫는다.知常日明
늘(영생)을 알지 못함은 허망하게 나와 일찍 죽음이다. 不知常妄作凶
늘(영생)을 알아 받아들이고知常容
받아들이면 이에 올바르고容乃公
올바르면 이에 어른이고公乃王
어른이면 이에 하느님이고王乃天
하느님이면 이에 얼나이고天乃道
얼나이면 이에 영원하리道乃久
몸은 죽어도 (얼은) 괜찮다(죽지 않는다).沒身不殆」

<제17장. 믿음이 모자라 못 믿는다> (p.94)
「맨 위로는 있는 줄을 알지 못함이요太上不知有之
그 다음은 사랑하고 기림이요其次親而譽之
그 다음은 두려워함이요其次畏之
그 다음은 업신여김이다.其次侮之
믿음이 모자라서 못 믿는다信不足焉 有不信焉
멀리 (옛) 귀한 말은悠(猶)兮其貴言
공은 이루고 일은 마침에功成事遂
씨알들이 다 이르기를 '우리 스스로다'라고 한다.百姓皆謂我自然」

<제18장. 슬기가 나와 큰 거짓이 있다> (p.99)
「한 얼(참)을 내 버려大道廢
어짐과 옳음이 있다.有仁義
아는 슬기가 나와智慧出
큰 거짓이 있다.有大僞
여섯(부자, 형제, 부부) 가까운 사이가 틀어져六親不和
효성스런 아들과 사랑하는 어버이가 있다.有孝慈
나라가 어둡고 어지러워國家昏亂
충성된 신하가 있다.有忠臣」

<제19장. 제나는 작게 욕심은 적게> (p.103)
「거룩한 체를 끊고 아는 체를 버리면絶聖棄智
씨알이 좋아지기가 일백 곱절일 거고民利百倍
어진 체를 끊고 옳은 체를 버리면絶仁棄義
씨알이 다시 위 섬김과 아래 사랑으로 돌아온다.民復孝慈
잔 재주를 끊고 제 이익을 버리면絶巧棄利
훔치는 도둑이 있을 수 없다.盜賊無有
이 세가지는 글월로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此三者以爲文不足
그러므로 하게끔 타이르는 바가 있어야 한다.故令有所屬
빔을 보고 얼을 품어見素抱樸
제나를 작게 욕심은 적게小私寡欲」

<제20장. 하느님 말씀먹기가 소중하다> (pp.108-109)
「배움을 뛰어넘어야(깨달아야) 근심이 없어진다.絶學無憂
(정중히) 예 하는 것과 (건성) 예 하는 것이唯之與阿
서로 떨어짐이 얼마인가(얼마나 다른가).相去幾何
착한 것과 모짐의 善之與惡
서로 떨어짐이 얼마인 것같은가相去何若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바를人之所畏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안되나니不可不畏
(두려움없이) 거칠어서는 (삶을) 다하지 못한다.荒兮其未央哉
뭇 사람들이 즐거워하기는衆人熙熙
축제라도 지내는 것 같고如享太牢
봄나들이로 돈대(墩臺)에라도 오르는 것 같다.如登春臺
나홀로 멍하여 맘차리지 못하고我獨泊兮其未兆
갓난아기도 어르지 못할 것같아라.女兒之未孩
저 높은 곳에 오랫동안 서성거리며兮若無所歸
돌아갈 곳이 없는 것같아라.
뭇 사람은 모두 남는 것이 있는데衆人皆有餘
나 홀로 잃어버린 것 같다.而我獨若遺
나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여我愚人之心也哉
막막하도다沌沌兮
세상사람들은 (세상일에) 밝은데俗人昭昭
나 홀로 (세상일에) 어둡다.我獨昏昏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俗人察察
나 홀로 답답하여라.我獨悶悶
(맘이) 움직임이여 바다같다.澹兮其若海
(얼의) 바람이 불어옴이여 쉼없는 것같다.兮若無所止
뭇 사람은 (말이나 글을) 씀이 있는데衆人皆有以
나 홀로 구두쇠처럼 완고하다.而我獨頑似鄙
나 홀로 사람들과 다르게我獨異於人
하느님(어머니) (말씀) 먹기를 귀하게 여긴다.而貴食母」

<제21장. 뚫린 속나의 얼굴은 오직 얼이다> (p.113)
「뚫린 속나의 얼굴(내용)은孔德之容
오직 얼이라 이를 좇을 뿐이다惟道是從
얼의 됨을 헤어리면 오직 아찔하고 오직 소스라쳐道之爲物 惟恍惟惚
아찔함이여, 소스라침이여, 그 가운데 빛나고恍兮惚兮 其中有象
아찔함이여, 소스라침이여, 그 가운데 만남이 있고惚兮恍兮 其中有物
고요함이여, 깊음이여, 그 가운데 힘이 있고窈兮冥兮 其中有精
그 힘이 몹시 참되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其精甚眞 其中有信
옛부터 이제까지 그 존재가 떠나가지 않고自古及今 其名不去
(와서 가는) 뭇 많은 것들을 보아 보낸다(사열한다)以閱衆甫
나 어째서 뭇 많은 것들의 실상을 알랴吾何以知衆甫之狀哉
이 얼로써니라以此(道)」

<제22장. 세상도 더불어 다툴 수가 없다> (p.118)
「(제나는) 둥글어져야 옹글고 (얼에) 굽혀야 곧아진다曲則全枉則直
(제나는) 움푹해서야 그득차고 (얼은) 묵어서도 새롭다. 窪則盈則新
(욕망이) 작아야 깨닫고 많으면 흘린다小則得 多則惑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是以聖人
하나(얼)를 품어 세상의 본보기가 된다抱一爲天下式
제나를 나타내려 않으므로 밝고不自見故明
제나를 옳다 않으므로 빛나고不自是故彰
제나를 자랑 않으므로 공이 (남아) 있고不自伐故有功
제나를 잘난 체 않으므로 길리라不自矜故長
그저 오직 다투질 않아夫唯不爭
그러므로 세상도 더불어 다툴 수가 없다故天下莫能與之爭
옛부터 이르는 바 둥글어져 옹글단古之所謂曲則全者
어찌 빈 말인가豈虛言哉
참되고 옹글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誠全而歸之」

<제23장. 말씀이 하느님이시다> (p.125)
「말씀이 하느님이시다希言自然
회오리바람이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飄風不終朝
소나기는 하루 해를 넘기지 못한다驟雨不終日
누가 이같이 하는가 하늘 땅이로다 孰爲此者天地
하늘 땅도 오히려 오래질 못하거늘天地尙下能久
하물며 사람으로선가而況於人乎
그러므로 얼님을 좇아 섬긴다故從事於道者
얼나는 얼과 같이 하고道者同於道
속나는 속알과 같이 하고德者同於德
버릴 나(제나)는 버릴 것(탐욕)과 같이 한다失者同於失
얼나와 같이 하는 이에 얼 또한 기쁨을 얻는다同於道者道亦藥得之
속나와 같이 하는 이에 속알 또한 기쁨을 얻는다同於德者德亦藥得之
버린 이와 같이 하는 이에 버림同於失者失亦藥得之
또한 기쁨을 얻는다
믿음이 모자란다고 믿지 않고 있어서니라信不足焉 有不信焉」

<제24장. 얼나를 깨달은 이는 제나에 머물지 않는다> (p.131)
「발돋움하는 게 서는 게 못되고기者不立
가랑이 벌리는 게 가는 게 못된다跨者不行
제나를 드러내려는 이는 밝지 못하고自見者不明
제나가 옳다는 이 빛나지 않고自見者不彰
제나를 자랑하는 이 공(일보람)이 없어지고自伐者無功
제나를 뽐내는 이 길지 않다自矜者不長
그건 얼나에게는其於道也
말하자면 찬밥이나 군 것질이다日餘食贅行
무리들이 미워하더라도物或惡之
얼나를 가진 이는 (제나에) 머물지 않는다.故有道者不處」

<제25장. 두루다니는 데 거치는 것이 없다> (pp.135-139)
「(없음에) 만물이 있어져 섞이어 이루어졌다有物混成
(없음의 하느님은) 하늘 땅이 나기 먼저부터 있었다.先天地生
(없음의 하느님은) 고요하여라. 비었어라.寂兮蓼兮
홀로 빛나며 바뀌지 않는다.獨立不改
(하느님은) 두루 다니시되 거치는 것이 없다周行而不殆
우주(천하)의 어머니라 생각하여도 좋겠다可以爲天下母
나는 그 이름을 모르나니 얼나(道)라 부를까吾下知其名 字之日道
억지로 이름하여 가로되 크다强爲之名日大
가로되 큰 것은 간다大日逝
가로되 가면은 멀다逝日遠
가로되 멀면 돌아온다遠日反
그러므로 얼은 크다. 하늘은 크다. 땅은 크다故道大 天大 地大
어른 또한 크다王亦大
우주 가운데 넷 큰 것이 있는데城中有四大
어른(임금)도 그 하나로 하여 둔다而王居其一焉
사람은 땅을 법받고人法地
땅은 하늘에 법받고地法天
하늘은 얼나에 법받는다天法道
얼나는 하느님(自存者)에게 법받는다道法自然」

「"우리는 본디부터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어디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이 속에 있다. 고독하고 비천한 이곳에 낮아지고 떨어졌다는 생각이 듣다. 이렇게 타락된 느낌이 있으니까 본디의 모습으로 오르려고 한다. 어디서 떨어졌을까. 거기가 있을 거라 생각된다. 그곳으로 올라가자는 게 하느님 사상이다. 떨어졌다는 것은 한 점이 된 것이다. 떨어진 나는 한 점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느님은 원대(遠大)한 태공(太空)으로 생각된다.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은 태공(하느님)의 찌꺼기다." (류영모, 『다석어록』). 이것은 하느님이 가버린(逝) 느낌을 말한 것이다. 하느님은 크신데 내가 한 점의 개체가 됨으로 하느님이 가버린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우주의 맨처음(太初)은 잘 모른다. 그것은 온통 하나가 되어서 그렇다. 사람은 전체(하느님)를 알 수가 없다. 사람은 완전(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완전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완전이 하느님 아버지(어머니)가 되어서 그렇다. 하느님 아버지(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 삶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여기서는 하느님(우주의 어머님)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할 만큼 멀어진(遠) 것을 밝히고 있다. 잘 알지 못한다고 할 만큼 멀어졌지만 우주의 어머님(하느님)을 그리워한다고 하였다.」

「"나는 무엇인가? 정신이다. 하늘이 무엇인가? 생각이다. 생각이 어디서 오고 어디를 가는가? 아무도 모른다. 정신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마침내 찾아가는 곳이 있다. 그러나 어디인지 잘 몰라서 얼의 나라라고 한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얼밖에 정신이 만족할 만한 곳이 상대세계에는 없다. 그러므로 상대세계에 한눈팔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이 상대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참나인 얼나에 맘을 내리는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이것은 생각으로 우주의 어머님(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이것이 돌이킴(反)이다.」

<제26장.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다> (p.140)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되고重爲輕根
조용함은 바스댐의 머리된다靜爲躁君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날 지도록 가되 수레짐에서 자리 뜨지 않는다終日行不離輜重
비록 눈부신 볼거리가 있을지라도雖有榮觀
(세상을) 뛰어넘어 쉬며 지낸다燕處超然
어찌 일만 가지를 다스리는 님으로서奈何萬乘之主
세상에서 몸을 가볍게 쓰랴而以身輕天下
가벼우면 밑동을 잃고 輕則失本
바스대면 머리를 잃는다躁則失君」

<제27장. 조히 가면 바퀴자국이 없다.> (p.144)
「잘 가면 바퀴자국이 없고善行無轍迹
잘 말하면 티 뜯을 데가 없고善言無瑕謫
잘 셈하면 셈가치를 안쓰고善計不用籌策
잘 닫으면 빗장이 없어도 열지 못하고善閉無關楗而不可開
잘 매면 줄을 졸라매지 않아도 풀지 못한다善結無繩約而不可解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늘 조히 사람을 건진다是以聖人常善救人
그러므로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故無棄人
늘 잘 물건을 건진다常善救物
그러므로 물건을 버리는 (일이) 없다故無棄物
이를 매우 밝음이라 이른다.是謂襲明
착한 사람이란 착하지 못한 이의 스승이고故善人者不 善人之師
착하지 못한 이는 착한 이의 일거리不善人者 善人之資
그 스승을 높이지 않고 그 일거리를不貴其師 不愛其資
사랑하지 않으면
비록 슬기롭다 해도 크게 흘림이라雖智大迷
이를 일러 종요로운 오묘함이라 한다是謂要妙」

<제28장.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p.150)
「그 억셈(수컷)을 알지만 그 부드러움(암컷)을 지키니知其雄守其雌
세상의 시내가 되리라爲天下谿
세상의 시내가 되어 늘 속알 안 여의니爲天下谿 常德不離
다시 갓난아기로 돌아가리라復歸於영兒
그 밝음을 알고도 그 캄캄함을 지키니知其白守其黑
세상의 본보기가 되리라爲天下式
세상의 본보기 되어 늘 속알 어기지 않으니爲天下式 常德不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復歸於無極
그 꽃다움을 알고도 그 더러움을 지키니 知其榮守其辱
세상의 골짜기가 된다爲天下谷
세상의 골짜기가 되어 늘 속알이 이에 넉넉하여爲天下谷 常德乃足
다시 하나(전체)로 돌아가리라復歸於樸
하나(등걸)에서 흩어져 그릇이 되나니樸散則爲器
다스리는 사람이 쓰면 관아의 어른이 된다聖人用之則爲官長
그러므로 크게 쓸 감은 자르지 않는다.故大制不割」

<제29장. 세상은 하느님의 그릇이라 사람이 하지 못한다> (p.155)
「장차 세상을 (욕심으로) 가지고자 하다간將欲取天下而爲之
얻지 못하는 것을 내 보노라吾見其不得已
세상은 하느님의 그릇이라 (욕심으로) 하지 못한다天下神器 不可爲也
(욕심으로)하는 이 엎어지고 잡는 이 놓친다爲者敗之 執者失之
그러므로 (밖의) 것이란 혹 가버리기도 따라오기도故物或行或隨
혹 흐느껴 울기도 혹 악기를 불기도或허或吹
혹 튼튼하기도 혹 약하기도或强或羸
혹 싣기도 혹 무너져 떨어지기도 한다.或載或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제나를 죽여)是以聖人
지나침을 버리고去甚
치레를 버리고去奢
큰 체(교만)를 버린다.去泰」

<제30장. 참(얼)이 아니면 일찍 그만두자> (p.160)
「참(얼)으로써 사람의 임금을 돕는 이는以道佐人主者
병력으로 세상(나라)을 힘세게 않는다不以兵强天下
그 일을 잘 돌아보아야 한다其事好還
군사가 있는 곳에는 가시덤불이 나고師之所處荊棘生焉
큰 싸움 뒤에 반드시 흉년이 든다大軍之後 必有凶年
착한 이는 냅뜰 뿐이다善者果而已
구태여 센 것을 가지려 않는다不敢以取强
냅뜨되 으스대지 말라果而勿矜
냅뜨되 자랑하지 말라果而勿伐
냅뜨되 방자하지 말라果而勿驕
냅뜨되 어쩔수 없어서果而不得已
냅뜨되 세지를 말라果而勿强
몸(물질)은 한창가면 늙는다物壯則老
말하면 이것은 참(얼)이 아니다是謂不道
참(얼)이 아니니 일찍 그만두자不道甲已」

<제31장. 이김을 좋아하지 않는다> (pp.165-166)
「저 좋은 무기라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다 未佳兵者 不詳之器
모든 이가 싫어할 것이다 物或惡之
그러므로 참(얼)을 가진 이는 두지 않는다 故有道者不處
군자는 앉으면 왼쪽을 높이고 君子居則貴左
군사를 쓰면 오른쪽을 높인다 用兵則貴右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다 兵者不詳之器
군자의 연장이 아니다 非君子之器
마지 못해서 쓴다 不得已而用之
(맘이) 고요하고 맑은 것은 하느님을 생각함이니 恬淡爲上
(싸움에) 이김을 좋아하지 않는다 勝而不美
그런데도 좋아하는 이라면 而美之者
이는 사람 죽임을 즐기는 것이다 是藥殺人
저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이라면 未藥殺人者
세상에서 뜻을 얻어서는 안된다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좋은 일에는 왼쪽을 吉事尙左
궂은 일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凶事尙右
부장군은 왼쪽에 자리하고 偏將軍處左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한다 上將軍處右
말하면 초상의 예의로 치룬다 言以喪禮處之
죽인 사람이 많으면 殺人衆多
애달픈 슬픔으로 울어서 (애도해야 한다) 以哀悲泣之
싸움을 이기고서는 초상의 예의로 치룬다. 戰勝則以喪禮處之」

<제32장. 얼은 영원하여 없이 계신다> (pp.170-173)
「얼(참)은 늘(영원)로 없이 계신다(이름할 수 없음)道常無名
(품은) 얼이 비록 작을지라도樸雖小
세상(임금)이 섬기라고 못한다天下莫能臣也
임금이 이(얼)를 (맘에) 간직할 것같으면侯王若能守之
온갖 것들이 거의 스스로 좇을 것이고萬物將自賓
하늘 땅도 서로 어울리어天地相合
다 이슬을 내릴 것이다以降甘露
사람들은 시키지 아니해도 스스로 반듯하리라民莫之令而自均
비로소 마름질 되어 있이 계심(이름 있어짐)始制有名
이름하니 또한 이미 있음이라名亦旣有
저 또한 나아가 그침을 안다夫亦將知止
그침을 앎으로써 (얼을) 다치게 안한다知止所以不殆
세상에 있는 얼을 비기면譬道之在天下
큰 가람과 바다에 흘러가는 골짜구니 시내와 같다猶川谷之於江海」

「얼나를 깨달은 성인에 의해 하느님의 얼은 말씀이 되어 진리의 사상이 되었다. 시제유명(始制有名)은 이것을 말한다. 얼(道)이 비로소 사람의 생각에 제약(制約)되었단 말이다. 그리고는 이름할 수 없는 얼나(道)인데 이름이 붙여지는 상대적인 존재처럼 되었다. 노자(老子)는 얼(道)을 자연(自然)·곡신(谷神)·대상(大象), 또는 박(樸)·일(一)·도(道)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름할 수 없는 절대존재가 상대적 존재처럼 이름이 붙여지게된 것이다.」


<제33장.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은 얼목숨이다> (pp.175-177)
「사람을 아는 이는 슬기롭고知人者智
(참)나를 아는 이는 밝다自之者明
사람들을 이기는 이는 힘이 있고勝人者有力
(제)나를 이기는 이는 굳세다自勝者强
넉넉한 줄 아는 이가 가멸하다 (부유하다)知足者富
(제나를 이기는) 굳셈으로 가는 이는强行者有志
(하느님의) 뜻(얼)을 지닌다
그 가진 뜻(얼)을 안 잃기를 오래도록不失其所者久
(몸은) 죽더라도 죽지 않는 것은 얼목숨이다死而不亡者壽」

「종교적인 사상가라고 할 수 없는 루소조차도 이렇게 말하였다. "나처럼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떤 때는 얼음처럼 냉정하여 사람을 싫어하다가도 그 다음 순간 환락과 애정에는 불같이 녹아버린다. 세상에 카멜레온도, 어떤 여성도 나처럼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때는 불꽃, 어떤 때는 얼음, 그러나 둘 다 아닐 때는 나는 무(無)가 되고 마니 도대체 나란 어디 있는가. 인간의 모든 지식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인데도 가장 뒤떨어진 것이 있다면 나를 아는 지식이다. 내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나를 알고 싶은 의욕만 가진다면 모든 도덕과 교훈을 아는 것보다도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의 눈길을 밖으로 향한다. 자기를 높이고 확대할 생각에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면 자기의 얼을 되찾게 되고 자기의 얼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되면 자기의 할 일까지도 알게 되어 사람은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는 도덕적인 존재가 되어 비로소 사람의 자유를 맛볼 수 있게 된다."(루소, 『참회록』).」

<제34장. 한 얼(하느님)은 가없이 크다> (p.180)
「한(큰)얼은 (가없이)크도다.大道汎兮
그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가이없어라)其可左右
모든 것의 어머니라 낳기를 마다하지 않는다萬物恃之而生而不辭
일 이루고도 이름지어 가지지 않고功成不名有
모든 것을 입히고 먹여 기르나 임자 되지 않는다.衣養萬物而不爲主
늘 욕심이 없어常無欲
어린이로 산다고 이름지을 만하다.可名於小
모든 것이 돌아가건만 임자되지 않으니萬物歸焉而不爲主
크게 이루었다고 이름지을 만하다.可名爲大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마침내 제나로는 크게 되고자 않음으로써以其終不自爲大
그 얼나(大道)를 이룰 수 있느니라.故能成其大
(깨달을 수 있느니라)」

<제35장 한 얼을 간직하고 세상으로 간다> (pp.184-185)
「한 얼을(마음에) 간직하고 세상으로 간다.執大象天下往
가되 시기하지 않는다往而不害
기쁘고 바르고 크도다安平太
풍악과 먹이는藥與餌
지나가는 나그네를 멈춘다過客止
얼이 나오는 입(의 말씀)은道之出口
슴슴하여 맛이 없고淡乎其無味
보아도 보잘게 없고視之不足見
들어도 듣잘 게 없다지만聽之不足聞
써도 다하지 못한다. 用之不可旣」

「마하트마 간디는 성령의 하느님을 아는지라 이렇게 말하였다. "어린 시절 나는 힌두교의 성전에 있는 신(神)이 가진 일천 가지의 이름을 외우라는 과제를 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신의 일천 가지 이름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건데 신은 그 창조물의 수와 같은 수의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신은 무명(無名)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신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졌으므로 또 무상(無象)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무수한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므로 신은 무언(無言)이라고 할 수 있다."」

<제36장. 부드럽고 무른 게 굳고 센 걸 이긴다> (p.188)
「장차 거둬들이고자 반드시 꼭 벌린다.將欲흡之 必固張之
장차 무르게 하고자 반드시 꼭 세게 한다.將欲弱之 必固强之
장차 치워버리고자 반드시 꼭 일으킨다.將欲廢之 必固興之
장차 빼앗으려고 반드시 꼭 준다. 將欲奪之 必固與之
이 일러 숨은(얼)이 나타남이다.是謂微明
부드럽고 여린(마음이) 굳센(얼나를) 가진다.(받든다)柔弱勝剛强
물고기가 못을 벗어나서는 안되듯이(깊이 숨듯이)漁不可脫於淵
나라의 이로운(날카로운) 그릇(병기)은國之利器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듯이 (얼나는 숨는다)不可以示人」

<제37장. 얼은 함 없이도 늘 아니하는 게 없다> (pp.193-197)
「일은 함 없이도 늘 아니하는 게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임금이 이를 지킬 것 같으면候王若能守之
모든 것이 곧 저절로 되리라萬物將自化
되다가도 (제나의) 욕망이 일면化而欲作
나 곧 없이 있는 얼나로 누르리吾將鎭之以無名之樸
없이 있는 얼나면 그저 모두無名之樸 夫亦將不欲
거의 (욕심대로) 하고자 아니하리
하고자 아니하여서 고요하면不欲以靜
세상은 곧 스스로 바를 것이다天下將自正」

「"자기 마음을 누르지 못하는 사람은 집중력이 얼나의 실재(實在)를 추측할 수 없다. 이 무지한 상태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욕망을 누르기란 너무나 어렵다. 똑똑한 이가 아무리 잘 알고 힘써도 마음은 쉽게 욕망에 끌려가기 때문이다. 쾌락의 느낌을 가져다 주는 감각의 대상은 이 감각의 대상에 대하여 엄격히 고행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 사라진다. 그러나 그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극히 높은 이의 실재(實在)를 체험하게 될 때 그 욕망도 사라진다."(『바가바드기타』, 66-60)」

<제38장. 높은 속알은 속알이 없는 듯하다> (pp.198-202)
「높은 속알은 속알 없는 듯上德不德
이래서 속알이 있다是以有德
낮은 속알은 속알을 잊지 않아下德不失德
이래서 속알이 없어진다是以無德
높은 속알은 함 없으니 (나란) 생각 없이 한다上德無爲而無以爲
낮은 속알은 하되 (나란) 생각 있어 한다下德爲之而有以爲
높은 어짐은 하되 (나란) 생각 없이 한다上仁爲之而無以爲
높은 옳음은 하되 (나란) 생각 있어 한다上義爲之而有以爲
높은 차림(예의)은 하고서 고분고분하지 않으면上禮爲之而莫之應
팔을 잡아당겨서 꺾는다則攘臂而잉之
그러므로 참을 버린 뒤에 속알故失道而後德
속알을 버린 뒤에 어짐失德而後仁
어짐을 잃은 뒤에 옳음失仁而後義
옳음을 잃은 뒤에 차림(예의)이다失義而後禮
저 차리는 이는 속 맘과 믿음이失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
얇아 어지러움의 머리다

먼저 아는 것은 참의 꾸밈이요,前識者道之華而愚之始
어리석음의 비롯이다
이래서 사나이는是以大丈夫
그 두터움(절대)에 들지處其厚不居其薄
그 얇음(상대)에 머물지 않고
그 참(절대)에 들지 그 반지르르處其實不居其華
(상대)에 머물지 않아
그러므로 저(상대)를 버리고 이(절대)를 잡는다故去彼取此」

「사람이 가장 어릴 때는 법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예를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의(義)를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인(仁)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덕(德)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얼(道)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아래서부터 배워서 위에 다다르는 것이다. (下學而上達-『논어』헌문 편)」

<제39장. 하늘이 맑지 못하면 찢어지리라> (pp.204-205)
「옛부터 하나(절대)를 얻은 것으로昔之得一者
하늘은 하나를 잡고서 맑고天得一以淸
땅은 하나를 잡고서 평안코地得一以寧
(사람의) 정신은 하나를 잡고서 신령코神得一以靈
골이 하나를 잡고서 차고谷得一以盈
모든 것은 하나를 잡고서 나고萬物得一以生
임금은 하나를 잡고서 세상의 곧음(기둥)되니候王得一以爲天下貞
그 하나에 닿았도다其致之一也
하늘이 맑지 못하면 장차 찢어질까 두렵다天無以淸 將恐製
땅이 평안치 못하면 장차 터질까 두렵다地無以寧 將恐發
정신이 신령치 못하면 장차 흩어질까 두렵다神無以靈 將恐歇
골이 차지 못하면 장차 마를까 두렵다谷無以盈 將恐竭
만물이 나지 못하면 장차 없어질까 두렵다萬物無以生 將恐滅
임금이 곧지 못하고 귀하고 높으면侯王無以貞而貴高
장차 쓰러질까 두렵다將恐蹶
그러므로 높임은 낮춤을 밑동으로 하고故貴以賤爲本
높음은 아래를 밑 터로 한다高以下爲其
이래서 임금은 저를 일러서是以候王自稱
외로운 이고 쭉정이라고 한다孤寡不穀
이것이 낮춤으로써 밑동 삼음일까 아닐까此非以賤爲本耶非乎
그러므로 지극한 기림은 없는 기림이다故至譽無譽
(개체인 제나로)말쑥말쑥 구슬같다거나不欲록록如玉
데굴데굴 돌같기를 바라지 않는다珞珞如石」

<제40장. 있음은 없음에서 났다.> (p.209)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는 얼나가 움직여서다反者道之動
(제나가) 여리어진 이는 얼나가 (제나를) 부림이다弱者道之用
세상의 모든 것은 있음에서 나고天下萬物生於有
있음은 없음에서 났다有生於無」

<제41장. 참은 숨어 이름이 없다> (p.214)
「윗 선비는 참(얼)을 듣고는 부지런히 걸어가며上士聞道勤而行之
가운데 선비는 참을 듣고는 있는 둥 마는 둥하고中士聞道 若存若亡
아래 선비는 참을 듣고는 크게 웃는다 (아래 선비가)下士聞道 大笑之
웃지 않으면 참이라 하기에 모자란다不笑不足以爲道
그러므로 걸어놓은 말(금언)이 있으니故建言有之
밝은 참이 어두운 것 같고明道若昧
오르는 참이 물러가는 것 같고進道若退
기꺼운 참이 비슷한 것 같다夷道若類
위 속알은 (텅빈) 골과 같다上德若谷
아주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 같고太白若辱
큰 속알은 모자라는 것 같고廣德若不足
선 속알은 하잘 것 없는 것 같고建德若偸
바른 참이 빛바래지는 것 같고質眞若투
아주 반듯한 것은 모가 없다大方無隅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大器晩成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大音希聲
큰 모습은 꼴이 없고大象無形
참은 숨어 이름이 없다道隱無名
그저 얼(참)만이 잘 빌려주고 또 이룬다夫唯道善貸且成」

<제42장. 참이 살아계시니 하나다> (p.220)
「참(얼)이 살아계시니 하나(전체)다道生一
하나가 둘(음양)을 낳았다一生二
둘(음양)이 나니 셋(태극)이다二生三
셋(태극)이 모든 것을 낳았다三生萬物
모든 것이 그늘(암컷)은 지고 별(수컷)은 안고萬物負陰而抱陽
빔과 힘으로 어울리게 되었다沖氣以爲和
사람의 싫어하는 바 오직 외로움과 쭉정이란 말을人之所惡 唯孤寡不 
임금들이 가지고 (스스로를) 일컫기로 한다而王公以爲稱
그러므로 몬이란 혹 더는데도 더해지고故物或損之而益
혹 더하는데도 덜어진다或益之而損
남들이 가르치는 바를 나 또한 가르치는데人之所敎 我亦敎之
억지 센 놈은 제대로 죽지 못하리니强粱者不得其死
내 장차 가지고 가르침의 아비(근본)로 한다吾將以爲敎父」

<제43장. 없음은 있음에 틈없이 들어간다> (p.225)
「세상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天下之至柔
세상의 가장 굳은 데를 달린다馳騁天下之至堅
없음은 있음에 틈없이 들어간다無有入於無間
나 이래서 함 없음이 더 값짐을 안다吾是以知無爲之有益
말없는 가르침과 함없는 값짐이不言之敎 無爲之益
세상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天下希及之」

<제44장. 많이 갈무리면 크게 망한다.> (pp.228-229)
「이름과 몸에서 어느 것을 더 사랑하는가名與身孰親
몸뚱이와 재물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身與貨孰多
얻음과 잃음에서 어느 것이 근심인가得與亡孰病
이러므로 너무 사랑하면 반드시 크게 (재물을) 쓰게 되고 是故甚愛必大費
(재물을) 많이 갈무리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多藏必厚亡
넉넉한 줄 알면 욕되지 아니하고知足不辱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고知止不殆
길고 오랠 수 있다可以長久」

「류영모는 말하였다. "사람이 이름을 자기로 아는 사람도 있다. 명예에 취하여 체면을 지키다가 거짓말을 하고 속빈 겨껍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름이란 마치 감옥에서 죄수에게 붙여준 죄수 번호와 같은 것이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감옥 속에 갇힌 죄수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이란 차례의 번호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름 없는 것(얼나)이 나의 본바탕이다. 참나란 영원한 생명이 폭발하여 나타나는 얼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긋(참나)을 찾아 자각한 인생은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참나인 영원한 생명에는 개인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이 소용없다."(류영모, 『다석어록』)」

<제45장. 맑고 고요해 세상을 바르게 한다> (p.233)
「큰 됨은 이지러진 것 같지만大成若缺
그 씀에 묵지 아니하고其用不弊
가득찬 것은 빈 것 같으나大盈若沖
그 씀에 다하지 아니한다其用不窮
아주 곧음은 굽은 것 같다大直若屈
큰 솜씨는 무딘 것 같다大巧若拙
큰 말은 더듬는 것 같다大辯若訥
움직여서 추위를 이기고躁勝寒
조용히 더위를 이긴다稱勝熱
맑고 고요해 세상을 바르게 한다淸稱爲天下正」

<제46장. 죄는 하고자 할 만하다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p.237)
「세상에 참(얼)이 있으면天下有道
달리는 말을 똥거름치는 데 쓰고却走馬以糞
세상에 참이 없으면天下無道
싸움 말이 들에서 산다戎馬生於郊
죄는 하고자 할 만하다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罪莫大於可欲
화는 족(足)함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禍莫大於不知足
허물은 얻겠다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咎莫大於欲得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흐뭇함이 늘 흐뭇할 것이다.故知足之足常足矣」

<제47장. 창을 내다보지 않아도 하느님을 본다> (p.242)
「집 문을 나서지 않고 세상을 알며不出戶知天下
창을 내다보지 않아도 하느님을 본다不窺유見天道
그 나가는 것이 더 멀면其出彌遠
그 아는 것은 더 작아진다其知彌小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가지 아니하고 알며是以聖人 不行而知
보지 않고 (누구인 줄 알고) 이름 부르며不見而名
하지 않고 이룬다不爲而成」

<제48장. 얼나를 생각하면 제나를 날로 잃는다> (pp.247-250)
「공부를 하면 제나(앎)가 날로 늘어나고爲學日益
얼나를 생각하면 제나는 날로 덜어진다爲道日損
(제나를) 버리고 또 버리면損之又損
(제나의 탐·진·치를) 하지 않음에 이른다以至於無爲
(탐·진·치를)하지 않으면 (하느님 일을)無爲而無不爲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김에는故取天下
늘(세상에) 일(탐·진·치) 없음으로써다常以無事
(세상에) 일이(탐·진·치) 있을 것 같으면及其有事
세상을 이기기에 모자란다不足以取天下」

「데이비드 흄(1711-1776)의 『人性論』가운데 크리스천들이 싫어한 핵심적인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내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깊숙히 들어가도 내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뜨거움이나 차거움, 밝음이나 어두움, 사랑이나 미움, 쾌락이나 고통이라고 하는 어떤 특수한 지각(知覺)이다. 어느 때든지 지각없이 내 자신을 포착할 수는 결코 없다. 또 지각 이외의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다. 예컨대 깊이 잠이 들어 나의 지각이 없을 때는 나는 그동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만약 죽음에 의해서 나의 모든 지각이 없어진다면 곧 나의 신체가 해체되니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보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하면 나는 완전히 無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확신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곧 사람이란 생각할 수 없는 속도로 잇달아 일어나 끊임없이 변화하며 계속 움직이는 여러 가지 지각(知覺)의 다발(束) 또는 모음(集)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흄, 『인성론』6절)
흄은 우리의 마음을 분석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요즘 말로 하면 여러 가지 정보를 입력시켜 놓은 컴퓨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컴퓨터에 입력된 자료를 소멸시켜면 남는 것이 없듯 사람은 지각의 다발을 흩어버리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죽으면 그만이지 영원한 생명인 얼이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크리스천에게는 대경실색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중대한 문제이다. 해괴한 것은 그런데도 흄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지 않은 채로 영국의 귀족생활을 즐기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삶의 허무를 느끼고 자살 직전에까지 이르렀다가 참나인 하느님을 깨닫고 부활의 삶을 산 톨스토이에 비기면 흄은 너무나 낙천적이요 속물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석가와 예수도 몸과 맘인 제나(自我)에 영원한 생명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깨달은 석가가 "괴론 몸과 모인 맘을 없애야 참나를 깨닫는다"고 가르친 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다. 예수는 어머니가 낳은 나는 거짓 생명이라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거듭나라(요한 3:3)고 가르친 것이다. 석가나 예수의 가르침을 바로 알고 있었다면 흄의 말에 놀랄 일은 없다. 이것을 알면 예수가 말한 "너희(제나)는 아래(어버이)에서 났지만 나(얼나)는 위(하느님)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상대세계)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한 8:23)의 말뜻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공부를 하면 제나의 앎이 날로 늘어난다(爲學日益)는 노자의 말은 흄의 말대로 지각(知覺)의 정보 다발이 굵어진다는 말이다. 사람은 이 지각의 정보 다발이 크면 클수록 일을 처리할 능력이 커진다. 그래서 많이 배우려 하고 또 한 많이 아는 이를 대접한다. "날로 아직 모르는 것을 알아가고 달로 그 할 수 있는 것을 잊지 않으면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다"(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논어』장자편)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하(子夏)의 말이다. 그러나 호학(好學)이나 독학(獨學)으로 참나는 깨닫지 못한다. 석사, 박사들이 얼나를 깨닫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노자는 말한다. "얼나를 생각하면 제나(自我)는 날로 덜어진다"(爲道日損)고 하였다. 날마다 제나가 덜어져 마침내 제나가 온전히 없어져 버리는 것을 장자(莊子)는 상아(喪我)라. 좌망(坐忘)이라, 심재(心齋)라 하였다. 제나가 온전히 죽지 않고는, 제나를 잊어 버리지 않고는, 제나를 치워버리지 않고는 얼나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제나가 없어지는 것이 먼저인가 얼나를 생각하는 것이 먼저인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석가가 오랜 고난 속의 명상 끝에 얼나를 깨달은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다. 허무한 나에 대해 생각하다가 제나가 사라질 때 얼나가 드러난다. 이것을 노자는 제나를 버리고 또 버려 제나가 함

없음에 이른다(損之又損 以至於無爲)고 하였다. 무위(無爲)는 제나가 수성(獸性)의 탐·진·치를 저지르지 않으면서 얼나의 영성(靈性)인 진·선·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진·선·미를 드러내면 하느님의 뜻을 이룸에 못하는 것이 없다. 진·선·미의 얼이 절대존재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인도의 마하리쉬는 "죽은 맘을 통해서 얼나(Atman)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죽은 맘이란 생각이 없는 맘이요 내부로 향해진 맘이다"(마하리쉬,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제나가 죽을 때 얼나(하느님)가 빈 자리를 채워준다"(M.K.간디, 『날마다의 명상』)고 하였다. 류영모는 "맘은 없어져야 맘이다. 내(제나)가 없는 것이 맘이다. 맘은 한번 죽어야 텅 빈다. 빈 맘에 하느님 나라가 들어온다. 얼나는 제나가 죽어서 사는 삶이다." 이처럼 비록 그 수는 적어도 얼나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 얼나가 있다는 실증인 것이다.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제49장. 온 씨알(백성)의 맘을 내 맘으로 삼는다> (pp.251-254)
「거룩한 사람은 늘 가진 마음이 없어聖人無常心
온 씨알(백성)의 마음을 (내) 맘으로 삼는다以百姓之心爲心
착한 이는 내 착하다 하고善者吾善之
착하지 못한 이를 내 또한 착해져라고 하여不善者吾亦善之
착함을 얻는다得善
미쁜 이를 내 믿고信者吾信之
미쁘지 않는 이를 내 또한 믿어주어不信者吾亦信之
믿음을 얻는다得信
거룩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서聖人在天下
조심조심 세상을 위하여 온 맘을 다하니출출焉焉天下渾心焉
온 씨알(백성)이 모두 그 귀와 눈길을 모은다百姓皆注其耳目
거룩한 사람은 모두를 어린이로 여긴다聖人皆孩之」

「우리는 누구를 성인(聖人)이라고 하면 우리하고 동떨어진 다른 나라 사람처럼 생각한다. 성인은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성질을 잘 다스려 짐승 노릇을 안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이다. 엄격히 말하면 성인들만이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 후보인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 후보인 짐승만 우글거리지 사람이 된 사람은 지극히 적다. 석가는 말하기를 짐승으로 사는 사람은 땅의 흙만큼 많은데 얼나를 깨달은 사람은 손톱 위의 흙만큼 적다고 하였다.」

<제50장. 나오니 삶이요 들어가니 죽음이다> (pp.255-258)
「나오니 삶이요 들어가니 죽음이다出生入死
살기는 다만 열에 셋 있고生之從十有三
죽기를 다만 열에 셋 있다死之從十有三
사람으로 나서 죽을 터로 움직여 가는 이가人之生動之死地者
또한 열에 셋 있다亦十有三
저 무슨 까닭인가夫何故
그 삶을 두터히 살려하기 때문이다以其生生之厚
대강 들어보니 삶을 잘 기르는 이는蓋聞善攝生者
뭍에 가도 들소나 범을 만나지 않고降行不遇시虎
군대에 들어가도 무기에入軍不被甲兵
상처입지 아니한다
들소가 그 뿔로 들이받을 데가 없고시無所投其角
범이 그 발톱으로 할킬 데가 없고虎無所措其爪
무기의 그 날로 찌를 데가 없다兵無所容其刃

저 무슨 까닭인가夫何故
그 죽을 터가 없기 때문이다以其無死地」

「"사람은 몸을 쓰고 있다가 맘으로 바뀌고, 맘을 쓰다가 얼로 바뀌어야 한다.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것이 자연이다. 하늘 땅 펼친 자리에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이 사람이요 자연이다."(류영모, 『다석어록』). 나비의 일생도 알이 유충이 되고, 유충이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데 차질이 없어야 섭생을 잘 한 것이다. 사람은 몸에서 맘으로, 맘에서 얼로 전환하는 것이 섭생을 잘하는 것이다. 섭생을 잘하여 얼의 나가 되면 참으로 죽을 터(死地)가 없는 영원한 생명이다.」


<제51장. 얼이 내고 속알이 기른다> (p.260)
「얼이 내고 속알이 기르고道生之 德畜之
몬(물질)이 꼴을 짓고 힘이(목숨을) 이룬物形之 勢成之
이것이 만물이다是以萬物
얼을 높이고 속알을 받들지 않음이 없으니莫不尊道而貴德
얼의 높임과 속알의 받듬은道之尊 德之貴
저 시키지 않아도 늘 스스로 그러하니라夫莫之命而常自然
그러므로 얼이 내어서故道生之
속알이 먹이고 키우고 자라게 한다德畜之長之育之
굳건히 여물게 돌보고 살핀다亭之 毒之 養之 覆之
내고서 가지지 않고生而不有
하고도 기대지 않고爲而不恃
기르고도 부리지 않는다長而不幸
이를 일러 하늘 속알이라 한다是謂玄德」

<제52장. 몸은 죽어도 얼은 아무렇지도 않다> (p.265)
「세상(우주) 있음의 비롯을天下有始
가지고서 세상(우주)의 어머니(근원)을 삼는다.以爲天下母
이미 그 어머니(하느님)를 찾음으로써旣得其母
그 아들을 안다.以知其子
이미 그 아들을 알아旣知其子
다시 그 어머니(하느님)를 (맘속에) 간직하면復守其母
몸이 죽어도 얼(아들)은 괜찮다.沒身不殆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塞其兌 閉其門
몸이 죽도록 힘들지 않고終身不勤
구멍을 열고 그 일을 치루겠다면開其兌 濟其事
몸이 죽도록 건지지 못한다.終身不救
작은 것을 보면 밝다고 하고見小日明
부드러움을 지키면 세다고 한다. 守柔日强
그 빛을 써서 다시 그 밝음에 돌아간다.用其光 復歸其明
몸의 허물을 더 하지 않으니無遺身殃
이를 일러 늘(영원)에 하나됨이다.是爲襲常」

<제53장. 사람들은 지름길을 좋아한다> (p.270)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자그마한使我介然有知
앎을 있게 하였다
한 얼(하느님)로 가는 데는 (제나를 버려야 하는데)行於大道
오직 (제나를) 버려야 하는 이것을 두려워한다唯施是畏
한 얼(하느님)은 몹시 공평하지만(제나가 없지만)大道甚夷
사람들은 (제나로) 지름길을 좋아한다而民好徑
조정은 몹시 말쑥한데朝甚除
밭은 너무나 거칠고田甚蕪
창고는 아주 비었다倉甚虛
빛나는 비단 옷을 입고服文綵
날카로운 칼을 차고帶利劍
싫도록 마시고 먹어도厭飮食
재물은 남아 있으니財貨有餘
이를 잘난 체하는 도둑이라 이르노니是謂盜 
참이 아니다非道也哉」

<제54장. 잘 안은 것은 풀지 못한다> (pp.275-280)
「(얼을 맘속에)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善建者不拔
잘 안은 것은 풀지 못하니善抱者不脫
아들 손자 제사 올림이 그치지 않는다子孫以祭祀不輟
(얼을) 몸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참되고修之於身 其德乃眞
(얼을) 집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남고修之於家 其德乃餘
(얼을) 마을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길고修之於鄕 其德乃長
(얼을) 나라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두텁고修之於國 其德乃豊
(얼을) 세상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넓을 것이다修之於天下 其德乃普
그러므로 몸으로써 몸을 보고故以身觀身
집으로써 집을 보고以家觀家
고을로써 고을을 보고以鄕觀鄕
나라로써 나라를 본다以國觀國
세상으로써 세상을 본다以天下觀天下
내 무엇으로써 세상이 그런 줄 알까吾何以知天下然哉
이로써니라以此」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도메니꼬 수도원에 들어가 스콜라 철학을 공부하다가 범신론적 사상가인 쿠자누스, 까르다노, 델레시오 등의 저서를 읽었다. 무한 우주를 낳은 자연(natura naturans) 神觀을 터득한 부르노는 하늘나라에 황제처럼 앉아 있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정통신앙에 만족할 수 없어 수도원을 탈출하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世界像을 인정하고 세계는 무한하다고 보았으며 모든 생물에는 神이 內在力으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중세에는 이단자가 되면 화형을 당하였다. 죽을 결심이 없으면 이단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

「귀족청년의 밀고로 브루노는 로마 교황청에 체포 구금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그를 죽이지 않으려고 7년 동안이나 회유하였으나 브루노는 뜻을 꺾지 아니하였다. 그는 궁극적인 선을 우주적 생명(하느님)과의 신비적 合一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에게 화형선고를 내리는 신부들이 부들부들 떨자 부르노는 "나를 심판하는 그대들이야말로 심판을 받는 나보다도 더 무서워 떨고 있지 않는가"라고 꾸짖었다. 화형을 다하면서 부르노는 외쳤다. "인간의 삶이란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나는 순교자로서 기쁘게 죽음을 맞는다. 내 얼은 불꽃과 같이 하늘나라에 오를 것이다." 그 때 브루노의 나이 52살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89년이 지난 1889년에 화형당했던 그 자리에 브루노의 동상이 세워졌다.
브루노의 마음에 심어진 진리의식은 그 누구도 뽑을 수 없었다. 그의 생각이 안은 진리인식은 그 누구도 풀 수 없었다. 그의 진리정신 앞에 사람들이 고개를 숙일 것이며 그의 동상 앞에서 헌화가 이어질 것이다. 사람이 기도하고 참선하는 것이 진리의식(얼나)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建極이라 한다. 또 진리의식을 안는 것이다. 이것을 抱一이라 한다. 건극이나 포일이나 같은 뜻인데 달리 표현한 것이다. 예수·석가는 건극 포일을 누구보다 잘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눈 앞에 영원한 생명줄이 아버지 계시는 위로부터 끊이지 않고 드리워져 있다. 영원한 그리스도란 한 생명줄이다. 목숨줄로 나온 말씀이다.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만 믿는다."(류영모, 『다석어록』).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얼생명을 붙잡고 놓치지 않는 것이 건극함이요 포일함이다.
참나(眞我)인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예수·석가·노자의 사상을 섭렵하지 않을 수 없다. 참나인 얼나로는 한 생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음식을 차려놓고 큰 절하는 것이 제사가 아니다. 그들의 사상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것이 참된 제사요 추모이다.

참나인 얼의 나를 깨달아 진리정신을 잇는 것이 제사이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이 우주와 세계가 그대로 떡과 포도주요 성체(聖體)임을 알고 우주와 세계에 대한 연구가 그대로 신앙적인 제사라고 말하였다.
子孫이라면 피붙이(血緣)의 자손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육신의 자손이 있듯이 정신의 자손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기를 육신의 자녀를 낳아 기르려 하지 말고 정신적인 자녀(제자)를 길러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와 석가는 혈연의 후손은 끊어졌다. 예수는 아예 혼인을 하지 아니하였다. 석가는 그의 외아들인 라이훌라까지 스님이 되어 후손이 없다. 그러나 예수·석가의 정신적인 자녀라 할 수 있는 제자들이 줄곧 이어지고 있다. 이 글도 그들의 진리정신을 잇자는 미사(제사)이다.
몸의 나에서 얼의 나로 거듭난 사람은 여기에 분명한 선이 그어지게 되어 있다. 예수는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마태오 23:9)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라고 하였다. 예수는 얼나로 거듭난 사람임을 여기에서도 뚜렷이 나타냈다.」

「몸으로써 몸을 보고, 집으로써 집을 보고, 고을로써 고을을 보고, 나라로써 나라를 보고, 세상으로써 세상을 본다는 말은 싱거운 말인듯 하지만 뜻있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가 된 만큼 남을 안다.」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한 공자는 예(禮)를 아는 사람이다. 만물과 내가 함께 났다고 한 장자(莊子)는 우주를 아는 사람이다. 성인은 하느님과 같다고 한 왕양명은 성인을 아는 사람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한 예수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우리의 영혼이다"라고 한 류영모는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하느님을 찾으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내놓으셨다. 우리에게 삶을 사는 시간을 주는 것도 그 시간 동안에 하느님 당신을 찾으라고 주신 것이다. 하느님이 나의 나인 참나(眞我)라 우리는 찾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사람으로 살리는 동안에 하느님에게 다다라야 한다."(류영모, 『다석어록』)」

<제55장. 참이 아니면 일찍 그만두라> (pp.281-286)
「(맘으로) 속알을 머금어서 두터워지니含德之厚
빨간 갓난아기에 견줄까比於赤子
독한 벌레도 쏘지 못하고毒蟲不석
사나운 짐승도 덤비지 못하고猛獸不據
채가는 새도 잡아가지 않는다攫鳥不搏
뼈는 무르고 힘살은 부드럽되 쥠(주먹)은 단단하다骨弱筋柔而握固
암·수가 짝짓는 것을 알지 못하되 고추가 일어나니未知牝牡之合而최作
정기의 지극함이라精之至也
하루동안 울어도 목쉬지 않는 것은終日號而不 
화기의 지극함이라和之至也
(얼에) 순화할 줄 앎을 늘(영원)이라 한다知和日常
늘(얼생명)을 앎을 밝음이라 한다知常日明
(얼로) 솟남을 좋음이라 한다益生日祥
맘의 힘을 부리는 것을 세다고 한다心使氣日强
몬(물체)은 한창인가 하면 (벌써) 늙는다物壯則老
말하노니 이것은 참(얼)이 아니다是謂不道
참이 아니면 일찌감치 그만 두어야 한다不道甲已」

「류영모는 말하였다.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얼생명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게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그것이 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이 우주의 기운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옴도 다 우리의 얼생명을 키우기 위해서다. 우주와 세계와 인생이 모두 얼생명을 키우기 위해 있다."(류영모, 『다석어록』)
석가의 법성(불성), 예수의 영성(靈性), 노자의 덕성이 모두가 같은 말로서 하느님 아들을 일컫는다」

「남자나 여자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씨(아들)를 길러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 아들인 영원한 생명을 내 맘속에 키워온 이는 몸의 죽음은 아기의 태집을 버리는 것처럼 아무런 미련이 없다.」

「마하트마 간디의 사탸그라하(진리파지)도 노자의 함덕지후(含德之厚)의 다른 표현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어릴 때 그렇게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마음 속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자(老子)는 어린이와 성자의 공통점을 들었다. 어린이는 뼈는 무르고 힘살은 부드럽되 쥠은 단단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먹을 쥐어도 굳게 쥐어지지 않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다. 악력(握力)과 주력(走力)은 사람의 건강척도이다. 그런데 악력이 주력보다 앞선다. 과학에 대해서는 가장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로마교황도 다윈의 진화론에 추인하였다. 침팬지와 사람의 공통조상인 프로콘솔은 아프리카 밀림지대에서 5백만 년 전까지 1천만 년에서 2천만 년 동안 살아왔다. 원숭이 새끼들은 어미 원숭이를 꼭 잡지 못하면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 악력이 오늘날 아기들에게도 유전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갖난 아기가 주먹을 쥐면 어른도 펼 수 없다. 그 악력이 생명선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람에게 주력(走力)이 중요하게 된 것은 5백만 년 전 침팬지와 갈라져 평지에 내려온 뒤부터이다. 달려서 위험을 피하지 못하면 생명을 잃게 된다. 맹수들에 비하면 사람이란 작고 약하기 때문이다. 2백만년 전 직립(直立)을 하고부터는 주력이 빨라지게 되고 손이 자유롭게 되어 손에서 재주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끊임없이 일을 해 악력을 기르고 끊임없이 걸어서 주력(走力)을 길러야 생명이 유지된다. 성인(聖人)들은 부지런하기 때문에 악고보속(握固步速)이다. "어린이는 암·수가 짝짓는 것을 알지 못하되 고추가 일어난다." 성인(聖人)도 남근은 일어나도 색욕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정력이 가득차 있어야 한다. 화약이 아무리 많아도 불을 붙이지 않으면 폭발하는 일이 없듯이 정력이 아무리 강하여도 색정(色情)을 일으키지 않으면 청정하게 지날 수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벼의 종자로 쓰이는 것은 거둔 벼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사람의 양식으로 쓰여진다. 사람의 씨앗인 정(精)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식(生殖)에 쓰여지는 정(精)은 극히 적은 부분이고 정(精)의 대부분은 정신을 위해, 문

화창조를 위해, 가치구현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쓰여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데, 연구하는 데, 기도하는 데 쓰여져야 한다."(류영모, 『다석어록』)」

「성인(聖人)은 희노애락을 발하여도 얼나에 의하여 절제된다. 장자(莊子)는 말하기를 "이른 사람(至人)의 마음씀은 거울같다. 보내지 않고 맞지도 않는다. 응대는 하되 잡아두려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만물을 이겨내여 다치지 않는다."(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 故能勝物而不傷-『장자』응제왕편). 거울같이 마음을 쓰는데 희노애락에 붙잡힐 까닭이 없다. 만물을 이겨내여 다치지 않는다는 말은 희노애락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56장. 아는 이라도 말로는 못한다> (pp.287-290)
「참(얼)은 아는 이라도 말로는 (다)못한다知者不言
참(얼)을 말하는 이도 (다)알지 못한다言者不知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았다塞其兌閉其門
그 날카로움이 꺾이고 그 얽힘이 풀리고挫其銳解其紛
그 빛과 함께하고 그 티끌과 하나된다和其光同其塵
이를 일러 하느님과 함께함이라 한다是謂玄同
그러므로 함부로 가까이 못하며故不可得而親
함부로 멀리 못하며不可得而疎
함부로 좋게 못하며不可得而利
함부로 해하지 못하며不可得而害
함부로 높이지 못하며不可得而貴
함부로 얕보지 못하니不可得而賤
그러므로 세상에 귀히 되도다故爲天下貴」

「"(참을) 아는 이라도 말로는 다 못하고(知者不信) 참을 말하는 이도 다 알지 못한다."(言者不知).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신통한 것이지만 말로 참(얼)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래서 장자(莊子)가 하는 말이 "참은 나타나면 참이 아니다. 말을 잘 해도 참에 미치지 못한다. 누가 아는가. 말로 할 수 없는 말을, 말할 수 없는 참을, 만일 알 수 있을 것 같으면 이를 가리켜 하늘나라라 이른다."(道昭而不道 言辯而不及 孰知不言之辯 不道之道 若有能知 此之謂天府 - 『장자』재물론)
류영모는 말하였다. "여기서 지금 쓰고 있는 말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의 배를 흔들고 성대를 울려서 소리를 내어 말을 내면 말을 받을 고막이 떨려서 이 단계로 생각되는 그것뿐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는 하느님이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맘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류영모, 『다석어록』)」

「"그 날카로움이 꺾이고, 그 얽힘이 풀린다."(挫其銳解其紛). 이는 마하트마 간디의 아힘사(Ahimsa 무상해)이다. 남을 공격하려는 사나운 진성(嗔性)이 꺾이어 남을 해치는 폭력을 쓰지 않게 된다. 탐욕에서 오는 번뇌의 얽힘을 다 풀어버린다. 이것은 얼나 앞에 제나가 죽을 때 가능한 일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였다. "참의 실현은 아힘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아힘사를 최고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M.K.간디, 『날마다의 명상』). "빛과 함께하고 티끌과 하나된다."(和其光同其塵). 맘에는 하느님의 빛(얼)을 지녀 세상의 빛이 된다. 몸은 먼지와 하나되어 일을 한다는 뜻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타파(Tapa 勞苦)라 하였다. 간디는 말하였다. "노고(勞苦)없이는, 곧 타파(Tapa)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자기 정화가 타파없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M.K.간디, 『날마다의 명상』),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동안 먹지 않는다"는 백장 스님의 주장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마하트마 간디도 제 먹을 것은 제 손으로 농사를 지어야(bread working)한다고 하였다. 간디가 아프리카에서 톨스토이 농장을 만들어 농사를 지은 것도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정신이다. 톨스토이는 농민복 루바사카를 입고 쟁기질까지 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브라마차랴(금욕), 아힘사(비폭력), 타파(노동), 이 세가지를 노자(老子)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뜻으로 현동(玄同)이라 하였다. 노자의 생각이 간디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기이한 일이 아니다. 한 성령에서 나온 생각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참나로 살고자 하는 얼사람은 함부로 가까이 못하며, 멀리 못하며, 좋게 못하며, 해하지 못하며, 높이지 못하며, 얕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제57장. 바름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 (p.292)
「바름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以正治國
숨김으로써 군사를 쓴다以奇用兵
일 없음으로써 세상을 받들어야 한다夷無事取天下
나 무엇으로써 그러한 줄을 알까. 이로써니라吾何以知其然哉 以此
세상을 꺼리고 싫어하는 것이 많으면天下多忌諱
사람들이 더욱 가난해진다而民彌貧
사람들이 좋은(재미있는) 기구가 많으면人多利器
나라는 더 어두워진다國家滋昏
사람들이 교묘한 재주가 많으면人多伎巧
이상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낸다奇物滋起
법령이 더욱 서슬이 퍼래지면法令滋彰
훔치는 도둑이 많아진다盜賊多有
옛 거룩한 사람이 이르기를故聖人云
나 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스스로 되고我無爲而民自化
나 고요를 좋아하니 사람들이 스스로 바르고我好稱而民自正
나 일 없애니 사람들이 스스로 가멸(富)하고我無事而民自富
나 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스스로 참되어진다我無欲而民自樸」

<제58장. 빛나나 빛내려 안한다> (p.297)
「그 다스리는 이는 캄캄하나 백성은 밝고 밝다其政悶悶 其民淳淳
그 다스리는 이가 쌀쌀맞으면 그 백성은 쩔쩔맨다其政察察 其民缺缺
화로다 (그러나 화뒤에) 복이 기대인 바다禍兮福之所奇
복이로다 (그러나 복 속에) 화가 업디어 있다福兮禍之所伏
누가 아는가 한마루(하느님)에는孰知其極
바름도 틀림도 없는 것을其無正耶
(세상에는) 바름이 다시 이상하게 되고正復爲奇
착함이 디시 요시하게 되니善復爲妖
사람들이 미혹에 빠진 날이 이미 오래되었다人之迷 其日固久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반듯하되 자르려 않고是以聖人 方而不割
모나되 깎으려 않고廉而不 
곧되 뻗대려 않고直而不肆
빛나나 빛내려 안한다光而不耀」

<제59장. 사람 다스림과 하느님 섬김에 아낌만한 게 없다> (p.303)
「사람 다스림과 하느님 섬김에 아낌만한 게 없다治人事天莫若嗇
그저 오직 아낌이다夫唯嗇
이 일러 일찍(욕망을) 다스림이라 한다是謂早服
일찍 다스림을 일러 거듭 속알 쌓음이라 한다早服謂之重積德
거듭 속알 쌓으면 이기지 못할 게 없다重積德則無不克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게 없다면 (그는) 알 수 없는無不克則莫知其極
그 한마루(하느님)이다
알 수 없는 그 한마루(하느님)는莫知其極
나라 있을 만하다可以有國
나라의 어머니로 있으니有國之母
길고 오랠 만하다可以長久
이 일러 깊은 뿌리 굳은 뿌리로是謂深根固 
길이 살고 오래 볼 얼님(하느님)이라 한다長生久視之道」

<제60장. 큰 나라 다스리기는 작은 생선 지지듯> (pp.308-309)
「큰 나라 다스리기는 작은 생선 지지듯 하여야治大國若烹小鮮
참(얼)으로써 세상을 돌보면以道이天下
그 귀신이 신노릇을 못한다其鬼不神
그 귀신이 신노릇을 못하는 게 아니라非其鬼不神
그 귀신이 사람을 다치게 아니한다其神不傷人
그 귀신이 사람을 다치지 않는 게 아니라非其神不傷人
다스리는 이도 또한 다치지 아니한다聖人亦不傷人
그저 둘이 서로 다치지 아니한다夫兩不相傷
그러므로 속알 사귀어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리라故德交歸焉」

「소로우는 "아주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아주 좋은 정부다"(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governs least.)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소로우는 그의 저서『시민 불복종의 의무』라는 책머리에서 이 아름다운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고 밝혔다.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는 표어에 나는 진신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이 좀더 빨리 또 조직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표어는 결국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는 말이 되는데 나는 그것을 또 믿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러한 정부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러한 정부를 그들의 정부로 가지게 될 것이다."(소로우, 『시민 불복종의 의무』)」


<제61장. 암은 늘 조용함으써 수를 이긴다> (p.313)
「큰 나라란 것은 아래로 내려大國者下流
세상의 사타구니 세상의 암컷이로다天下之交 天下之牝
암컷은 늘 조용함으로써 수컷을 이긴다牝常以靜勝牡
조용함으로써 밑이 된다以靜爲下
그러므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 아래가 되어故大國以下小國
곧 작은 나라를 거둔다則取小國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아래되어小國以下大國
곧 큰 나라를 거둔다則取大國
그러므로 혹 아래가 되어 거두고 혹 아래로 거둔다故或下以取或下而取
큰 나라는 모든 사람을 겹쳐서大國不過欲兼畜人
기르고 싶은데 지나지 않고
작은 나라는 들어가 남을 섬기고 싶은데小國不過欲入事人
지나지 않는다.
자 둘이 서로 그 하고 싶어하니夫兩者各得其所欲
그러므로 큰 것이 마땅히 아래가 되어야 한다.故大者宜爲下」

<제62장. 얼이란 온갖 것의 속(고갱이)> (p.318)
「얼(참)이란 온갖 것의 속(고갱이)인데道者萬物之奧
착한 사람의 보배이고善人之寶
착하지 못한 사람도 간직한 바니라不善人之所保
아름다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할 만하다美言可以市
높은 행실은 사람들에게 미치게 (파급)할 만하다尊行可以加人
사람이 착하지 못하다고 어찌 버림이 있으랴人之不善 何棄之有
그러므로 하늘 아들이 서고 세 귀한 이를 두었는데故立天子 置三公
(모실)수레 앞서 비록 폐백을 보낸다 할지라도雖有拱璧 以先駟馬
앉아서 이 얼나로 나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不如坐進此道
옛날 이 얼나를 귀하게 여긴 까닭이 무엇인가古之所以貴此道者何
찾으면 얻을 것이요不日求以得
죄 있으면 면할 것이라고 말하지 안했던가有罪以免耶
그러므로 세상(우주)의 소중한 님이 된다故爲天下貴」

<제63장. 어려움을 꾀하되 그 쉬운 데서> (p.323)
「함없는 함爲無爲
일없는 일事無事
맛없는 맛味無味
커다랗고 조그맣고 많고 적다大小多少
원망은 속알(깨우침)로써 갚아야報怨以德
어려움을 꾀하되 그 쉬운 데서圖難於其易
큰 것을 하되 그 잔 데서爲大於其細
세상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일고天下難事 必作於易
세상 큰 일은 반드시 잔 데서 일어난다天下大事 必作於細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마침내 큰 것을 하지 않아是以聖人 終不爲大
그러므로 능히 그 큰 것을 이룬다故能成其大
그저 가볍게 허락하면 반드시 믿음이 적다夫輕諾必寡信
많이 쉬우면 반드시 많이 어려워진다多易必多難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오히려 어려워하므로是以聖人猶難之
그러므로 마침내 어려움이 없어진다故終無難矣」

<제64장. 마치기를 비롯같이 삼가면 그르치는 일이 없다.> (pp.328-329)
「평안하여야 가지기 쉽다其安易持
조짐이 없어야 꾀하기 쉽다其未兆易謀
연하여야 가르기 쉽다其脆易泮
작은 것이 헤치기 쉽다其微易散
아직 있기 앞서 하고爲之於未有
아직 어지러워지기 앞서 다스려야治之於未亂
아름드리 나무가 털끝만한 데서 났고合抱之木 生於毫末
아홉 층 높은 대가 한 줌 흙에서 일어났고九層之臺 起於累土
천리 갈 길이 발 아래서 비롯된다千里之行 始於足下
하는 이는 그르치고 잡는 이는 잃는다爲者敗之 執者失之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함없음으로 그르침이 없다是以聖人無爲 故無敗
잡음이 없음으로 잃지 않는다無執故無失
사람들이 일 좇음에民之從事
늘 거의 이루고서 그르친다常於幾成而敗之
마치기를 비롯같이 삼가하면愼終如始
그르치는 일이 없다則無敗事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하고자 않기를 하고자 하고欲不欲
얻기 어려운 보화를 귀히 여기지 않고不貴難得之貨
배우지 않기를 배워學不學
뭇 사람들의 그릇된 것을 돌이킨다復衆人之所過
온갖 것의(임자인)하느님을 믿는 까닭에以恃萬物之自然
구태여 아니한다而不敢爲」

<제65장. 하늘 속알은 깊고 멀다> (pp.334-335)
「옛날 얼(참)을 잘 생각한 이는古之善爲道者
사람을 총명(영리)하게 기르지 아니하고非以明民
어리석게 기르고자 하였다將以愚之
사람들을 다스리기 어려움은民之難治
그 슬기(잔꾀)가 많기 때문이다以其智多
그러므로 슬기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故以智治國
나라의 도둑이다國之賊
슬기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음은不以智治國
나라의 복이다國之福
이 두가지를 아는 것이 또한 본보기이니知此兩者 亦稽式
떳떳이 본보기를 알면常知稽式
이 일러 하늘 속알이라 한다是謂玄德
하늘 속알의 깊고 멀음이여玄德深矣遠矣
몬(물질)과는 등돌려버린與物反矣
뒤에야이에 큰 따름에 이른다然後乃至大順」

「노자(老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얼(참)을 잘 생각한 이는 사람을 총명케함이 아니고 어리석게 기르고자 하였다. 사람들을 다스리기 어려움은 그 슬기(잔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도둑이다. 슬기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음은 나라의 복이다."」


<제66장. 가람이나 바다가 온 골의 임금이 될 수 있는 까닭은> (p.339)
「가람이나 바다가 온 골의 임금이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될 수 있는 까닭은
잘 낮추는 까닭이다.以其善下之
므로 온 골의 임금이 될 수 있다.故能爲百谷王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사람들을 올리려고 그 말을 낮추어 쓰고欲上人 以其言下之
사람들을 앞세우려고 그 몸을 뒤로 한다.欲先人 以其身後之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위에 자리해도 사람들이 무거워 않고處上以民不重
앞에 자리해도 사람들이 막지 않는다.處前以民不害
이래서 세상이是以天下
즐거이 밀어주되 싫어하지 않는다.樂推而不厭
까닭에 다투지 않는다.以其不爭
그러므로 세상이 더불어 다툴 수 없다.故天下莫能與之爭」

<제67장. 내게 세 보배가 있다. (사랑 검약 지계의 세가지 보배)> (pp.344-348)
「세상이 다 이르기를天下皆謂
나의 말(진리)이 그럴듯하나 같지 않다고 한다.我道大似不肖
그저 오직 크기는 하여夫唯大
그러므로 비슷하나 같쟎다고故似不肖
닮았을 것 같으면若肖久矣
그 자디잘아진지가 오랬을 것이다.其細也夫
내게 세 보배가 있다.我有三寶
귀히 여겨 가지니寶而持之
첫째로는 사랑一日慈
둘째로는 검약二日儉
세째로는 구태여 세상 일에 먼저 되지 아니함.三日不敢爲天下先
그저 사랑하므로 능히 날래고夫慈故能勇
검소하므로 능히 넓고儉故能廣
구태여 세상 일에 먼저 안됨으로不敢爲天下先
능히 큰 그릇을 이룬다.故能成器長
이제 그 사랑을 버리고도 날래려면今舍其慈且勇
그 검약을 버리고도 넓히려 하면舍其儉且廣
그 뒤에 서는 것을 버리고도 앞서려 하면 죽을 것이다.舍其後且先死矣
그저 사랑으로써 싸우면 이기고夫慈以戰則勝
(사랑)으로써 지키면 굳다.以守則固
하느님이 장차 건지리니 사랑으로써 지켜주리라.天將救之 以慈衛之」

「노자(老子)는 말하였다. "뭇 사람은 말이나 글을 쓰는데 나 홀로 구두쇠처럼 완고하다. 나홀로 사람들과 다르게 하느님 말씀을 먹는 게 소중하다"(『노자』20장)고 하였다. 20장에서는 노자가 자신을 평가하였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자기를 반성하여 깊이 숨으면 숨을수록 더욱 빨리 고치가 되고 나비가 될 것이다.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말고 숨으려고 하라. 숨으면 숨을수록 더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그것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한다. 숨는다는 것은 더 깊이 준비하고 훈련한다는 것이다. 훈련에 훈련을 통하여 사람은 참(道)에 이르는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제68장. 잘 싸우는 이는 성내지 않는다> (p.350)
「잘 된 사나이는 사납지 않고善爲士者不武
잘 싸우는 이는 성내지 않고善戰者不怒
맞수를 잘 이기는 이는 다투지 않고善勝敵者不爭
사람을 잘 쓰는 이는 낮추기를 한다善用人者爲之下
이 일러 다투지 않는 속알이라 한다是謂不爭不德
이 일러 사람쓰는 힘이라 한다是謂用人之力
이 일러 하느님과 함께 하는 비롯의 꼭대기라 한다.是謂配天古之極」

<제69장. 서러워하는 이가 이긴 것이다> (p.355)
「군자를 부리는데 할 말이 있다.用兵有言
나 구태여 임자되지 않고 손님이 되어吾不敢爲主而爲客
구태여 한 치 나아가지 않고 한 자 물러선다.不敢進守而退尺
말하면 나가되 줄(항오)이 없고是謂行無行
밀치는데 팔이 없고攘無臂
나아가나 맞수가 없고잉無敵
잡는데 무기가 없다執無兵
화는 맞수를 가벼히 여김보다 큰 일이 없다.禍莫大於輕敵
맞수를 가벼히 여기면 내 보배를 거의 잃는다輕敵幾喪吾寶
그러므로 겨루고자 무기로 서로 칠 때故抗兵相加
서러워 하는 이가 이긴 것이다哀者勝矣」

<제70장. (겸손의) 베옷을 입고 (참나인) 구슬을 품는다> (p.359)
「내 말은 너무나 알기 쉽고 너무도 하기 쉽다.吾言甚易知甚易行
(그런데) 세상에는 잘 아는 이 없고天下莫能知
잘 행하는 이 없다.莫能行
말에는 말머리(하느님의 뜻)가 있고 일에는言有宗
일머리(이웃사랑)가 있네事有君
그저 오직 알지 못한다夫唯無知
이래서 참나를 알지 못한다是以不我知
참나를 아는 이 드무늬知我者希
곧 참나가 귀하다則我者貴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是以聖人
(겸손의) 베옷을 입고 (참나인)구슬을 품는다被褐懷玉」

「노자(老子)는 자기의 사상을 세상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데 대하여 그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내 말은 너무도 알기 쉽고 너무도 하기 쉽다. (그런데) 세상에는 잘 아는 이 없고 잘 행하는 이 없다. 그저 오직 알지 못한다. 나를 아는 이 드무니 곧 내가 귀하다"라고 하였다.」


<제71장. 모르고 아는 체가 탈이다> (pp.363-365)
「모르는 줄 아는 것이 위다.知不知上
모르고 아는 체가 탈이다.不知知病
그저 오직 탈을 탈로 하면夫唯病病
이래서 탈안난다.是以不病
거룩한 사람이 탈 안나는 것은聖人不病
그 탈을 탈로 하기 때문이다.以其病病
이래서 탈 안난다.是以不病」

「우리는 전체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를 못한다. 그래 전체라, 절대라, 하나라 무극(無極)이라고 한다. 이 전체를 모르고는 나를 안다는 것은 어리석은 소리다. 나는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분은 전체가 규정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무(無)요 유(有)다. 절대용 상대다. 애당초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상대에서 보니까 있다 없다지 있다 없다가 어디 있느냐. 절대에서는 있다 없다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는 절대적인 유, 무(有, 無)를 모르고 있다. 상대적 유, 무는 과학을 수단으로 해서 조금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도 사실은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우리는 아무리 비상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고 첨단의 과학기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무한 우주의 저 공간적인 끝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또 저 시간적인 끝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또 잠재의식 넘어, 초의식 넘어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안다는 것이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다만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거짓 존재요 하느님이 참나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느님은 없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데 이상할 것 없다. 그러나 부분인 내가 있는데 전체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하느님을 모르겠다는 말이 옳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하느님이 참나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참나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이 신(神)이 있어서 이루어진다. 신이 내게 건네주는 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신이 건네주지 않으면 참 생각을 얻을 수 없다. 거룩한 참 생각은 신과의 연락에서 생겨난다.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수밖에 없다."(류영모, 『다석어록』)」

<제72장. 씨알이 무서움을 겁내지 않으면 곧 큰 무서움이 닥친다> (p.368-369)
「씨알이 무서움을 겁내지 않으면民不畏威
곧 큰 무서움이 닥친다.則大威至
그 사는 데를 좁다 않고無狹其所居
그 난 바를 싫어하지 않는다無厭其所生
그저 오직 싫어 안해야夫唯不厭
이래서 싫어하지 않는다.是以不厭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저를 알아 스스로를 뵈려 않는다.自知不自見
저를 사랑해 스스로를 귀한 체 않는다.自愛不自貴
그러므로 저쪽을 버리고 이쪽을 집는다.故去彼取此」

「마하트마 간디는 다음 7가지는 하지 말라고 하였다. ①신념없는 정치 ②일 안하고 얻는 부(富) ③비양심적인 쾌락 ④부도덕한 상업 ⑤비인도적인 과학 ⑥부정직한 지식 ⑦희생없는 신앙. 이는 마하트마 간디를 통해 나온 하느님의 말씀이다.」

<제73장. 함부로 날래면 (목슴을) 죽인다> (pp.373-377)
「함부로 날래면 (목슴을) 죽인다.勇於敢則殺
함부로 날래지 않으면 (목슴을) 살린다.勇於不敢則活
이 두가지는 아마 이롭기도, 아마 해롭기도한데此兩者或利或害
하느님이 (둘 다) 미워하는 바를天之所惡
누가 그 까닭을 알겠는가孰知其故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오히려 어려워한다.是以聖人猶難之
하느님의 얼은 싸우지 않고서 잘 이긴다.天之道不爭而善勝
말 아니하고도 잘 맞들고不言而善應
부르지 아니하고도 스스로 온다不召而自來
느지러지되 잘 꾀하나니천然而善謨
하늘 그물은 넓직넓직 성글되 잃지 않는다天網恢恢疏而不失」

「하느님은 부르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오신다. 내가 가난과 고초 끝에 정신이 깨어나 제나(自我)의 짐승 노릇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오신다. 하느님이 오셨다고 말하기가 송구스러워 하느님이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말한다. 하느님이 성령이신데 하느님 따로 있고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나(自我)가 죽어야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가 온다. 6년 고행을 하던 석가의 마음 속에도 얼나가 스스로 찾아왔고, 광야를 헤매던 예수의 마음 속에도 얼나가 스스로 찾아왔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예수·석가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얼나)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얼나는 시간·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류영모, 『다석어록』)
프로티노스의 친구가 프로티노스에게 신전(神殿)에 같이 가자고 하자 프로티노스의 말이 "하느님이 내게 오시는데 내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하느님의 얼이 내 맘속으로 오는데 사원, 사찰,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필요하다면 아직 얼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필요할 것이다.」


<제74장. 큰 목수를 대신해 깎는 이는 그 손을 다친다> (p.379)
「씨알이 늘 죽음을 두려워 않는데民常不畏死
어떻게 죽이는 것으로써 두려워하게 하랴奈何以死懼之
만약 사람으로 하여금 늘 죽음으로 두렵게 하는데도若使民常畏死
이상한 짓을 하는 이는而爲奇者
내 잡아서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吾得執而殺之
누가 구태여 (다른 짓) 하리 (그러나)孰敢
늘 죽음 다스리는 이가 있어서 죽이는데常有司殺者殺
저 죽음 다스리는 이를 대신해 죽이면夫代司殺者殺
이는 큰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깍는 것이다是代大匠착
저 큰 목수를 대신해 깎는 이는夫代大匠착者
그손을 안 다치기가 드물 것이다.希有不傷其手矣」

<제75장. 씨알 굶주림은 세(稅)가 많아서다> (pp.383-387)
「씨알의 굶주림은民之飢
그 위에서 많은 세를 받아먹는 까닭에以其上食稅之多
이래서 굶주린다.是以飢
씨알을 다스리기 어려움은民之難治
그 위에서 지음이 (거짓이) 있는 까닭에以其上之有爲
이래서 다스리기가 어렵다.是以難治
씨알이 가벼이 죽는 것은民之輕死
그 위로 두터운 삶을 바라는 까닭에以其上求生之厚
이래서 가벼이 죽는다.是以輕師
그저 오직 살려고만 하지 않는夫唯無以生爲者
이것이 살고 봐야지 하는 것보다 어질다.是賢於貴生」

「씨알(民)의 원형적인 모습은 이마에 땀흘리며 농사에 힘쓰는 여름아비(農夫)다. 좀 더 이상적인 농부는 톨스토이 民話에 나오는 '바보 이반'이다. 씨알은 힘쓴다. 가난함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게으름을 부끄러워한다. 그 힘씀에는 삼복 더위가 오히려 땀을 흘리고 삼동 추위가 오히려 떤다. 가난이 제가 쑥스러워 물러가고 어려움이 제가 황송스러워 돌아선다. 씨알은 착하다. 미천함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 모짐을 부끄러워한다. 새날 아침 먹거리가 모자라도 거지를 빈 손으로 보내지 아니하고 단벌 옷을 훔쳐간 도둑을 미워하지 아니한다. 오죽이나 어려우면 빌러 다니고 도둑질을 하겠느냐는 너그러운 마음가짐이다. 씨알은 참는다. 씨알은 힘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참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 그 뻔뻔한 탐욕도 그 어리석음 앞에는 당할 수 없고 그 모진 포악도 그 미련에는 당할 수 없다. 그리하여 빼앗던 무리가 내놓고 물러가며 억누르던 무리들이 무릎을 꿇고 죄를 빈다. 씨알은 믿는다. 무식함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그 바보스런 양심에, 천치같은 믿음에 배우고 안다는 이들이 오히려 고개를 숙인다. 이 씨알(民)이 역사의 임자인 시대가 왔다. 이제 씨알은 하느님 앞에만 머리를 숙인다.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 바치는 속마음(忠)을 가로채지 못 할 것이다.」

「사람에게 시련과 고난을 주는 것은 몸살림에만 빠지지 말고 제 맘속에 가지고 있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 사람이 제 속에 귀한 것을 지녔건만 생각하지를 않는다"(人人有貴於己者不思耳-『맹자』고자 상편)고 하였다. 자살할 만큼 고통스럽지 않으면 삶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지를 않는다. 그것을 보면 오히려 자살하기는 쉬워도 참나를 깨닫기는 더 어렵다.」


<제76장. 산 사람은 부드럽고 물렁하다> (pp.389-392)
「살아 있는 사람은 부드럽고 무르나人之生也柔弱
죽으면 굳고 뻣뻣하다其死也堅强
산 풀과 나무는 부드럽고 연한데草木之生也柔脆
죽어서는 말라빠진다其死也枯槁
그러므로 굳어 뻣뻣한 것은 죽은 무리이고故堅强者死之徒
부드러워 무른 것은 산 무리다柔弱者生之徒
이래서 군사는 굳세면 이기지 못하고是以兵强則不勝
나무는 굳세면 잘린다木强則折
굳고 센 것은 밑에 자리하고堅强處下
부드럽고 무른 것은 위에 자리한다柔弱處上」

「류영모는 말하였다. "허무(虛無)는 무극이요, 고유는 태극이다. 무극·태극은 하나이다. 하나가 하느님이다. 유(有)의 태극을 생각하면 무(無)의 무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다. 하느님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제77장. 높은 것은 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준다> (pp.393-394)
「하느님의 참(얼)은 그 활 벌리는 것 같다고 할까天之道 其猶張弓與
높은 이를 누르고 낮은 이를 들어준다高者抑之 下者擧之
남게 가진 것을 덜고 모자라는 걸 보탠다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하느님의 참(얼)은天之道
남는 걸 덜어서 모자라는 것 보탠다損有餘而補不足
사람의 노릇은 그렇지 못하다人之道則不然
모자라는 걸 덜어 남아 있는 데에 바친다損不足以奉有餘
누가 능히 남는 걸 가지고서孰能以有餘
세상을 받들 수 있을까奉天下
오직 참(얼)을 가진 이뿐이다唯有道者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하고도 기대지 않고爲而不恃
일 이루고 몸두지 않는다功成而不處
그어짐을 나타내려 않는다不欲見賢」

「로마에서는 승전을 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크게 환영했다. 군중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늠름한 개선장군이 마차를 타고 가면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손을 들어 답례를 보냈다. 그때 개선장군 옆에 붙어서서 개선장군에게 주문처럼 외우고 서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내용은 "그대 위에 황제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라고 계속 일러준다. 너는 황제의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소리다. 군중의 환호에 이성을 잃고 자기가 천하에 제일인자라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런데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게 제일 귀중한 것이 생명인데 그 생명은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다. 재산도, 가족도, 자연도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잊어 버릴 때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


<제78장. 부드러움이 굳음을 이긴다> (pp.398-400)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무른 것이 없으되天下莫柔弱於水
굳센 걸 치기에는而攻堅强者
(물보다) 잘 하기로 앞설 것이 없으니莫之能先
이는 바꿔 쓸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以其無以易之
그러므로 부드러운 것이 굳은 것을 이기고故柔之勝剛
여린 것이 센 것을 이김을弱之勝强
세상이 모르지 않을 터인데 행하지를 못한다.天下莫不知莫能行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이르기를是以聖人云
나라의 더러움을 받아서愛國之垢
이 일러 나라의 임자라 하고是謂社稷主
나라의 상서롭지 않음을 받아서愛國不祥
이 일러 세상의 어른님이라 한다是謂天下王
바른 말은 뒤집는 (말)같다正言若反」

「간디는 유약(柔弱)의 아힘사(비폭력, 무상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은 우리를 유약하다고 부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폭력은 결단코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폭력이 성취하는 듯이 보이는 선(善)은 오직 외적일 뿐인데 반해 폭력이 가져오는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비폭력에는 미움은 완전히 없다. 비폭력은 최대다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체의 선(善)을 위해 일한다.
비폭력 신봉자는 필요하면 전체의 선을 위해 자신의 목슴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맘 속에 무한한 인내력을 품지 않는 사람은 비폭력을 지킬 수 없다. 참을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비폭력뿐 아니라 진리도 잃어버린다. 백지 한 장을 보면 어느 면이 앞 면이고 어느 면이 뒷 면인지 알 수 없다. 이는 비폭력과 진리의 관계와 같다. 참의 실현은 아힘사(무상해)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최고의 다르마(Dharma, 진리)이다."(M.K. 간디, 『날다마의 명상』)」


<제79장. 언제나 착한 사람과 더분다> (P.402)
「큰 분을 풀어도 반드시 원망이 남아 있으니和大怨必有餘怨
어찌 하여야 잘 할까.安可以爲善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是以聖人
왼쪽 어음(채권)을 잡고도 사람을 조르지 않는다執左契而不貴於人
그러므로 속알 있는 이는 문서(차용증서)를 맡지만故有德司契
속알 없는 이는 잡힘(담보)을 맡는다.無德司徹
하느님의 얼(성령)은 알음알이가 없어天道無親
언제나 착한 사람과 더분다.常與善人」

<제80장. 살기가 평안하고 풍속이 즐겁다> (p.406)
「작은 나라 적은 씨알(백성)小國寡民
열 사람 백 사람이 (얼러) 쓸使有什伯之器而不用
그릇을 두고도 쓰지 않게 한다
사람들이 죽음을 무겁게 하여使民重死而不遠徙
멀리 옮기지 않게 한다.
비록 배 수레가 있어도 타고 다닐 곳이 없고雖有舟輿 無所乘之
비록 갑옷이나 무기가 있어도雖有甲兵 無所陳之
진칠 데가 없고
사람들이 다시 매듭 매는 셈을 쓰게 한다使民復結繩而用之
그 먹음이 달고甘其食
그 옷이 아름답고美其服
그 살기가 평안하고安其居
그 풍속이 즐겁다樂其俗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는隣國相望
개 닭 소리 마주 들리는데鷄犬之聲相聞
사람들이 늙어 죽도록民至老死
서로 가고 오지 않는다不相往來」

<제81장 말 잘하는 이는 착하지 않다> (p.411)
「믿음의 말은 아름답지 않고信言不美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아니다美言不信
착한 이는 말 잘하지 못하고善者不辯
말 잘하는 이는 착하지 않다辯者不善
아는 이는 배우지 못하였고知者不博
배운 이는 알지 못한다博者不知
거룩한 사람은 모으지 않는다聖人不積
이미 사람을 도왔으나 제 더욱 가지고旣以爲人己愈有
이미 사람에게 주었으나 제 더욱 많아旣以與人己愈多
하느님 얼은 좋지 언짢지 않으며天之道利而不害
거룩한 사람의 얼은 돕되 다투지 않는다.聖人之道爲而不爭」

「류영모는 말하였다. "좋은 사상은 내 생명을 약동케 한다. 남의 말을 읽어도 (들어도) 시원하다. 생각처럼 귀한 것은 없다. 생각 가운데서 거룩한 생각은 향기롭다. 바람만 통해도 시원한데 거룩한 향기가 풍기는 바람이 불어오면 얼마나 시원할까. 시원한 생각, 시원한 말씀이 불어가게 하라."(류영모,『다석어록』)」

「류영모는 말하였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 있어서 이루어진다. 하느님이 내게 건네 주는 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하느님이 건네 주지 않으면 참생각을 얻을 수 없다. 거룩한 참생각은 하느님과의 연락에서 생겨난다.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고 염재신재(念在神在)라 한다. 그러면 생각이 하느님인가 나로서는 모른다."(류영모, 『다석어록』). 그러나 미언(美言)은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소리와 같은 것이다. 암컷에게는 아름답게 들릴지 모르나 참사람에게는 미덥지 못한 말일 뿐이다. 미언(美言)이 나오는 근원이 제나(自我)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언행으로 선자불변(善者不辯)을 보여주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오랜동안 금요일을 침묵의 날로 지키기도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공자의 말가운데 "침묵을 통해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默而識之-『논어』술이 편)는 말을 좋아하여 실천하고자 하였다. 간디는 말을 적게 하기를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극기(克己)를 많이 하거나 일에 몰두한 사람은 말이 적다. 말과 행동은 서로 맞지 않는다. 자연을 보라.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한다. 그런데 말이 없다. 나는 매일 침묵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침묵은 누구에게나 좋지만 일에 깊이 골몰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중요하다. 불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가능한 몇마디로 필요한 것만 애기하면 나의 시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간도 건질 수 있다. 나는 삶의 순간마다 침묵이 최대의 웅변임을 알게 된다. 말해야 한다면 가능한 적게 말하라. 한마디로 중분할 때면 두 마디를 피하라."(M.K. 간디, 『날마다의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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