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디자이너 자부심으로 아카데미 건립…미용韓流 이끄는 강윤선 준오헤어 대표

93년 남편 몰래 집팔아 직원들과 英연수…연탄집게로 머리말던 소녀 2500명 미용그룹 키워냈죠
"미용철학 지키려 프랜차이즈 아닌 직영점 고수"

  • 김병호 기자
  • 입력 : 2017.12.15 16:18:56   수정 : 2017.12.15 17: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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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전국에 140개 직영점을 둔 국내 최대 미용업체 준오헤어를 35년째 이끌고 있는 강윤선 대표. [이승환 기자]
국내 최대 헤어숍 중 하나인 준오헤어의 강윤선 대표(57)가 꼽는 자기 인생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는 24년 전 직원들과 함께했던 영국 연수였다. 미용실을 오픈한 지 11년 만인 1993년 여름, 배움에 목말랐던 강 대표는 선진 미용기술을 배워 오겠다는 일념으로 영국행을 결정했다. 목적지는 전 세계 최고 미용 교육기관인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 혼자만이 아니었다. 매장에서 일할 최소 인력만 남겨두고 함께 공부하러 직원 19명을 데리고 갔다.
그 많은 직원의 비행기 표를 끊고, 2개월 동안 런던에서 교육받으며, 생활비를 대느라 약 2억원이 들었다. 비용은 미용실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장만한 서울 돈암동 집을 팔아 마련했다. 당장 귀국해서는 전세살이를 해야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심경으로 밀어붙였다. 강 대표는 "가게 언니들에게서 헤어 기술을 주먹구구로 배운 게 마음에 한(恨)으로 남아 있어서 체계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었다"면서 "당시 30대 초반 나이라 더 늦출 수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직원들과 함께한 영국 연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귀국한 직원들은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고, '미용사' 대신 '헤어 디자이너'라고 스스로 치켜세우면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키웠다. 당시 국내에는 미용실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던 때였다. 소득 증가로 헤어 스타일과 모발 관리에 관심이 커지면서 미용업체마다 경쟁적으로 헤어숍을 오픈했다. 준오헤어는 프랜차이즈 대신 직영점 체제로 외연을 확대했다. 여기에다 해외 연수로 다져진 실력과 이후 계속된 교육훈련 프로그램, '고객에게 자부심을 판다'는 모토를 바탕으로 준오헤어는 다른 경쟁사들을 계속 앞질렀다. 지금은 전국에 140개 매장과 직원 2500여 명을 보유한 거대 미용그룹으로 발전했다. 수많은 미용실 프랜차이즈가 생겨나고 있지만 준오헤어는 2016~2017년 국내 미용 브랜드 1위(능률협회 주관)에 선정됐을 정도로 막강한 브랜드 파워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세운 교육기관(준오아카데미)은 미용기술을 배우러 방한한 외국인 미용사 지망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24년 전 배움의 갈증을 풀기 위해 영국행을 결심했던 그가 이제는 당당히 '미용 한류' 전파에 나선 것이다. 국내 미용업계 산증인 중 한 명인 강 대표를 서울 청담동 사옥에서 만나 삶과 사업철학 등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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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머리 손질 등 미용 일에 관심이 많았나. 미용 분야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는가.

▷서울 서대문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오후에는 작은 회사에서 급사 생활을 했다. 당시 돈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생활을 했다. 급사로 일하며 받는 월급은 작았지만 그것으로 미장원에 가서 당시 유행했던 혜은이의 '깻잎머리'를 하곤 했다. 어린 나이 치고는 머리 손질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셈이다. 하루는 동네 미장원에 갔는데 어떤 손님이 "보따리를 좀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봤다. 하지만 미장원 주인은 냉정하게 거부하더라. 그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보따리를 잠시 받아주면 이 손님이 단골이 될 텐데' 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내가 미용실을 운영한다면 저렇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소일거리로 관심만 갖던 미용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본격적인 미용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서대문에 있는 1년제 미용학교인 무궁화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미용실에 나가 실습 생활을 했다. 잔심부름부터 시작했는데, 선배 언니들의 미용기술을 틈틈이 지켜보면서 밤에 집에 돌아와 혼자 수많은 연습을 했다. 쑥스럽지만 손재주가 좀 있는 편이었다. 얼마 안 가 손님 몇 사람의 머리를 손질하게 됐다. 사람마다 얼굴 특징에 맞게 머리 디자인을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를 찾는 단골 고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술도 나름 쓸 만하고, 손님에게 친절하고 스스럼없이 대하다 보니 나를 찾는 손님이 많아졌다.

―미용 일을 하는 데 부모님 반대는 없었나. 학교 진학 대신 미용기술을 익혀야 할 만큼 집안 상황이 어려웠나.

▷아버지는 경상도 진주 분이셨는데 우리집 가정 형편은 늘 어려웠다. 내가 초등학교 때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남가좌동에 있는 판자촌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셔서 일을 거의 못했고, 어머니가 조그마한 연탄가게를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언니와 오빠는 돈을 벌러 외부로 나갔고, 나도 중학교 때부터 급사 생활을 하면서 푼돈이라도 벌어야 했다. 요즘에 '금수저' '흙수저' 얘기를 많이 하지만 난 수저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다.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 정상적인 중학교 대신 전수학교를 가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미용일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으셨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운다고 하면 팔자가 드세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부모님은 딸이 알아서 돈벌이를 찾겠다는데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미용기술을 익힌 뒤 곧 미장원을 차려 돈을 벌겠다는 꿈이 있었으니까 아마 부모님이 말렸어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인기 있는 미용사였는데 언제 독립했나.

▷1982년 서울 돈암동에 직원 5명을 데리고 지금 준오헤어의 전신인 준오미용실을 오픈했다. '준오(JUNO)'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헤라(HERA)'의 로마어 표기로 '결혼의 신'을 뜻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물론 낯선 지역에 처음 가게를 내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손님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내서 고객한테 이렇게 말했다. "다음번에 오면 좀 더 나은 스타일로 해주고 싶다. 이런저런 헤어 디자인을 준비 중인데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 다음에 방문해주면 오늘보다 훨씬 멋있게 만들어주겠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재방문 약속을 잡는 것이다.

또 "당신은 머리 모양이 만족스러운 것 같지만 난 솔직히 오늘 파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음번에는 좀 더 세밀하게 준비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하는 내 태도에 고객들이 믿음을 갖게 되면서 점차 단골 고객이 되어갔다. 하루에 100명이 넘는 손님을 받은 날도 많았다. 이후 돈암동에 5개 매장을 오픈하게 됐고, 당시 유행 1번지인 이대 앞에도 가게를 냈다. 이대 쪽 헤어숍은 3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명동, 압구정동으로 상권 확장에 맞춰 매장 수를 늘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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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청담동에 위치한 준오헤어 아카데미.
―그런데 왜 갑자기 영국으로 연수를 떠날 생각을 했나.

▷당시에도 배움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것 같다. 지금도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나와 직원들 교육이다. 아무리 하찮은 직업이라도 제대로 성장하려면 배우는 것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미용실 사업이 잘됐지만 문득 '내가 체계적인 미용기술 교육을 과연 받아봤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1년제 미용학교를 다녔지만 주요 기술은 선배 언니들 어깨너머로 대충 전수받은 것이 전부였다.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이왕이면 선진국에 가서 국내에 없는 기술을 배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런던에 있는 전 세계 최대 미용 교육기관인 비달사순 아카데미의 2개월짜리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그해가 1993년 여름이었던 것은 우연일 뿐이지 딱히 그때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왕이면 최고 수준의 교육을 한번 받아보자는 생각이 미치자 전광석화같이 움직였다. 나를 포함해 총 20명의 경비를 마련하려면 돈암동 집을 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영국행을 반대하지 않았나. 어린아이들을 놓고 가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텐데.

▷사실 남편 모르게 집을 팔았다. 집 명의가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부동산 주인과 친해져서 내 계획 일정에 맞춰 잘 팔았다. 일단 목표를 세웠으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남편을 설득하느라 힘들이고 싶지 않았다. 먼저 갈 준비를 거의 다 하고 난 뒤 그때 가서 통보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남편은 내 얘기를 듣더니 잘했다고 격려해줬다. 돈은 나중에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 공부 잘하고 오라면서 용기를 북돋워줬다. 난 지금도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한잔을 사먹는 것도 망설이는 편이다. 하지만 교육이나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쌓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

―영국에 다녀와서는 뭔가 얻은 게 있었나. 돈을 들인 성과가 있었나.

▷영국인 헤어 디자이너들이 약지로 가위를 잡고 커트하는 것도 처음 봤다. 참 멋있어 보였다. 런던에서 교육을 받고 나니 한국에서 아마추어적인 태도로 일한 데 대한 자괴감이 컸다. 제대로 성장하려면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런던 생활은 이런 신념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같이 간 직원들도 충격을 받았는지 한국에 돌아와서는 일과 고객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그전에는 소위 '3D' 업종이라서 그만두려는 직원이 많았지만 영국에 다녀온 뒤로는 미용 일에 대한 자부심과 직업 충성도가 높아졌다. 1990년대 중반 자끄데상쥬 등 해외 유명 프랜차이즈가 국내 시장을 노크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국내 미용실도 전문화되고 대형화됐다. 영국에서의 연수가 이런 기회를 포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직원을 외국에 보내 공부시키는 사례가 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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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강윤선 대표가 서울 청담동 준오헤어 교육아카데미에 있는 본인 사무실에서 벽면에 꽂혀있는 책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래 트렌드와 경제·경영서 위주의 200여 권의 책들은 강 대표가 지난 35년간 직원들과 함께 읽어온 준오헤어 필독서다. [이승환 기자]
▷우리가 단체로 영국에 가는 것 말고도 미국과 일본에서 미용 공부를 하도록 비용을 지원했다. 회사 직원 동생 중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수의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미국의 선진 미용기술을 배워 와서 나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미국 내 비달사순 아카데미의 8개월 연수 과정을 듣고 생활할 수 있도록 별 조건 없이 3000만원을 보내줬다. 그 사람은 지금 준오헤어 교육 아카데미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같은 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도쿄에 보내 할리우드 미용학원에서 1년간 공부시켰다. 여기에도 3000만원을 보내줬다. 그 직원은 공부를 마치고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다른 일을 좀 하다가 작년에 헤어 디자이너로 준오헤어에 다시 합류했다. 이런 투자로 인해 남들보다 우리 회사 기술이 한발 앞서갔음은 물론이다.

―요즘에는 사업 외에도 외부 강연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어떤 내용들인가.

▷내가 살아온 인생 과정을 바탕으로 리더십 함양과 목표달성 방법 등을 주로 얘기한다. 기업체와 대학, 군부대를 비롯해 6년 전에는 청와대에 가서 경호실 직원들을 상대로도 강의를 했다. 내가 즐겨 쓰는 말 중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조직원들이 같은 꿈을 꾸면 어디서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리더의 역할은 바로 이처럼 직원들이 같은 꿈을 꾸도록 해서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강연에서는 큰 꿈을 꾸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주문을 많이 한다. 사실 인간이 꿈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꿈을 꾸지만 말고 계획해서 세분화하면 실천 가능한 목표가 된다. 난 직원들에게 "너의 꿈은 무엇이지?"라고 자주 묻는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직원들은 대답을 망설이지만 난 다시금 "무슨 일을 할 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일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는 것도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일을 대하는 관점이 중요하다. 난 직원들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수동적으로 머리만 자르는 기술자로 멈춘다"고 강조한다. 결국 스스로 독서와 교육을 통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인성과 리더십까지 길러야 일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더 잘해보려고 부단히 힘쓰게 되는 것이다.

―사무실에 책이 참 많다. 벽면을 메운 책이 200권은 넘을 것 같다. 독서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가.

▷아카데미 건물 내 사무실에 있는 책들은 지난 35년간 준오헤어를 이끌면서 직원들과 함께 읽어온 필독서들이다. 매달 필독서를 정해 전 직원들에게 읽게 한 뒤 넷째주 토요일 오전 7~9시에 독서토론회를 열고 있다. 저자를 불러 직접 강연을 듣기도 한다. 일부 직원들은 독서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우리는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지 등을 발표한다. 또 책을 읽고 나서 '나다움' '준오다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각자 느낀 점을 간단히 적어 내기도 한다. 먼저 나부터 책을 통해 세상 변화를 알고, 인성과 리더십의 중요성을 깨우쳤으니 직원들에게도 독서를 권장하는 편이다. 2만원가량의 돈으로 한 사람의 지식과 노하우가 고스란히 집약된 것은 책밖에 없다고 본다.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눈을 기르는 데 책만 한 것이 없다. 최근 필독서로 정한 '격의 시대'(김진영 저)를 직원들이 읽고 나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뀌게 됐을 것이다. 세상이 양과 질로, 다음에는 격(格)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그 책에 이러한 흐름이 잘 정리돼 있다. 이제 고객이 원하는 것은 격이 다른 서비스다. 격이라는 게 꼭 비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것인데 이 책을 읽고 격조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자세를 배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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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이고 인성이고 말은 좋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난 등으로 '헬조선'을 외친다.

▷요즘 젊은이들이 겪는 좌절에 공감하기 때문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조심스럽다. 재능 있고 실력 있는 인재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개인이나 국가적으로도 슬픈 일이다. 한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일하는 것을 돈 버는 데만 국한하지 말았으면 한다. 청년들이 기대치를 좀 낮춰서라도 쉬운 직장부터 경험했으면 좋겠다. 일하면서 받는 돈과 급여도 중요하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겪는 인간관계, 거래 행태 등 배울 것이 많다. 많은 경험이 쌓여서 결국에는 좀 더 나은 일자리와 창업도 할 수 있는 밑천이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객을 접하고 매장 운영 상황을 지켜보면서 '내가 이런 사업을 하면 어떻게 해보겠다'는 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당장 기대치에 못 미치더라도 현실과 부딪혀 많은 경험을 쌓으면 나중에 높이 날 수 있는 밑천이 될 수 있다. 젊다면 용기를 갖고 일단 부딪혀보길 권한다.

―준오헤어는 다른 업체와 달리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직영점을 고수하고 있다. 이유가 있나.

▷준오헤어는 전국에 140개 매장을 두고 있는데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전부 직영점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프랜차이즈보다 직영점 형태가 주인이나 직원 모두 일을 대하는 진정성이 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술 노하우도 중요하지만 직업적 사명감과 충성도를 높여 장기적으로 가려면 직영 체제가 낫겠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주변에서 프랜차이즈를 해보자는 권유가 많아서 만일 돈만 많이 벌고자 했다면 그런 제의를 수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헤어 디자이너로서 사명감과 미용철학을 갖고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프랜차이즈로는 힘들다고 본다. 그래서 프랜차이즈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준오헤어의 직영 매장들은 재직기간 10년이 넘은 직원들과 절반씩 투자해 파트너십 형태로 운영된다. 점주가 되려면 미용기술은 물론 리더십과 품성까지 갖춰야 한다. 또 행정직원을 빼면 헤어 디자이너는 모두 프리랜서다. 자기가 번 돈의 일부만 회사에 내고 나머지를 본인이 가져가는 식이라 동기 부여가 확실하다. 35년 전 준오헤어를 오픈할 때부터 이렇게 했다. 연봉 1억원 이상자가 전체 2500명 직원 중 200명이 넘는다.

―요즘에는 직접 머리를 손질하는 것보다 교육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고객 머리 손질을 하지 않은 지는 벌써 20년이 넘었다. 전문경영인과 함께 매장을 관리하는 것도 벅차다. 하지만 미용 일은 꾸준한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신경을 쓴다. 대표적인 것이 2년 전 청담동으로 이전해온 '준오헤어 아카데미'다. 8층 건물인 이곳에서는 층마다 내국인과 아시아에서 온 미용 인력들을 상대로 교육이 진행된다. 이곳은 특히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와 동일한 커리큘럼으로 운영되는, 영국 본사가 인증한 아시아 내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연수기간은 2년6개월로 연간 250여 명의 헤어 디자이너를 배출하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 수는 영국 본사보다 많다. 조만간 홍대에도 아카데미를 세워 제2의 준오헤어 캠퍼스로 만들 계획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준오 아카데미 커넥션 스쿨이 있는데 여기서는 준오가 만든 미용교재를 활용하기도 한다. 내 꿈은 준오헤어가 해외 미용 인력을 흡수해 아시아의 미용 허브가 되는 것이다. '미용 한류'는 이미 시작됐다.

―국내 미용시장이 포화 상태인데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나.

▷교육기관 말고 헤어숍의 해외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이랜드와 공동 투자해 중국 시장에 진출했지만 사드 여파로 3개월 전 철수했다. 하지만 중국 광둥성 현지 미용숍 체인과 손잡고 12월 중 신규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다시 도전하는 셈이다. 사드 후폭풍을 경험하면서 해외 사업은 국내와 달리 중국 현지인을 통해 프랜차이즈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광둥성을 필두로 중국인 파트너사가 보유한 중국 내 150개 미용체인이 앞으로 준오헤어로 간판을 교체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우리의 로열티 수입으로 이어진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도 헤어숍을 조만간 오픈하기 위해 막판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서 다른 사업계획은 어떠한가.

▷앞으로 국내 매장을 140개에서 300개까지 늘릴 계획이다.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의미도 크다.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유통사업도 본격화할 것이다. 지금은 단골 고객에게 자체 미용상품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샴푸나 젤 등 헤어 제품을 개발·생산한 뒤 일반 시장에도 유통시키겠다. 일부에서는 준오헤어가 기업공개(IPO)를 할 때가 됐다고도 얘기하는데 난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사견이지만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하게 되면 남의 회사가 된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돈이 많아지면 지금처럼 전 직원이 자긍심을 갖고 일을 대하기가 힘들어질 것 같다. 늘 배우고 일에 자부심을 갖고 전문가가 되고자 애쓰자는 초심을 잃어버릴 것 같아 IPO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다.

강윤선 씨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연탄집게로 머리를 손질하고 아카시아 잎으로 친구들 머리 장식을 해주면서 헤어에 관심을 키웠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무궁화고등기술학교에서 미용수업을 받으면서 틈틈이 미장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졸업 후 미장원에 취업해 5년간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1982년 서울 돈암동에 준오미용실을 차려 지금의 준오헤어에 이르렀다. 현재 전국에 140개 직영 헤어숍과 미용교육을 위한 아카데미를 운영 중이다. 최근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미용을 배우려 방한하는 외국인을 상대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미용 한류 확산에 애착을 보이고 있다.

[김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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